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eat the Hero Party RAW novel - Chapter 332
〈 332화 〉 주어진 시간(1)
* * *
검이 장로의 심장을 관통했다.
검에 맺힌 잿빛 마나가 장로의 심장에 뿌리내린 그림자를 불태웠다. 그림자와 함께 장로의 혼(?) 또한 불에 타 바스러진다.
파스스.
수년의 세월을 견뎌냈던 장로의 육신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무너진 육체는 재가 되어 흩날린다. 부서진 마탑의 외벽의 너머에서 불어오는 바람에 실려 잿가루는 흩어진다.
재는 재로.
잿빛을 위해 한평생을 바친 늙은 마법사는, 그 최후 또한 잿빛 마탑의 마법사답다. 재로 변해 사방에 흩날리는 장로를 보며 레스티는 소리 죽여 울음을 토했다.
그렇게 잿가루가 눈에 보이지 않게 되어서야 레스티는 고개를 들었다. 붉게 물든 눈꼬리를 비비고, 눈물 자국을 닦으며 앞을 보았다.
장로의 육체는 재가 되었다.
하지만, 레스티의 눈에는 보인다.
장로의 몸에 떠나서 허공으로 녹아드는 그림자가. 저 그림자야말로 자신의 원수다. 자신의 스승이자 은인을 죽인 원수.
【아쉽구나.】
바스러지는 그림자가 속삭였다.
【잿빛을 이으려는 아이야.】
그림자는 이곳에 모여든 신성들을 본다.
【최초의 용사의 뜻을 잇는 아이야, 태초의 신과 계약한 주술사야, 별의 아이야, 별에게 축복받은 아이야.】
분명히 자신의 계획에 큰 걸림돌이 될, 훗날 하나의 시대를 이끌어갈 영웅들.
【나는 돌아온다.】
영웅들을 향해 그림자는 말한다.
【그리고, 다음엔 내가 너희들을 막아서마.】
광인은알고 있다.
고대에 맺어진 계약의 끝이 다가오고 있음을. 빌어먹을 대현자가 가둬둔 물길은, 머지않아 터져 나오고 말 것이란 걸.
【기대하라.】
그때는 내가 직접 너희를 마주할 테니.
시간이 흘러 완성될 광채를 머릿속으로 그리며 광인은 웃음을 터뜨린다. 마지막의 마지막 순간까지 광인은 웃음을 멈추지 않는다.
그렇게 광인의 잔재는 바스러진다.
마탑을 집어삼켰던 그림자가 걷히고, 무너진 외벽의 틈으로 햇살이 마탑 안으로 새어 들어왔다. 그것은 신성들의 승리를 의미한다.
“후우···.”
그제야 긴장이 풀린듯 하나둘 숨을 내뱉으며 자리에 주저앉았다. 하지만, 레스티는 끝까지 땅을 디디고 선 채 광인이 있던 곳을 노려보았다.
부릅 뜬 눈동자.
그 눈동자에선 잔불이 타오르고 있다.
라니엘이 보았다면 분명 잿빛 마탑의 마법사가 가져야 할 눈동자라며 칭찬했을 눈. 그 눈동자를 가진 채 레스티는 속으로 다짐한다.
잿빛은 결코 원수를 잊지 않는다.
은혜도, 복수도 반드시 갚아내리라.
‘반드시. 무슨 일이 있어도.’
그렇게 레스티가 다짐하는 순간이다.
“어?”
주변을 둘러본 벨노아가 말했다.
“라니아 교수님은?”
라니아 반 트리아스.
그녀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2.
라니엘은 무너진 천장의 잔해를 밟으며 마탑의 최상층으로 올라왔다. 그곳에는 아직 처리하지 못한 주문의 잔재가 남아있다.
모여든 구정물.
발아하지 못한 마(?)의 씨앗.
광인이 남긴 계획의 잔재를 처리하기 위해 라니엘은 걸음을 옮겼다. 비틀거리며 그녀는 씨앗을 향해 걸어갔다. 이것을 처리할 수 있는 건 자신밖에 없음을 라니엘은 알고 있다.
그렇기에, 광인이 쓰러진 걸 확인하고 곧장 걸음을 옮긴 것이다.
“후우, 후으윽···.”
몸이 저려온다.
시선은 자꾸만 흐릿하고, 씨앗을 향해 다가갈수록 심장이 요동쳤다. 저릿한 가슴팍을 꾸욱 누르며 라니엘은 씨앗의 앞에 멈춰 섰다.
“하···.”
거친숨을 내뱉으며 라니엘이 쓰게 웃는다.
하여간, 음습한 새끼 같으니라고.
속으로 그리 중얼거리며 라니엘은 모여든 구정물을 향해 손을 뻗었다. 본질적으로 마(?)와 같은 그것을 정화하기 위해서.
잿빛 마나가 피어올랐다.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남겨둔 회로.
이것을 정리하기 위해 스톡(Stock)해둔 회로를 해방하며 라니엘은 구정물 안에 손을 집어넣는다. 그 중심이 된 씨앗을, 비틀린 인간의 상반신을 강하게 움켜쥐었다.
【■■아, 아아■■. 아아■아.】
기괴한 비명이 라니엘의 정신을 뒤흔들었다.
죽지도 살지도 못한 채 수백 년간 무언갈 저주했을 존재. 그것이 내지르는 비명은 과연 끔찍하기 짝이 없다. 영혼이 울릴 정도였으니.
눈살을 찌푸린 채 라니엘은 손아귀에 더욱 힘을 준다. 뿌득, 소리를 내며 씨앗이 바스러지기 시작한다. 타오르는 마나가 비명마저 집어삼킨다.
화르르륵!
구정물과 함께 씨앗이 불타올랐다.
그렇게 아무것도 남지 않게 되어서야, 라니엘은 제 손을 축 늘어트렸다. 호흡이 조금 더 가빠졌다. 라니엘은 벽이 기대어 선 채 숨을 몰아쉬었다.
‘진짜, 이러다가 제 명에 못 죽지 내가.’
이미 편히 죽지 못하게 됐음을 안다.
새삼 든 생각에 라니엘은 쓰게 웃었다. 호흡을 가다듬으며 라니엘은 눈을 감았다. 조금 전 보았던 광채들을 떠올렸다. 자신이 길러 낸 제자들이 보인 광채를 라니엘은 곱씹는다.
웃을 상황이 아님에도 웃음이 나온다.
자신을 보며 종종 웃음을 흘리던 스승님을 지금이라면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엷은 미소를 흘리던 라니엘이 콜록, 컥 하고 마른기침을 뱉었다. 라니엘은 제 입가를 가린 손바닥을 보았다.
장갑에 검붉은 피가 한 움큼 묻어있다.
쯧, 하고 혀를 차며 라니엘은 장갑을 벗어 아무 곳에나 던져두었다. 그렇게 벽에 기대어 숨을 가다듬고 있자니 인기척이 느껴졌다.
“라니아 교수님?”
아이들이 올라오고 있다.
라니엘은 그쪽으로 걸어가 보려다가, 괜히 비틀거리다 넘어질까 봐 그냥 벽에 기대어 서 있기로 했다. 그렇게 기다리니 자신을 발견한 칼트와 아이들이 이쪽을 향해 걸어왔다.
“왔냐?”
라니엘은 손을 들어 그들을 맞이한다.
“···괜찮으십니까?”
“괜찮아. 괜찮아.”
척보기에도 심각한 상태이나, 제자들 앞에서 라니엘은 허세를 부리며 괜스레 웃음을 지어 보인다. 온몸에 힘을 쥐어짜네 한 걸음 내디딘 라니엘이 라크와 벨노아의 목에 제 팔을 감았다.
“특강의 보람이 있지? 그치?”
내가 좀 잘 가르치긴 해.
그리 장난스레 속삭이며 라니엘은 라크와 벨노아에게 기대어 선다. 학생들이야 라니엘의 장난기 가득한 농담에 웃음을 흘리지만, 칼트만큼은 웃지 못한다.
트래커(Tracker).
추적자로서의 재능을 지닌 칼트의 특기는 인간관찰이다. 칼트의 눈에는 식은땀이 맺힌 라니엘의 이마가, 자꾸만 흔들리고 감기는 흐릿한 라니엘의 눈동자가 들어온다.
“···슬슬 정리합시다.”
표정을 딱딱하게 굳힌 칼트가 학생들에게 말했다.
“왕녀님, 먼저 내려가 보십시오. 밑에서 기사들이 기다리고 있을 테니.”
너희도마찬가지다.
그렇게 학생들을 내려보내고 나서, 칼트가 라니엘을 부축했다. 다리에서 힘이 풀린 라니엘은 칼트에게 업히다시피 부축을 받았다.
“하여간.”
칼트가 쓰게 웃었다.
“허세 부리는 건 여전하십니다.”
“새끼, 이럴 때만 눈치 좋아서는.”
“제가 선배님하고 하루 이틀 일합니까? 척 보면 척 아니겠습니까.”
칼트가 한숨을 내쉬었다.
“힘드십니까?”
“어. 뒤지게 힘들다. 진짜로.”
“그래 보입니다.”
“아는 새끼가 왜 물어봐?”
칼트는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라니엘은 짧게 숨을 내뱉으며 말했다.
“그래도, 마음은 가볍네.”
“···가볍다니?”
“그 애들 보니까 참 잘 키웠단 생각이 들어. 어느새 저렇게까지 컸나 싶고.”
그러니까.
“쪼개고 쪼개어 쓴 내 1년이, 아깝지 않다는 생각이 든다. 참 잘 썼어.”
그 사실이 뿌듯하다.
아플리아에 온 것은 정말로 옳은 선택이었다고, 그리 생각할 수 있게 되어서 라니엘은 기쁘다. 스승으로서의 웃음을 흘리는 라니엘을 칼트는 온전히 이해하진 못한다.
“그렇습니까.”
“그런 거지. 너도 시간 나면 제자나 하나 키워봐라. 이게 생각보다 되게 뿌듯하다니까? 애들 굴리는 맛도 좀 있고···.”
“제자 키워도 선배님처럼은 안 키울 겁니다.”
“뭐 임마?”
“저는 선배님과 달리 인간의 마음을 가진···.”
“허, 이 새끼 이거 내가 못 때린다고 아무 말이나 하는 거 봐라.”
라니엘이 피식 웃었다.
칼트 또한 피식 웃었다.
“수고하셨습니다. 선배님.”
“너도 수고했다.”
그렇게 둘은 마탑의 아래로 내려갔다.
마탑의 바깥에는 수많은 이들이 모여있다. 라니엘의 등장에 모여들었던 기사들이 환호성을 내지른다. 기사들은 연달아 라니아 반 트리아스의 이름을 입에 담았다.
영웅, 왕도를 구한 영웅···.
그 칭송을 들으며 라니엘은 웃어 보인다.
지켜냈다. 헛된 죽음을 만들지 않았다.
저들이 버텨낸 시간이 가진 가치는 훼손되지 않았다. 강박증에 가까운 사고방식이나, 그 사실을 알고도 그런 사고방식밖에 불가능한 라니엘이다.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까.
그렇게 고민하던 라니엘의 귓가에 누군가의 목소리가 맴돌았다.
「정말 멋진 일 아니겠습니까.」
언젠가 갈라할이 중얼거렸던 말.
「동화 속 영웅이 될 수 있다는 건, 정말 멋진 일이지 않겠습니까.」
그때 갈라할이 지었던 표정이 떠오른다.
그 티 없이 맑은 미소가 떠올라, 라니엘은 무심코 갈라할과 같은 웃음을 지어 보였다.
“아하.”
라니엘은 갈라할처럼 웃었다.
기사들의 환호성이 울려 퍼졌다.
3.
사건은 일단락됐다.
왕도의 중심에서 벌어진 사건인 만큼, 이 사건이 불러온 여파는 거대했다.
칼트와 왕녀를 비롯한 이들의 증언으로 잿빛 마탑의 무고함은 입증되었으나, 잿빛 마탑은 뒷수습으로 바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그곳에서 영웅으로서 두각을 드러낸 이들 또한 마찬가지였고.
이미 가더(Guarder)라는 이례적인 직책을 맡게 된 칼트에게, 왕가는 더 무엇을 내려야 할지 고민하느라 머리를 싸매야 했고··· 칼트가 아니더라도 그 자리에서 공을 세운 이들에겐 너나 할 것 없이 큰 보상이 따랐다.
그렇게 사건은 마무리되어간다.
시간은 흐르고 흘러, 일상으로 복귀할 시간이 다가왔다. 그날도 라니아는 평소와 다를 바 없는 일상을 보내고자 한다. 아침 해가 떠오를 무렵 침대서 일어나 하루를 시작하는 것.
가볍게 몸을 씻고, 가벼운 식사를 한 뒤 출근할 준비를 한다. 그 일상적인 과정을 반복하고자 라니아가 침대에서 일어나려한 순간이다.
“······.”
라니아는 멍하니 눈을 깜빡였다.
오늘따라 시야가 흐릿하다.
조금 지나면 괜찮아지겠지. 그리 생각하며 라니아는 눈을 몇 번 깜빡이며 침대에서 일어섰다. 그렇게 한 걸음, 다시 한 걸음. 세 번째 걸음을 내디디려는 순간 라니아의 발이 꼬였다.
쿵, 쿠당탕!
라니아가 바닥에 쓰러졌다.
“라니아, 괜찮느냐?”
방 바깥까지 울려 퍼진 요란한 소리에 놀란 로셀이 방문을 열고 들어왔다. 그렇게 문을 열고 들어선 로셀은 무심코 숨을 헛삼킨다.
“아, 스승님···.”
바닥에 주저앉은 채 라니아는 몽롱한 눈동자로 로셀을 올려다보았다. 그녀는 손을 무릎 위에 축 늘어트리고 있었는데, 그 손에 피가 고여있다.
후두둑.
라니아의 눈에서, 입에서, 코에서 검붉은 피가 흐르고 있다. 흐른 피가 툭, 투욱 하고 그녀의 새하얀 잠옷에 핏방울을 찍었다. 핏자국이 번진다.
“···라니아?”
털썩.
라니아가 옆으로 고꾸라졌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