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eat the Hero Party RAW novel - Chapter 395
* * *
마수의 왕 바르타는 학습하는 존재다.
마수의 시야를 통해 수많은 정보를 수집하고, 정보를 바탕으로 학습하는 존재. 마치 인간과도 같은 그 존재에 대해 카르디는 몇 차례고 경고했다.
「주의해라. 그건 통제할 수 없는 변수니.」
“변수, 변수라···.”
라니엘이 한숨을 내쉬었다.
지도를 펼쳐놓은 채 그녀는 바르타의 위치를 계속해서 확인하고 있었다. 왜인지 모를 불길함을 지울 수 없었기에. 그렇게 지도를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을 무렵이다.
깜빡, 하고 바르타를 나타낸 점이 흔들렸다.
두어차례 깜빡인 점이 한순간에 툭 하고 꺼졌다. 라니엘의 미간이 좁아졌다. 바르타의 신호가 사라졌고, 잠시 뒤 신호가 나타난 곳은···.
검의 협곡, 갈라트릭의 인근이다.
라니엘이 눈을 부릅떴다.
제발 빗나가기를 빌었던 감이 들어 맞았다. 이따위 일이 어떻게 가능한지 고민하는 건 소용 없다. 지금 해야 할 것은 행동하는 것.
콱.
그녀가 곧장 로브를 두르고 장갑을 쫙 끌어내렸다. 테이블에 올려둔 아티팩트가 부르르 떨리기 시작했다. 칼트가 마도구를 활성화 상태로 옮겼다는 것.
몇 초뒤 게이트가 열릴 것이다.
게이트에 뛰어들 준비를 하며, 라니엘이 숨을 가다듬고 회로를 모조리 활성화 상태로 옮겼다. 게이트를 넘어서자마자 곧장···.
쩌억.
눈앞에 게이트가 열렸다.
라니엘이 이를 악물고 게이트를 향해 걸음을 옮기려던 순간이다. 게이트의 너머에서 무언가 번뜩이기를 잠시, 직후 세찬 섬광과 함께 무언가 밀어닥쳤다.
“······!”
콰아아아아아아아아앙!
밀려드는 것은 거대한 충격파.
굉음과 함께 천막이 찢어졌다. 막사 안에 놓여둔 물건이 이리저리 흩날렸다. 박살난 책상의 파편이 나뒹구는 가운데, 라니엘이 두 팔로 얼굴을 가린 채 몇 걸음 뒤로 물러섰다.
피어오른 흙먼지가 가라앉았을 때, 라니엘의 눈앞에는 게이트 대신 박살난 아티팩트가 나뒹굴고 있었다.
게이트가 박살 났다.
열린 공간을 닫아버릴 만큼의 힘에 의해, 강제로.
고요한 절삭음. 튀어 오르는 붉은 핏방울.
라크 반 그레이스는 보았다.
비스듬히 잘려나가는 게이트를, 게이트의 너머에 서 있던 나티다의 몸에 그어지는 선(線)을. 그 선이 그어지는 방향을 따라 핏줄기가 솟구치는 것을··· 라크는 보았다. 보고야 말았다.
투확.
나티다의 사제복이 붉게 물들었다.
솟구치는 핏방울과 함께 나티다의 몸이 천천히 앞으로 고꾸라졌다. 붉게 물든 옷. 흘러내리는 피. 쓰러진 채 미동도 하지 않는 나티다.
길게 늘어진 시간 속에서, 지금 이 순간 라크의 머릿속에 떠오르는 것은 그날의 풍경이다.
제 앞에서 죽음을 맞이했던 수많은 전사들. 피 흘리며 쓰러진 형제들의 모습. 기어코 자신이 지켜내지 못했던 이들의 얼굴이 라크의 눈앞에 어른거렸다. 그때도 지금과 같았다.
지키지 못한 것. 흘러내리는 피.
그리고, 그 끝에 있는 짐승.
라크의 고개가 휙 돌아갔다.
붉게 충혈된 눈동자가 노려보는 것은, 검을 휘두른 자세 그대로 멈춰있는 마수의 왕이다. 그날과 같은 싯푸른 눈동자. 마수의 왕 또한 라크를 바라보고 있었다.
시선이 교차한다. 서로가 서로의 존재를 인식한다.
그 순간 라크의 머릿속에서 무언가 뚜욱, 하고 끊어지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라크가 움켜쥔 성검이 거세게 흔들렸다. 흔들리는 성검의 상이 여러 개로 쪼개졌다 다시 합쳐지기를 반복한다.
바르타, 마수의 왕 바르타.
가열(Heating).
라크의 입가에서 증기가 새어나왔다.
반드시 죽여야만 할 대상을 향해 라크가 땅을 박차고 달려들었다. 그 어느 때보다 빠르게.
* * *
카아아아아아아아앙!
라크가 휘두른 검과 바르타의 검이 맞부딪친 순간 굉음이 울려 퍼졌다. 땅이 뒤흔들리고, 협곡의 잔해들이 이리저리 튀어 오르는 가운데 칼트는 이를 악물었다.
‘···빌어먹을.’
미친 듯이 날뛰는 라크의 움직임에 맞춰 칼트가 검을 휘둘렀다. 라크의 빈틈을 채우고 마수의 왕이 휘두르는 검의 궤도를 조금씩이나마 비틀었다.
캉, 카가가각!
그렇게 어떻게든 전투를 이어가고 있긴 하나, 칼트는 알고 있다. 언제까지고 이어갈 수는 없음을. 이래서는 결코 승기를 붙잡을 수 없다는 사실을.
밀린다, 계속해서.
위력에서도, 검술에서도, 신체능력에서도, 그 모든 게 밀린다. 눈앞에 있는 마수의 왕에게서 칼트는 죽음의 칼의 편린을 엿보고 있었다.
‘···휘두를 때마다 공간이 삐걱인다. 땅이 파헤쳐지고, 공기가 뒤흔들린다.’
단순히 힘으로 밀어붙이는 게 아니다.
배교자의 공방에서 맞이했던 한낱 짐승이었다면 승산이 있을지도 모르겠으나, 검(劍)을 쥐고 기술을 펼치는 지금··· 저 마수를 이길 수 있으리란 생각은 들지 않는다.
저건 마수가 아니다.
벽을 허문 초인이며, 미래를 보고 행동하는 검사다.
내다 본 몇 초 뒤의 미래가 끊임없이 변화함을 칼트는 느꼈다. 지금 이 순간 믿을 수 있는 것은 자신의 직감뿐이다. 하지만···.
“······.”
칼트는 말없이 라크를 바라봤다.
라크는 성장했다, 확실히.
학생 시절부터 두각을 드러냈던 소년이나··· 지금에 이르러선 완전한 궤도에 이르렀다. 엄연한 초인이며, 그 성장이 그리는 곡선은 가파르다.
‘지금 이 순간도···.’
마수의 왕이 검을 휘두르는 속도는 갈수록 빨라지거늘, 라크는 그것을 따라잡고 있다. 가열을 통한 가속. 마나를 활용한 움직임. 검격과 검격 사이에 발생하는 간극을 메우기 위한 보조 무장의 활용. 쓸 수 있는 모든 걸 써서 따라잡고 있다.
청년은 성장하고 있다. 가파르게.
타고난 재능, 직감, 특수성, 성장 속도.
칼트는 라크의 가치를 매겼다.
오랜 세월 전장에서 살아온 칼트다. 모든 인간의 목숨이 동등한 가치를 지니는 것이 아니라는 걸, 칼트는 잘 알고 있었다. 때에 따라 선택해야 했으니.
꾸욱.
칼트가 칼자루를 움켜쥐었다.
넓은 시야로 칼트는 전장을 파악했다. 지형, 도주 경로, 가능성, 그리고··· 쓰러져있는 나티다. 아직 나티다의 숨은 끊어지지 않았다.
아마도 게이트가 방어막이 되어준 덕분이겠지.
게이트의 뒤에 서 있던 나티다에겐 검격의 위력이 온전히 전달되지 않았다. 죽음에 이를 치명상이긴 하나, 나티다는 성녀다. 성녀의 회복력이라는 특수성을 감안하면 살아날 수 있으리라.
···무엇을 선택해야 하는가?
캉, 카앙!
검을 휘두르며 칼트는 생각한다.
그 누구도 버리지 않고 모두를 구해내는 것.
그런 것이 가능한 이를 세간은 영웅이라 부른다. 그런 영웅을 칼트는 알고 있다. 곁에서 오랜 시간 동안 보좌해 왔으니. 그렇기에, 칼트는 또한 안다.
자신은 그런 영웅이 되지 못한단 사실을.
칼트는 절대적인 강자가 아니다.
무언갈 구하기 위해선, 무언갈 포기해야 한다.
‘포기해야 할 것은 무엇인가. 선택해야 할 것은.’
칼트는 생명의 가치를 저울질했다. 칼트 자신의 목숨과, 라크의 목숨을 저울 위에 올려 두었을 때 저울은 라크의 쪽으로 기울었다.
당연한 일이다.
칼트는 검의 초인이다. 특별한 것 없는.
때에 따라 대체될 수 있는 인력이나, 라크 반 그레이스는 그렇지 않다. 최초의 성검을 쥐었으며 특별함을 가진 라크는 무엇으로도 대체될 수 없는 전력이다.
그렇기에 이 자리에서 버려야 할 것이 있다면···.
‘지랄 맞군.’
칼트가 헛웃음을 흘렸다.
판단은 마쳤다.
칼트는 선택을 내렸다.
2.
라크는 제 팔이 삐걱거림을 느꼈다.
검을 말아쥔 손가락이 흔들렸다. 어느 손가락은 부러졌고, 어느 근육은 찢어졌다. 검을 맞부딪칠 때마다 신체의 한 부분이 찢어지거나 터져 피가 흘렀다.
누적된 부상으로 라크가 비틀거린 순간.
라크의 칼끝이 흔들린 그 순간.
마수의 왕의 안광이 시퍼렇게 점멸했다.
바르타는 빈틈을 보인 사냥감에게 제 송곳니를 드러낸다. 한순간의 가속과 함께 바르타의 검이 라크의 검을 걷어냈다. 카아아앙! 소리를 내며 하늘로 쳐올려 진 라크의 검.
보이는 것은 빈틈.
쿠웅! 하고 바르타가 발로 땅을 내려찍었다.
땅이 뒤흔들리며 라크의 자세가 완전히 무너졌고, 칼자루를 움켜쥔 바르타의 손가락이 뿌득 소리를 냈다. 그 순간 라크는 보았다.
보이는 것은 몇 초 뒤의 미래.
눈앞의 바르타가 여러 개의 상(狀)으로 쪼개진다. 쪼개졌던 상이 하나로 겹쳐진 순간, 하늘에서 단두대가 떨어졌다. 시야가 붉게 물들었다.
내다보인 미래는 죽음.
라크가 몸을 비틀어 죽음에서 도망치려 하나, 그런 라크를 뒤쫓듯이 바르타의 검은 움직였다. 다가오는 죽음. 결국 라크가 제 팔 하나를 내줄 각오를 다진 순간이다.
미래에 은백색의 궤적이 끼어들었다.
카아아아아아아아아아앙!
라크의 앞에 끼어든 것은 칼트.
거대한 대검을 받아낸 순간 칼트의 눈에서, 코에서, 입에서 피가 흘렀다. 한 움큼 터져 나오는 피. 울려 퍼지는 것은 뼈가 부러지고 근육이 찢어지는 소리.
“———!”
괴성을 내지르며 칼트는 검을 비튼다.
기어코 바르타의 일격을 흘려보낸다. 라크의 몸을 찢어발기려던 검격은 땅에 내리꽂혔다. 쿠웅, 소리와 함께 땅이 뒤흔들리고 돌무더기가 하늘로 솟구쳤다.
그리하여 만들어진 빈틈.
그러나 칼트는 공격을 선택하지 않는다.
칼트가 뒤로 손을 뻗어 라크의 목덜미를 움켜쥐었다. 뒤를 돌아본 칼트가 피식, 웃음을 흘렸다.
“도망쳐라, 라크.”
그대로 칼트가 라크를 내던졌다.
나티다가 쓰러져있는 방향을 향해. 라크가 눈을 크게 뜬 채 칼트를 바라봤다. 라크를 내던진 직후, 칼트는 바르타를 향해 한 걸음 내디뎠다.
그리고, 바르타는.
“결투를 방해하는가?”
눈을 가늘게 뜬 채 칼트를 내려다봤다.
처음부터 바르타가 응시한 적은 라크뿐이다. 바르타에게 있어 눈앞의 인간은 걸림돌에 불과했다. 마음만 먹으면 당장에라도 치워버릴 수 있는 걸림돌.
“비켜라. 걸림돌아.”
바르타가 검을 휘둘렀다.
무방비해 보이는 눈앞의 검사 하나는 족히 치우고도 남을 검격. 그리 걸림돌을 치워버리고 제 호적수를 향해 걸음을 옮기려던 순간이다.
카가가각.
바르타의 검의 궤적이 비틀렸다.
비틀린 검 끝이 꽂힌 것은 눈앞의 인간이 아닌, 애먼 땅바닥이다. 지면에 검이 꽂힌 순간 쿠웅! 하고 검 위로 무언가의 무게가 더해졌다.
지면에 꽂힌 바르타의 검을 군화로 짓밟은 채, 칼트가 그대로 검을 휘둘렀다. 은백색의 궤적을 그리는 검격이 바르타의 어깨를 할퀴었다.
핏.
상처는 얇다. 그러나 전투 직후 처음으로 바르타는 피를 흘렸다. 고작 해봐야 한두 방울에 불과한 핏물.
“······.”
바르타가 말없이 칼트를 돌아봤다.
인간의 눈동자를 응시한다. 한낱 걸림돌에 불과했다 생각한 인간. 그런 인간의 검이 자신에게 닿았다. 그 순간 바르타가 느끼는 것은 불쾌함이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
바르타는 흥미를 느낀다. 눈앞의 검사에게.
칼트가 한 걸음 뒤로 물러섰고, 바르타는 천천히 검을 뽑아들었다. 자신에게 검을 들어 올린 검사를 응시했다.
“이름은.”
마수의 왕이 질문을 던졌다.
왕의 질문에 인간은 답했다.
“칼트.”
칼트가 검을 가볍게 털었다.
“검사다.”
바르타는 말없이 자세를 다잡는다.
칼트 또한 자세를 잡는다. 두 명의 검사가 내다보는 것은 서로의 미래. 미래를 뒤쫓으며 칼트는 길게 숨을 내뱉었다.
잠깐의 침묵.
먼저 침묵을 깬 것은 칼트다.
칼트가 바르타를 향해 파고들었다. 그 움직임은 빠르지 않다. 라크처럼 격렬하지도, 바르타의 움직임처럼 압도적이지도 않다. 인간의 속도. 인간의 움직임.
후웅.
뒤늦게 검을 휘두른 바르타의 움직임이 칼트를 압도한다. 한순간에 밀려드는 검격을 눈으로 좇지도 않은 채 칼트는 한 걸음 더 앞으로 내디뎠다.
카가가가가각!
칼트가 내지른 칼끝이 바르타의 대검에 뚫린 구멍을 관통했다. 그 순간 칼트가 자세를 낮추며 허리를, 팔을, 검을 비틀며 휘둘렀다.
대검에 비해 작고 왜소한 은백색의 도신이 그리는 검로(劍路)를 따라, 대검의 궤적이 뒤바뀐다.
검이 할퀸 것은 칼트가 아닌 저 멀리 떨어진 협곡의 일면이다. 스겅, 소리를 내며 협곡의 한자락이 비스듬히 갈라져 추락하기 시작했다. 쿵, 쿠궁 하는 소리와 함께 울리는 땅바닥.
쩌억, 하고 바르타가 아가리를 벌렸다.
벌린 아가리에서 새어나오는 것은 웃음소리. 바르타는 조금 전 칼트가 보인 검격을 곱씹었다. 칼트가 보인 것은 정확한 예측. 정확한 예측에서 오는 정밀하기 짝이 없는 검격이다.
검이 휘둘러지는 방향, 검 끝에 실린 힘, 검이 그리는 궤적. 눈앞의 검사는 그 모든 것을 정확하게 계산해 궤도만을 비틀었다.
그말은 곧 이를 의미한다.
저 검사가 내다보는 미래가, 바르타 자신이 보는 것보다 정교하단 뜻이다. 그것이 어찌 가능한지는 알 수 없다. 눈앞에 놓인 미지에 바르타는 환희한다. 그리고 칼트는···.
후두둑.
피를 한 움큼 토해냈다.
칼트가 갈라진 숨을 내뱉었다. 방금과 같은 묘기를 아무런 대가 없이 부릴 수 있을 리가 없다. 당장에라도 쓰러질 것 같지만, 칼트는 이를 악물고 눈앞을 노려봤다. 또다시 온다, 죽음이.
다가오는 대검.
밀려드는 죽음 앞에 칼트는 이를 악물었다.
3.
도망쳐라, 라크.
칼트는 선택을 내렸고 라크는 그 선택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이해했다. 쓰러진 나티다의 몸을 일으켜 세워 등에 업은 채 라크는 뒤를 돌아봤다.
빠득, 하고 라크가 이를 악물었다.
발걸음이 떨어지질 않는다.
저곳에 합류하고 싶다. 칼트를 돕고 싶다. 학생 시절부터 신세를 진 저 사람을 죽게 두고 싶지 않다. 하지만, 그래선 안 됨을 라크는 알고 있다.
승산은 없다.
칼트가 내린 선택은 옳다.
아무런 대안도 없이 이 상황에서 저곳을 향해 달려드는 건, 칼트의 각오를 짓밟는 행위다. 모두를 죽게 하는 길이다. 라크는 제 등이 나티다가 흘린 피로 축축하게 젖어가는 것을 느꼈다. 동시에 나티다의 가파른 숨소리 또한 귓가에 맴돌았다.
제 어깨에 달린 것은 하나의 목숨뿐만이 아니다.
또 다시 잃어야만 한다.
약하기에, 무력하기에, 또 저 빌어먹을 짐승에게 빼앗겨야만 한다. 꽉 깨문 입술에서 피가 흘러내린다. 결국 라크가 칼트에게서 등을 돌리려는 순간이다.
“멈···춰요.”
라크의 귀에 나티다의 목소리가 들렸다.
가느다란 목소리. 당장에라도 끊어질 것 같은 목소리. 라크가 고개를 돌렸고 나티다와 눈을 마주했다. 평소와 같은 퀭한 눈동자는 그곳에 없었다.
기이한 빛을 띠는 눈동자.
평범한 인간의 눈동자가 아니다. 하물며 고작 해보아야 몇 초 뒤의 미래를 보는 초인의 눈도 아니다. 머나먼 미래를 내다보는 신의 눈동자. 신이 들린듯한 눈동자.
“나를.”
예언자가 인간에게 속삭였다.
“저곳에 데려다 줘요.”
나티다가 팔을 들어 올렸다.
파르르 떨리는 손가락의 끝이 향하는 것은 협곡의 중심에 꽂혀있는 검이다. 죽음의 칼, 가니칼트의 상징과도 같은 대검.
“어서.”
예언자는 죽음을 가리켰다.
지금 이 순간, 나티다는 기시감을 느꼈다.
모든 것이 꿈에서 보았던 대로다. 이 흐름을 나티다는 알고 있었다. 제 몸에서 검격이 그어진 순간, 튀어 오르는 핏방울의 너머로 나티다는 미래를 보았다. 아니, 어쩌면 이미 지나쳤을 과거를.
예언자는 자신이 본 과거를 떠올렸다.
* * *
“나는 미끼입니다.”
검의 무덤, 갈라트릭.
국가는 무너졌고 규칙은 짓밟혔다. 무법, 혼돈, 배교, 배반이 들끓는 세상에서 마지막까지 긍지를 잃지 않은 이들이 있었다.
“나뿐만이 아니지요. 이곳에 있는 모두가 그렇습니다. 미끼가 될 겁니다, 우리는.”
지킬 이가 더는 남아있지 않음에도.
충성을 바칠 왕국은 이미 무너졌음에도.
마지막까지 기사로 남고자 한 이들이 있었다. 기사로서의 긍지를 지키고자 남은 그들은 망가진 용사가 아닌 라크 반 그레이스의 이름 아래 모여들었다.
“그분께 도움이 되기 위해서.”
라크는 성검을 뽑아들었다.
찬란히 빛나는 성검 아래 기사들이 검을 뽑았다. 최후를 직감한 이들의 사이에서 나티다는 언덕의 너머를 보았다. 무언가 다가오고 있었다.
탁, 하고 걸음 소리가 울릴 때마다.
파삭, 하고 무언가 바스러졌다.
바스러지는 소리가 울린 뒤에 밀려드는 것은 그늘이다. 빛이란 빛을 모조리 집어삼키는 그늘.
하늘을 바라보면 해가 그늘에 좀 먹히고 있다.
찬란히 빛나던 별이 그늘에 가려졌다. 성검에서 새어나오는 빛조차 더는 어둠을 밝히지 못하게 됐다. 검게 물든 하늘에선 구정물이 흘러 내렸다.
투두두둑.
비가 내렸다. 구정물의 비가.
비탈길을 따라 구정물이 흘렀다. 협곡의 고랑을 타고 흐르고 흐른 구정물이 강이 됐다. 검게 물든 검의 무덤 위로 누군가 발을 내디뎠다.
“온다.”
라크가 말했다.
나티다는 앞을 보았다.
그곳에 재앙이 있었다.
끽, 끼기기기긱.
공간이 비틀리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비틀림을 낳으며 모습을 드러낸 것은 만마의 주인이다. 모든 자격을 되찾아 온전해진 신이 그곳에 있었다. 그 손에 쥐어진 것은 한 자루의 검(劍).
“역천의 검···.”
누군가 그 검을 알아보았다.
그 검이 서서히 움직인 순간, 라크가 땅을 박차고 달려들었다. 찰박, 하고 튀어 오르는 구정물. 어둠 속에서도 가려지지 않는 성검의 엷은 빛을 따라 수많은 기사들이 라크의 뒤를 쫓았다.
죽음을 각오한 인간들이 달려든다.
그리고, 역천의 검이 휘둘러졌다.
서걱.
검이 휘둘러진 순간 모든 게 무너졌다. 하늘과 땅이 뒤집혔다. 협곡에 깔린 수많은 돌무더기가 모조리 하늘로 솟구쳤다. 뒤집힌 것들은 제자리를 찾지 않는다. 아무리 기다려도 튀어 오른 것은 아래로 추락하지 않았다.
하늘에 처박힌 돌무더기와, 인간의 시체들.
잘개 쪼개진 기사들의 시체가 하늘에 삼켜졌다. 그러나 그들의 죽음은 무의미하지 않다. 마지막까지 방패가 된 기사들은 라크의 몸을 지켰다. 기사들의 시쳇더미에서 라크가 일어섰다.
“······.”
하늘에 처박힌 돌무더기에 발을 디딘 채, 라크는 아래를 내려다봤다. 역천의 검과 시선을 마주한 순간 라크는 하늘을 박차고 땅을 향해 뛰어올랐다.
칼이 부딪치는 소리.
뼈가 부러지고, 피가 철퍽이는 소리.
그런 소리가 몇 번이고 울려 퍼졌다.
라크는 저항했지만, 그 저항은 오래가지 못했다. 그저 재앙의 걸음을 몇 걸음 늦출 뿐이다. 라크는 나티다에게 도망치라 말했지만, 나티다는 도망치지 못했다. 도망쳐봐야 의미가 없다 생각했으니.
그리곤, 투욱.
끝은 무겁게 다가왔다.
팔다리가 모조리 부러진 라크가 무릎 꿇었다. 부러진 손가락으론 더는 검을 쥐지 못해, 놓아버린 검이 비탈길에 처박혔다.
툭.
라크의 목이 떨어졌다.
굴러떨어진 목이 나티다의 앞에 멈춰 섰다. 라크의 비어버린 눈동자를 바라보기를 잠시, 고개를 든 나티다는 멍한 눈동자로 재앙을 바라봤다. 재앙 또한 나티다를 보았다. 시선이 교차한 순간 역천의 검이 공간을 삐걱거리며 움직였다.
죽음이 다가온다.
다가오는 죽음 아래 나티다가 웃음을 흘렸다.
···이전까지 꾸었던 꿈은 여기서 끝이 났다. 그러나, 지금 이 순간 나티다는 그다음을 보았다. 그렇기에 알 수 있었다. 지금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할지.
“라크.”
나티다가 감았던 눈을 떴다.
“나를.”
나티다는 라크의 등에 업힌 채 저 멀리 꽂혀있는 죽음의 칼을 가리켰다.
“나를, 저곳에 데려다 줘요.”
보았던 미래. 혹은 지나쳤을 과거.
그로부터 알게 된 지식. 허무한 죽음을 맞이한 미래의 자신이 남긴 유일한 것을 써먹기 위해, 나티다가 외쳤다.
“어서.”
2.
다가오는 죽음 앞에 인간은 저항했다.
칼트는 검을 끊임없이 휘두르며 속으로 생각했다. 스승님이 딱 이런 기분이었겠군. 죽음을 각오한 채 시간을 끈다. 이는 쿤텔의 최후와도 같았다.
캉, 카앙!
날붙이가 맞부딪치는 소리가 끊임없이 울려 퍼졌다. 칼트는 검을 휘두를 때마다 몸이 망가짐을 느꼈다. 실핏줄이 터진 눈에 피가 고였다. 한꺼번에 너무나도 많은 정보를 계산한 나머지 머리가 들끓었다. 코에서 핏물이 흘렀다.
몸을 망가트리며 칼트는 저항했다.
부릅뜬 눈동자에 담는 것은 모든 것.
넓은 시야로 파악한 정보를 바탕으로 정확한 미래를 그려라. 자신이 앞설 수 있는 것은 오직 예측뿐이니.
미래를 보고 검을 휘두른다.
검의 궤도를 틀고, 때로는 빗겨치고, 때로는 과감히 파고든다. 생과 사의 갈림길에서 칼트는 발버둥쳤다.
카앙!
검을 휘두르며 칼트는 사고한다.
마수의 왕이 휘두르는 검의 근간에 놓인 것은 협곡에 전해지는 검술의 원류다. 어쩌면 죽음의 칼이 휘두르는 검과도 그 근간을 같이하리라.
저 검술을 상대하는 법을 칼트는 안다.
한 명의 인간이 있었다. 죽음의 칼에게 맞서기 위해 제 한평생을 갈고닦은 인간이. 그 긍지 높은 검사에게 칼트는 검술을 배웠다. 그리고, 이젠 그 검사를 죽이기 위해 자신의 검술을 갈고 닦았다.
카가가가각!
칼트가 비스듬히 세운 검을 따라, 바르타의 대검이 그리는 궤적이 꺾였다. 이것이 칼트의 검이었다. 강자를 상대하기 위한 검. 그러나, 칼트는 자신의 검이 완성되지 않음을 느끼고 있었다.
모자라다, 위력이.
빈틈을 만들어내도 그 빈틈을 파고들 일격이 자신에겐 없었다. 할 수 있는 거라곤 물고 늘어지는 것뿐.
핏.
상처가 늘어간다. 피가 흐른다.
마수의 왕은 어느새 칼트의 코앞까지 쫓아와 있다. 정확하다고 생각했던 미래가 계속해서 흔들렸다. 그리고 기어코 카앙, 소리를 내며 칼트가 검을 놓치고 말았다.
허공을 맴도는 검.
칼트는 뒤로 도약하며 손을 뻗었다. 그 손은 허공을 맴도는 검을 붙잡지 않는다. 이곳은 검의 무덤이다. 지면에 꽂힌 부러진 검을 칼트는 뽑아들었다.
카아아아앙!
밀려드는 바르타의 검을 쳐낸 순간 검이 박살 났다. 검을 쥐고 있던 칼트의 손가락이 꺾였다. 미끄러지듯 착지한 칼트가 허공을 날던 자신의 검을 쥔 순간, 바르타의 검은 이미 칼트의 머리 위로 떨어지고 있다.
검을 휘둘러도 늦는다.
직감한 것은 죽음.
“숙이십시오.”
그 순간 울려 퍼지는 것은 익숙한 목소리.
칼트가 반사적으로 머리를 숙인 순간, 칼트의 머리 위로 공기를 끌며 대검이 스쳐 지나갔다. 이윽고 울려 퍼지는 것은 카앙, 하는 굉음.
“···라크?”
도망치라고 말했던 소년이 돌아왔다.
눈을 크게 뜨기를 잠시, 칼트가 언성을 높이려는 순간이다. 검을 쳐낸 라크가 칼트의 목덜미를 움켜쥔 채 뒤로 몇 걸음 물러섰다.
“너, 내 말을···.”
“10초.”
숨을 몰아쉰 라크가 말했다.
“10초만, 버티면 됩니다.”
그리 말하며 라크가 자세를 잡은 순간이다.
물러선 라크와 칼트를 지켜보던 바르타가 제 아가리를 쩌억 벌렸다. 벌린 아가리에서 새어나오는 것은 웃음소리. 허나, 비웃음과는 먼 웃음소리다.
“감사를.”
마치 스승에게 인사를 올리듯, 잠시 고개를 숙인 바르타가 도로 고개를 들어 올렸을 때···.
후웅, 하고 바르타가 오른손으로 쥐고 있던 검을 허공에 내던졌다. 허공에서 한 바퀴 돈 검을 움켜쥐는 것은 조잡한 마수의 시체로 이루어진 오른손이 아니다.
본래부터 자신의 것이었던 왼손.
바르타가 왼손으로 검을 쥔 순간 공기가 떨렸다.
“긍지 높은 검사에게, 경의를.”
바르타가 자세를 잡았다.
3.
보았던 풍경을 떠올리며 나티다는 걸음을 옮겼다. 사방으로 몰아치는 검격을 해치며 앞으로. 그녀가 향하는 곳에는 한 자루의 검이 꽂혀있다.
죽음의 칼이 꽂힌 곳.
그곳을 향해 나티다는 걸었다.
* * *
라크의 죽음. 더이상 잃을 게 없어진 순간.
“아하.”
역천의 검을 앞에 두고 나티다는 뒷걸음질치지 않았다. 헛웃음을 흘리며 오히려 재앙을 향해 한 걸음 더 내디뎠다. 그 걸음이 어디로 향하는가.
협곡의 중심에 꽂혀있는 검이다.
잔해가 모조리 하늘로 날아가 드러난 협곡의 밑바닥. 그 밑바닥에는 한 자루의 검이 꽂혀있다. 라크의 검과 나란히 꽂혀있는 대검. 그것은 죽음의 상징과도 같은 대검이다.
탁.
어째서 그곳으로 향했는지는 모른다.
나티다는 무언가에 이끌리듯 검을 향해 다가갔다. 역천의 검은 걸음을 멈춘 채 나티다를 보았다. 나티다는 지면에 박힌 죽음의 칼에 손을 뻗었다.
콱, 하고 칼자루를 움켜쥔 순간.
밀려드는 검기에 나티다의 다섯 손가락이 모조리 떨어져 나갔다. 핏물이 튀어 올랐다. 그러나 나티다는 남은 한 손 마저 그 위에 덮었다. 마치 기도를 올리듯이.
···어째서 기도를 올렸는지는 모른다.
우스갯소리로 자신에게 있어 신(神)은 별이 아닌, 라크 당신이 가진 성검이라고 떠들며 기도를 올리던 그녀다. 자신의 신을 잃은 순간, 나티다는 성검이 아닌 죽음의 검을 붙잡은 채 기도를 올렸다.
바라는 것은 복수, 혹은 죽음.
그 기도는 성녀가 올리는 기도가 아니다.
죽음을 각오한 인간의 바람이자 소망이다. 그 소망이 그릇됐을지언정, 인간은 간절히 기도를 올렸다. 그 기도는 신에게 닿지 않지만···.
쩌적.
오래 전, 수백 년도 더 이전의 시대.
언제나 인간의 기도에 답했던 어느 용사에겐 닿았다. 설령 타락했을지언정 최초의 용사는 인간이 최후에 내지르는 비명에 반응했다.
용사가 인간의 기도에 답했다.
철컥, 하고 갑주가 흔들리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나티다의 등 뒤, 찢어진 공간의 너머에서 갑옷에 뒤덮인 인간의 손이 뻗어나 왔다. 인간의 손은 나티다가 쥐고 있는 죽음의 칼을 붙잡지 않는다. 조금 더 뻗어 나가 그 옆에 꽂힌, 최초의 성검을 움켜쥐었다.
구우우웅.
성검이 거세게 떨린다.
마치 손길을 거부하듯이. 성검을 쥔 인간의 손이 타들어 가기 시작하나, 타락한 용사는 그에 아랑곳하지 않는다. 공간의 너머로 최초의 용사가 모습을 드러냈다.
가장 두려운 재앙.
죽음의 칼, 가니칼트.
검의 협곡의 주인이 돌아왔다.
타락한 용사가 성검을 뽑아들었다. 성검에선 별빛 따위 일지 않는다. 별빛이 흐르지 않는 성검은 한낱 날붙이에 불과하다.
그러나, 그것은 여전히 검(劍)이다.
검의 형태를 띤다면 그걸로 족하다.
죽음의 칼이 역천의 검을 향해 칼끝을 들어 올렸다. 한순간의 침묵. 직후, 두 개의 검은 서로를 향해 정확하게 같은 속도로 휘둘러졌다.
밀려드는 바람. 휘몰아치는 검기.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이 엎어지는 풍경 아래, 나티다는 헛웃음을 터뜨렸다.
전투의 여파에 휘말려 죽어가던 와중 그녀는 깨달았다. 죽음의 칼은 자신이 바란 소원을 이루어주기 위해 이 자리에 모습을 드러낸 것이 아니다. 저 검사가 바라는 것은 오직 재대결이었을 뿐이리라.
자신은 명분을 제공했을 뿐.
아무렴 어떠한가. 나티다는 망가진 웃음을 흘리며 마지막 한마디를 내뱉었다. 다, 죽어버려라. 그렇게 미래의 자신의 삶은 끝이 났다. 아무것도 이루지 못한 채. 아무것도 남기지 못한 채.
···그러나, 지금은 아니다.
나티다가 길게 숨을 내뱉었다.
감았던 눈을 뜨면 보이는 것은 현재. 그리고 눈앞에 꽂혀있는 것은 죽음의 칼. 마른침을 삼킨 나티다가 천천히 칼자루를 향해 손을 뻗었다.
이 협곡의 주인에게 명분을 주기 위해서.
* * *
박살 난 게이트.
검의 협곡 갈라트릭에 모습을 드러낸 마수의 왕. 라니엘이 입술을 꾹 깨문 채, 지도를 들고선 막사의 잔해를 해치고 뛰어나갔다.
연락망을 가진 기사들을 튀어나오라고 소리를 지르며 라니엘이 걸음을 옮기던 순간이다.
우뚝, 하고 라니엘이 멈춰 섰다.
그녀의 머릿속에 번갯불이 내달린 까닭이다. 계약에 이상 현상이 발생했다는 신호. 라니엘이 지도를 펼쳤다. 바르타를 나타낸 점이 깜빡이고 있는 갈라트릭. 그러나, 이제는 또 다른 점이 점멸하고 있다.
죽음이 침묵하는 곳, 게헤테.
그곳에서 도전자를 기다리고 있을 죽음의 칼, 가니칼트의 신호가 세차게 점멸했다. 그렇게 깜빡이기를 한순간. 가니칼트의 신호가 사라졌다. 이윽고 그 신호가 다시 잡힌 곳은···.
검의 협곡, 갈라트릭.
검의 협곡에 주인이 발을 내디뎠다.
아주 오래전부터 인간은 기도를 올려 왔다.
하늘에게. 상위의 존재에게. 자신보다 우월한 인간에게. 심지어 때로는 뛰어난 누군가에게 인간은 제 소망을 이야기하곤 했다. 부디 그것을 들어주길 바라며.
소망은 기도가 됐다.
갈망은 신앙으로 변질했으며, 간절함은 기적을 일으켰다. 그렇게 종교가 탄생했다.
그렇기에, 태초의 시대에 그 누구보다 제 소망에 간절할 수 있는 인간을 가리켜 사람들은 이렇게 불렀다. 사제. 기도를 전하는 이라고.
수만 년이 흐른 지금 사제의 의미는 변질됐다.
교단은 부패했으며 인류는 과거를 잊었다. 언어의 정의가 바뀌었으며 본질에서 또한 멀어졌다. 지금의 인류는 기도를 올리는 행위를 신성하다고 여기나, 기도의 본질은 신앙심이 아니다.
기도는 바라는 것.
자신의 소망에 간절한 것.
그 목소리가 누군가에게 닿기를 바라는 것.
그것만으로도 기도는 힘을 가진다.
설령 그 대상이 신이 아니라 한들, 그 목소리가 누군가에게 닿는다면···.
“···바라건대.”
성녀, 나티다가 손을 뻗었다.
검의 무덤에 꽂힌 한 자루의 검. 가장 두려운 재앙이 휘두르던 검의 칼자루를 나티다는 움켜쥐었다.
촤악!
칼자루를 움켜쥐는 순간 손가락이 잘려나갔다. 검에 서려 있는 예기(銳氣)가 나티다의 손을 할퀴었다. 손가락의 절단면에서, 손바닥에서 피가 튀었다.
“부디, 바라건대.”
나티다는 남은 한 손마저 뻗어 피 흘리는 제 손등을 덮었다. 마치 기도를 올리듯이. 너덜너덜해진 손가락. 칼자루를 타고 흐르는 핏물. 살갗이 찢어지는 고통 속에서 나티다는 두 눈을 감았다.
···뛰어난 검사에게 있어, 검이란 제 반신과도 같다고 한다. 죽음의 칼을 붙잡은 순간 나티다는 극심한 공포를 느꼈다.
눈을 감으면 보이는 것은 어둠 속에서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 죽음이 자신을 응시하고 있다. 가장 두려운 재앙 앞에 나티다는 두려움에 떨었다. 하지만 결코 검을 놓치는 않는다.
바라건대, 기적을.
죽음 앞에 보이는 것은 각오.
두려움에 떨면서도 굽히지 않는 의지.
나티다는 제 소망을 이야기했다. 소망과 함께 죽음의 칼에게 속삭였다. 내가 당신의 명분이 되어주겠다. 이곳에 당신과 재대결을 바라는 이가 있다. 검사로서, 당신은 그 제안을 받아들여야 하지 않나?
그리고 죽음은 답한다.
그것이 나티다의 소망에 답한 것인지, 나티다의 속삭임에 답한 것인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죽음이 답을 들려주었다는 것.
깊은 어둠 속에서 죽음이 움직였다.
* * *
마수의 왕이 왼손으로 검을 쥐었다.
검을 고쳐 쥔 순간 흐름이 뒤바뀌었다.
공기가 떨려온다. 왕의 앞에 흐름이 무릎 꿇는다. 물론, 이는 죽음의 칼이 검을 고쳐 쥐었을 때와 같은 격변은 아니다. 바르타는 오른손으로도 검술을 펼쳤다. 왼손으로 검을 쥐며 달라진 것이라곤 분위기뿐.
완벽해진 자세와, 흔들림 없는 칼끝.
자세를 다잡은 바르타를 칼트는 보았다.
더는 바르타의 상(狀)이 흔들리지 않았다. 고요함 속에서 바람이 불어왔다. 불어온 바람에선 썩은 내가 났다. 죽음의 냄새다. 가니칼트와 같은.
···온다.
온다, 죽음의 칼에 필적할 일격이.
칼트가 보는 수많은 미래가 모조리 쪼개졌다.
모든 미래가 바스러진 지금 보이는 것은 현재.
뒤흔들리는 공기. 하늘 위로 떠오르는 돌무더기. 바르타가 선보이려 하는 것은, 그가 펼칠 수 있는 최선의 일격이리라.
“감사를.”
자신에게 가르침을 준 검사에게 경의를 표하듯이, 바르타는 자신이 가진 최선의 일격을 선보이고자 한다.
‘···저 일격을 버텨내야 한다.’
그리고 칼트는 각오를 다진다.
라크는 말했다. 10초를 버티라고. 칼트는 라크가 왜 그런 말을 했는지 이해했다. 바르타의 어깨너머에서 나티다는 죽음의 칼을 붙잡고 기도를 올리고 있었다.
···무슨 일이 일어날지는 알 수 없으나.
‘버텨낸다면, 길이 열린다.’
죽음뿐이던 길에 활로가 열린다.
하지만, 어떻게?
손가락은 부러졌다. 근육은 찢어졌다. 육체는 진작에 한계에 이르렀다. 이런 몸으로 검을 휘두를 수 있는 건 앞으로 한 번뿐이었다. 그 한 번의 휘두름으로 저 일격을 쳐내야만 했다.
할 수 있는가?
스스로 던진 물음에 칼트는 답했다.
아니, 해내야만 했다.
“···후우.”
칼트가 길게 숨을 내뱉었다.
숨을 내뱉으며 한 걸음 앞으로. 라크보다 한 걸음 앞선 곳에 서서 칼트는 자세를 잡았다. 자신을 바라보는 라크를 뒤돌아보며 칼트가 말했다.
“라크.”
칼트가 웃었다.
“길은 열어주마.”
2.
하늘로 치솟는 돌무더기.
흔들리는 공기와 떨리는 땅. 모든 것이 흔들리는 가운데 바르타가 쥔 검은 고요하다.
쿠웅.
바르타가 한 걸음 앞으로 내디딘 순간 지면이 터져나갔다. 움푹 파인 지면. 튀어 오르는 돌무더기. 내디딘 발에 힘을 실으며 바르타가 검을 휘둘렀다. 칼끝은 더는 흐름을 끌지 않는다. 공기를 끌지도 않았다.
그저, 모든 것을 끊어낼 뿐이다.
튀어올랐던 돌바위가 반으로 쪼개졌다.
공기가 투둑, 소리를 내며 끊어졌다.
꺾인 흐름이 사방으로 휘몰아쳤다. 닿는 모든 것을 끊어내며 바르타의 검기가 질주한다. 지면을 파헤치며 질주하는 검기가 향하는 곳은, 검을 쥔 인간.
한낱 인간을 향해 검기가 밀려든다.
칼트는 가늘게 뜬 눈으로 눈앞을 보았다. 자신이 보는 모든 미래를 쪼개며 다가오는 검격. 한없이 느려진 체감 시간, 모든 것이 정지한 것처럼 보이는 세상 속에서도 저 검기만큼은 움직이고 있다.
온다, 죽음이.
인간의 몸으로는 쳐낼 수 없는 검이.
쪼개지는 미래의 파편을 칼트는 보았다.
모든 미래가 자신의 죽음을 가리키고 있다. 자신이 가진 어떠한 것으로도 저 검을 쳐낼 수는 없다. 그것을 알고 있음에도 칼트의 검은 움직이고 있다.
떠올려라. 경험을.
찾아내라. 승리로 향할 길을.
눈에서는 피가 흐른다. 코에서도, 입에서도, 귀에서도 피가 흐른다. 피를 게워내며 칼트는 떠올린다. 지금 저 마수의 왕이 휘두르는 검을 칼트는 언젠가 흘려내 본 적이 있었으니까.
그것은 초인이 되기 이전의 일이다.
죽음의 칼이 휘두르는 일격에서 살아남았던 경험.
그 경험을 바탕으로 칼트는 길을 찾는다. 핏줄이 터져 붉게 물든 시야로 보는 것은 수많은 미래. 그 미래 속에서 칼트는 몇 번이고 죽었다. 몇 번이고 실패했다. 반복된 죽음 속에서 칼트는 앞으로 걷는다.
···초인이란 식지 않는 쇠와 같다.
생과 사의 갈림길. 죽음의 위기. 고통과 시련 속에서 초인은 끊임없이 단련된다. 더욱 날카롭게. 더욱 견고하게. 더욱 아름답게. 뜨거운 쇠를 담금질 하듯, 한 자루의 명검을 단조해 내듯이. 그렇게 불순물을 덜어낸 인간은 빛나기 시작한다.
칼트의 검 끝이 빛났다.
검기란 결국 육체의 기(氣)이자 영혼의 색(色)이다. 인간이 살아온 삶. 단련해온 육체에 의해 정해지는 것. 불순물이 떨어져 빛나는 칼트의 검기는 달빛이다.
스릉.
달빛을 닮은 검기가 바다에 비춘 달빛처럼 넘실거렸다. 은은한 검기를 머금은 채 검이 약진했다. 지금 이 순간 칼트의 검이 그리는 길은 어느 미래에도 없던 것이다. 실패한 미래 속에서 찾아낸 단 하나의 답.
월광이 검로(劍路)를 그린다.
부드럽게, 비스듬하게, 스며들듯이.
바르타가 그린 검로에 칼트의 검이 끼어들었다. 모든 것을 가르며 밀려들던 검기에 월광이 닿은 순간 변화가 일어났다.
바르타의 검기가 출렁였다.
한줄기의 선을 그리던 검기가 휘어졌다. 꺾인다. 칼트가 휘두르는 검을 따라 바르타의 검로가 틀어졌다.
후웅.
반월을 그리며 휘둘러진 칼트의 검이 지면에 파고들었다. 스겅, 부드럽게 지면을 가르며 칼트의 검이 다시 땅 위로 치솟았다. 마지막으로 그 칼끝이 향하는 곳은 정면이다. 반월에서 만월로. 완전한 원(圓)을 그리며 칼트가 검을 올려쳤다.
칼트가 그린 검로를 따라, 바르타가 쏘아낸 검기가 움직였다. 원을 그리며 휘어진 검기는 바르타에게로 돌아간다.
챠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악!
돌아오는 검기를 바라본 바르타의 눈동자가 한순간이지만 흔들렸다. 지금 이 순간 바르타는 놀라움을 느낀다. 인간이 선보인 기술에 당황하면서도, 바르타는 돌아오는 검기를 향해 검을 휘둘렀다.
그러나, 돌아오는 것은 바르타 자신이 선보인 최선의 일격이다. 자신의 검격을 온전히 받아치지 못한 바르타가 뒤로 물러섰다. 자세가 무너졌다. 피를 흘리며 바르타가 빈틈을 드러냈다.
그 모습을 보며 칼트는 웃음을 흘린다.
드러난 빈틈. 하지만 그 빈틈에 파고드는 것은 자신의 몫이 아니다. 더이상 설 힘이 남아있지 않은 칼트가 천천히 옆으로 고꾸라졌다.
“가라, 라크.”
칼트가 무대에서 내려온다.
그 자리를 대신하는 것은, 칼트의 뒤에 서 있던 라크다. 성검에서 찬란한 별빛이 피어올랐다.
쿠웅.
발을 내려찍으며 라크가 검을 휘둘렀다.
가열된 육체. 라크의 몸에서 피어오르던 눈보라가 성검에 휘감겼다. 휘감긴 눈보라에 라크는 하나의 주문을 새겼다. 라니엘이 잿가루를 모아 일대를 모조리 날려버리는 주문으로 뒤바꾼다면···.
라크는 흩날리는 마나의 잔재를 ‘이렇게’ 쓰기로 결정했다. 눈보라에 새겨진 주문은 단순하다.
충격(Shock).
몰아치는 눈보라가 모조리 충격파로 변했다. 충격파가 성검의 칼등을 연달아 후려쳤다. 라크의 검이 가속에 가속을 거듭하며 잔상을 흩뿌렸다. 가속된 칼끝에서 터져 나오는 것은 그레이스류의 극의.
거친 검격이 바르타의 몸에 비스듬히 새겨졌다.
자세가 무너진 바르타의 왼 어깻죽지부터, 오른쪽 옆구리에 이르는 일선. 그어진 선을 따라 핏물이 맺혔다. 직후 피가 분수처럼 터져 나왔다. 바르타가 짧게 경련하며 몇 걸음 뒤로 물러섰다.
바르타가 제 몸에서 흐르는 피를 보았다.
인간의 검이 자신의 몸에 새겨넣은 상처를 보며, 회복되지 않는 상처에서 아릿한 고통을 느끼며 바르타가 웃음을 터뜨렸다. 어느 때보다 즐겁다는 듯이.
더욱 더 가르침을.
더욱 더, 내가 보지 못한 기술을.
비틀거린 바르타가 환희하며 다시 검을 휘두르려는 순간이다. 바닥에 쓰러진 칼트가 무심코 웃음을 터뜨렸다. 그것은 자포자기한 인간의 웃음이 아니다.
“10초.”
주어진 시간은 끝났다.
“온다.”
칼트의 시선은 바르타의 등 뒤를 향했다.
“가장 두려운 재앙이.”
섬짓.
한순간 바르타의 털이 모조리 곤두섰다. 바르타의 고개가 휙, 하고 뒤로 돌아갔다. 뒤를 돌아본 바르타는 보았다. 지면에 꽂힌 대검 옆에 쓰러져있는 인간을.
그리고.
쪼개지는 공간에서 뻗어나오는 손을.
“죽음의 칼, 가니칼트가 온다.”
뻗어나오는 것은 마수의 손.
바르타가 잃어버렸던 오른팔. 수백 년도 더 전에 잃어버린 자신의 반신을 본 순간 바르타의 몸이 경련했다. 바르타의 안광이 흔들렸다. 공포가 아닌 환희로.
“아, 아아.”
바르타가 신음을 흘렸다.
“아아, 아아아아아아아!”
마수의 손이 대검을 움켜쥐었다.
그 순간 손 하나가 통과할 만큼만 찢어졌던 공간이 쩌적, 소리를 내며 쪼개졌다. 쪼개진 공간의 너머에서 그가 모습을 드러낸다.
가장 두려운 재앙이.
죽음을 상징하는 검사가.
쿠웅.
한순간 협곡의 공기가 무거워진다. 거센 바람이 불어온다. 죽음의 향을 간직한 바람. 거대한 존재감이 협곡을 찍어눌렀다.
“······.”
모습을 드러낸 죽음의 칼, 가니칼트가 지면에 박혀있던 제 검을 뽑아들었다. 스릉, 하고 나지막이 울리는 검명(劍鳴). 죽음의 검이 울린다.
그 순간 검의 무덤에 박힌 수십 자루의 검들이 공명하듯 떨리기 시작했다. 그것은 마치 도래한 죽음 아래 공포에 떠는 것 같기도, 머리를 조아리는 것 같기도 하다. 그것은 하나의 사실을 알린다.
검의 무덤, 갈라트릭.
더럽혀진 땅의 주인이 돌아왔음을.
검이 울린다.
죽음이 검을 뽑아든 순간 울려 퍼진 검명(劍鳴)은 낮고 서늘하다. 검명이 울려 퍼진 것은 찰나의 순간이나, 울림은 검과 검을 타고 협곡을 뒤덮었다.
구우우웅.
검의 무덤에 꽂힌 수십, 수백 자루의 검.
이곳에 모습을 드러낸 죽음에게, 이 협곡의 주인에게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리듯 주인 잃은 검들이 요란스레 떨렸다. 그중 몇 자루는 울림을 견디지 못하고 부러졌다.
검명은 비명이 되어 돌아왔다.
떨리는 칼자루들 사이로 죽음이 검을 들어 올렸다. 그 칼끝이 향하는 것은 자신의 영역에 발을 디딘 짐승이다. 짐승을 칼끝으로 가리킬 적 죽음은 오른손으로 검을 쥐고 있었다. 본래 짐승의 것이었던 팔.
“묻는다.”
죽음의 칼, 가니칼트.
긍지 높은 검사가 질문을 던졌다.
“너는 짐승인가?”
혹은, 그게 아니라면···.
“여전히, 검사이고자 하는가.”
죽음은 짐승을 알아본다.
과거 자신에게 도전했던 검사. 수백 년의 시간이 흘러 다시 마주한 호적수에게 죽음은 물었다. 너는 여전히 그때와 같은 검사이냐고.
“나는.”
그리고, 짐승은.
“나는, 바르타.”
죽음의 질문에 마수의 왕은 답한다.
마수의 왕, 바르타가 검을 들어 올렸다. 왼손으로 쥔 검의 끝을 바르타는 죽음에게 겨누었다.
“나는 바란다. 그날의 재결전을.”
그날의 다음을.
내가 그날 보지 못했던 다음을 바란다.
바르타는 답을 내놓았다.
“그런가.”
죽음이 검을 하늘을 향해 던졌다.
후웅, 하고 허공에서 한 바퀴 돌며 떨어지는 검을 향해 가니칼트가 손을 뻗었다. 뻗은 것은 인간의 팔. 왼손으로 가니칼트가 칼자루를 움켜쥐었다.
“그렇다면, 검사로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