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eat the Hero Party RAW novel - Chapter 508
보이고 있었으니까.”
요르문의 여유가 사라졌기에, 그가 한 번이지만 천리(天理)를 펼쳐 보였기에, 전력을 끌어내고 있기에 비로소 보이는 것이 있었다.”
···인도자로서의 자질을 개화하며, 만능에 가까운 힘을 손에 넣었던 라니엘이다.”
너무나도 많은 것이 가능했기에 도리어 그녀는 제한적으로 주문을 펼쳐왔다. 자신이 지닌 힘을 어떤 식으로 다뤄야 할지 제대로 알지 못했으니까. 그녀의 곁에는 인도자가 없었고, 그 힘을 다루는 방식을 알려줄 스승이 없었다.”
언제나 홀로 답을 찾아왔을 뿐이다.”
어둠을 더듬으며 천천히 나아갔을 뿐이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라니엘은 눈이 뜨인 것만 같은 감각을 느꼈다. 더는 어둠을 더듬으며 천천히 나아갈 필요가 없었다. 눈앞에 답이 있었으니까.”
‘가장 오래된 인도자, 요르문.’”
그 누구보다도 높은 곳에 올랐던 마법사.”
자신이 걸으려는 길을 이미 걸었던 선배. 인도자로서의 길의 끝에 도달한 인물이 제 앞에 서 있었다. 그가 주문을 어떤 식으로 다루는지 라니엘은 보았다. 그의 별자리가 물결치는 모습을 시야에 담았다.”
후두둑.”
핏발이 선 눈에서 피가 흘렀다.”
코에서, 귀에서, 입에서 피가 흘렀다. 인지를 벗어난 지식을 받아들인 대가다. 하지만 라니엘은 지식을 삼키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보아라. 단 하나도 놓치지 마라.’”
보았다. 보았기에 깨달았다.”
깨달았기에 자신의 것으로 만들었다.”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 변형했다.”
타인의 한평생을 한순간으로 만들어버리는 것이 천재라면, 라니엘은 천재였다. 요르문이 흘리는 피를 마시며 라니엘은 앞으로 나아갔다. 보이지 않는 길을 더듬으며 내딛던 발은 이제 땅을 박차고 달리고 있었다.”
주문이 번뜩였다.”
회로가 찬연히 빛났다.”
요르문이 쌓아온 것을 라니엘은 자신이 걸어온 마도(魔道)에 맞춰 깎아냈다. 자신의 것으로 만들며 요르문을 향해 나아갔다. 빠르고, 정교하고, 매끄럽게 주문과 주문들이 맞물렸다.”
콰아아아아아아아아앙!”
폭발과 함께 시야가 걷혔다.”
주문들을 걷어내며 라니엘이 걸음을 내디뎠다. 어느덧 요르문의 바로 앞까지 라니엘은 도달해 있었다.”
콰직.”
별자리를 두른 요르문의 손아귀와 라니엘의 역뢰가 맞부딪쳤다. 밀려나는 것은 당연히 라니엘이다. 다만 이전처럼 아예 튕겨 나가진 않았다. 밀려난 것은 단 한걸음. 그것이 두 사람 사이에 놓인 간극이었다.”
‘앞으로 단 한 걸음.’”
주문과 주문이 서로를 집어삼켜 새하얗게 물든 공간 속에서 두 마법사의 손짓이 교차했다.”
손짓과 손짓이 교차했다.”
범람하는 회로와 별자리가 서로 뒤엉켰다. 그물처럼 펼쳐진 별자리와 찬연히 빛나는 회로는 이제 분간이 가질 않았다. 요르문의 별자리와 맞부딪칠수록 라니엘의 회로는 별자리를 닮아가고 있었다.”
회로를 새기던 라니엘은 불현듯 깨달았다.”
저 밤하늘의 별자리의 본질이 회로와 같다는 사실을.”
인도자가 되어 세상을 둘러싼 규율을 훔쳐보게 된 라니엘이다. 규율과, 규율을 이루는 별자리를 바라보고 있는 지금 그녀의 시야에는 평소와 다른 것들이 보였다. 지금껏 당연하게 해왔던 것들이, 다만 당연치 않게 느껴졌다.”
그녀는 곱씹었다. 주문과 회로의 본질을.”
주문은 회로에서부터 온다.”
회로는 별에게 거래를 요청하는 것. 하지만 별은 거래를 돕는 다리와 같은 역할을 할 뿐, 별을 거치지 않고서도 마법은 얼마든지 쓸 수 있다. 지금 자신이 그리하고 있지 않은가.”
‘그렇다면, 마법사가 건드는 것은 무엇인가?’”
규율 그 자체다. 세상을 돌아가게 하는 기본적인 규율. 세상의 균형을 맞추는 규율에 마법사는 작게나마 간섭해오고 있던 것이다.”
회로를 통해 대가를 바치고.”
바친 대가에 걸맞은 권리를 얻고.”
그 권리를 사용해 규율을 고친다.”
물론 대부분의 마법이 규율에 깊게 관여하진 못한다. 규율의 위에 회로를 덧칠한다 하여 그것이 규율이 되는 것은 아니니까. 마법사의 회로는 시간이 지나면 사라지고, 바람에 휩쓸려 사라질 행위에 불과하다.”
‘···하지만.’”
라니엘은 앞을 보았다.”
그곳엔 규율에 덧칠한 회로가 아니며, 시간이 지나면 쓸려나갈 회로가 아닌··· 규율 그 자체가 되어버린 회로가 존재했다. 태초의 시대에 요르문과 글레투스가 하늘에 새겨넣었다는 단 하나의 별자리.”
저것은 어찌 보면 하나의 회로였다.”
누군가의 개입이 없다면 영원불멸할 회로.”
결국 저것이 자신이 도달해야 할 영역이었다.”
핏발이 선 눈동자로 라니엘은 회로를 바라봤다. 요르문과 자신 사이에 놓인 한 걸음의 간격, 그 간격을 메꿀 정답이 저곳에 있었으니까.”
후두둑.”
피가 떨어졌다. 머리가 뜨거웠다.”
지금 이 순간 라니엘은 기이한 감각을 느꼈다. 모든 감각이 한계까지 곤두섰다. 시간이 한없이 느리게 흐르는 것만 같았다. 머릿속에서 수많은 회로가 조립되고 해체되길 반복했다.”
마치, 수명의 절반을 바쳤던 그날처럼.”
살아남기 위해 답을 찾으려 했던 그날처럼.”
쿵쾅거리는 심장, 거친 숨소리, 타들어 가는 열기, 고막을 울리는 굉음··· 수많고 수많은 것들 사이에서 라니엘은 요르문이 쥔 별자리에 몰입했다. 그녀의 푸르스름한 눈동자에 담긴 불길이 일렁였다.”
그리고.”
요르문이 쥔 별자리가 번뜩였다.”
요르문이 눈살을 찌푸렸다.”
카일에 의해 숨긴 수가 까발려지고, 별자리의 배열마저 흐트러진 지금 그는 초조함을 느끼고 있었다. 다름 아닌 제 앞에 바로 선 한 명의 인간 때문에.”
번쩍.”
주문과 주문이 충돌해 상쇄된다.”
번뜩이는 열기와 섬광을 꿰뚫으며 라니엘이 손을 뻗어왔다. 별자리를 새긴 손으로 요르문은 그 손아귀를 기어코 쳐내지만, 라니엘은 저 멀리 밀려나지 않았다.”
한 걸음.”
일보(一步).”
고작 그 정도 거리만큼을 밀려나선, 한 번 숨을 내뱉기도 전에 다시 따라붙었다. 그 과정이 반복될수록 그녀의 회로는 정교해졌으며, 그녀가 손에 두른 검붉은 번개는 더욱 짙어졌다.”
성장하고 있는 것이다.”
기어코, 자신을 따라잡으려 하는 것이다.”
지금과 같은 상황을 요르문이라하여 예상치 못한 것은 아니다. 그렇기에 수를 최대한 숨기고 별자리를 드러내지 않은 채로 짓밟으려 한 것이 아닌가. 하지만, 아무리 그렇다 한들···.”
‘이건, 너무 빠르다.’”
요르문의 눈동자가 가늘어졌다.”
빠르다. 빨라도 너무나도 빠르다. 계기를 맞이한 인도자의 성장이 비정상적인 속도라곤 하나, 이건 도를 넘었다. 요르문 자신과 글레투스조차 저런 속도로 성장하진 못하지 않았던가.”
처음 고룡의 도시에서 마주했던 라니엘은 인도자로서 완전히 개화하지 못했다. 그렇기에 요르문은 짓밟을 수 있다고 확신한 것이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자신에게 달려들고 있는 라니엘은··· 완성을 목전에 두고 있었다. 별자리를 닮아가는 그녀의 회로를 바라보며 요르문이 신음했다. 더욱더 거세지는 역뢰가 요르문의 살갗에 파고들었다.”
한 걸음.”
정말 단 한 걸음만이 남아 있었다.”
‘이래서야···.’”
따라잡히고 만다.”
요르문이 이를 악물었다. 이미 여유는 사라진 지 오래다. 이제는 그 또한 선택을 내려야 했다. 라니엘에게 천리를 펼쳐 끝장낼 것인가, 아니면 이대로 조금씩 깎아내려 그녀를 죽음으로 내몰 것인가.”
요르문은 직감했다.”
지금의 라니엘에게 다시 한 번 천리를 보인다면 그 순간 라니엘은 완성될 것이라고. 천리를 꺼내는 순간 정말로 끝을 내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눈앞의 인간은 자신과 같은 경지에 서게 될테니.”
‘하지만 그럼에도···.’”
이대론 끝내지 못한다.”
승부수를 던져야 했다. 결국 요르문은 결정을 내렸다. 그가 들어 올린 발로 땅을 내려찍었다. 별자리가 한순간 세차게 점멸했다. 요르문의 손아귀를 중심으로 별자리들이 재정렬했다.”
세상이 뒤흔들렸다.”
요동치던 주문의 불길도, 섬광도 한순간에 고요해졌다. 멈춘듯한 시간 속에서 별빛이 범람했다. 요르문의 손아귀에 모여드는 별자리가 형태를 이룬 순간이다.”
드디어, 하고.”
라니엘이 웃었다. 그녀는 물러서지 않는다. 범람하는 별빛을 향해 한 걸음 더 앞으로 내디뎠다. 부릅뜬 눈동자로 요르문이 손에 쥔 별자리를 보았다.”
온다. 하늘의 섭리가.”
단 하나의 규율, 천리(天理)가.”
밀려드는 하늘의 규율, 별자리를 향해 라니엘은 손을 뻗었다. 인간은 빛나는 별을 향해 손을 뻗었다. 그것을 움켜쥐어 자신의 것으로 만들고자.”
천리를 마주한 순간 라니엘은 한없이 거대한 벽을 느꼈다. 역천을 마주했을 때와는 다른 느낌이다. 이건 이해할 수 없는 것이 아닌··· 마법으로, 다만 회로로 쌓아올린 거대한 벽이다.”
별자리에 새겨진 것은 수많은 회로다.”
태초의 시대에 요르문이 만들었다고 알려진 주문언어들이 별자리에 빼곡하게 새겨져 있었다. 회로와 회로가 맞물려 단 하나의 회로를 이루었다.”
번쩍.”
빛나는 별자리를 요르문이 움켜쥔 순간 별자리는 형태를 이루었다. 하늘을 향해 가지를 뻗은 나무와 같은 빛 기둥으로 별자리는 변했다. 얼핏 보면 창 같기도, 하늘에서 내리치는 천둥을 붙잡은 것 같기도 하다.”
그것이, 자신을 향해 밀려든다.”
요르문이 쥔 별자리의 창날은 닿는 모든 것을 흐름으로 휩쓸었다. 마치 파도가 치듯이 창날에 닿은 풍경이 뒤섞였다. 라니엘의 회로라 하여 다를 바 없다.”
챠아아아아아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