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eat the Hero Party RAW novel - Chapter 475
벨리알은 자세를 잡은 채 벨노아에게 턱짓했다. 어서 자신을 따라 자세를 잡으라고. 벨노아는 길게 숨을 내뱉곤 제 옆에 선 선배의 자세를 따라 했다.”
“지금부터.””
벨리알이 씨익, 미소 지었다.”
“용의 위대함을 저 되다 만 해골뼈다구에게 알려줄 시간이다, 후배.””
스케발은 승리를 확신했다.”
제 눈앞에 있는 것은 피를 흘리는 짐승이요, 죽어가는 용의 모습이다. 제 힘에 취해 날뛸 뿐인 짐승에게 패배할 만큼 스케발은 멍청하지 않았다.”
‘기세가 매섭긴 하지만···.’”
고작 그뿐이다. 승기는 천천히 자신의 쪽을 향해 기울고 있었다. 싸움이 길어지면 길어질수록 패색이 짙어지는 것은 저 짐승의 쪽이다. 긍지 높은 생명체라는 이름에 어울리지 않게··· 저 흑룡은 그야말로 짐승처럼 싸우고 있었으니까.”
닥치는 대로 물어뜯는다. 달려든다.”
제 힘에 취해 날뛸 뿐이다.”
그 기세와 힘은 흑룡 벨리알을 상회하나, 벨리알보다 강하다는 생각은 조금도 들지 않았다. 그늘에 물들어 타락하기 이전의 흑룡을 보았던 스케발은 안다. 그가 얼마나 강한 존재였는지.”
‘완전히 흑룡이 되었을 때조차 그랬다.’”
그 싸움에 끼어들진 못했지만, 그늘의 신전에서 터져 나오는 폭풍을 스케발은 멀찍이서 보았었다. 완전한 존재였던 마왕이 일으키는 파도를 찢어발기고, 그늘의 군세를 불사 지르던 거신룡의 모습을 그는 아직도 기억하고 있다.”
‘그에 비해 저 짐승은 어떤가?’”
보잘것없다. 어설프기 짝이 없다.”
스케발이 제 팔을 휘둘렀다. 한순간에 완성된 수십, 수백의 비수가 흑룡을 향해 날아들었다. 이번에도 맨몸으로 받아내며 목을 물어뜯으려 할 테지. 그 야만스러운 전투에 어울려주는 것도 지쳤다.”
키이이이이잉!”
비수를 쏘아내며 스케발이 안광을 번뜩였다.”
시선을 따라 사슬들이 치솟았다. 과거, 잿빛이 흑룡의 발을 묶었던 것처럼 수천, 수만 다발의 사슬이 흑룡을 향해 사출됐다.”
‘비수로 움직임을 제한하고, 사슬로 속박한 뒤, 이 일격으로 끝내리라.’”
갈비뼈 사이로 흐르는 검은 물.”
수많은 마족들의 원한을 대가 삼아 스케발은 거대한 일격을 준비했다. 처음과 같은 기세를 잃어버린 지금의 저 짐승은 이 일격을 막아낼 수 없으리라.”
챠르르르르르르륵!”
그렇게 뻗어 나가는 사슬을 보며 스케발이 승리를 직감한 순간이다. 제 아가리를 벌린 채 달려들던 흑룡이 한순간 공중에서 멈춰 섰다. 쫙 펼쳐두었던 제 날개를 접어 몸을 웅크렸다.”
그리곤, 화악.”
접었던 날개를 펼치는 순간 폭풍이 몰아쳤다. 몰아치는 폭풍에 비수들이 꺾였다. 흑룡의 몸을 묶으려던 사슬들이 카카캉! 소리를 내며 끊어졌다. 날갯짓 한 번으로 폭풍을 일으킨 흑룡이 제 아가리를 벌렸다.”
키이이이이이이이이이이이잉!”
압축된 열선이 지면을 휩쓸었다. 스케발이 모으고 있던 힘의 격류를 흐트러트렸다. 폭발하는 열선과 함께 피어오르는 불길이 스케발의 시선을 가렸다. 처음과 같은 수법이다. 시야를 가리고 달려들 것이 분명했다.”
‘같은 수에 다시 걸릴 리가.’”
스케발이 제 앞에 숱한 함정을 깔며 불을 걷어낸 순간이다. 그러나 그곳에 흑룡은 없었다. 스케발이 고개를 들어 올렸다. 여전히 흑룡은 하늘에서 날갯짓하고 있었다. 달라진 것은······.”
카, 가, 가가가가가가가가각!”
흑룡을 중심으로 회오리치는 폭풍이다.”
일곱 갈래의 폭풍이 흑룡을 중심으로 맴돌고 있었다. 회전하면 할수록 폭풍은 거세지고, 검게 물들어갔다. 그리하여 폭풍이 완전히 검게 물든 순간.”
후웅, 하고.”
흑룡이 크게 날갯짓했다.”
폭풍이 지면을 휩쓸며 스케발을 향해 밀려들었다. 일곱 갈래의 거대한 폭풍. 폭풍과 함께 흑룡이 스케발을 향해 강하했다. 폭풍은 스케발이 쏘아낸 주문을 모조리 꺾어버리며 흑룡을 수호했다.”
···벨리알이 어찌하여 검은 폭풍이라 불렸던가.”
날갯짓 한 번으로 폭풍을 일으켰으니까. ”
날갯짓만으로 크고 작은 도시들을 폐허로 만들어버렸으니까. 그렇기에 흑룡은 재앙이자, 검은 폭풍이라 불렸던 것이다. 스케발은 제 앞을 바라봤다.”
카가가가가가가가가각!”
땅과 하늘을 이은 채, 모든 걸 갈아버리며 밀려드는 폭풍이 그곳에 있다. 그야말로 재앙과도 같은 풍경. 스케발의 안광이 가늘어졌다. ”
‘한순간에···.’”
흑룡의 움직임이 뒤바뀌었다. 전략이 완전히 변했다. 지금 자신이 마주하는 흑룡은 짐승이 아니라···.”
‘···하늘의 주인.’”
그리 불렸던 긍지 높은 거신룡이다.”
스케발을 향해 기울었던 저울이, 어느새 다시 평형을 이루고 있었다.”
쐐에에에에에에엑!”
스케발이 지면에 새긴 주문 함정을 모조리 폭풍으로 쓸어버리며, 흑룡이 스케발에게 근접했다. 검은 폭풍 사이에서 금빛의 용안(龍眼)이 번들거렸다.”
우인(愚人)의 창을 쥔 채, 아크리타는 눈을 가늘게 떴다. 제 머릿속에 여러 목소리가 울리고 있었다.”
최초의 광인은 말한다.”
이곳에서 도망치라고. 도망치고 도망쳐서 다음을 노리라고. 불리한 무대에서 싸워줄 필요는 없으며, 시간은 우리의 편이라고. 언제나처럼 도망쳐라··· 수만 년의 세월을 암약해온 광인은 소리쳤다.”
하지만, 천혜(天惠)는 말한다.”
어디까지 도망칠 생각이냐고. 또다시 도망친다면 손에 넣을 수 있는 것이 있느냐고 그는 질문했다. 한 자루의 창만을 움켜쥐고 혼돈의 시기를 가로질렀던 천혜는 최초의 광인을 비웃었다.”
그리고, 아크리타는 결정한다.”
그는 언제나 냉철했다. ”
냉철하게 상황을 파악했다. 광인의 말도, 천혜의 말도 모두 옳다. 이곳은 자신에게 불리한 무대이며 승산 또한 희박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하여···.”
‘도망칠 수도 없지.’”
도망가고자 한다면 할 수는 있으리라.”
진체를 버리고, 쌓아왔던 모든 것을 버리고, 자신을 죽일 수 있는 저 칼날들을 이 자리에 남겨 둔 채 도망친다면··· 도망칠 수는 있다.”
글레투스에게서 도망쳤던 것처럼.”
가니칼트에게 도망쳤던 것처럼.”
하고자 한다면 못 할 것은 없었다.”
다만, 귓가에 맴도는 것은 천혜의 비웃음이다. 이번에도 도망친다면 이룰 수 있는 것이 있겠냐고. 과연 그의 말대로다. 글레투스와 가니칼트 때와는 상황이 많이 달랐으니까.”
‘이곳에서 도망쳐도···.’”
살아남지 못한다.”
도망쳐도 자신을 죽일 칼날들은 이곳에 남아있다. 하물며 저 와쳐는 자신의 위치마저 특정할 수 있다. 저들의 추격을 자신은 뿌리칠 수 있는가?”
라니엘이 마왕과 공멸했다면, 가능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 빌어먹을 잿빛조차 건재하다면··· 가능성은 희박하다 못해 없는 거나 마찬가지다. 도망친다 한들 지금보다 더욱 불리해진 전장에서 저들 모두를 상대해야 하리라.”
‘잿빛 마법사, 카일 토벤까지 함께 말이지.’”
웃음이 새어나왔다.”
도망쳐봐야 답이 없다. 언제나 선택을 강요해왔던 아크리타는, 지금 선택의 갈림길에 섰다. 체스판의 너머에서 라니엘이 미소 짓고 있었다.”
‘도망치든가. 맞서 싸우든가.’”
어느 쪽이든 잃게 된다.”
어느 쪽이든 손해를 보게 되는 선택지뿐이다. ”
“아아, 이런 기분이었겠군.””
광인은 비웃음을 흘리며 제 손에 들린 우인의 창을 바라봤다. 입가에 맺혔던 자조적인 웃음이 조금씩, 조금씩 비틀리기 시작했다. 조소가 광소로 변질했다.”
즐겁다는 듯이.”
참을 수 없이 즐겁다는 듯이.”
아크리타가 광소하며 창대를 휘둘렀다. 밀려드는 파도를 가르며 광인이 제 머리칼을 쓸어 올렸다. 강요되는 선택지. 갈림길에 선 자신. 지금 이 순간이 되어서야 아크리타는 인간의 편린을 마주했다.”
수만 년을 살아왔거늘, 이제서야 인간을 편린이나마 이해하게 되다니. 참으로 웃지 못할 농담이다.”
다가오는 것은 죽음이다.”
언제나 자신에게서 멀리 떨어져 있었고, 마주할 일이 없었던 죽음이 다가온다. 다가오는 죽음 앞에서 아크리타는 웃었다. 즐겁게 웃었다. 죽음 앞에 인간이 느껴야 할 절대적인 공포가 아크리타에겐 부재했다.”
애초에, 아크리타는 공포를 느끼지 않았다.”
그렇기에 그는 인간을 이해하지 못했으며, 그렇기에 그는 인간으로서 결여되어 있었다.”
“오라.””
오라, 죽음이여.”
아크리타가 창대를 움켜쥔 채 죽음을 향해 달려들었다. 극복해야 할 공포는 없었다.”
포말하는 파도가 아크리타의 팔뚝에 튀었다. 치이이익, 살이 타들어 가고 피가 흘렀다. 흩날리는 꽃잎이 아크리아의 피부를 스치고 지나갔다. 칼에 베인 듯이 피가 길게 튀었다. ”
튀어오르는 피. 느껴지는 고통. 유혈.”
아크리타는 웃음을 흘리며 질주했다.”
자신을 향해 달려드는 전사들을 향해 창대를 휘둘렀다. 이길 수 없는 전장이다. 그렇다면 하다못해 저들에게 완벽한 승리를 안겨주지는 않으리라. 죽는 그 순간마저 추하고 볼품없게 물어뜯으리라.”
그리 마음먹는다면.”
또 혹시 모르는 일이지 않은가?”
저들에게 일어난 기적이 자신에게도 일어날지. 자신 또한 갑작스레 한계를 뛰어넘어 이 불리한 전황을 뒤엎어버릴지. 그것은 아무도 모르는 일이었다. 아크리타는 동전을 던졌다. 앞면이 나왔는지, 뒷면이 나왔는지 바라보지 않은 채 그는 달렸다.”
언제나 무대의 뒤편에서 암약해오던 광인이 무대 위로 내려왔다. 자신이 비웃고, 농간하며, 선택지를 강요했던 이들과 같은 존재가··· 배우가 되어 아크리타는 무대 위에서 피를 흘렸다.”
카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앙!”
데스텔이 휘두른 구원의 창과, 아크리타가 휘두른 우인의 창이 맞부딪쳤다. 거친 마찰음과 함께 아크리타가 데스텔을 향해 고개를 들이밀었다.”
“너로구나.””
아크리타가 웃음을 터뜨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