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eat the Hero Party RAW novel - Chapter 301
〈 301화 〉 엇갈림(5)
* * *
「마법사에게 시간적 여유를 주지 마라.」
「마법사를 덮칠 생각이 있다면, 되도록 빨리 최대한 은밀하게 덮쳐라. 결코 노리겠다는 신호를 줘서는 안 된다. 거창한 계획을 짤 시간조차 없다.」
「우선 달려들고 봐라.」
「마법쟁이들이 대비를 하기 전에.」
이는 암살자들 사이에 유명한 격언이요, 지금에 와선 마법사들이 농담하듯 던지는 문장이다. 결국 이 격언은 하나의 문장으로 연결된다.
「시간을 주면 줄수록, 마법사란 존재는 지나치리만치 까다로워진다.」
마법사, 그중에서도 위자드(Wizard).
수십, 수백의 회로를 새겨넣은 마법사의 영역에서 그들을 상대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시간을 주면 줄수록 마법사들은 제 영역에 몇 개의 회로를 더 새길 뿐이니, 장기전은 더더욱 끔찍하다.
마법사란 그토록 까다로운 족속들이다.
그 사실을 백색 마탑의 주인, 셀리 드벨라는 아주 잘 알고 있다. 그 까다로운 족속들이 심혈을 기울여 쌓아올린 탑의 주인인 만큼, 모를래야 모를 수가 없다.
‘하지만···.’
아무리 그렇다 한들.
“이렇게까지 하는 건, 처음··· 보는데.”
셀리는 숨을 삼키며 주변을 둘러봤다.
케넬 설원을 오간 지 벌써 열흘째다. 그간 열흘 동안 한 명의 마법사가 해낸 일을 셀리는 보았다.
지평선의 너머까지 그어진 한 획의 선.
그 선에서 펼쳐지는 수십, 수백의 회로.
설원을 가득 메운 난잡한 선은 보기만 해도 머리가 어지러울 지경이다. 새하얀 도화지에 빼곡하게 들어찬 기하학적 문양은 차라리 광기에 가깝다.
그 수를 세는 것조차 힘들다.
지금 이 땅에 몇 개의 주문이 새겨져 있는지조차 모르겠다. 가만히 세보면 셀 수는 있겠지만, 그것이 딱히 의미가 있을 것 같지는 않다.
티딕.
지금도 그 수는 늘어나고 있으니.
셀리는 고개를 돌려 저 멀리서 회로를 그리고 있는 소녀를 바라봤다. 소녀는 무표정히 바닥에 지팡이를 긋고 있다. 그것은 마치 정해진 업무를 수행하는 마공학 인형에 가깝다.
티딕, 촤악.
지면에 회로를 새기고 마나 포션을 붓는다. 그것이 땅에 스며듦을 확인하고선 다른 곳으로 향한다. 그것을 끝없이 반복한다.
그리하여 만들어지는 것은 마법사의 영역이다.
셀리의 눈에는 이곳이 하나의 마탑으로 보이기 시작했다. 그것도, 다가오는 것을 흔적도 없이 날려버리는 광인의 마탑.
“아, 오셨습니까?”
회로를 새기던 라니아가 셀리를 알아보고 다가왔다. 셀리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부탁한 물품들 들고 왔어요.”
그녀가 제 뒤를 가리켰다.
그곳엔 딱딱하게 굳은 백색 마탑의 마법사들이 있다. 그들은 눈을 크게 뜬 채, 지면에 새겨진 회로와 다가오는 소녀를 번갈아 본다.
믿을 수가 없다는 눈치다.
한 명의 마법사가 이만한 일을 벌였다는 것을.
‘···저런 반응이 당연하지.’
셀리는 제 눈가를 쓸어내렸다.
셀리 조차도 믿기 힘들다. 수십, 수백의 고위 마법사들이 달려들어 해도 불가능할 일이다. 단순히 회로를 새기는 것이라면 어떻게든 할 수 있을 테지만, 그 전부를 통제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그것을 눈앞의 소녀는해내고 있다.
이제 일일이 놀라기도 힘들 지경이다. 셀리는 허탈하게 웃으며 가져온 물품을 라니아에게 건넸다.
“이렇게까지 하면 정말 막을 수 있겠는걸요.”
이곳에서 벌어질 일에 대해선 셀리도 얼추 전해 들은 바가 있다. 죽음의 칼, 그 두려운 재앙이 이곳에 나타난다고 했던가?
‘처음엔 절대 못 막을 거라 생각했지만···.’
눈앞에 펼쳐진 풍경을 보고 있자면, 마냥 불가능한 일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고 만다. 허나, 정작 회로를 그리는 본인의 생각은 다른듯싶었다.
“고작 이걸로? 어림도 없죠.”
물품을 건네받으며 라니아가 쓰게 웃었다.
“수천 개를 그려도 모자랄 판인데.”
“···그렇게까지?”
“그렇게까지 해도, 가능성은 낮습니다.”
그러니.
“용사가 있는 거겠죠.”
라니아가 고개를 돌렸다.
그곳엔 카일이 서 있다. 바닥에 새겨진 회로를 보며 카일은 성검을 움켜쥐었다.
2.
백색 마탑주는 물품을 건네주고 자리를 떴다. 눈바람이 몰아치는 설원에 회로를 새기다 말고, 라니엘은 고개를 돌려 카일을 흘겨봤다.
불어오는 눈바람에 용사의 정복이 흩날린다.
견장에 달아둔 두 갈래의 천조각이 불어오는 바람에 펄럭인다. 기사들에게 승리의 상징이라 불리는 모습이나, 라니엘의 눈에까지 그리 보이지는 않는다. 라니엘은 한숨을 내쉬었다.
“후우···.”
죽음의 칼을 상대하기 위해선 카일이 필요하다.
정말 인정하긴 싫지만, 라니엘은 카일의 존재가 얼마만큼의 전략적 가치를 지닌 지 알고 있다. 그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다. 녀석이 있으면 활용할 수 있는 전략의 수가 곱절은 늘어나니.
“다 읽어봤냐?”
“대충은.”
카일이 짧게 답했다.
라니엘이 카일에게 건넨 것은 일대에 새겨놓은 회로의 정보이자, 죽음의 칼을 상대하기 위한 전략이다.
“네가 죽음의 칼과 직접 부딪치는 건 마지막의 마지막 수야. 될 수 있으면 거기까지 안 가게 할거고.”
“가능할 것 같진 않군.”
“그렇겠지.”
라니엘 또한 알고 있다.
작전을 아무리 열심히 세워봐야, 칼질 한 번에 싹 쓸려나갈 것이란 것쯤은.
“칼질 한번에 수백 개씩 썰려나가는데, 이게 다 무슨 소용이냔 생각이 들긴 하지. 그래도 해야지. 작전은 많을수록 좋으니까.”
“녀석의 말버릇이군.”
“그래, 내 말버릇이지.”
“녀석의 말버릇이다, 라고 말했다.”
“어휴, 시발롬.”
여전히 카일은 저런 태도다.
아득바득 이를 악물어가며 부정하는 카일의 태도에 일일이 반응하기도 지친 라니엘은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기를 잠시.
라니엘이 입을 열었다.
“여긴 왜 온 거냐?”
뜬금없는 질문이다.
하지만 꼭 물어봐야 할 질문이다. 카일은 곧바로 답하지 않았다. 잠깐의 침묵 후 카일이 입을 열었다.
“그래야 하니까.”
“왜? 내가 부탁한 것도 아닌데.”
“누군가 부탁하지 않아도, 마땅히 그래야 하니까 그 자리에 서는 것. 그게 용사 아닌가? 라니엘이 이것까지 말해주진 않았나 보군.”
라니엘이 눈을 깜빡였다.
처음에는 자신이 잘못 들었다고 생각했는데, 아무래도 그건 아닌 모양이다. 라니엘이 헛웃음을 터뜨렸다.
“이제 와서?”
“그렇다면.”
“그럼 내가 묻고 싶은데. 너 카일 맞냐? 연기하지 마라. 역겨우니까.”
“믿지 않는 눈치군.”
“내가 믿을 것 같냐?”
“아니.”
마음에도 없는 말을 던졌다는 반응이다.
라니엘이 어이없어하는 와중, 카일은 성검의 칼자루를 매만지며 입을 열었다.
“아마도.”
카일이 말했다.
“죽음의 칼이 나타난다면, 라니엘은 무엇이 됐든 이 자리에 나타날 거다. 그렇게 생각했다.”
“그나마 가능성 있는 게 나밖에 없으니까 와야 될 거 아니야.”
“그래. 그렇게 녀석은 또다시 목숨을 걸겠지. 내가 오지 않더라도, 그 누구도 이 자리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더라도, 녀석은 그리 할 거다. 반드시.”
카일이 중얼거렸다.
“그래선 안 돼.”
“뭐?”
“그래선 안 된다고 말했다.”
그 단호한 태도에 라니엘은 불쾌함을 느낀다.
이 불쾌함을 또 어디서 느꼈던가? 그것을 떠올려 보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별이 말했다.」
「별의 말을.」
「별이.」
허구한날 별을 운운하던 카일의 목소리.
기어코 별에게서 독립하지 못했던 카일을 떠올리며 라니엘이 비웃음을 흘렸다.
“왜, 별이 그렇게 하랬냐?”
여전히.
“별이 그렇게 하래? 난 여기서 죽으면 안 되니까, 네가 와서 나를 도우라고 별이 그래?”
여전히도, 녀석은 별에게 붙잡혀 있구나.
“별 없이는 아무것도 아니니, 그 말을 따라야 할 것 같아서 여기로 온 거냐?”
내 말은 절대 닿지 않았지만.
별의 말이라면 목숨이 위험한 전장에도 기어코 발을 들이미는구나. 그 사실에 라니엘은 짜증을 느낀다. 그놈의 별이 대체 뭐길래.
“혹시 나를 쫓아낸 것도 별이 그렇게 시켰냐?”
이쯤되면 그런 의심마저 든다.
라니엘이 툭 쏘아붙이며 카일을 노려봤다.
“아니.”
카일이 답했다.
“그건 내 선택이었다.”
“뭐가.”
“라니엘을 쫓아낸 것.”
“오우. 더 개새끼였네.”
쯧, 하고 라니엘이 혀를 찼다.
“그럼 이곳에 온 건 별이 시킨 게 맞나 보네?”
카일은 침묵했다.
불리하면 입을 다물어버리고 상황을 회피하려 드는 습관은 여전하다. 라니엘은 한숨을 내쉬며 제 머리칼을 헝클어트렸다.
“조금이라도 기대한 내가 병신이지.”
기대해봐야 뭐하겠는가.
이미 수년간의 기다림마저 배신당한 마당인데. 더는 기대하지 않아야 함을 알고 있음에도, 그냥 포기해버려야 함을 알고 있음에도 그리할 수 없는 자신에게 라니엘은 짜증을 느낀다.
그렇게 라니엘이 머리를 거칠게 쓸어넘기고 있자니, 카일이 입을 열었다.
“하나 묻지.”
“뭐.”
“마법사들은 계약을 이행할 때, 그것을 자신의 의지라고 부르나?”
“···뭔 뜬금없는 소리야? 계약의 내용에 따라 다르겠지.”
“내 의지로 맺은 계약이고, 그 계약에 따라 지켜야 할 일을 행하는 것은··· 나의 의지라 말할 수 있나?”
잠깐 고민하던 라니엘이 말했다.
“원해서 맺은 계약이면 그렇겠지.”
“그렇다면, 내 의지가 맞다.”
카일이 피식, 웃음을 흘렸다.
“이곳에 온 건 내 의지가 맞다.”
지어낸 표정도, 비웃음도, 헛웃음도 아닌 가벼운 웃음. 그래서 더 진짜 같은 웃음. 몇 년 전에는 카일이 종종 지어보이곤 했던 표정이다.
그 웃음 앞에 라니엘은 당황한다.
“···너 뭐냐?”
카일은 더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눈바람이 불어오는 설원에 선 채, 제 성검을 매만질 뿐이었다.
3.
“계약을 이행하라.”
“···예?”
“그레이스 가문 대대로 이어지는 말이다.”
북부의 주인, 에랴흘 반 그레이스.
그는 제 앞에 앉아있는 아들을 바라본다. 자신보다 뛰어난 재능을 가진 아이. 초인의 좌를 노려볼만한 가능성을 가진 전사.
“선대의 선대, 그렇게 거스르고 거슬러 시조 때부터 내려오던 말이다. 시조님의 유언이시지.”
계약을 이행하라.
“시조께선 말씀하셨다. 자신은 스승과 한가지 약속을 맺었으며, 그것은 계약이어서 반드시 지켜야만 하는 일이라고.”
그것이 무엇이냐고 라크가 질문을 던졌다.
“죽음 앞에 긍지를 보이는 것.”
에랴흘이 답했다.
“죽음의 앞에 그레이스는 전사로서의 긍지를 보여야 하리라. 죽음이 결코 긍지를 망각하지 않도록.”
그것은 추상적인 단어의 나열이다.
“긍지를 아는 이, 죽음의 물음에 답할 준비가 된 이는 성지의 한가운데 도착할 수 있으리라.”
하지만 어째서인지, 그 추상이 무엇을 나타내는 지 라크는 알 것만 같았다. 예로부터 죽음을 상징하는 것은 한 존재뿐이었으니.
“라크.”
에랴흘이 라크를 바라봤다.
“북부에 죽음의 칼이 온다. 이것은 예언이자 확정된 미래다. 종교쟁의들의 말은 믿지 않으나, 우리의 시조께선 예언만큼은 신뢰하셨다.”
죽음이 북부에 찾아올 것이다.
에랴흘은 이것을 단순한 우연이라 생각하긴 어려웠다. 이것은 전사의 직감이다. 그리고, 에랴흘의 직감은 대체로 맞는 편이었다.
“네게 죽음앞에 서란 소리는 하지 않는다. 지금의 네가 그곳에 가봐야, 그건 개죽음일 테니.”
하지만, 하고 에랴흘이 말했다.
“한 번 더 시련에 도전해보겠느냐.”
에랴흘이 제 아들을 보았다.
라크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 * *
“그래서 성지의 시련에 다시 도전하게 됐다고?”
“예, 그게 그렇게 됐습니다.”
라니엘이 제 턱을 매만졌다.
안 그래도 성지의 시련에 다시 도전해볼 것을 라크에게 권유해보려던 참이다.
“괜찮네. 지금이면 옛날보다 훨씬 멀리 갈 수 있긴 하겠다. 그거, 매일 훈련했지?”
“마나의 샘 인근에서 수련을 반복했습니다.”
라크가 고개를 끄덕였다.
라니엘이 직접 알려준 마나의 배열을 다스리는 방법. 라크는 그것을 하루도 빼먹지 않고 수련했다. 지난 반년 동안 매일같이.
“같이 가자, 그럼.”
라니엘이 지팡이를 내려뒀다.
그녀가 회로를 새기고 있는 케넬 설원에서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 성지는 존재했다.
눈바람이 몰아치고, 하늘을 찌를듯한 거목들에 둘러싸여 있는 곳. 한때 그레이스가 피를 흘리며 걸음을 옮겼다는 곳으로 라니엘과 라크는 향한다.
그렇게 두 사람이 성지의 초입에 선 순간이다.
사락.
한줄기의 바람이 불어왔다.
불어온 바람은 썩은내가 났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