Beat the Hero Party RAW novel - Chapter 200
〈 200화 〉 막이 내린 다음(6)
* * *
별궁에 위치한 제 1 왕녀, 르뤼엘의 집무실.
이곳저곳에 널브러진 서류와, 잉크 냄새로 가득한 방 안에선 때아닌 침묵이 감돌았다. 침묵을 깬 것은 르뤼엘의 짧은 숨소리였다.
“···허.”
한방 먹었다는 듯한 표정.
르뤼엘의 입술이 살짝 벌어졌다. 벌어진 틈새로 숨결이 새어 나왔다.
“으음···.”
그녀의 눈썹이 호선을 그린다. 이윽고 눈을 감으며 르뤼엘은 고개를 푹 숙였다. 그녀의 어깨와 등줄기가 조금 들썩였다. 들려오는 건 웃음소리였다.
“내 성격은 연기하려 해도 못할 거라니···.”
고개를 든 르뤼엘이 검지를 구부려 제 눈가를 쓸어내렸다. 그녀의 눈가에는 약간의 물기가 맺혀있었다. 어이가 없다는 듯 르뤼엘은 웃음기를 머금은 목소리로 말했다.
“제법 신랄한 평가로군, 교수.”
“어··· 그런가요?”
“그렇다. 돌려 말했다 뿐이지, 당신 같은 또라이가 어디 흔하겠는가? 하고 말하는 것 같지 않나.”
르뤼엘이 장난스레 목을 긋는 시늉을 했다.
“누가 들었다면 왕실 모욕죄로 매달렸을 만한 발언이다. 하지만···.”
짧게 숨을 뱉은 그녀가 말을 끝맺었다.
“내게는 마음에 드는 말이로군. 역시 나는 그대가 좋다. 그 솔직함이 무척 마음에 들어.”
가감 없는 행동.
생각나는 대로 내뱉는 언어.
겉과 속이 다르지 않은 솔직한 인간.
‘흔하지 않은 인간 군상이지.’
모략과 암투가 오가는 왕성에서 눈앞의 교수 같은 인물은 무척이나 드물다. 단순히 왕성에서만 드문 게 아니었다. 어딜 가나 솔직한 인간은 드물다.
‘포장 없이 삶을 살아가는 이들.’
자신에게 솔직한 이들.
그 솔직함으로부터 오는, 당당함을 가진 이들.
“그대 같은 인물은 정말 한 줌에 불과하다.”
한 줌에 불과하기에.
“그렇기에, 매력적으로 느껴지는 것이겠지.”
그리 중얼거린 르뤼엘이 테이블을 툭툭, 건드렸다. 그녀의 입가에는 여전히 미소가 걸려 있었다.
“그래, 교수 그대의 말마따나 본녀나 그대 같은 또라이가 흔한 건 아니지.”
“예? 저는 갑자기 왜···.”
“몰랐는가? 그대도 충분한 또라이다.”
정말로 모르는 눈치였다.
고개를 갸웃거리며, 푸른 눈동자를 깜빡이는 교수를 바라보며 르뤼엘은 무심코 고개를 가로저었다.
‘자기가 또라이인 줄 모르는 또라이가 가장 위험한 법인 거늘······.’
뒷말은 뱉지 않았다.
그저 마음속에 묻어 둔 채, 르뤼엘은 길게 숨을 내쉬었다. 내뱉은 숨결과 함께 힘이 좀 풀리는 느낌이었다.
“후우···.”
힘을 주고 있던 어깨도, 표정을 만들기 위해 하나하나 신경 쓰고 있던 눈꼬리와 입가도, 그 모든 행위가 눈앞의 교수 앞에서는 다만 무의미한 것처럼 느껴진 까닭이었다.
“······.”
르뤼엘은 말없이 맞은편에 앉은 라니아를 바라봤다. 아직도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푸른 눈을 깜빡이고 있는 그녀를 바라보고 있자니··· 입가에 웃음이 맺히고 만다.
솔직한 인간이다.
솔직함으로 살아가는 인간이기에, 그녀의 말에는 언제나 진심이 깃든다.
거짓을 납득시키기 위해선 백 마디의 말이 필요하나, 진심을 이야기할 땐 그런 미사여구가 필요하지 않는다. 한마디의 감상, 몇 개의 단어로 이어진 한 줄의 문장이면 충분하다.
「그 성격은, 연기하려 해도 못 할 것 같은···.」
한마디의 말, 한 줄의 문장.
“···아하.”
르뤼엘이 소리 내 웃는다.
독특한 성격, 남들에게 얕보이지 않기 위해 어렸을 적부터 만들어온 자신의 인상. 누군가 쉬이 따라 할 수 없는 자신만의 개성.
그것 역시 자신이 쌓아온 삶의 일환이라 생각하며 보람을 느끼는 건, 너무 편의주의적인 해석일까?
르뤼엘은 피식, 웃음을 흘렸다.
‘···꿈보다 해몽이로군.’
마음이 한결 편해진 기분이다.
그 방향성이 조금 이상하긴 하나, 어찌 됐든 눈앞의 교수는 자신을 신뢰하고 있다. 그 사실이 르뤼엘은 기껍다.
“···고맙군.”
들릴 듯 말듯 한 작은 목소리가 맴돌았다.
2.
“그래서, 내 오라비의 행방은 파악했나? 칼트 경이 조사에 착수했다고 전해 들었다만.”
라니아는 말없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흔적도 남아있지 않다고 하더군요. 찾는 게 불가능한 수준이라는 답변을 들었습니다.”
“그건··· 의외로군.”
르뤼엘이 제 입가를 매만지며 말했다.
“칼트 경조차 흔적을 찾지 못했다면··· 확실히, 내 오라비를 찾아내는 건 불가능한 일이겠지. 그대는 이제 어쩔 샘인가?”
“현 상황에서, 가장 연관이 있을 법한 인물에게 찾아가 볼까 생각 중이긴 합니다.”
“이 나라의 국왕을 말하는 거로군.”
라니아는 침묵한다.
침묵은 긍정을 의미했다.
“별로 추천하고 싶진 않군.”
툭, 하고 르뤼엘이 테이블을 건드렸다.
“만나봤자 얻을 건 없을 테니까.”
“···얻을 게 없다뇨?”
“내 아비는 인형과도 같은 작자다.”
성장하며 봐 왔던 아비의 모습.
르뤼엘은 그것을 떠올리며 말을 이었다.
“혈육 간의 다툼도, 권력 투쟁의 과열도, 그 모든 걸 내 아비는 묵인했다. 내가 아주 어렸을 때는 그래도 ‘정상적인’ 인간의 범주에 들었지만···.”
지금은 아니다.
누이의 죽음 앞에서도 그는 언제나와 같은 무표정을 보일 뿐이었다. 제 자식의 죽음에도 그는 무관심으로 일관했다.
“지금은 단순한 인형일 뿐이야. 인간이라기보단, 이 나라를 관리하는 기계 같은 느낌이지.”
“···그런가요?”
“지난 십여 년간 내 아비를 봐 오며 느낀 점이지. 지금의 내 아비는 인간적인 교감이 불가능한 인물이야. 얻을 수 있는 정보는 없을 거다.”
“그럼 당장은···.”
뭘 해야 하고, 당신은 뭘 할 생각인가.
그리 묻는듯한 라니아의 시선에, 르뤼엘은 시선을 내렸다. 그녀의 시선은 빈 찻잔을 향한다.
“글쎄.”
찻잔에 다시 물을 채우고, 입 안에 머금으며 르뤼엘은 앞으로의 행동 방침에 대해 생각해본다. 생각은 그리 길지 않았다.
“도려내야겠지.”
“도려내요?”
“잔가지를 쳐내고, 썩은 뿌리를 뽑아내는 느낌으로 도려내 볼 생각이다.”
탁, 하고.
찻잔을 내려놓으며 르뤼엘이 눈을 가늘게 떴다.
“나는 지금이 기회라고 본다, 교수.”
기회.
“현재 왕성에 왕위 계승자가 부재하다. 제 2 왕자는 전장에 나가 있으며, 아일라는 아플리아에 머무르고 있지. 이곳에 남은 건 나 뿐이란 이야기다.”
제 목덜미를 툭툭, 건드리며 르뤼엘이 웃었다.
“목줄 풀린 미친개가 짖어댈 시간인 셈이지.”
이 나라의 탄생부터 지금까지, 막의 너머에서 암약한 존재에 대해 르뤼엘은 알지 못한다. 수백 년의 세월을 인내하며 그것이 무엇을 바라는지 또한, 알지 못한다.
‘그 어느 것도 알지 못하지만.’
그래도 상관없었다.
자신이 해야 할 일이란 언제나와 같았으므로.
“지금까지, 그리고 앞으로도 내가 할 일은 하나밖에 없다.”
그것은 언젠가 르뤼엘이 말한 적이 있는 이야기다. 사흘간의 임무가 끝날 무렵 말했던 이야기를, 르뤼엘은 다시 한번 입에 담는다.
“그 아이가 옥좌에 앉을 때까지 길을 닦아두는 게 나의 몫이겠지.”
누이들의 죽음을 바라보며 맹세했던 것.
하나 남은 누이에게서 보았던 가능성.
그것들을 떠올리며 르뤼엘은 미소 지었다. 부드러운 미소는 아니다. 고혹적이고, 그녀의 인상에 잘 어울리는 도전적인 미소다.
“신뢰란 상호 간의 노력하에 유지될 수 있는 가치이지. 내겐 나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해야 할 의무가 있다.”
그 모습을 보며 라니아는 생각한다.
‘···처음에는 긴가민가했는데.’
제 4 왕녀, 아일라.
르뤼엘이 이토록이나 신뢰하는 그 소녀의 가능성을, 지금껏 라니아는 크게 공감하진 못했다.
그러나, 최근 벌어진 일련의 사건을 거치며 아일라를 지켜본 지금은 다르다.
확실히, 특별함을 간직한 소녀다. 그것이 비단 별에게 사랑받는 재능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별을 거부했기에 그녀의 가치는 더욱 빛난다.
별에게 의존하지 않았기에.
스스로의 선택으로 나아갔기에.
그 소녀가 내디뎠던 한걸음은, 분명 가치 있는 일이다. 그녀는 스스로의 가치를 증명해냈다.
「한 세대를 걸러 한 명, 왕가에 반드시 나타나는 별의 축복을 가진 아이.」
무심코 라니아는 여태껏 대수롭지 않게 여겼던 이야기를 곱씹는다.
왕가가 별의 축복을 받았기에.
별의 선택을 받은 혈족이기에.
세간에 퍼진 말들을 별생각 없이 받아들였을 뿐이다. 하지만, 지금에 와서 라니아는 당연한 것으로 여기던 사실에 의문을 가진다.
‘별은 섭리다. 가장 공정한 규칙이다.’
별은 저울을 상징한다.
공정한 저울은 언제나 수평을 띄어야 한다. 별이 언제나 왕가에게 축복을 내려왔다면, 그것은 기울어져 버린 저울에 수평을 이루기 위해서가 아니었을까.
왕가에 드리운 그림자.
그림자를 걷어내기 위한 빛.
그러니까, 필요에 의해 내려진 축복.
‘그렇다면.’
왕가에 내려진 흑막을 걷어낼 존재가 있다면.
‘그건, 그 아이뿐이란 거겠지.’
그것이 스텔라(Stella)에게 주어진 무대다.
어쩌면 단순한 억측일지도 모르나, 이 추측이 정답일 거란 직감이 든다. 라니아는 맞은편에 앉은 르뤼엘을 바라보았다.
금빛의 눈동자에 깃든 건 확신.
자신과 같은 가능성을 느끼고 있는 왕녀를 바라보며, 라니아는 무심코 웃음을 흘렸다.
“···왕녀님답네요.”
“나답게 살고자 노력하고 있긴 하지.”
둘은 누가 먼저랄 것 없이 손을 내민다.
가벼운 악수를 나누며, 둘은 자리에서 일어선다.
그렇게 그들은 각자의 무대로 향한다.
하나의 무대가 막을 내린다.
그리고, 또 다른 무대가 막을 올린다.
무대의 너머에 무엇이 숨었는지 알 수 없지만, 당장에 할 수 있는 일에 최선을 다할 뿐이다. 언제나 그래왔듯이.
3.
아플리아가 때아닌 방학을 맞이한 가운데, 나는 여러 사람을 한 명씩 만나며 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라니아 교수님, 커피 사 왔어요!」
가끔 거부할 수 없는 뇌물과 함께 찾아오는 아일라와 이야기를 나누기도 하고, 그녀가 물어보는 문제에 답해주며 하루를 보내는가 하면···.
「선배님 죽을 것 같습니다. 업무가 끝나질 않습니다···! 서류를 제출하면, 새로운 서류 더미가 날아옵니다···!」
밀려드는 서류에 비명을 지르는 칼트의 등을 토닥이고, 그래도 유사 초인이 됐으니 버틸 수 있지 않겠니? 하고 놀리며 하루를 보내기도 했다.
물론 그 뒤에 서류작업을 도와주긴 했다.
오래간만에 진심 어린 존경의 눈빛을 내게 보내는 칼트를 보는 건, 제법 즐거운 일이긴 했다.
「도대체, 그 엘프는 뭐 하는 꼰대인가?」
개중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건, 카르디에게 시달릴 대로 시달린 흑색 마탑주 예투알과의 대화였다. 퀭한 눈동자로 내게 하소연을 늘어놓는 흑 마탑주의 말에 나는 쓰게 웃을 뿐이었다.
‘최소 천년 단위 짬밥의 꼰대가 말이 안 되긴 하지.’
천 살 먹은 엘프들의 왕조차 ‘애송이’라 부르는 꼰대 중의 꼰대다. 짬밥에서 오는 꼰대 짓에 천년의 정수가 담겨있다고 생각해보면·· 눈앞이 아득해지고 마는 것이다.
“하여간 꼰대 같으니라고.”
“뭐라고 했나, 라니엘?”
“아무 말도 안 했는데?”
나는 너스레를 떨며 눈앞의 인물을 바라보았다.
몸이 좀 회복하고 나서 찾아오란 말에, 뒤로 미루고 미뤘던 만나야 할 사람.
“카르디.”
고대의 엘프.
과거의 대현자, 카르디 반 아르미엘.
“너 이 녹차 언제까지 줄 거냐?”
그를 바라보며 나는 테이블 위에 놓인 찻잔을 가리켰다. 걸쭉한 녹색 액체가 담긴 찻잔. 카르디는 엘프의 전통 음료인 녹차()라고 주장하지만, 내가 보기엔 절대로 아니었다.
“차라리 물 주면 안 돼?”
“몸에 좋다. 그냥 마셔라.”
“아잇 싯팔···.”
나는 찻잔을 멀찍이 밀어놓았다.
아무리 몸에 좋다고 한들, 저건 좀 그랬다.
“문득 생각난 건데 말야.”
카르디가 뭐라 한 마디 덧붙이기 전에 나는 주제를 돌려 말을 잇기 시작했다.
“내가 아플리아의 학장이라면, 나라도 탈모가 올 것 같긴 해. 요즈음 그런 생각이 든다?”
그건 또 무슨 개소리인가.
그런 시선으로 나를 바라보는 카르디에게, 나는 어깨를 으쓱이며 말을 이었다.
“아니 생각해봐, 카르디.”
“뭘 말이냐.”
“하루가 멀다고 사건이 터지지, 1년도 안 돼서 건물 수리만 두 번째 하고 있지··· 심지어 재앙이 아플리아에 찾아온 게 1년 만에 두 번이라니까?”
해골바가지가 워낙에 자주 보이긴 하지만, 그건 전장에서나 해당되는 이야기다.
“개학한 지 한 달 만에 다시 휴교했지. 게다가 여기저기서 찾아온 기사들이 눈에 불을 켜고 아플리아를 뒤져대고 있지··· 탈모가 안 오는 게 이상한 게 아닐까?”
“그래서 요점이 뭐냐, 라니엘.”
“아니 뭐··· 그냥 그렇다는 거지.”
낡아 해진 가게.
이제는 친근하기까지 한, 주기적으로 삐걱거리는 소리를 내는 의자를 기울이며 나는 턱을 괬다.
“요 일 년간 사건이 많이 일어났잖아?”
“그렇긴 하군.”
“그 뒤처리를 하나씩 하려고 준비하고 있단 말야?”
“뒤처리?”
“응, 뒤처리.”
내가 내 눈동자를 가리켰다.
“칼트, 그 자식 눈동자도 치료해줘야 하고, 왕가의 뒤에 숨은 흑막도 알아봐야 하고··· 이것저것 생각하다 보니 머리가 복잡하더라. 뒤처리 하는 게 제일 귀찮아. 언제나 느끼긴 하지만.”
“그래서 학장의 고통에 공감하고 있다, 그거군.”
“그런 샘이지. 진짜로 탈모가 오는 지는 모르겠지만 말야.”
한숨을 내쉬며 내가 테이블 위에 엎드렸다.
더럽게 맛없는 녹차가 담긴 찻잔을 손으로 툭툭, 건드리고 있자니 카르디가 입을 열었다.
“···몸은 좀 괜찮나?”
“나쁠 거야 없지. 회복되고 있기도 하고. 네가 내 몸에 쏟아부은 물약값만 합쳐도 저택 하나는 세울 텐데, 괜찮아야지.”
“그렇다면 다행이군.”
카르디가 닦던 유리컵을 내려놓았다.
그리곤 걸음을 옮겨 어딘가로 향했다. 그곳은 가게의 창고였다. 먼지가 가득 쌓인 창고.
턱턱.
얼마 안 가 옷에 묻은 먼지를 털며, 카르디가 다시 자리로 돌아왔다. 그 손에는 상자 하나가 들려있었다. 내가 상자를 가리키며 물었다.
“그거 뭐냐?”
“옛날에 입었던 옷이다.”
삐걱, 소리를 내며 상자가 열렸다.
상자의 안에 담긴 것은 로브였다. 허공에 로브를 한번 털어낸 카르디가, 로브를 어깨에 둘러멨다.
“어 그거···.”
내가 눈을 크게 떴다.
어디선가 본 적이 있는 로브였다.
“초대 마탑주, 아르미엘 님의 로브···!”
잿빛 마탑의 최상층, 아티팩트 보관함에 장식돼 있는 로브였다. 잿빛 마탑의 상징이자, 이상하게도 같은 디자인으론 무슨 수를 써도 만들 수가 없었기에··· 환상의 로브라 불리던 바로 그 로브.
로브를 바라보며 내가 눈을 빛내고 있자니, 카르디의 고개가 천천히 기울어졌다.
“···아르미엘 ‘님’?”
카르디가 눈을 게슴츠레 뜨고 날 바라봤다. 나는 입을 틀어막은 채 시선을 살짝 아래로 내렸다.
“아니, 뭐···.”
“무슨 어울리지도 않는 존대지? 라니엘.”
“너한테 존대 한 거 아니거든? 초대 마탑주님을 존경하는 마법사가 얼마나 많은데···.”
나 또한 그중 하나였다.
카르디가 아르미엘이란 사실을 알기 전 까지는 말이야.
‘물론, 존경할만한 인물이긴 한데···.’
천년 묵은 꼰대를 롤 모델로 삼기는 아무래도 좀.
‘그건 그렇고···.’
나는 슬쩍 고개를 들어 카르디가 입은 로브를 흘겨봤다. 역시, 괜히 환상의 로브라 불리는 게 아니었다. 내가 봐 온 어떤 로브보다 완벽한 디자인을 가진 로브였다.
꿀꺽.
내가 홀린 듯이 로브를 바라보고 있자니, 툭툭 하고 카르디가 테이블을 건드렸다.
“라니엘.”
“응, 으응?”
“너, 교수직을 한 달 정도만 휴가 낼 생각 없나?”
“휴가? 갑자기?”
“같이 가야 할 데가 있다.”
내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가야 할 데?”
“그래. 네 몸도 괜찮아졌다고 하니 말이다.”
“아니 뭐, 휴가야 못 낼 건 없긴 한데···.”
내가 질문했다.
“어디를 가길래 한 달이나 쓰게?”
그렇게 물은 내게 돌아온 건, 내가 상상치도 못했던 대답이었다.
“잿더미의 땅.”
카르디가 말했다.
“수백 년 전 잿더미가 되어버린 나의 고국, 아르카디아.”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