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eat the Hero Party RAW novel - Chapter 202
〈 202화 〉 잿더미의 땅(2)
* * *
한 달간의 휴가를 신청하는데 큰 어려움은 없었다.
휴가와 관련된 서류를 제출하러 총장실에 들린 날, 아론 학장은 고개만을 끄덕일 뿐이었다. 별다른 질문 없이 그는 내게 이렇게 말했다.
「수고가 많았네. 로얄 가드 분들께 이야기는 전해 들었네. 학생들을 지키는 데 큰 도움이 됐다지.」
부드러운 목소리, 인자한 미소.
「크게 다쳤다고 들었네. 한달간 편히 쉬고 오도록 하게나. 지난번 변절자 사건도 그렇고, 이번에도 자네에게 큰 신세를 졌어.」
수많은 교수들이 어째서 그를 존경하는지, 그리고 스승님께서 아론 학장은 ‘좋은 사람’이다 라고 말한 이유를 알 수 있는 대목이었다.
어찌 됐든, 휴가 서류는 정상적으로 결재 됐다.
남은건 한달간의 내 공백을 채울 사람을 찾는 것이었는데, 이는 그리 어렵지 않았다. 이미 이 아플리아에는 초인의 경지에 오른 마법사가 있었으니까.
「수업의 대리 말인가? 네가 담당하던 과목이··· 아아, 마나의 거래학이군.」
초인의 경지에 이른 마법사, 켈르할름.
「잘 알고 있다. 마나의 거래와 천칭에 대해선 여러 강연을 계획해 본적이 있지. 백 년이 조금 더 된 일이긴 하나, 기억은 하고 있다.」
광인이란 이름으로 더 잘 알려졌긴 하지만, 켈르할름은 본래 아르티아라는 역사상 최대규모의 학술 도시를 운영한 전적이 있는 교육자였다.
‘솔직히, ‘특정한’ 부분에선 나보다 잘 가르치는 것 같기도 하고···.’
교육자로서의 경력이 다르다.
내 스승님은 물론이고, 아론 학장마저도 한 수 접고 들어가야 할만한 경력을 지닌 인물이다. 교육자로서의 자질은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레스티 엘레노아에게 특강?」
또한, 나는 그에게 특강 또한 위임했다.
클로에의 경우에는 켈르할름이 거부반응을 보여 어쩔 수 없었지만, 레스티 쪽은 그럭저럭 괜찮은 듯싶었으니까.
‘···무엇보다.’
레스티의 재능과 클래스.
그것을 가르치는 데는 나보다는, 이미 한번은 가르쳐 본 적이 있는 켈르할름이 더 적합할 테니까.
「노력해보도록 하지.」
켈르할름은 그렇게 답했다. 이로써 한 달의 휴가에 앞서 처리해야 할 일은 전부 끝맺은 셈이었다.
그렇게 맞이한 약속 당일의 이른 아침.
성벽의 외곽에서 나는 카르디를 기다리고 있었다.
“흐으윽!”
나는 늘어져라 기지개를 켜며 나무에 기대어 섰다. 약속시각이 다가오고 있었으므로, 머지않아 꼰대 엘프도 모습을 드러낼 것이다.
째깍.
회중시계를 흘겨보며 시간을 때우고 있자니, 걸음 소리가 귓가에 맴돌았다. 가벼운 걸음 소리. 내가 고개만을 살짝 돌려 뒤를 돌아보았다.
“와 있었나.”
약속시간의 정시.
단 1분의 빠름도, 늦음도 없이 칼 같이 약속했던 시간에 도착한 카르디를 보며 나는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좀 일찍 오면 덧나냐?”
“오랜만의 외출이라, 준비할 게 많아서 좀 걸렸다. 그래도 시간은 지켰으니 된 것 아닌가?”
카르디가 옷매무새를 가다듬었다.
그가 로브의 목깃을 잡고 두어 번 앞으로 잡아당기자 로브가 크게 펄럭였다. 나는 펄럭이는 로브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백(白)을 기본으로 둔 채, 별빛을 닮은 백금색의 실로 자수를 놓은 로브. 마치 별자리를 닮은 듯한 자수는 가히 예술의 영역에 닿아 있었다.
‘초대 마탑주의 상징과도 같은 로브.’
내가 몹시나 탐냈던 로브였다.
“······.”
나는 말없이 내 로브를 내려다봤다.
깔끔한 디자인에 실용성까지 챙긴 로브다. 잿빛 마법사 시절 입고 다녔던 로브에 비하면 덜하지만, 어지간한 로브에 꿀릴만한 것은 아니었다.
그런데, 어째서일까. 오늘따라 유난히도 내 로브가 초라해 보이는 기분이 드는 것은.
“쩝···.”
나는 카르디의 로브를 흘겨보며 입맛을 다셨다.
“뭘 그렇게 보나?”
“아니 뭐···.”
“말을 해라. 말을.”
잠깐의 고민, 그러나 길지 않은 고민 끝에 내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야. 나 그거 한 번만 입어보면 안돼냐?”
한번만 입고 돌려줄게. 진짜로.
2.
“유적의 조사를 맡기고자 한다.”
기사단장, 하인켈의 막사.
온갖 전술서와 전황을 표시한 지도로 어지럽혀진 그곳에는 두 사람이 서로를 마주 보고 앉아있다. 한쪽은 이 막사의 주인, 기사단장 하인켈이요. 다른 한쪽은 인류의 희망이라 불리는 용사다.
“유적의 조사 말씀이십니까?”
용사, 카일 토벤.
그가 성검의 칼집을 바닥에 내려놓으며 되물었다. 그 물음에 하인켈이 고개를 끄덕였다.
“최근 검귀(??)가 전장에 합류했다는 사실은 알고 있을 테지. 그것도 종속 계약에 걸린 채로 말이다.”
“···알고 있습니다.”
카일 또한 얼마 전 전장에서 검귀와 마주친 적이 있었다. 퀭한 눈동자로 마구잡이로 마수를 쓸어넘기는 모습은··· 그야말로 귀신에 가까웠다.
‘망가진 모습이었지.’
자세한 사정은 듣지 못했다.
단지, 북부에서 모종의 사건을 일으키려다 잿빛 마법사에게 제압당했단 이야기를 들었을 뿐.
‘또 그 녀석인가.’
모습은 보이지 않지만, 꾸준히 존재감을 내비치는 옛 동료의 행보에 카일은 짧게 한숨을 내뱉었다.
“그래서, 검귀가 무슨 문제라도 있습니까?”
“그에게서 몇 가지 이야기를 들었다. 정확히는, 북부에서 일으키려 했던 사건에 대한 내막이지.”
그리 중얼거리며 하인켈이 장기 말들이 늘어져 있는 지도의 위에 무언가를 올려두었다. 그것은, 누군가의 뼈마디였다.
“···이건?”
“최초의 성녀의 손가락이라더군.”
카일이 눈을 가늘게 떴다.
“···최초의 성녀라면.”
“델로힘 성교회의 금서(?書)에만 적혀있는 특수한 인물이지. 여태껏 전설로만 전해지는 가상의 인물이라 여겨졌지만··· 검귀가 이렇게 실물을 들이밀더군. 이걸로 ‘소생’의 기적을 사용하려 했다고.”
하인켈이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자세한 내막은 듣지 못했지만, 소생에는 수많은 이들의 희생이 따르는 모양이더군. 명백히 선을 넘은 행위였지. 그러니 라니엘 또한 과격한 수단을 써서 제압한 모양이고.”
“···그렇습니까.”
“그래서, 내가 이걸 자네에게 왜 보여주는지, 또 유적의 조사와 무슨 연관이 있을지 궁금할 테지.”
툭툭, 하고 하인켈이 테이블을 건드렸다.
“이 뼈마디는 잿더미의 땅에서 발견됐다네.”
잿더미의 땅.
그 이름은 들어본 적이 있다.
“오염이 가득한 곳 말씀이십니까?”
“그래. 그곳의 오염이 막 시작되는 곳, 그 외곽에 위치한 델로힘 교단과 관련된 유적에서 발견됐다고 하더군.”
“···그곳은 발을 들이지 못하는 곳일 텐데요?”
“모종의 편법을 쓴 모양이야. 아무튼, 나는 자네에게 그곳의 조사를 맡기고 싶네.”
잿더미의 땅, 오염된 지대.
그곳의 안으로 들어가 유적의 조사를 맡긴다는 말이, 카일의 귀에는 곱게 들리지 않았다. 카일은 테이블 아래서 손을 깍지꼈다.
“···제가 해야 하는 일입니까?”
“자네만이 할 수 있는 일이지. 자네가 빠지면 전선에 큰 영향이 가니, 자네에게 맡기고 싶지는 않지만··· 다른 용사들은 전부 실패했다네.”
성창의 갈라할도.
비굴의 데스텔도, 그 모두가 실패했다고 하인켈은 말했다. 그들의 실패를 겪고도 도전해야 하는 이유가 무엇이냐고 카일은 묻는다.
“무엇을 얻을 수 있는 겁니까?”
“초인에 근접한 이를, 아무것도 잃지 않은 채 초인의 영역에 닿게 하는 성배.”
“···성배?”
카일이 눈을 깜빡였다.
그것은 세간에 퍼진 초인의 정의와 상반되는 문장이다. 그 점을 카일은 지적했다.
“무언가를 잃어야만 초인이 되는 것 아니었습니까?”
“보통은 그렇지. 하지만 검의 성지에선 아니었어. 그곳의 기록에 따르자면 초인에 근접한 이들은 모종의 ‘시련’을 겪게 됐지.”
그리고, 비밀리에 치르는 시련을 끝마치게 되면··· 무언갈 잃지 않고도 초인이 돼 있었다.
“검귀가 조사했던 것들, 그리고 성교회를 몰아붙여 반강제로 회수해온 금서의 자료들을 대조해 보니 답을 찾을 수 있더군.”
하인켈이 입을 열었다.
“세 개의 빛을 담아낸 세 개의 잔. 성녀의 축복을 대리하게끔 만들어진 성배(??)이자 성배(??).”
그것은 본디 검귀가 찾고자 하였던 물건이다.
집념 하나로 수많은 기록과 유적을 헤집고 다녔던 검귀는, 성배가 위치해 있으리라 예측되는 장소를 특정하는 데는 성공했다.
하지만, 검귀는 성배를 손에 넣지는 못했다.
“하나는, 검의 성지 갈라트릭에.”
당연하게도 얻을 수 없다.
검의 성지는 죽음의 칼, 가니칼트의 영역이 되었으므로.
“둘은, 마경의 중심인 검은 들판에.”
그 또한 얻을 수 없다.
다가오는 모든 것을 집어삼키는 만마의 왕(王)이 그곳에 위치하였으므로.
“마지막 하나는, 잿더미의 땅에 위치한 최초의 성교회의 지하에 있다고 하더군.”
위의 둘보다는 가능성이 있는 곳.
하지만, 드라카로서는 그곳 또한 닿을 수 없었다.
별빛을 지닌 자만이 열 수 있는 문이 길을 막았으므로.
“하지만, 자네에겐 가능하지.”
하인켈이 카일을 가리켰다.
“모든 용사 중에, 가장 강한 별빛을 지닌 자네라면 가능하리라고 본다네.”
그가 카일에게 최초의 성녀의 뼛조각을 건넸다.
“이것을 몸에 지닌다면, 그리고 자네와 함께하는 성녀의 도움을 받는다면 오염의 땅을 건널 수 있을 것이라네. 부탁하지, 카일.”
하인켈의 눈동자가 똑바로 카일을 바라본다.
“잿빛 마법사의 부재, 그로 인한 자네의 패배. 전선은 나날이 상황이 안 좋아지고 있어. 현상을 유지하기 위해서라도 우리에겐 새로운 초인이 필요해.”
전장을 바꾸는 것은 하나의 초인이다.
초인조차 능가하는 잿빛 마법사가 떠난 지금, 전장은 새로운 초인을 갈망하고 있었다.
“성배의 회수를 부탁하겠네.”
하인켈이 고개를 숙인다.
그 모습에 카일은 차마 거절을 입에 담지 못한다. 현 전선의 후퇴에는 자신의 패배가 가져온 여파가 거대했음을 자각하고 있었으므로.
“···알겠습니다.”
마지못해 카일은 제안을 수락했다.
3.
“그래서, 잿더미의 땅으론 왜 가는 건데?”
문득 질문을 던지는 라니엘에게, 카르디는 턱을 괸 채 답했다.
“사냥개가 눈을 잃었다고 하지 않았나.”
“칼트?”
“그래. 그리고 너는 그 녀석의 눈동자를 회복시킬 방법을 찾고 있는 것 아닌가?”
“그렇긴··· 하지. 여차하면 사라, 그 미친년 머리끄댕이라도 잡아 끌고 올 생각이었는데.”
마치 물건을 다루는듯한 말투다.
도대체 이번 시대의 성녀는 어떤 인물이길래··· 하는 생각을 하면서도 카르디는 마저 말을 이었다.
“잿더미의 땅, 내 고국에는 ‘다양한 수단’이 존재한다. 그걸 쓴다면 눈동자를 회복 시킬 수도 있겠지. 더 나아가선··· 초인으로 만들 수 있을지도 모르고.”
“···초인으로 만든다고?”
“내 고국에는 특별한 물건이 좀 많았거든.”
카르디의 입가에 쓴웃음이 걸렸다.
그 태반을 자신과 글레리아가 머리를 맞대어 만들었다는 사실을 카르디는 구태여 입에 담지 않았다.
“그건 좀 반가운 소식이네. 안 그래도 칼트 그녀석, 안대 쓰고 다니는 게 좀 안쓰러워 보였는데.”
라니엘도 더는 묻지는 않았다.
그녀는 한숨 돌렸다는 듯, 부드러운 미소를 지을 뿐이었다. 그 모습에 카르디는 한숨을 내뱉었다.
“···네가 남 걱정할 몸 상태는 아닌 것 같다만.”
“나야 뭐, 하루 이틀 일도 아닌데.”
늘상 저런 식이었다.
카르디의 눈에 비춰 보이는 라니엘의 몸은, 이미 망가질 대로 망가진 상태였다. 수명은 둘째 치더라도 영혼에 퍼진 균열이 몸을 좀먹으며 수명의 단축을 가속화 하고 있었다.
‘···지난번 사건 이후로 더욱 악화됐군.’
카르디는 이대로 가속이 계속됐을 때, 라니엘이 얼마나 살 수 있을지 속으로 계산해 본다. 엘프의 입장에선 한순간에 불과한 시간. 그리고, 인간의 시점에서도 그리 긴 시간은 아니었다.
“라니엘.”
카르디가 착 가라앉은 목소리로 소녀의 이름을 입에 담았다.
“너, 네 수명이 갉아 먹히고 있는 건 알고 있겠지? 영혼의 마모가 가속화가 되고 있다는 것도.”
“···알고 있지.”
“이번 여행은 그걸 해결하러 가는 거다. 날아간 수명을 돌려주진 못하더라도, 마모의 가속화 정도는 멈출 수단이 그곳에 있을 테니까.”
“···칼트의 눈 고칠 거 찾으러 간다며?”
카르디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건 겸사겸사 찾는 거지. 본 목적은, 네 수명의 가속화를 멈추고··· 네게 자격을 주기 위함이다.”
“자격?”
“진실을 엿들을 자격. 내 고국의 중심에 도달해 네가 무언갈 ‘이해하게’ 된다면, 나도 네게 진실을 말해줄 수 있을테니까.”
그리 말하며 카르디는 라니엘을 바라본다.
찰나에 불과한 인간의 삶으로, 수백 년의 정적을 깨트리고 있는 그녀의 행보는 언제 보아도 놀라울 따름이다.
‘반백 년도 채 안 되는 삶으로 진실에 다가섰다.’
게다가 이번 사건을 거치며, 그녀가 접근할 수 있는 정보의 양은 더욱 늘어났다. 감춰진 진실을 향해 한 걸음 더 나아간 것이다.
‘아르카디아란 지명을 알아들었지.’
그것은 곧 때가 왔음을 의미한다.
별과 맺어진 세 개의 계약. 그 중 두 번째 계약을 들려줄 차례가 다가옴을 카르디는 직감한다.
“듣고 나면 이젠 하나만 남은 거네.”
“그런 셈이지.”
그렇게 나란히 걷다 말고, 카르디는 눈을 게슴츠레 뜬 채 라니엘을 흘겨봤다.
“그나저나, 라니엘.”
“응? 왜?”
“너, 그 로브 언제까지 입고 있을 셈이냐?”
잠깐만 입는다면서 돌려주질 않고 있다.
카르디의 물음에 라니엘이 짧게 어깨를 떨었다. 이윽고 시선을 살짝 돌리며 작은 목소리로 그녀가 중얼거렸다.
“···도착할 때까지만.”
“내놔라.”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