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eat the Hero Party RAW novel - Chapter 306
〈 306화 〉 죽음에 맞서는 방법(5)
* * *
성지에서 빛이 터져 나온다.
하늘로 빛줄기가 치솟는다.
그 빛기둥은 먼 곳에서도 보일 만큼 거대하다. 백야성의 옥좌를 지키던 에랴흘이, 그 곁에 바로 선 전사들이, 저주룡을 앞에 두고 바로 선 클로에가··· 그 빛을 보았다.
찬란히 솟구치는 빛이 시선을 잡아끈다.
하지만, 성지에서 가장 가까운 곳에 있는 두 명의 검사는 그 빛에 눈길 한번 주지 않는다. 둘은 서로가 쥔 검만을 바라볼 뿐이다.
캉, 카앙!
검과 검이 맞부딪친다.
결코 부러지지 않는 두 자루의 검이 요란스레 얽힌다. 쇠와 쇠가 맞부딪치는 소리가 연신 울려 퍼진다. 하염없이 흩날리는 눈발마저 두 사람의 곁에는 머물지 않는다.
죽음의 칼, 가니칼트.
최초의 용사이자 최초의 초인이었던 그는 자신의 최선을 보인다. 수백 년 만에 처음으로, 자신 앞에 나타난 호적수에게 긍지를 표한다.
최강의 용사, 카일 토벤.
승리의 상징이라 불리는 그는 몇 번이고 자신을 무릎 꿇렸던 재앙을 향해 검을 휘두른다. 두려움에 떨면서도 코앞까지 다가온 죽음에 눈을 돌리지 않는다. 과거, 자신의 스승이 그리했듯이.
기술과 기술이 맞부딪친다.
수년 만에 자신의 모든 것을 내걸고 검을 휘두르는 지금, 카일은 아주 오래전 일을 떠올린다. 그것이 언제였던가. 당시의 기억은 모종의 이유로 공백이 되어버려 자세히 기억이 나진 않지만···.
그것은, 카일이 검(?)을 동경하게 된 이유다.
그것이 꿈이었는지, 혹은 모종의 마도구를 통해 엿본 타인의 기억이었는지는 모른다. 그저 기억나는 것은, 그곳에 한 명의 검사가 있었다는 것.
흐르는 피.
잃어버린 한쪽 눈.
잘려버린 팔.
검을 들기는커녕, 일어서는 것조차 힘들어 보이는 누군가의 뒷모습을 카일은 보았다. 그 검사가 상대하고 있는 신(?)을 보았다.
「나는, ■■■■ ■ ■■■■.」
그는 검을 들어 올렸다.
그 칼끝은 세상에 내려온 그릇된 신을 겨눈다.
「기억해라, 너를 벨 ■■의 이름이다.」
그가 검을 휘둘렀다.
눈에 보이는 것은 뒷모습뿐이기에, 그가 휘두르는 검의 궤적이 카일의 눈에는 보이지 않았다. 보이지 않았지만 알 수 있었다.
서걱.
그 칼끝이 신에게 닿았음을.
벨 수 없는 존재를 기어코 베어냈음을.
챠아아아아아아아아악!
칼이 한번 휘둘러짐과 동시에 세상이 쪼개졌다. 일대의 풍경이 비스듬히 갈라졌고, 신의 육신 또한 반으로 쪼개어졌다. 하늘이 잘리고, 태양을 가리던 그늘이 모조리 쓸려나간다.
가히 기적이라 불러야 할 일격.
‘아름답다.’
당시의 카일은 그렇게 생각했다.
그때 함께 보았던 모든 풍경이 흐릿해져 기억에서 잊혔음에도··· 그 일격만큼은 결코 잊히지 않았다. 오랫동안 카일의 뇌리에 맴돌았다.
‘나도, 그런 검을···.’
동경했다.
그 찬란한 일격을 선망했다.
기억 속의 그 검사처럼 검을 휘두를 수 있게 되기를 바랐다. 그러나, 강해지면 강해질수록 카일은 깨닫게 된다. 그것이 얼마나 먼 경지인지.
용사가 되었다.
검의 초인에게 검을 배웠다.
최강의 용사라 불리게 됐다.
그러나, 여전히 그 경지는 요원하다.
이제는 기억에서 마저 서서히 잊혀 가는 마당이다. 자신은 그런 검을 휘두를 수 있을 리가 없다. 그런 확신이 들기 시작했다. 그럼에도, 카일은 계속해서 그 검을 바라고 있다.
그 검술을 흉내 낼 수 있다면.
그와 같은 일격을 자아낼 수만 있다면.
자신에게 주어진 시련을, 계약을 수행할 수 있으리라. 위업을 이룰 수 있으리라. 그렇기에, 카일은 그 검을 흉내 내기 위해 다른 수를 썼다.
별빛을 모으고, 축적하고, 또다시···.
“소용없는 일이지.”
카일이 무심코 중얼거렸다.
“그런 거로 흉내 낼 수 있는 게 아닐 텐데.”
풍경은 기억과 함께 흩어진다.
시간은 다시금 현실로 돌아온다. 카일의 눈앞에는 한 명의 검사가 서 있다. 죽음의 칼, 가니칼트. 그가 어떤 자세를 취하고 있다.
오른팔이 잘려 나가고 없는 것처럼 축 늘어트리고선, 한쪽 눈을 감은 채 왼손으로 검을 쥐고 있다.
그것은 쿤텔에게 배운 적이 없는 자세다.
그러나, 카일은 저 자세를 알고 있다. 알 수밖에 없다. 저건 꿈에서 몇 번이고 보았던 그 검사가 취하던 자세였으니까.
“역시.”
지금 이 순간 카일은 확신한다.
“당신이었군.”
가니칼트가 카일을 보았다.
카일 또한 눈앞의 검사를 보았다.
‘■■■■ ■ ■■■■.’
기억에서 지워져 버린 이름.
모두에게서 잊힌 이름.
별빛이 흐릿해진 까닭일까, 별에 의해 지워졌던 기억을 카일은 어렴풋이나마 떠올려낸다.
“당신이었어, 가니칼트 반 갈라트릭.”
가니칼트는 답하지 않는다.
앞으로 한 발짝 내디딜 뿐이다.
쿠웅!
땅이 뒤흔들린다.
일대의 흐름이 뒤바뀐다. 지금 가니칼트가 보이려는 기술이 무엇인지 깨달은 카일은 숨을 허 삼킨다.
‘온다.’
가니칼트의 왼팔이 서서히 움직인다.
빠르지 않다. 느리지도 않다. 마치 멈춘 시간 속에서 가니칼트의 검만이 움직이는듯한, 기이한 속도로 대검이 은백색의 궤적을 그린다.
틱, 티딕. 티디디디디딕.
검에 닿는 것이 모조리 갈라진다.
칼끝이 지나간 궤적을 따라 공간이 갈라진다. 허공에 거대한 빗금이 생겨난다. 공간을 가르며 칼끝이 자신을 향해 다가온다.
다가오는 칼 앞에 카일은 죽음을 느낀다.
피할 수 없다. 대항할 수 없다.
그렇기에, 저것은 죽음의 칼이다.
“···아.”
다가온 죽음 앞에 인간은 탄식을 내 지른다.
끝까지 눈을 감지는 않은 채, 카일은 죽음이 휘두르는 칼을 바라본다. 그 한없이 아름답고도 두려운 검격을 눈에 아로새겼다.
그리고, 죽음이 카일을 덮쳤다.
서걱.
풍경이 비스듬히 갈라졌다.
2.
서걱.
검이 휘둘러지는 순간, 라니엘은 카일을 향해 있는 대로 사슬을 뽑아냈다. 사슬로 카일의 몸을 옭아맨 채 뒤로 잡아당겼다.
그녀 또한 직감한 탓이다.
저건 막을 수 없다. 피할 수도 없다.
결코 부러지지 않는 성검이라 한들, 저 일격은 그런 성검조차 베어낼 거다. 그런 확신이 든 까닭이다. 그리고, 그것은 정답이었다.
챠아아아아아아아악!
허공에 거대한 빗금이 생겨났다.
풍경이 비스듬히 잘려 나간다.
잘려서, 미끄러지듯 엇나가는 공간은 좀 전처럼 제자리를 되찾지는 않는다. 엇나간 채, 그대로 이어져 버린다. 그 순간 라니엘은 상식이 무너짐을 느꼈다.
거리감이 사라진다.
상식이 무가치해진다.
섭리가 비틀린다.
상식을 벗어난 무언가가, 보고도 이해할 수 없는 무언가가 협곡을 덮쳤다. 그 범위 안에서 벗어났다고 생각한 것은 착각이다. 몰아치는 풍압에 라니엘과 카일의 몸이 공중에 붕 뜬다.
투확!
검에 닿지 않았음에도, 그 풍압만으로 온몸이 찢어진다. 카일과 라니엘이 피를 쏟아내며 눈바닥 위를 나뒹굴었다.
“컥, 커흑!”
시야가 붉다. 온몸이 욱신거린다.
라니엘은 피를 토하며 천천히 고개를 들어 올렸다. 그렇게 시야에 들어오는 것은, 조금 전과는 아예 달라져 버린 일대의 풍경이다.
하늘이 갈라졌다.
비스듬히 잘린 채 붙어버린 협곡은 천천히 무너지고 있다. 쿠궁, 쿠웅 소리를 내며 땅이 울렸다.
“하···.”
라니엘은 헛웃음을 터뜨린다. 이제는 감조차 잡히지 않는다. 저게 도대체 뭐란 말인가.
“쿨럭, 컥.”
라니엘은 옆을 바라본다.
그곳에는 자신보다 더 많은 피를 게워내고 있는 카일이 있다. 더는 일어설 수 있을 것 같지가 않다.
“······.”
라니엘이 천천히 몸을 일으켜 세웠다.
쓰러져서 일어서지 못하는 카일을 뒤로한 채 그녀는 피할 수 없는 죽음을 마주한다. 결국, 자신의 계획은 모조리 실패했다. 그렇다면···.
‘남은 건 하나 뿐이지.’
결정을 내려야 할 때다.
사락.
옷깃을 걷어붙이고 팔을 앞으로 쭉 뻗는다.
라니엘의 앞에 천칭이 떠오른다. 천칭을 앞에 두고 잠시나마 망설이나, 라니엘은 결국 천칭에 제 손가락을 얹는다.
“바친···.”
그렇게 발음하려는 순간이다.
턱.
카일이 라니엘의 발목을 붙잡았다.
“말했지 않나.”
핏발이 선 눈동자로 카일이 라니엘을 노려봤다.
“쓰지 마라.”
“안 쓰면 다 죽는데 무슨.”
“쓴다 해서···.”
“알아, 못이기는 거.”
라니엘이 피식 웃었다.
“그니까그때처럼 튀어, 등신아.”
움찔, 하고 카일의 눈동자가 떨린다.
라니엘은 앞으로 한 걸음 더 내디딘다. 카일은 결국 라니엘의 발목을 놓치고 만다. 그렇게 라니엘이 몇 걸음 더 내디딘 순간이다.
후두둑.
어디선가 눈이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라니엘이 고개를 들어 소리가 들린 곳을 보았다. 그곳에 누군가 서 있다.
“···라크?”
3.
그레이스라는 인간이 있다.
그에겐 한 명의 스승이 있었는데, 고아였던 그에게 있어서 스승은 형이자 아버지였다. 그는 자신의 스승을 존경했다. 동경했다. 언제나 위업을 이루고 돌아오는 긍지 높은 검사를 선망했다.
그에게 가르침을 배웠다.
많은 것을 받았다.
그것이 고맙고 또 고마워서, 청년이 된 소년은 그 은혜를 갚고자 하였다. 그 말에 스승은 쓰게 웃으며 이렇게 답할 뿐이었다.
「내가 긍지를 잃는다면, 긍지를 일깨워주도록.」
참으로 스승다운 답이었다.
청년은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반신반의했다. 저토록 이나 긍지 높은 검사가, 긍지를 잃는다니? 그런 일이 일어날 거라곤 상상조차 하지 않았다.
허나, 그리되었다.
스승은 패배했다.
모두에게서 스승은 잊혀졌다.
어느샌가 스승은 재앙이라 불리게 됐다.
죽음의 칼, 가니칼트.
스승에게 새로이 붙은 이름이었고, 사람들은 스승을 재앙이라 부르며 두려워했다. 스승은 더는 용사가 아니었다. 사람을 죽이는 재앙이었다. 청년은 스승과의 약속을 지켜야만 했다.
하지만, 어떻게?
스승을 죽여야 한다.
스승을 저 고통에서 해방해드려야 한다.
하지만, 자신에겐 그럴 힘이 없다. 한평생을 갈고 닦았지만, 청년은 자신이 스승에게 닿으리란 생각은 하지 않았다.
인간은 끝없이 사고한다.
사고의 끝에, 인간은 한 가지 답을 내놓는다. 그 답을 준 것은 스승의 동료였던 어느 엘프다. 엘프와 함께 인간은 한가지 수를 준비한다.
「잇는다.」
잇고 또 잇는다.
「다음으로, 다시 다음으로.」
언젠가 다가올 그날을 위해서.
* * *
라크가 협곡에서 뛰어내린다.
그 손에는 아무것도 쥐어져 있지 않다. 다만, 그 몸에선 증기가 피어오른다. 가열을 한계까지 중첩한 듯한 모습이다.
턱.
바닥에 내려앉은 라크가, 죽음을 향해 다가간다. 죽음이 눈을 가늘게 뜬 채 라크를 본다.
“너는.”
죽음은 라크를 알아본다.
그 몸에 흐르는 피를 알아본다.
“그레이스인가?”
“라크 반 그레이스.”
이를 딱딱 맞부딪치면서도, 라크는 제 이름을 말한다. 그리곤 죽음을 향해 한 걸음 내디딘다. 죽음이 라크에게 묻는다.
“검사인가.”
물음에 라크는 답한다.
“전사입니다.”
라크는 눈을 부릅뜬 채 죽음을 향해 다가간다. 라니엘이 소리치나, 라크는 그 소리를 듣지 않는다.
“약속을 지키고자, 이 자리에 섰습니다.”
다가선 것만으로 라크의 눈에서 핏물이 흐른다.
그 육체가 삐걱거리기 시작한다. 그러나, 라크는 입을 열어 계속해서 말했다.
“약속한 긍지를.”
라크가 빈손을 허공을 향해 뻗었다.
왼손으로 허공을 움켜쥐었다.
“죽음 앞에, 그레이스는 긍지를 보이리라.”
시조의 유언을 발음한 순간이다.
라크의 손아귀에서 빛이 터져 나온다. 터져 나온 빛은 검의 형상을 이룬다. 완성된 검의 형상에 가니칼트의 눈이 가늘어진다.
용사, 가니칼트 반 갈라트릭.
그가 쥐었던 검이 라크의 손에 들린다.
찬란히 피어오르는 광채에, 라크를 말리고자 뛰어들던 라니엘이 멈추어 선다. 두 눈을 크게 뜬 라니엘의 시야에, 라크의 뒤에 서린 무언가 보인다.
「가겠습니다, 스승님.」
그것은 누군가의 기억이자 망령이다.
한때 이곳에 섰던 그레이스라는 인간의 흔적이, 라크와 겹쳐진다. 라크는 죽음을 향해 한 걸음 내디디며 자세를 다잡는다.
그리곤, 탁.
라크가 가볍게 땅을 박찼다.
···그레이스 가문에 내려지는 비기는 없다.
그들에게 세련된 기술은 존재하지 않는다.
감각과 본능, 근력만으로 휘두르는 파괴적인 난격만이 존재할 뿐이다. 하지만, 그것은 후대에 그레이스의 피를 이은 이들이 자신의 재능을 살리지 못했을 뿐이다.
시조, 그레이스.
사내는 제 일생을 바쳐 하나의 기술을 완성했다.
오직 한 번의 휘두름을 위해 사내는 제 일생을 바쳤다. 첨예하게 갈고 닦았다.
존경했던 스승을 죽이기 위한 기술.
시간이 흐르고 흘러, 그 기술은 라크의 손을 통해 재현된다. 검을 움켜쥔 순간 라크의 머리에 기억이 흘려들어온다. 그것은 몇 번이고 죽음에 도전했던 선조의 기억이다.
위대한 전사, 그레이스.
그가 펼쳤던 일격을 라크는 재현해낸다.
성검에 담긴 별빛이 라크의 몸을 가속시킨다. 한순간 가속한 라크의 눈동자가 붉게 번들거린다. 가열된 육체에 담긴 열기가 폭발하듯 터져 나온다.
그레이스류, 무형검.
형태도, 정해진 방식도 없다.
손에 들린 것이 무엇이든 상관없다. 베고자 하는 것이 있다면 그걸로 족하다. 그렇게 심검(心?)을 설명했던 스승의 말을 자신의 방식으로 해석한 그레이스가 만들어낸 검격.
라크의 손에 쥐어진 것은 대검이다.
허나, 휘둘러지는 순간 그것은 검(?)이 아니다. 마치 도끼처럼 공간을 찢어발기며 라크가 휘두른 검이 가니칼트의 검과 맞부딪친다.
카아아아아앙!
굉음과 함께 별빛이 터져 나온다.
범람하는 별빛은 죽음의 칼이 잃어버린 긍지요, 그가 과거에 두고 온 영혼의 반쪽이다. 별빛이 영락해버린 용사의 혼을 뒤흔든다.
그늘과 별빛이 뒤섞인다.
그 순간 공간의 비틀림이 만들어진다.
비틀림을 견디지 못한 라크가 뼈가 모조리 끊어진다. 결국 라크는 검을 결국 놓치고 만다.
“커헉!”
피를 토하며 라크는 바닥을 나뒹군다.
결국 기술을 제대로 펼치는 것은 실패했지만, 그 시도가 무의미하진 않다. 터져나온 별빛이 가니칼트의 몸에서 새어나오는 그늘을 붙잡아뒀다.
잠깐이지만, 가니칼트는 그늘을 쓰지 못한다.
라크는 자신이 놓친 검을 바라봤다.
대검은 허공을 맴돌다 푹, 하고 바닥에 꽂혔다. 대검이 꽂힌 위치는 죽음의 칼, 가니칼트와 용사, 카일 토벤의 사이다.
설원에 꽂힌 대검.
카일은 그것을 멍하니 바라본다.
라니엘 또한 검을 바라본다.
지금 이 순간, 두 사람의 머릿속에 같은 생각이 떠오른다. 라니엘은 눈앞에 떠오른 천칭을 뒤틀었다.
천칭이 아닌, 공양(Offering).
뒤바뀐 천칭에 라니엘은 제 열 손가락을 모조리 공양한다. 그리곤, 바닥에 남은 회로를 발로 내려찍었다. 혹시 모를 변수를 위해 준비해둔 회로. 그것이 지금 찬란한 빛을 내뿜는다.
“컥, 퉷.”
카일 또한 입안에 들어찬 피를 뱉으며 일어선다.
성검을 놓쳐버린 그는 빈손이다. 성검을 쥐지 않았기에, 카일 토벤은 더는 용사가 아니다. 인간, 카일 토벤은 라니엘의 곁에 섰다.
“야, 카일.”
라니엘이 말한다.
“흑룡 토벌 때, 기억하냐?”
“잊었을 리가.”
“그럼, 지금 내가 뭘 하려는지도 알겠지?”
카일이 웃음을 흘렸다.
“물론이다, 라니엘.”
이제야 인정하네, 개같은 자식.
라니엘이 피식 웃음을 흘리며 제 손가락을 모조리 꺾었다.
챠르르르륵!
회로가 빛을 뿜고, 사슬이 솟구친다.
하늘을 뒤덮을 정도의 수많은 사슬이 일대를 가득 매운다. 수백, 수천 가닥의 사슬. 그 사슬의 목적은 두말할것도 없다. 라니엘이 입가를 비틀며 소리쳤다.
“가라, 카일.”
카일은 대답하지 않는다.
대답 대신, 땅을 박차고 카일이 달리기 시작한다.
설원에 꽂힌 성검을 향해서.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