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eat the Hero Party RAW novel - Chapter 424
그녀가 라니엘을 바라봤다.”
달리 말하자면, 현재의 잿빛 마탑주가 과거의 잿빛 마탑주를 보았다. 제자가 스승을 본 것이요, 어른이 된 아이가 어렸을 적 동경한 우상을 본 것이다.”
레스티 엘레노아는, 라니엘 반 트리아스에게 많은 것을 받았다. 너무나도 많은 것을 빚졌다. 빚진 것을 쉬이 잊어버리고, 안하무인 하게도 그것을 당연하게 여기는 이들이 있는가 하면···.”
“찾아보면 있을 거에요, 분명.””
진 빚을, 받은 은혜를 마음속 깊은 곳에 새긴 채 살아가는 이들도 있는 법이다. 레스티 엘레노아는 그런 인간이다. 그런 인간이기에 그녀는 지금 이 자리에서 목소리를 낸 것이다.”
“전이문, 전이문이 있잖아요. 굳이 선배님 혼자 감당하지 않더라도 전이문으로 합류하는 방법 역시 가능하지 않을까요? 거리가 문제인 거니까···.””
하지만, 목소리를 내면 낼수록, 방법을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레스티는 불현듯 깨닫고 만다.”
“그건 불가능해.””
방법이 없음을.”
“레스티, 게이트(Gate)의 부하를 견딜 수 있는 건 나뿐이야. 하지만 이 경우에는 그마저도 불가능해.””
불가능하다는 것을.”
“한쪽은 그늘의 영역이야. 혹은, 가니칼트의 영역이지.””
라니엘이 말했다.”
“그늘의 영역에선 모든 흐름이 꼬여. 주문과 마나가 꼬이고, 마도구들은 모조리 먹통이 되지. 가니칼트의 영역 또한 마찬가지야. 애초에, 베여버리겠지.””
그녀는 담담히 말했다.”
담담히 레스티의 생각을 부정했다.”
“그렇다면 다른 한쪽은? 최초의 광인의 영역이지. 그 녀석은 전이문의 원리를 알고 있고, 그것을 어떻게 쓰는지, 어떻게 통제하는지도 알고 있어. 너와 나보다 더 자세하게.””
간섭이 들어올 것이다, 분명하게.”
“어느 쪽으로도 불가능해.””
“···그렇다면.””
“그러니, 방법은 이것뿐이라는 거지.””
레스티가 고개를 숙였다.”
라니엘은 고개를 들었다. 고개를 들어서, 제 멱살을 움켜쥐고 있는 데스텔을 바라봤다.”
“그러니까 이것 좀 놔봐, 이 녀석아. 분위기 험악해지게 이게 뭐하는 짓이야?””
그러나 데스텔은 놓지 않았다.”
멱살을 움켜쥔 채 그가 말을 이었다. 하고 싶은 말이, 혹은 해야만 하는 말이 있다는 것처럼.”
“···네가 대단한 놈이라는 거, 모르지 않는다. 알아. 네게도 다 계획이 있겠지. 있겠는데 말이다.””
데스텔이 눈을 가늘게 떴다.”
“지금 네 태도, 어조, 분위기. 그 모든 게 몇 년 전하고 똑같다고 느끼는 건 내 착각이냐?””
이 자리의 그 누구보다도 데스텔은 ‘라니엘 반 트리아스’라는 인간의 밑바닥을 잘 알고 있다. 그녀의 사고방식을, 행동양식을, 신념을 이해하고 있다. 그럴 수밖에 없으리라. 이 자리에서 라니엘에게 멱살을 붙잡힌 채 쥐어 터진 인물은 데스텔이 유일할 테니.”
잿빛 마법사, 혹은 현자라 불리던 라니엘.”
용사, 혹은 인류의 수호자라 불리는 라니아.”
그 둘 사이에 놓인 간극을 데스텔은 알고 있다. 지난 몇 년간 라니엘이 보여준 변화를 지켜봤으니까.”
“너는 언제나 최선을 추구하지. 그 누구도 희생하지 않고, 그 무엇도 놓지 않는 결말을 갈구해. 지금도, 몇 년 전에도 말이다.””
언제나 최선의 결말을 추구했다.”
그것이 라니엘 반 트리아스다.”
“그때와 지금의 차이는 단 한 가지다. 최선의 결말, 최선의 수단에 네가 포함되어 있는가, 아닌가. 그거 하나.””
과거의 라니엘은 자기 자신을 희생시킴으로써 최선의 결말을 붙잡았다. 그렇기에 도달한 최선의 결말에 라니엘이 서 있을 자리는 없었다. 그녀에게 있어서만큼은 어떤 것도 ‘최선’이 될 수 없었다.”
그 사실을 깨달았기에.”
카일의 사건을 겪으며 변했기에.”
라니엘은 더는 저 자신의 삶을 가벼이 여기지 않았다. 가벼이 자기희생을 선택하지 않았다. 그렇기에 지금의 라니엘을 데스텔은 인정한 것이요, 그녀의 방식을 긍정했던 것이다.”
“그리고.””
데스텔이 조금 더 눈을 가늘게 떴다.”
“지금의 넌 또 과거로 돌아간 것 같다고 느끼는 이거, 이게 내 착각은 아닌 거 같거든?””
“······.””
“네 말대로, 네 계획대로 한다고 쳐. 한다고 치고, 하나만 묻자.””
데스텔이 질문했다.”
“살아서 돌아올 수 있냐?””
생환(生還)의 여부.”
너 자신의 희생으로 성립되는 작전이 아니냐고, 데스텔은 질문한 것이다. 그 질문 앞에 라니엘은 침묵했다. 곧장 답하지 못했다.”
“거 봐.””
데스텔이 신경질적으로 내뱉었다.”
“확신 못하잖아.””
모든 일에 확신하던 라니엘이다.”
그런 그녀가 확신하지 못하고 있다. 그 순간 답은 나온 거나 마찬가지였다. ”
툭, 하고.”
데스텔이 라니엘의 멱살을 밀치듯이 놓았다. ”
떠밀린 라니엘은 가만히 제 목덜미를 매만졌다. 구겨진 옷 주름을 바라보던 라니엘이 무심코 웃음을 흘렸다. 이런 상황에도 어울리지 않는 웃음소리가 회의실에 맴돌았다.”
“하여간 눈치는 더럽게 좋아.””
에휴, 하고 라니엘이 길게 한숨을 내뱉었다.”
“그래, 뭐. 다 들켰으니 툭 까놓고 말해 볼까?””
용사가 아닌 한낱 인간.”
무게감 있는 말투도, 진중한 자세도 없다. 벽에 기대어 선 채 라니엘이 주변을 쓱 둘러봤다. 자신을 바라보는 이들을 향해 라니엘이 입을 열었다.”
“생환(生還)? 솔직히 확신은 못해. 그런데, 그렇다고 해서 말야···.””
라니엘이 데스텔을 흘겨봤다.”
“내가 딱히 죽자고 가는 건 아니거든.””
“···뭔 소리냐? 그게.””
“죽음을 각오한 건 맞아. 맞는데, 지금 데스텔 네가 하고 있는 생각처럼, 딱히 내 목숨과 맞바꿔서 마왕과 동귀어진할 생각은 추호도 없다는 뜻이야.””
라니엘이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애초에 내가 해야 할 일이 얼마나 많은데? 레스티는 알고 있을걸? 모든 일이 끝나고도, 내가 해야 할 일이 얼마나 많은지.””
마탑의 제 0 지부에서 무엇을 만들고 있는지 알고 있는 레스티다. 레스티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레스티를 흘겨보며 라니엘이 말했다.”
“정말로 내가 마왕과 손잡고 죽어버릴 생각이었다면 레스티에게 따로 말했겠지. 내가 죽거든 무슨 일을 하라고. 내 뜻을 이어달라고.””
그만큼 중요한 일이니까.”
하지만, 하고 그녀가 말했다.”
“난 그런 말 안 했고, 말할 생각도 없다.””
라니엘이 딱 잘라 말했다.”
“데스텔 너는 모르겠지만··· 내게는 반드시 해야 할 일이 있어. 한평생을 바쳐 이뤄야만 하는 일이 있다고. 그리고, 그건 모든 일이 끝나고 나서 이룰 수 있는 거야.””
반드시 이루어내야만 하는 것.”
세상의 진실을 깨달은 그 순간부터, 라니엘이 계획하고 있었던 것. 그것을 떠올리며 라니엘이 웃음을 흘렸다.”
“반드시, 이뤄야 하는 일이지. 내 모든 걸 걸고서라도. 그런 일이 기다리고 있는데 말야···.””
웃으며, 데스텔을 바라봤다.”
“내가 죽겠단 생각으로 마왕한테 덤빌 것 같아? 자살하러 갈 것 같냐고. 야, 데스텔.””
라니엘이 짓궂게 웃었다.”
“내가 그렇게 욕심이 없는 놈으로 보이냐?””
한번 정한 일은 해야만 직성이 풀린다.”
결심한 것은 반드시 이루어야 한다.”
계획을 세웠다면, 과정이야 어찌 됐던 그 결말은 자신이 바라던 대로 쩍 하고 갈라져야 한다.”
라니엘 반 트리아스는 그런 인간이다.”
고집이 세고, 승부욕이 강하며, 어딘가 비틀린 인간. 데스텔은 라니엘의 질문에 쉽사리 고개를 끄덕일 수 없었다. 확실히, 라니엘이 그리 쉽게 제 목적을 포기할 인물로는 안 보였기에.”
“···정말로 가능하다고 생각하는 거냐?””
그렇기에 데스텔은 질문했다.”
고작 둘, 혹은 하나만을 대동한 채 가니칼트를 토벌할 수 있겠냐고. 너 혼자서 마왕을 토벌할 수 있겠냐고. 그 질문에 라니엘이 답했다.”
“내가 확신하지 못하는 건 전자야.””
라니엘이 어깨를 으쓱였다.”
“후자의 경우는, 어떻게든 돼. 못할 건 또 뭐야?””
그녀가 미소 지었다.”
“카일 그놈이 혼자서 해낸 일을 나라고 못할 건 또 없지.””
카일은 단신으로 마왕을 베었다.”
그 녀석이 해냈는데, 자신도 그와 비슷한 일을 해내야 하지 않겠는가. 걱정 어린 시선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이들을 향해, 라니엘은 가벼운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내가 할 수 있고, 해야 할 일을 한다. 그뿐이야. 그러니까···.””
언제나 입에 담았던 말.”
그 말을 라니엘은 다시 한 번 입에 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