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eat the Hero Party RAW novel - Chapter 362
〈 362화 〉 재앙, 그리고 용사(5)
* * *
몇 년 전, 마왕을 묶어두기 위해 라니엘은 별과 거래했다. 그날 그녀는 수명의 절반을 바쳐 막대한 양의 별빛을 제 영혼에 담았다.
「거래한다.」
그때 라니엘이 손에 넣었던 것은, 역대 용사 중 가장 강한 출력을 지녔다는 카일의 별빛조차 아득히 능가하는 양의 별빛이다. 현자라 불리던 마법사가 제 삶을 모조리 불태울 각오로 손에 넣은 힘은 그야말로 전능에 가깝다.
범람하는 별빛.
찬란히 빛나는 영웅의 모습.
그것을 카일은 제 눈에 아로새겼다.
저것이야말로 영웅이라고.
그 어떠한 적의 앞에서도 물러서지 않는 저 모습이야말로 자신이 꿈꾸던 영웅이라고, 카일은 생각했다. 그 모습을 제 눈에 아로새겼다.
그렇기에 카일이 떠올리는 영웅이란.
가장 완벽한 이상이란, 그날의 라니엘이다.
‘···어지간히도 인상적이었나 보네.’
라니엘은 헛웃음을 흘렸다.
자신에게 주어진 별의 무구는 천칭(??)이다. 허나 그 형태는 상징적인 것에 불과하다고 그녀는 생각했다. 라니엘이 바란 것은 카일이 꿈꾸던 영웅이 되는 것. 그리고 영웅을 해석함에 있어 그녀의 주관 또한 포함되었다.
영웅이란 스스로를 희생하는 이.
대가를 짊어지고 앞으로 나아가는 이.
그렇기에 천칭(Balance)이리라.
별의 무구로 만들어진 천칭이 요구하는 것은 과거와 같은 수명이 아니지만, 무언갈 ‘바친다’는 행위가 중요한 것이라고 라니엘은 여겼다. 마법사인 자신에게 참 어울리는 무구지 않은가.
언제나 그래 왔듯이.
그녀는 대가를 지불했고 거래는 성립됐다.
별의 무구가 행하는 것은 강화가 아닌 재현이다. 마왕을 상대했던 그날의 재현. 허나 그날과 완전히 같지는 않으리라. 많은 시간이 흘렀고, 그 시간을 라니엘은 허투로 보내지 않았으니까.
힘에 휘둘렸던 그때와는 다르다.
힘을 견디지 못하고 무너졌던 그때와는 다르다.
용사가 된 지금 그녀는 이 막대한 양의 별빛을 견딜 수 있다. 몸에 무리가 가는 건 마찬가지이지만, 그날처럼 무너지지는 않으리라.
···바라는 것은 승리를 위한 수단.
땅을 박차고 질주하며 그녀는 떠올렸다.
그날 자신이 마왕의 발을 묶기 위해 사용했던 것이 무엇인지. 그녀를 휘감은 백금색의 입자가 곧장 그녀의 생각에 반응했다.
챠르륵.
익숙한 소리가 라니엘의 귀에 울렸다.
라니엘은 제 손에 감긴 것을 보았다.
그것은 별의 무구가 아니다. 결코 부러지지 않는 무언가도, 결코 꺾이지 않는 용사의 상징도 아니다. 하지만, 이것은 수년 전에도 마왕을 상대하기 위해 라니엘이 불러냈던 것이다.
상대가 마왕이라면.
그늘을 품은 존재라면.
이것은 곧 별의 무구나 마찬가지다. 손에 감긴 백금색의 사슬을 보며 라니엘이 웃었다. 웃으며 생각했다. 이제야 좀 해볼 만 하겠다고.
2.
재앙이 된 이후로도 성장을 거듭한 결과, 조금 더 빠르고 조금 더 효율적으로 움직일 수 있게 된 카일이다. 라니엘이 공간을 터뜨리며 달리듯, 카일 또한 공간을 일그러트리며 질주했다.
부릅 뜬 눈동자.
한계까지 곤두세운 초감각.
다가온 라니엘을 향해 카일이 검을 휘둘렀다.
공간을 찢어발기며 밀려드는 검격. 하지만 라니엘은 그 검을 피할 생각이 없어 보인다. 회피를 위한 움직임을 보이기는커녕, 그녀는 오히려 한 걸음 더 앞으로 내디뎠다.
막을 방법이 없을 텐데, 어째서?
그런 의문도 잠시, 카일은 뻗어오는 라니엘의 손아귀를 보았다. 그 손아귀에 무언가 감겨 있었다. 백금색으로 빛나는 사슬이었다.
카아아아아아아아아앙!
쇠와 쇠가 맞부딪치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닿는 모든 것을 베어내던 카일의 검이 처음으로 막혔다. 쇠사슬이 감긴 손으로 라니엘은 카일의 검을 움켜쥐었다. 카일의 눈이 크게 뜨였다.
베이지 않는다. 끊어지지 않는다.
붙잡힌 칼끝에서 검기를 방출하려고 하나, 그보다 먼저 라니엘이 움직였다. 앞서 카일이 라니엘의 손목을 붙잡고 칼을 휘둘렀듯이, 라니엘 또한 카일의 검을 붙잡은 채 한 걸음 더 앞으로 파고들었다.
쿠웅!
땅이 뒤흔들린다.
쩍, 쩌적하고 바닥에 금이 내달렸다.
찰나의 순간 카일은 라니엘의 움직임을 읽지 못했다. 초인의 동체시력으로도, 초감각으로도 읽지 못할 만큼의 가속(??). 공기가 터지는 소리가 뒤늦게 카일의 귓가에 메아리쳤다.
공기를 찢으며 주먹이 다가왔다.
분쇄(Smash).
카일의 심장에 라니엘의 주먹이 닿았다.
물리적인 충격이 먼저 엄습하고, 잠깐의 틈을 두고 충격파가 카일의 몸을 뒤흔들었다. 일전과는 비교가 안 될 정도의 충격파다. 카일의 몸이 충격을 견디지 못하고 날아가려는 순간이다.
챠르르륵!
사출된 사슬이 공중에 뜬 카일의 몸을 휘감았다. 사슬의 끝을 움켜쥔 것은 라니엘이다. 주먹을 휘두른 자세 그대로, 라니엘이 한 바퀴 돌며 사슬을 잡아당겼다.
“···!”
끌려들어 간다.
끌려들어 간 곳에는 잿가루를 움켜쥔 라니엘이 있다. 끌려들어 가면서도 카일은 몸을 비틀어 칼을 휘둘렀다. 검의 초인답게 완벽한 일격이나···.
카아아아아앙!
카일과 라니엘 사이에 돌연히 나타난 수십 줄기의 사슬이 그 검격을 막아냈다. 방출되는 검기마저 막아내진 못한 채 사슬이 끊어졌으나, 애초에 사슬의 역할은 거기까지다.
끊어진 사슬이 백금색의 입자로 변했다.
변한 입자는 틱, 티딕 소리를 내며 카일의 몸에 달라붙었다. 마치 잿가루와 같은 형상을 띄는 백금색의 입자는 카일의 망막에도 달라붙었다.
점화(ignite).
눈앞에서 작은 불똥이 튀었다.
직후, 카일의 시야가 새하얗게 물들었다. 굉음과 함께 밀려드는 열기, 일대를 후려치는 섬광. 주문에 휩쓸린 카일이 바닥을 굴렀다. 눈동자가 증발해 앞을 볼 수 없게 된 카일은 감각에 의지해 마구잡이로 검을 휘둘렀다.
그 검격은 날카로우나, 라니엘에게 닿을 만큼 날카롭진 않다. 검을 휘두르는 와중에도 기척은 한순간에 가까워졌다.
재생을 마친 카일이 눈을 뜬 순간 보이는 것은 푸른색이었다. 흐릿한 시야에 담기는 것은 오직 푸른색뿐. 그것이 코앞까지 다가온 라니엘의 눈동자라는 사실을, 라니엘이 자신의 목을 움켜쥐었단 사실을 카일은 뒤늦게 이해했다.
콱.
그녀가 카일의 목을 움켜쥔 순간, 그녀의 손아귀에 휘감겨있던 사슬이 카일과 그녀의 손아귀를 한데 묶었다. 묶인 사슬의 안에서 라니엘의 손이 백금색으로 점멸했다.
재는 재로(Ashes to Ashes).
사슬이 크게 출렁였다. 옭아맨 사슬의 틈새에서 백금색의 섬광이 점멸했다.
콰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앙!
굉음과 함께 카일의 목이 꺾였다.
살점과 근육이 모조리 날아갔다. 차오르는 그늘이 간신히 카일의 목이 떨어지는 것을 막아냈지만, 폭발은 한 번으로 끝나지 않는다. 미친 듯이 피어오르는 백금색의 입자는 몇 번이고 새로운 섬광을 낳았다.
쿵, 쿠우우웅!
묶이지 않을 그늘을 묶은 채 라니엘은 몇 번이고 주문을 난사했다. 물론 그녀의 손 또한 멀쩡하진 않다. 사슬로 묶인 그녀의 손 또한 살갗이 날아가고 새하얀 뼈가 고스란히 드러났다. 그 뼈마저 끊어지지만, 곧장 재생한다.
이미 상식의 범주를 넘어선 싸움이다.
그러나, 순수한 재생으로만 따지면 밀리는 것은 라니엘이다. 거듭되는 폭발 속에서 카일이 검을 휘두르려 하고 있었다. 쯧, 하고 혀를 차며 라니엘이 사슬을 풀며 카일을 걷어찼다.
끽, 끼기긱.
바닥을 몇 바퀴 구르며 일어선 카일의 심장에선 손아귀가 쏟아져 나오고 있었다. 망가진 카일의 몸을 손아귀는 짜맞추고, 다시 조립하고 있다. 마치 인형을 고치듯이.
그리곤 스겅.
라니엘이 고개를 젖혔다.
한순간 날아든 검격에 잘려나간 머리칼이 허공에 나부꼈다. 라니엘이 눈살을 찌푸렸다. 조금 전보다 더욱 빨라져 있었다.
“···돌겠네, 진짜.”
라니엘이 꾸욱, 입술을 깨물었다.
당장의 육체 능력은 자신이 우세하다곤 하나, 이 상황이 언제까지고 이어질 것 같진 않았다. 카일은 이 속도마저 따라오려 하고 있다.
그렇다면.
‘단기간에 결전을 봐야겠지.’
따라오기 전에 승부를 낸다.
성장하기 전에 결판을 낸다.
라니엘이 땅을 박차고 달렸다. 하지만 처음부터 온전히 가속하진 않았다. 카일이 검을 휘두르려는 순간에 맞춰 라니엘이 땅을 내려찍었다.
터져 나오는 백금색의 입자, 찰나의 가속.
공기가 터지며 라니엘이 카일의 후방에 미끄러지듯 나타났다. 그녀가 지나간 길에 챠르륵, 소리를 내며 사슬이 뒤따랐다. 카일이 다시 등을 돌리며 검을 휘두르나, 검격이 완성되기 직전 라니엘은 또 한 번 카일의 시야에서 사라졌다.
챠르륵!
카일이 검을 휘두르는 순간에 맞춰 라니엘은 몸을 가속했다. 시야의 사각으로 파고들기를 반복했다. 그 짓을 몇 번이나 반복했을까.
챠륵, 챠르르륵!
카일의 주변에는 거미줄처럼 사슬이 펼쳐져 있었다. 검격이 닿지 않자 카일은 칼끝을 낮게 끌었다. 땅과 수평을 이루는 도신. 그 자세를 잡는 순간만큼은 카일은 라니엘을 압도했다.
역천(??)의 검.
섭리를 가르는 검을 카일이 펼치려는 순간이다. 스팡, 하고 공기가 터지는 소리와 함께 라니엘이 카일의 옆을 스쳐 지나갔다.
챠륵.
그녀가 팔을 휘둘렀다.
사방에 그물처럼 펼쳐졌던 사슬이 한순간에 라니엘을 향해 모여들었다. 그 경로에 있는 카일의 몸을 사슬이 옭아맸다. 그 사슬마저 끊어내며 카일은 검을 휘두르려 하였으나···.
재구축(Rebuild).
검이 선(?)을 그으려는 순간 땅이 푹 꺼졌다. 중심을 잃은 카일이 흔들렸고,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라니엘이 온 힘을 다해 사슬을 잡아당겼다.
카일의 팔이 흔들렸다.
팔이 흔들렸으므로 칼끝이 흔들렸다.
칼끝이 흔들렸으니, 그 기술 또한 흔들린다.
키이이이이이이잉!
역천의 검이 뒤흔들렸다. 정렬되지 않은 검기가 사방으로 흩뿌려졌다. 기둥이 무너져내리고, 하늘로 치솟아야 하는 잔해들이 땅으로, 옆으로, 사방으로 제멋대로 내던져졌다.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이 제멋대로 뒤집혔다.
중심을 잃었기에 카일 조차 그 흐름에서 자유롭지는 않다. 혼돈 속에서 카일이 눈을 부릅떴다. 모든 게 제멋대로 뒤섞이는 혼돈 속에서, 흔들리지 않는 존재가 있었다.
이제는 반대야, 개자식아.
그렇게 말하듯이 사슬로 제 몸을 고정한 채 땅을 디디고 선 라니엘이 웃음을 흘렸다. 그녀가 제 양 손바닥을 맞부딪쳤다. 백금색의 입자가 정렬되며 기이한 회로를 그렸다.
그리곤, 번쩍.
방향감각을 상실한 상태에서 카일은 보았다.
해가 떠오르지 않아야 할 마경에, 해가 보이지 않을 지하에 거대한 태양이 떠오르는 것을. 시야를 가득 채우는 백금색의 태양을.
화륵.
터져 나오는 열기에 카일이 눈을 부릅떴다.
저것은 위험하다고 본능이 경고하고 있다. 공중에서 카일이 검을 휘두르려 했으나, 그렇게 두지는 않겠다는 듯 라니엘이 땅을 내려찍었다.
중력장(Graviton).
검기에 휩쓸려 허공에 떠올랐던 것들이, 나부끼던 흙먼지를, 공중에서 자세를 잡던 카일을 거대한 압력이 찍어 눌렀다. 잔해들과 함께 카일이 바닥에 처박혔다.
범위 특정, 위력 증폭.
중력이 찍어누르는 범위가 카일의 몸으로 좁혀지고, 그만큼 압력이 늘어났다. 카일이 삐걱이며 몸을 일으키려 하자 라니엘은 발을 굴렀다.
대격변(Cataclysm).
재구축(Rebuild).
땅이 무너진다. 무너졌던 것들이 완전히 새로운 형태로 재구축됐다. 원형의 벽이 카일을 가둔 채 솟아올랐다. 라니엘이 손가락을 까딱이자 벽에서 사출된 사슬이 카일의 몸을 옭아맸다.
원형의 벽.
벽안에 거미줄처럼 얽히고설킨 사슬.
사슬이 카일의 움직임을 조금이나마 잡아두는 순간, 라니엘은 제 양손을 깍지꼈다. 스톡된 회로가 모조리 불타올랐다.
주문 다발(SpellBunch).
천벌(Judgment).
청백색의 섬광이 번뜩였다.
뒤늦게 콰르르릉! 하고 천둥이 치는 소리가 일대를 뒤흔들었다. 카일을 가두어둔 벽 안에서 섬광이 연달아 번뜩였다. 청백색의 번개가 카일의 몸을 후려쳤다.
···본래라면 카일은 주문의 영향으로부터 자유롭다. 카일의 몸에 담긴 그늘이 주문에 저항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 라니엘이 펼치는 주문에는 막대한 양의 별빛이 담겨있다.
콰릉!
상상을 초월하는 출력 앞에 그늘의 저항마저 찢어지고 만다. 번개에 지져진 카일의 몸이 새까맣게 타들어 갔다. 그늘이 그 몸을 회복시키려 하나, 카일을 옭아맨 사슬을 따라 잔류한 번개가 카일의 몸을 지속적으로 붕괴시켰다.
부러진 카일의 팔을 붙잡고 있던 그늘의 손아귀가, 처음으로 떨어져 나갔다. 카일이 검을 놓치고 말았다. 검을 놓친 순간, 그늘이 몸을 놓아준 순간 카일은 몸이 가벼워짐을 느꼈다.
“······.”
허공을 맴도는 검을 카일은 보았다.
그리고, 자신을 가둔 벽을 모조리 녹여버리며 다가오는 거대한 태양 또한 보았다. 거대한 태양이 닿는 모든 것을 증발시키며 추락하고 있었다.
태양이떨어진다.
떨어지는 태양에 반응하듯, 천벌로 한껏 마나를 머금은 사슬이 새하얗게 점멸했다. 불길을 기다리는 잿가루처럼 틱, 티딕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수십, 수백 가닥의 사슬은 잿가루.
떨어지는 태양은 사슬에 불을 붙일 점화다.
지금 라니엘이 선보일 수 있는 최선의 일격이며, 이 일격은 과연 카일에게도 위협적이다. 카일은 온몸이 떨림을 느꼈다. 전투가 시작된 이후 처음으로 위기를 직감했다.
다가오는 죽음.
느끼는 것은 두려움.
두려움 속에서 카일은 허공을 맴도는 칼을 보았다. 칼을 향해 카일은 손을 뻗었다. 부러진 그늘의 팔이 아닌 인간의 팔을.
콱.
인간의 팔로 카일은 검을 쥐었다.
카일이 검을 쥔 순간 태양이 새하얗게 점멸했다. 사방에 흩날리는 잿가루가 점멸했다. 거대한 힘의 격류가 일대를 휩쓸려는 순간이다.
후웅.
카일이 검을 휘둘렀다.
휘두른 칼끝은 가볍다. 가볍되 흔들리지 않는다. 흔들리지 않기에 무엇보다도 무겁다. 그늘에 파묻혔다 한들 그 경지가 퇴색되는 일은 없다.
카일은 검사였다.
한 자루의 검이 있다면 벨 수 없는 것은 존재하지 않았다.
3.
떨어지는 태양을 보며 라니엘은 승리를 직감했다. 쓸 수 있는 모든 수단을 쏟아부었다. 카일의 움직임을 예상했으며, 카일보다 한발 앞서 움직였고, 카일을 유도해 궁지로 몰아넣었다.
최대규모의 주문.
밀려들 충격에 대비해 라니엘이 팔을 들어 올리려는 순간이었다. 서걱, 하고 울려선 안 될 소리가 라니엘의 귓가에 메아리쳤다.
투확.
라니엘이 눈을 크게 떴다.
태양이 폭발하는 순간, 잿가루가 모조리 폭발하려는 그 순간 한줄기의 선이 폭발을 갈랐다. 허나 완전히 가르지는 못했다. 세차게 점멸한 태양은 기어코 폭발했다.
콰아아아아아아아아아앙!
굉음과 함게 일대가 뒤흔들렸다.
몰아치는 열기와 함께 땅이 치이이익, 소리를 내며 증발했다. 터져 나오는 충격파에 연신 땅이 뒤흔들리고 공기가 거세게 흔들렸다. 그 혼란 속에서 라니엘은 분명히 들렸다.
서걱, 하는 소리를.
서걱, 계속해서 울려 퍼지는 절삭음을.
일대를 후려치는 열기가 순식간에 걷히기 시작했다. 충격파가 잘려나가기 시작했다. 흔들리던 땅에 검흔이 난잡하게 새겨지기 시작했다.
마지막으로 촥.
한줄기의 검격이 라니엘의 옆을 스치고 지나갔다. 직후 바람의 방향이 뒤바꼈다. 충격파가 완전히 걷히고, 열기마저 걷힌 그곳에 카일이 서 있었다.
“······.”
그늘에 붙잡힌 오른팔을 축 늘어트린 채, 왼손으로 검을 쥔 카일이 천천히 칼끝을 들어 올렸다. 그 칼끝은 라니엘을 향했다.
정상이 아닌 상태다.
태양을 갈랐다곤 하나, 완전히 가르지는 못했다. 특대의 주문을 몇 번이고 몸으로 견뎌낸 카일의 육신은 붕괴하고 있다. 그 붕괴를 막는 것만으로도 그늘은 바쁘다.
더는 카일의 몸이 회복되지 않는다.
붕괴하고 있는 카일의 몸은 작은 충격에도 허물어져 일어설 수 없게 될 것이다.
‘···저런 몸으로는 검을 휘두를 수가 없을 텐데.’
눈을 가늘게 뜬 라니엘은 그렇게 생각했다.
저런 몸으론 조금 전과 같은 움직임을 보일 수는 없으리라. 하지만 어째서일까. 조금도 약해진 것 같지가 않다. 약해지긴커녕, 조금 전보다 더 날카로워진 듯한···.
핏.
“···!”
라니엘이 숨을 헛삼키며 옆으로 제 몸을 던졌다. 서걱, 하고 방금까지 라니엘이 서 있던 공간이 비스듬히 잘려나갔다. 그 검기는 일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날카롭다.
‘···미친.’
라니엘이 이를 악물었다.
조금도 방심할 수 없었다. 지금부터 상대해야 하는 것은 재앙이 아니다. 과거, 전인미답의 경지에 올랐던 최강의 검사 가니칼트 반 갈라트릭.
그와 같은 경지에 오른 검사다.
그를 증명하듯 카일이 다시 한 번 검을 휘둘렀다. 휘두르는 칼의 속도는 느리다. 검이 휘둘러지는 힘 또한 그늘의 손아귀로 휘두를 때와는 비교가 되지 않을만큼 약하다.
하지만.
그 끝에서 터져 나오는 검기는 그 무엇보다도 빠르다. 그 무엇보다도 날카로우며 무겁다. 라니엘이 뽑아낸 사슬을 가볍게 베어 가르며 다가온 검격이 라니엘의 어깨를 할퀴었다.
투확!
피가 분수처럼 터져 나왔다.
차오르는 별빛마저 검격은 끊어냈다. 벌어진 상처는 아물지 않았다. 이를 악문 채 라니엘이 땅을 내려찍었다.
재구축(Rebuild).
그녀가 발현시킨 주문이 카일이 발을 내디딘 땅에 닿으려는 순간이다. 카일이 가볍게 검을 휘둘렀다. 서걱, 하고 무언가 갈려나갔다.
주문이 불발됐다.
라니엘이 눈을 크게 떴다.
별빛으로 증폭된 주문이다. 스톡된 주문을 사용하기에 발현까지의 틈이 존재하지 않는 주문이다. 그러나, 카일은 베어냈다. 발현되지도 않은 주문을 마나의 흐름을 읽어 베어낸 것이다.
“돌겠네, 진짜.”
라니엘이 헛웃음을 터뜨렸다.
앞으로 일격이다. 만신창이인 카일에게 한방만 먹일 수 있다면 이 싸움은 끝난다. 기초 주문인 강타(Smite) 한 발만 꽂아도 카일은 움직일 수 없게 될 것이다.
그렇게 되면 계획을 이룰 수 있는데.
녀석을 인간으로 되돌릴 수 있을 텐데.
그 일격을 좀처럼 먹일 수 있을 것 같지가 않다. 라니엘이 이를 악물고 주문을 난사했다. 지금의 카일에게 다가가는 것은 위험하다고 직감이 경고하고 있었으므로.
서걱.
하지만 소용이 없다.
한 번 칼을 휘두르는 것만으로 발현하던 주문이 모조리 잘려나갔다. 불발한 마나의 잔재가 흩날리는 가운데 라니엘은 헛웃음을 흘렸다.
카일은 여전히 저곳에 있다.
저곳에 선 채 칼을 겨누고 있다.
이쪽으로 오라는 듯이. 이따위 주문은 통하지 않으니, 가까이서 결판을 내라는 듯이.
“빌어먹을 새끼.”
라니엘이 쓰게 웃었다.
챠르륵, 하고 그녀의 손에는 사슬이 감겼다. 라니엘은 자신에게 남은 시간을 계산했다. 한계에 도달한 것은 카일 뿐만이 아니다.
몇번이고 특대의 주문을 쏟아부었다.
재생을 믿고 몸을 혹사시켰다.
남은 시간은 한 줌에 불과했다. 한 줌의 모래가 떨어지면 강화는 풀리고 만다. 그렇게 되면 패배하는 것은 라니엘이다. 승리까지도, 패배까지도 단 한 걸음만이 남아 있었다.
라니엘은 앞을 보았다.
칼을 겨눈 채 호흡을 가다듬고 있는 카일이 있다. 그가 자리 잡고 선 곳은 검사의 영역이다. 다가가는 순간 베인다. 잘게 쪼개지고 말 거다. 그곳은 분명한 사지(死?)다.
사지를 향해 제 발로 걸어 들어가는 것.
미친짓이며 멍청한 짓이다. 그런 짓을 하는 이들을 세간은 우인(?人)이라 부르며 조롱하곤 한다. 하지만, 바보와 영웅은 언제나 한끝 차이인 법이다. 차이가 있다면···.
‘실패하느냐, 성공하느냐 그 차이겠지.’
영웅이란 불가능한 위업에 도전하는 자.
조롱받을지언정 사지로 기어들어가는 자.
탁.
라니엘이 걸음을 내디뎠다.
그 걸음이 향하는 곳은 언제나와 같다.
앞을 향해 라니엘은 나아갔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