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eat the Hero Party RAW novel - Chapter 371
이것은 단순한 실패의 흔적인가. 그게 아니라면 완성품을 만들어 낸 뒤 남은 실험의 흔적인가? 알 수 있는 것은 없었다. 라니아가 입술을 꾹 깨물었다.
“지랄 맞네.”
길게 한숨을 내쉬며, 공방의 더 깊은 곳으로 걸음을 내디디려던 순간이다. 칼트의 걸음이 멈췄다. 라니아의 걸음도 멈췄다. 두 사람은 정확하게 같은 순간 걸음을 멈춰 서서, 정확하게 같은 곳을 돌아보았다.
기척은 느껴지지 않는다.
살아있는 생물이라면 무조건 낼 수밖에 없는 숨소리가, 심장 박동 소리가, 그 어떤 기척도 느껴지지 않는다. 하지만 존재감만큼은 지워지지 않는다.
숨통을 틀어막고, 공기를 찍어누르는 위압감.
짙은 어둠 속에서.
싯푸른 안광이 번뜩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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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창!
유리가 깨지는 소리와 함께 어둠을 비추던 광구가 모조리 박살 났다. 완전한 어둠에 휩싸인 공방에 한줄기의 바람이 밀려들었다. 공방의 석문에 뚫린 구멍에서부터 공방의 깊은 곳으로 밀려드는 바람.
마치 짐승의 울음소리 같은 바람이었다.
“······.”
라니아도, 칼트도 입을 열지 않았다.
두 사람의 시선은 어둠에 잠긴 공방의 깊은 곳에 고정되어 있었다. 푸른 불꽃처럼 일렁이는 싯푸른 눈동자. 그 시선에서부터 느껴지는 거대한 기척.
···재앙의 기척이다.
거대한 존재감. 격이 다른 존재가 그 자리에 모습을 드러낼 때, 일대의 마나는 찌그러지듯 짓눌리곤 한다. 그와 같은 현상이 지금 일어나고 있었다.
‘배교자는 아니야.’
라니아는 확신했다.
배교자가 모습을 드러낼 때는 이런 기척을 내지 않는다. 짙은 피비린내와 함께 모습을 드러낼 때, 일대의 마나는 배교자를 피하듯 이리저리 흩어지고 만다.
죽음의 칼 또한 아니었다.
그 괴물이 나타났다면 마나는 뭉개지기보다는 베인 듯이 찢어질 테니까.
‘···처음 느껴보는 기척.’
그러니 이건 다른 재앙의 기척이다.
일대의 마나가 거대한 존재 앞에 복종하듯 무릎을 꿇었다. 바닥을 낮게 기는 마나는 기이했다. 기이한 흐름을 몰고 온 존재를 라니아는 응시했다.
그 존재 또한 라니아를 마주 바라봤다.
어둠 속에 숨은 푸른 안광은 미동도 없었다. 어둠 속에 감춰진 제 몸을 드러내지도 않았다. 그저 눈앞에 놓인 인간 둘을 바라보고 있을 뿐이다. 정적 속에서 투둑, 하고 무언가 떨어지는 소리가 났다.
천장에서 떨어진 돌 부스러기가 바닥에 닿았다.
정적을 깨는 작은 소음. 그 소음을 계기 삼아 스릉, 하고 칼트의 검이 움직였다. 라니아가 땅을 내려찍으며 주먹을 움켜쥐었다.
그리고.
쿠궁.
어둠 속에서 싯푸른 안광이 요동쳤다. 한순간 공기의 흐름이 뒤바뀌고 공방의 바깥에서부터 불어오던 바람의 방향이 뒤틀렸다. 공방의 깊은 곳에서부터 바깥으로 세찬 바람이 몰아쳤다.
불어온 바람에선 짐승의 누린내가 났다.
그리고, 인간의 냄새 또한.
2.
그것은 어둠 속에서 눈을 떴다.
별빛이 닿지 않는 땅, 버림받은 땅, 버려진 것들이 다시 한 번 버려진 땅에서 그것은 태어났다. 사방에는 죽음의 냄새가 가득했다.
그것은 깨달았다.
죽음에서 자신이 돌아왔음을.
영원해야 할 안식이 방해받았음을.
그 사실에 불쾌함을 느낀 건 잠시다. 두 번째 삶을 얻은 그것은 제 첫 번째 삶을 떠올렸다. 기억은 흐릿했으므로 제대로 떠오르는 것은 없었다. 기억나는 것이라곤 마지막 순간 보았던 찬란한 빛 뿐이다.
갈망했던 빛.
눈이 멀어 버릴 것 같은 빛.
아름답다고 여겼던 찬란한 섬광을 떠올리며 그것은 몸을 일으켰다. 죽어 쓸모없어진 것들을 끌어모아 산 것을 만들어낸 존재는 이곳에 없었다. 자신을 되살린 존재가 자신을 방치했으므로, 그것은 하염없이 걸었다.
어디로 향해야 하는가.
무엇을 쫓아야 하는가.
목적이 없다. 이성도 없다. 바라는 것이라곤 찬란한 빛 뿐이다. 그렇기에 그것은 왕이 아니었다. 한낱 짐승으로 추락한 그것은 방황했다. 무엇을 삼키고 무엇을 먹어도 채워지지 않는 허기에 짐승은 다시 자신이 태어난 곳으로 돌아왔다.
이곳에 무언가 있으리라 믿으며.
그리고, 짐승은 마주했다.
검(劍)을.
어둠 속에서도 은백색으로 빛나는 검광(劍光)을, 칼날이 부르르 떨리며 울리는 검명(劍鳴)을, 칼날 위로 피어오르는 검기(劍氣)를.
마지막으로, 검을 쥔 검사를 짐승은 보았다.
바라던 빛이 그곳에 있었다.
그 사실을 깨달았을 때 짐승은 달리고 있었다.
* * *
콰앙, 하고 공기가 터져나갔다.
거대한 신형이 공기를 가르며 질주했다.
드러낸 존재는 실패작들과 똑같은 모습을 가지고 있었으나, 구정물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살점이 있었고 가죽이 있었으며 털이 있었다. 실패작들에게서 느껴지지 않던 위압감을 그것은 지니고 있었다.
쿠웅.
눈을 부릅뜬 라니아가 땅을 내려찍으며 주먹을 내질렀지만, 그녀의 움직임보다 짐승이 더 빨랐다. 한순간 라니아를 상회하는 속도로 짐승은 그녀의 곁을 스쳐 지나갔다.
처음부터 짐승은 라니아를 노리지 않았다.
그것의 싯푸른 안광은, 터질듯한 근육은, 날카로운 발톱은 오직 칼트만을 향하고 있었으므로. 돌 바닥을 분쇄하며 돌진한 짐승이 칼트를 향해 팔을 휘둘렀다. 공기가 찢어지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
칼트가 숨을 헛삼키며 검을 휘둘렀다.
은백색의 검광과 짐승의 손톱이 맞부딪쳤고, 튕겨 나간 것은 칼트의 검이었다. 얼얼한 충격에 칼트가 눈을 부릅떴다.
‘무슨 힘이···!’
튕겨져나가는 검과 함께 몸을 빙글 돌리며 칼트가 검격을 이었다. 초인의 검(劍)이 날카로운 궤적을 그리며 짐승의 손톱과 다시 맞부딪쳤다.
카아아아앙!
쇠와 쇠가 맞부딪치는듯한 굉음.
이번에는 짐승의 손아귀 또한 밀려났으나, 칼트에게 무기는 한 자루의 검뿐인 것과 달리 짐승은 육체의 모든 것이 무기나 다름없었다.
투확.
짐승이 앞발을 내질렀다. 공기를 터뜨리며 다가오는 발차기에 칼트가 급히 검을 가져다 대었다. 카앙, 하는 소리와 함께 칼트의 몸이 공중에 붕 떴다.
“커흑!”
검으로 막았다곤 하나 충격이 완전히 상쇄되진 않았다. 피 섞인 숨결을 토하며 칼트가 이를 악물었다. 바닥을 몇 바퀴 구르며 일어선 칼트를 짐승은 곧장 추격하려 했지만···.
분쇄(Smash).
그녀가 그것을 내버려 둘 리가 없다.
한순간에 짐승을 따라잡은 라니아가 짐승을 향해 주먹을 내질렀다. 말아쥔 그녀의 주먹에서 섬광이 터져 나왔다.
콰아아아아아아아아앙!
굉음과 함께 충격파가 짐승을 덮쳤다. 땅이 뒤흔들리고 짐승이 몇 걸음 뒤로 밀려났다. 하지만 겨우 그뿐이다. 해골바가지를 한방에 박살 내는 주문이나, 짐승은 피 한 방울 흘리지 않았다.
키잉.
푸른 눈동자를 가늘게 뜰 뿐.
짐승이 발로 땅을 내려찍었다. 주먹을 움켜쥐고 자세를 낮추었다. 그 모습을 바라본 순간 라니아의 미간이 좁혀졌다.
“저게 뭔···?”
직후, 짐승이 주먹을 휘둘렀다.
마치 라니아를 흉내 내듯이.
인간의 두세 배는 되는 육체, 마수의 타고난 강골과 근육. 짐승의 몸이 수축하는 동시에 팽창했다. 공기를 터뜨리며 내질러진 주먹은 마나를 담지 않았음에도 마법과 같은 기적을 일으켰다.
콰아아아아아아앙!
짓쳐드는 풍압에 라니아가 이를 악물고 주문을 발현했다. 공방의 돌 바닥이 한순간에 뒤집히며 라니아를 밀어냈다. 그리하여 만들어진 틈. 짐승의 고개가 뿌득 소리를 내며 거칠게 돌아갔다.
짐승이 바라보는 것은 검사.
어느새 자세를 다잡고 자신을 향해 뛰어드는 검사를 바라보며 짐승이 제 손아귀를 쫙 펼쳤다. 버릇처럼 허공을 움켜쥐려던 짐승은 제 손에 들린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선 다섯 손가락을 일자로 폈다. 날카로운 짐승의 손톱은 한 자루의 검과도 같았다.
검과 검이 맞부딪쳤다.
하지만 조금 전처럼 밀려나진 않았다. 충돌의 순간 칼트가 검을 비스듬히 세웠다. 마수의 손톱을 흘려보내며 칼트가 검을 쳐올렸다.
스겅.
칼끝이 짐승의 팔뚝을 스치고 지나갔다. 짐승의 팔뚝에 검흔이 새겨지고 뒤늦게 검은 피가 터져나왔다.
‘얕다.’
칼트는 쯧, 하고 혀를 찼다.
아예 팔을 베어버릴 생각이었으나 상상 이상으로 짐승의 가죽이 질겼다. 칼이 깊게 들어가지 않았기에 새긴 상처 또한 얕았다. 상처를 순식간에 회복한 짐승이 칼트를 향해 한 걸음 내디뎠다.
다시 한 번의 격돌.
이번에도 같은 방법으로 마수의 손톱을 흘려보내려던 칼트는 한순간 숨을 헛삼켰다. 마수의 움직임이 조금 전과는 다르다. 비스듬히 세운 칼날과 맞부딪친 순간 마수가 팔목을 비틀었다.
칼트가 선보였던 기술을 짐승은 모방했다.
짐승은 손톱을 비스듬히 세웠다. 그 손톱을 따라 칼트의 검이 카캉, 소리를 내며 하늘로 치솟았다.
유도당했다, 역으로.
칼트가 이를 악물고 검의 궤도를 다시 비틀어 휘둘러지는 짐승의 손톱을 쳐냈다. 손아귀가 얼얼했다. 억지로 궤도를 비튼 탓에 팔이 비명을 질렀다.
‘뭐야, 대체.’
몰아치는 짐승의 공격을 막으며 칼트가 신음했다. 이해할 수 없었다. 칼트가 수년에 걸쳐 완성한 기술을 눈앞의 짐승은 한순간에 모방했다. 마치, ‘이미 알고 있던’ 기술을 다시 떠올리는 것처럼.
캉, 카앙.
공방을 거듭할수록 짐승의 움직임은 더욱 빨라졌다. 더욱 정교해졌다. 마치 학습하듯이.
‘학습을 하는 마수···라고?’
인간의 두 세배는 될 법한 체구.
마수 특유의 회복력과 강인한 육체. 그 육체를 활용해 펼치는 기술은 가히 위협적이었다. 한 번의 공방이 오갈 때마다 칼트의 몸이 비명을 내질렀다.
“선배님, 빨리 좀!”
칼트가 소리를 질렀다.
직후, 한줄기의 섬광이 칼트와 짐승 사이에 떨어졌다. 빛 무리와 잿가루를 흩뿌리며 나타난 라니아가 짐승이 휘두르는 손톱을 향해 맨손을 내 뻗었다.
키이이잉!
초인의 검조차 밀어내는 손톱이지만, 짐승의 손톱은 라니아의 손을 떨쳐내지 못했다. 라니아의 손아귀에 휘감긴 사슬이 빛 무리를 토해내며 짐승의 손톱을 받아냈다. 쩍, 쩌억 소리를 내며 라니아가 딛고 선 돌 바닥이 갈라졌다.
뿌득.
짐승의 손아귀를 움켜쥔 팔을 라니아가 뒤로 잡아당겼다. 짐승의 거구가 한순간 앞으로 쏠렸고, 라니아는 빈손을 짐승의 가슴팍에 가져다 댔다.
사슬(Chain).
빈 손에서 뻗어나온 사슬이 짐승의 몸을 휘감았다. 짐승의 살가죽에 파고든 사슬이 시퍼렇게 점멸했다.
천벌(Judgment).
주문 다발(Spell-Bunch).
콰릉, 하는 소리와 함께 섬광이 내리꽂혔다.
응축된 번개 다발이 사슬을 타고 짐승의 몸을 지졌다. 막대한 양의 전류에 짐승의 살가죽이 검게 그을리고 마수의 몸에서 연기가 피어올랐다. 이마저 견딜 수는 없는지, 짐승의 몸이 크게 들썩였다.
치직, 치지지직.
잔류한 번개에 휘감긴 짐승은 마치 푸른 불에 타들어 가는 것처럼 보이기까지 한다. 연신 몸을 후려치는 충격에 견디지 못하고 짐승의 머리가 점점 낮아졌다.
콱.
충분히 낮아진 짐승의 머리.
그 머리에 뻗은 뿔을 라니아는 움켜쥐었다. 사슬로 무릎 꿇린 짐승의 머리를 뜯어내고자 그녀가 손을 들어 올린 순간이다.
움찔.
짐승의 몸이 크게 떨렸다.
직후 숙였던 고개를 짐승이 들어 올렸다. 같은 높이에 있는 라니아의 눈동자를 짐승이 보았다. 싯푸른 불꽃과 같은 눈동자가 번뜩이기를 한 순간.
투둑, 투두두두둑.
사슬이 모조리 끊어졌다.
짐승의 육체에서 연기가 피어오르고 상처가 순식간에 회복됐다. 그리하여 팽창한 짐승의 육체는 조금 전보다 더 거대하다. 그제서야 라니아는 깨달았다.
일부러 당해줬음을.
빈틈을 유도하기 위해서.
직후 짐승의 날카로운 손톱이 라니아의 눈동자를 향해 치솟았다. 라니아가 고개를 비틀며 짐승의 복부를 걷어차며 뒤로 물러섰다. 사슬을 모조리 끊어낸 짐승이 두 발로 땅을 디디고 섰다.
축 늘어트린 팔이 땅에 닿았다.
짐승의 아가리에서 새하얀 숨결이 밀려 나왔다. 라니아는 제 이마를 손등으로 문질렀다. 손톱에 할퀸 상처가 이마에 남아 있었다. 마수가 육체를 순식간에 회복하듯, 라니아 또한 상처가 한순간에 아물었다.
라니아가 눈을 가늘게 떴다.
짐승의 안광 또한 수축했다.
눈앞의 짐승이 ‘성공작’임을, 마수의 왕을 배교자가 되살려냈음을 라니아는 직감했다. 그리고 이 자리에서 배제해야 함 또한 확신했다. 각오를 다진 라니아가 제 심장을 꾸욱 누르며 중얼거렸다.
가속(加速).
3.
난장판이 된 공방의 내부.
칼트는 거친 숨을 내쉬며 바닥에 주저앉았다. 댕그랑, 소리를 내며 칼트의 검이 바닥에 나뒹굴었다.
“후욱, 후우우···.”
이마에 맺힌 땀방울을 닦아내며 칼트가 길게 숨을 내쉬었다. 바닥에 주저앉은 칼트의 시선은 앞을 향했다. 그곳에는 아직 땅을 디디고 선 라니아가 있었다.
뚝, 뚜욱.
라니아는 피가 흐르는 어깻죽지를 지혈하고 있었다. 칼트는 속으로 혀를 내둘렀다. 용사가 된 이후 그녀가 저렇게까지 부상을 입은 적은 없었으니까.
“대체··· 뭐였습니까?”
칼트가 숨을 몰아쉬며 질문을 던졌다.
조금 전 칼트는 보았다. 가속에 가속을 거듭한 라니아의 움직임과, 그 움직임에 반응하던 짐승의 모습을. 그리고 기어코 라니아의 어깨에 손톱을 박아 넣는 모습을 보고야 말았다.
“오래된 재앙.”
마수의 왕과 마주한 탓에 제약이 풀린 걸까.
라니아는 한숨을 내쉬며 말을 이었다.
“마수의 왕이라고 불리는 특이 개체다.”
“···마수의 왕?”
“수백 년 전에 있었던 존재라는데, 배교자 그 빌어먹을 년이 살려낸 모양이지.”
라니아가 팔을 가볍게 휘둘렀다.
철퍽, 하는 소리와 함께 바닥에 무언가 나뒹굴었다. 그것은 짐승의 오른팔이었다. 접전 끝에 라니아는 짐승의 오른팔을 뜯어냈고, 짐승은 제 오른팔을 미끼 삼아 라니아의 어깨에 손톱을 박아 넣었다.
“지랄 맞네.”
라니아가 신경질적이게 제 머리칼을 흐트러트렸다.
오른팔을 뜯어내긴 했지만 짐승은 놓쳤다. 가속하며 공방의 바깥으로 도망친 짐승은 절벽의 너머로 사라졌다. 인류의 땅이 아닌 마경의 깊은 곳으로.
“그래도 팔은 뜯었지 않았습니까. 덤으로 뿔도 하나 베어냈고.”
칼트가 바닥에 널브러진 뿔을 가리켰다.
나뭇가지를 닮은 뿔. 라니아와 짐승이 접전을 펼치는 가운데 칼트가 베어낸 것이었다. 그 뿔을 바라보며 칼트는 눈을 가늘게 떴다.
학습하는 마수.
때로는 제 몸의 일부를 버려 목적을 이루는 집념마저 지닌 짐승. 칼트의 직감이 경고했다. 하루빨리 이 짐승을 잡아 죽여야만 한다고. 그리고 비슷한 감상을 라니아 또한 느끼고 있었다.
“······.”
라니아는 말없이 자신이 뜯어낸 팔을 보았다.
그것은 오른팔 이었다. 본디 마수의 왕의 육체가 아닌 배교자가 덧대어 만든 ‘인위적인’ 육체.
···마수의 왕의 육신.
그 중 절반은 가니칼트의 몸을 만드는데 사용됐다. 마수의 왕에게 남은 것은 왼쪽 반신뿐이며, 조금 전 짐승 또한 남은 절반을 마수와 인간의 시체로 뒤섞어 메꿔둔 불안정한 상태였다.
하지만 무언가 위화감이 든다.
북부의 탑에서 보았던 기억.
카르디가 묘사했던 마수의 왕.
그것은 고고하며, 인간을 이해하고자 하며 대화가 통하는 인간과 같은 존재였다. 하지만 조금 전 상대했던 마수에게서 라니아는 그와 같은 감상을 느끼진 못했다. 자신이 상대한 것은 한낱 짐승이었다.
기술을 사용하며 학습을 한다 한들.
그것에게서 카르디가 말했던 고고함 같은 신비스러움을 라니아는 느끼지 못했다.
‘마수의 왕이라기보다는···.’
그저 짐승이다.
그러니, 저 짐승이 왕이 되기 전에 죽여야만 한다고 라니아는 생각했다.
* * *
으적, 콰직.
짐승은 마수를 물어뜯었다.
마경에서 살아가는 마수를 한 손으로 붙잡고, 발로 그 몸을 짓누르며 머리를 잡아 뜯었다. 아가리를 쩌억 벌려 마수의 머리를 씹으며 짐승은 생각했다.
맛이 없다.
이것에선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는다.
채워지지 않는 갈증에 짐승은 신음했다. 그저 배를 채우기 위해 마수를 씹어 삼키며 짐승은 또 다른 마수를 사냥했다. 자신이 사냥한 마수들의 뼈와 살점을 모아 짐승은 비어버린 오른팔에 붙였다.
뼈대를 만들고.
살점과 뼈를 이어붙여 팔을 만든다.
왜인지 모를 익숙함이 느껴지는 행위를 반복하며 짐승은 잃어버린 팔을 자신이 사냥한 것들로 채웠다. 채우며 짐승은 패배를 곱씹었다. 자신은 패배했다. 긍지를 잃고 도망쳤다. ‘긍지’가 무엇인지 알 수 없었지만 짐승은 불쾌함을 느꼈다.
어째서 패배했는가.
자신에겐 그것이 없었으니까.
그 검사가 쥔 예리한 칼날과 같은, 검(劍)이 자신에겐 없었으니까. 검에서 보았던 광채를. 자신이 바라던 찬란한 광채를 짐승은 떠올렸다.
검(劍).
그 하나의 단어만을 짐승은 떠올릴 수 있었다. 검(劍)을 떠올릴 때 만큼은 짐승은 인간이었다. 인간과 짐승의 냄새를 모두 가진 그것은 중얼거렸다.
“가, 니칼트.”
가니칼트 반 갈라트릭.
그 이름만이 짐승의 머리에 맴돌았다. 알 수 없는 증오와 질투 선망, 그리고 막연한 동경. 온갖 감정이 머릿속을 메꾸는 가운데 짐승은 신음했다.
갈증이 채워지지 않았다.
목이 타들어 가는 것만 같은 갈증 속에서 짐승은 떠올렸다. 자신의 마지막 순간을. 새하얀 눈밭 위에서 피 흘리던 자신의 모습을. 자신에게 검을 겨눈 한 인간과 그가 쥔 검의 모습을 떠올렸다.
자신이 새로이 태어난 곳에서 짐승은 광채의 정체를 확인했다. 자신이 바라던 막연한 빛을 인지했다.
그렇다면 자신이 죽은 곳에선 무엇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인가. 알 수 없었다. 그저 이 지독한 갈증이 채워지기를 바라며 짐승은 정처 없이 걸었다. 눈에 보이는 모든 마수를 무릎 꿇리며 앞으로 나아갔다.
짐승이 걸어간 길에는 죽음이 가득했다.
어느 순간부터 마수들은 짐승의 앞에 고개를 조아렸다. 겁에 질린 마수들 사이를 짐승은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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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티다는 설산의 깊은 곳으로 들어갔고, 라크는 반신반의한 채 그녀를 따라갔다.
‘기사들이 뒤졌을 때도 흔적 하나 찾지 못했는데?’
벨노아와 클로에가 북부에 찾아왔을 때, 두 사람은 기사와 함께 설산을 쥐잡듯이 뒤졌었다. 하지만 결국 기이한 흔적을 남긴 마수의 행방을 잡지는 못했다. 그건 전사들 또한 마찬가지였고.
북부에서 나고자라 설산을 제 앞마당처럼 오 다니던 전사들조차 발견하지 못했단 것은, 이 설산에 남은 흔적은 더 없다고 보는 게 옳았다.
하지만, 앞장서 걷는 나티다의 걸음에는 망설임이 없었다. 자신의 걸음이 향하는 곳에 무언가 있다고 확신하고 있는 걸음이었다. 그렇게 라크가 의문 어린 시선으로 나티다의 뒷모습을 흘겨보고 있자니, 나티다가 웃음을 흘리며 입을 열었다.
“피에 젖은 옷이 신경 쓰이시는 거라면, 그렇게 노려보지 않으셔도 됩니다. 저는 멀쩡하니까요.”
고개를 기울인 채 그녀가 말했다.
“이래 봬도 성녀입니다? 제가 쓰는 신성술이 다소 몸에 무리가 가긴 하지만··· 다 회복되니 쓰는 겁니다. 그렇게 걱정 안 하셔도 됩니다.”
“···예?”
“네?”
라크가 눈을 깜빡였다.
덩달아 나티다도 눈을 깜빡였다. 라크는 생각했다. 아무래도 눈앞의 성녀님께선 단단히 오해하고 계신 모양이라고.
“옷은 딱히 신경 쓰이지 않습니다.”
돌려 말하는 것을 못하는 라크다.
라크는 직설적으로 말했다.
“확신을 가지고 움직이시기에, 이 방향에 뭐가 있을지 생각했습니다.”
그 뿐이다, 라고 말하듯 라크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 말하는 라크의 표정에는 한 줌의 거짓도 느껴지지 않았다.
“어··· 정말요?”
“예.”
“옷이 피투성이가 됐는데··· 신경이 안 쓰이신다고요?”
“몸을 단련하다 보면 흔한 일 아닙니까?”
라크가 제 셔츠의 소매를 걷었다.
팔뚝에 새겨진 흉터를 툭툭 가리키며 라크가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자랑스럽다는 듯이.
“상처와 흉터는 전사의 자랑입니다.”
“아, 예···.”
나티다가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헛다리 짚었다는 사실을 깨달은 그녀가 머쓱하다는 듯 뒷목을 긁적이며 다시 걸음을 옮겼다. 그렇게 걷기를 한참, 나티다가 어느 절벽 앞에 멈춰 섰다.
깎아지른듯한 절벽.
절벽의 아래에는 떨어져 죽은 짐승의 시체들이 드문드문 보여왔다. 그것을 흘겨보던 나티다가, 절벽의 어느 벽면을 가리켰다.
“저기네요.”
라크가 눈을 가늘게 떴다.
나티다가 가리킨 방향, 절벽의 한 부분이 기이하게 돌출되어 있었다. 마치 돌로 입구를 틀어막은 것처럼. 알고 보지 않으면 알 수 없는 흔적이었다.
“···이걸 어떻게?”
“다 방법이 있습니다.”
나티다가 어깨를 으쓱이며 턱짓했다.
“갑시다. 저기에 흔적이 남은 것 같으니.”
그런데 이걸 어떻게 가야 하나, 그리 중얼거리며 나티다가 로브 속에서 밧줄 따위를 꺼내고 있을 무렵이다.
“잠깐 실례.”
라크가 나티다를 한 손으로 들어 올렸다.
당황한 나티다가 어어, 하고 소리를 내기도 잠시, 라크는 나티다를 제 어깨에 둘러멨다. 잠깐이나마 설렜던 나티다의 눈동자가 순식간에 차갑게 식었다.
“···공자님?”
“예?”
“보통 이럴 때는 좀··· 다른 방식으로 안아 들지 않습니까? 동화에선 그러던데.”
“이게 더 안전하지 않습니까.”
라크가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눈을 깜빡였다. 나티다는 한숨을 내쉬며 자신을 둘러멘 라크의 팔뚝을 툭툭 두들겼다.
“그래요, 갑시다. 가.”
탁, 하고 라크가 절벽의 끝자락에서 도약했다. 가벼운 도약이었고 착지 또한 부드러웠다. 한순간에 절벽을 넘어 돌출된 바위 앞에 멈춰선 라크가 나티다를 내려주며 허리춤에 손을 댔다.
빙글, 콰직!
매끄럽게 뽑아든 도끼로 바위를 찍었다.
제법 두꺼운 바위였으나 라크의 도끼에 찍힌 순간 바위는 마른 나뭇가지마냥 쩌억 하고 쪼개졌다.
“와오.”
짧은 감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