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eat the Hero Party RAW novel - Chapter 308
〈 308화 〉 별이 바라는 것(1)
* * *
인간의 긍지가 죽음에게 닿았다.
죽음이 설원을 떠난 아래, 일대를 짓누르던 위압감이 사라졌다. 라크는 무의식중에 참았던 숨을 내뱉었다. 한번 숨을 내쉴 때마다 정신이 희미해져 갔다.
몸에 맞지도 않는 기술을 썼다.
성검이 막아주었다 한들, 죽음이 휘두른 칼의 여파에 그대로 휩쓸렸다. 온몸이 삐걱거렸다.
그 때문일까, 자꾸만 눈이 감기려 했다.
피곤함이 몰려오는 와중에도 라크는 눈을 감지는 않는다. 고개를 빳빳이 세운 채, 설원에 서 있는 한 명의 검사를 바라본다.
최강의 용사, 카일 토벤.
라크는 그가 휘두른 검을 보았다.
자신이 놓친 검을 쥐고, 카일이 펼치는 기술을 똑똑히 보았다. 멈춰버린 시간 속에서 움직인 검(?)은 기묘했고, 신비했으며 또한···.
‘아름답다.’
아름다웠다. 너무나도.
경지에 오른 검사가 목숨을 걸고 펼쳐내는 일격은 너무나도 아름다운 것이어서, 아직 성숙하지 않은 소년을 매료시키기엔 충분하고도 남았다.
그야말로 영웅의 일격.
죽음에 맞서 검을 휘두른 영웅의 모습을 라크는 몇 번이고 머릿속으로 그린다. 그 풍경을 곱씹으며 라크는 눈을 감았다.
잊지 않으리라.
머릿속에 아로새기리라.
그래서, 언젠가는 자신 또한···.
* * *
라니엘은 멍하니 눈을 깜빡였다.
두눈으로 보고도 믿을 수 없는 풍경에, 라니엘은 입술을 열었다가 닫기를 반복했다. 그렇게 몇 초의 시간이 흐른 후, 라니엘이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읏.”
부러진 손가락이 아프다.
온몸이 삐걱거리고 벌어진 상처에서 피가 철철 흘러내렸다. 눈밭에 붉은 점을 찍으며 라니엘은 걸음을 옮겼다. 비틀거리며 걸음을 내디뎠다.
사박.
그렇게 한참을 걸어 라니엘은 카일의 곁으로 다가갔다. 카일은 한쪽 무릎을 꿇은 채 칼자루에 기대어 서 있었다. 그 뒷모습을 보며 라니엘은 뭐라 말해야 할지 고민하다가, 힘겹게 입을 열었다.
“미친놈.”
라니엘이 중얼거렸다.
그녀의 입꼬리가 자꾸만 파르르 떨렸다. 자꾸만 새어나오려는 웃음을 참으며 라니엘이 말했다.
“진짜, 미친놈.”
그녀가 카일의 곁에 털썩, 주저앉았다.
“너 미쳤지? 진짜 미친 새끼지?”
“···귀가 울린다. 시끄럽다.”
“거봐 시발, 내가 뭐라 했어.”
라니엘이 참다못해 웃음을 터뜨렸다.
“진짜 되잖아.”
반신반의 했다.
카일이 옛날처럼 검을 휘두를 수 없음을 라니엘 또한 안다. 지난 몇 년간 카일은 검을 반쯤 놓아버렸으니까. 그렇기에 기대하지 않았다. 처음부터 자신의 수명을 걸 각오를 다지고 있었다.
“진짜 하면 되잖아, 새끼야.”
하지만 결과는 어떤가.
라니엘은 보았다.
죽음과 맞서는 카일을. 그 끝에 죽음에게 피를 흘리게 한 카일을. 그것은 꿈이 아니다. 검게 물든 설원이 그것이 현실임을 증거한다.
“미친 새끼. 존나 대단한 새끼. 진짜, 와.”
제 머리칼을 쓸어넘기며 라니엘이 웃었다.
한참 동안 웃던 그녀가 숨을 짧게 뱉으며 말했다.
“수고했다, 개자식아.”
라니엘이 카일의 등을 후려쳤다.
챱, 하고 요란한 소리가 울렸다. 카일은 얼얼한 제 등을 문지르며 피식 웃음을 흘렸다.
“입이 험한 건 여전하군.”
“뭐.”
“그냥 그렇다는 거다.”
숨을 몰아쉰 카일이 털썩, 자리에 주저앉았다.
“카일, 라니엘!”
뒤늦게 절벽 위에서 목소리가 들린다.
레미아에게 안긴 채 사라가 절벽을 타고 내려왔다. 저러다 넘어지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급히 걸음을 옮긴 사라가 카일의 앞에 멈춰 섰다.
“괜찮아요? 눈, 눈이!”
“이정도는 금방 낫는다. 나보다는···.”
카일이 라니엘을 가리켰다.
“저 녀석이나 먼저 봐줘라. 나보다 상태가 심각할 테니.”
“···멀쩡한데.”
“허세 부리지 마라. 마나도 바닥까지 끌어써서 숨 쉬는 것도 힘든 놈이 허세는.”
“악!”
카일이 라니엘의 뒷목을 잡아다가 사라의 앞에 앉혔다. 라니엘은 툴툴거리면서도 손을 내밀었고, 사라는 라니엘의 뼈를 맞추며 신성술을 쓰기 시작한다.
“진통, 시팔련아 진통···!”
“아 맞다.”
라니엘이 비명을 지르는 가운데, 카일은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본다. 눈에 들어오는 것은 죽음의 칼이 갈라놓았던 하늘이다.
갈라졌던 하늘이 붙고 있다.
서서히 제자리를 찾는 별은 자신을 바라보고 있다. 마치, 계약을 이행하라는 것처럼.
2.
별이 카일을 비추기 시작한다.
찢어졌던 계약이 제자리를 찾고 있다. 손을 들어 올려보면, 그 손에 별빛이 응어리지고 있다. 그것은 검의 형상을 이룬다.
콱, 하고 움켜쥐면 성검이 나타나겠지.
성검을 쥐면 부상은 순식간에 치료될 것이요, 잃어버린 눈도 사라의 도움을 받는다면 수복될 것이다. 하지만 카일은 그리하지 않는다. 성검을 쥐지 않은 채 카일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비틀거리며 카일은 검게 물든 눈밭 위에 선다.
그리곤 손을 뻗어, 죽음의 피가 묻은 눈을 한 움큼 움켜쥐었다. 그것을 카일은 터져버린 제 눈동자에 밀어 넣었다. 마치, 치료를 방해하는 것처럼.
“카일···!”
“야, 너 뭐하는···!’
라니엘과 사라가 소리를 지르며 카일에게 달려온다. 카일은 손을 뻗어 둘을 제지한 채, 천천히 입을 열었다.
“눈은 한쪽이면 충분하다. 별빛으로 만들어진 눈동자는 필요 없으니까.”
“그게 무슨···.”
“가니칼트 반 갈라트릭은 외눈으로 마왕을 마주했다. 그걸 따라 하는 것뿐이야. 남은 한쪽 눈 만큼은 온전히 나의 것이니까.”
사라는 알아들을 수 없는 문장.
그러나, 라니엘은 그것을 알아듣는다. 라니엘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카일은 그런 라니엘을 바라보며 피식 웃었다.
“너도 봤나 보군.”
“···네가 그걸 어떻게?”
“글쎄. 그 고대의 엘프가 실수를 했던 모양이지.”
전부다 기억이 났다.
어째서 자신이 별과 계약을 맺을 수 있었는지.
이런 방법을 선택했는지까지도, 전부.
‘무의식중에 남은 기억을 따라 한 거겠지.’
대현자가 맺었던 계약.
카일은 그것을 흉내 냈다. 별에게 그와 같은 계약을 요청했고, 별은 카일에게 시련을 내렸다. 시련을 떠올린 카일은 무심코 웃음을 흘렸다.
‘···겨우 시작점에 섰군.’
영웅의 일격을 흉내 낼 수 있게 됐다.
길을 뚫을 별빛을 모으고 있다.
그날 별과 맺었던 계약을 되새기며, 카일은 짧게 숨을 내뱉었다. 잘못된 길을 걷고 있었음을 깨달았다 한들, 결과적으로 자신이 해야 할 일은 바뀌지 않았다.
결과까지 가는 과정만이 조금 바뀌었을 뿐.
“사라.”
카일이 사라의 이름을 불렀다.
사라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카일의 분위기가 평소와는 다르다. 그 사실을 눈치챈 사라는 눈을 가늘게 뜨곤 카일을 바라봤다.
“고맙다. 도움이 됐다.”
“···네?”
“감사인사가 너무 늦었나? 음, 미안하군.”
“아, 아뇨. 갑자기요?”
“지금이라도 해야 할 것 같아서.”
카일이 멋쩍게 웃었다.
정말이지 너무나도 오랜만에 본 그 웃음에 사라는 당황했다. 사라는 눈을 깜빡이며 카일의 곁에 다가와 그 몸을 이리저리 살피기 시작했다.
“카일, 당신 어디 아파요?”
“아니, 오히려 정상이지. 그 어느 때보다 더.”
제 팔뚝을 매만지는 사라를 내버려 둔 채, 카일은 라니엘을 보았다. 그 외견이 많이 변했음에도 날카로운 푸른 눈동자는 여전하다.
“······.”
서늘하고도 소름 끼치는, 무엇이든 꿰뚫어 보는듯한 눈동자. 말없이 카일을 바라보던 라니엘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카일, 너.”
그녀가 카일을 똑바로 보았다.
“종속 계약이라도 맺은 거냐?”
“용사는 모든 정신계열 주문에서 자유롭지. 그걸 네가 모르는 건 아닐 텐데?”
“말 돌리지 말고, 새끼야.”
라니엘이 카일을 노려봤다.
“있잖아. 그런 걸 강요할 수 있는 존재가.”
그녀가 하늘을 가리켰다.
“별하고 맺었냐고. 종속 계약.”
역시, 피해 가기는 힘들군.
이런 모습을 보여줬으니 녀석이 눈치채는 것도 당연하다. 카일은 이상한 부분에선 지나치리만치 눈치가 좋은 제 옛친구를 보며 쓰게 웃었다.
“그렇다면?”
“언제부터··· 아니다. 됐다.”
라니엘이 신경질적으로 머리를 헝클어트리며 카일에게 쏘아붙였다.
“뭘 얻으려고 했는데?”
곧장 핵심을 찌르고 들어오는 질문이다.
“의사와 육체의 주도권마저 저울에 올리면서, 뭘 얻으려 한 건데? 너 이 새끼, 별한테 호구 잡힌 거 아니지?”
카일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는다.
그저 쓰게 웃으며, 하늘을 올려다봤다.
어느새 별은 제자리를 찾았다. 카일의 손이 제멋대로 움직여 허공을 움켜쥐었다. 성검이 나타나고, 카일의 몸이 회복되기 시작한다.
“글쎄··· 호구 잡힌 건 아닌 것 같군.”
하지만, 비어버린 눈동자만큼은 차오르지 않는다. 카일은 눈을 천천히 감았다 떴다. 별이 제 몸을 감싸나, 옛날처럼 정신이 흐릿하진 않다. 한쪽 눈으로 보는 세상은 여전히 선명하다.
카일 토벤은 초인이 됐다.
별은 더는 카일의 정신을 온전히 지배하지 못한다. 초인의 경지에 오른 인간의 의지가 그에 저항하고 있기에. 저항하며 카일은 말을 잇는다.
“바라던 건 이룰 수 있을 테니까.”
그리 중얼거리며 카일은 소녀를 본다.
결코 라니엘이 아니라고 여겼던 소녀.
라니엘은 변하지 않는다. 라니엘에게 나약한 부분은 존재하지 않는다. 라니엘은 언제나 완벽하다. 그러니, 저 소녀는 라니엘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것은 자신의 착각이다.
녀석 또한 인간이기에 변한다.
자신이 신앙했던 녀석 또한, 변하고 말았다. 모든 것은 변한다. 불변한 것은 없다. 그렇기에, 인간은 발버둥을 치며 살아가는 것이다.
카일은 불완전해진 라니엘 반 트리아스를 본다.
자신으로 하여금 망가진 옛 친구를 본다.
카일의 마음은 여전히 변하지 않는다.
자신은 어떠한 방향으로든 책임을 져야 한다. 카일은 쓰게 웃었다. 이제는 카일 또한 후회한다. 왜 조금 더 일찍 깨닫지 못했을까 하고.
그리 생각한 순간이다.
【계약을 이행하라.】
별빛이 허공을 찢었다.
계약이 제대로 지켜지지 않는 지금, 별은 자신이 가진 가장 강력한 사도를 움직인다. 계약을 강제로 집행하기 위해서.
쩌적.
공간이 갈라진다.
마치, 죽음의 칼이 그러했던 것처럼.
갈라진 공간은 문의 형상을 띄고 있다. 문이 열리고, 집행자가 설원에 발을 디딘다.
“정말이지 귀찮게 하는군.”
백금색의 로브가 펄럭인다.
로브에는 용의 문양이 새겨져 있다. 이곳에 서 있는 모두가 그 존재를 알아본다. 라니엘이 눈을 크게 뜬 채 중얼거렸다.
“···고룡의 마법사?”
요르문 반 드라고닉.
고룡의 마법사가 설원에 나타났다.
“그래, 오랜만이군. 라니엘 반 트리아스.”
그리고 요르문은.
“그리고 지독한 계약자 또한.”
지팡이로 설원을 두들겼다.
라니엘이 이미 쓰고 남은 회로가, 다시 발동되지 않아야 할 회로가 멋대로 발동한다. 솟구친 사슬이 카일의 몸을 옭아매 그를 무릎 꿇린다.
“섭리는 지키라 있는 것이며, 계약은 이행하기 위해 존재한다. 그것이 조건이었으며, 그대는 그것을 받아들였다. 그렇지 않나? 카일 토벤.”
그가 무릎 꿇은 카일에게 다가간다.
지팡이를 카일의 이마에 겨눈다.
“계약을 이행하라. 그렇지 않으면 처분할 테니.”
고룡의 마법사는 무표정하다.
장난스러운 모습은 온데간데없다.
이 자리에 서 있는 것은 별을 대리하는 인간이요, 이 세상에 내려온 완전한 신(?)이다.
그리고.
“지랄.”
신(?)이라면 치를 떠는 성질 더러운 마법사는 신의 횡포를 두고 보지 않는다. 콱, 고룡의 마법사가 카일에게 겨눈 지팡이를 라니엘이 움켜쥐었다.
“다 끝나고 와서는 뭐? 계약을 이행해?”
라니엘이 피식, 웃음을 흘렸다.
“호구 잡으려 하네, 씨발련들이.”
3.
열손가락은 이미 바쳤다.
팔도, 다리도 바칠 수 있는 건 다 바쳤다.
그러나 막을 수 없었다.
“······아.”
바닥에 주저앉은 벨노아는 멍하니 주변을 둘러본다. 혼돈이다. 지옥이 펼쳐져 있다. 기사들의 시체가 바닥을 나뒹군다. 기사의 살점을 뜯어먹는 구울들이 주변에 가득하다.
고개를 들면 하늘에는 저주룡이 날갯짓 하고 있다.
벨노아는 툭, 하고 고개를 숙였다.
벨노아의 앞에는 피 흘리며 쓰러진 클로에가 있다. 클로에의 몸에서 하염없이 피가 흐르고 있다. 클로에를 끌어안은 채 벨노아는 비명을 내지른다.
지옥이다.
지옥이 펼쳐졌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