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eat the Hero Party RAW novel - Chapter 72
〈 72화 〉 차기 마탑주, 레스티(下)
* * *
만난 적이 있다.
많다.
그 대답은 어느 정도 예상을 했던 것이다. 레스티는 라니아 교수에 대해 꽤 많은 것을 알고 있었다.
잿빛 마탑에도 그 기록이 올라와 있으니까.
‘로셀 교수에게 십 년간 가르침을 받았다.’
라니엘의 이름에 묻히긴 했지만, 그녀 또한 로셀의 오랜 제자 중 하나였다. 잿빛 마법사가 사라지고 나서야 정식으로 제자로서 올라온 인물.
그리 드문 일은 아니었다.
마도 가문은 일인 전승의 느낌이 강하긴 하지만, 만약을 대비하여 한 명 정도 더 제자를 들여두는 일도 종종 있었으니까.
레스티는 생각한다.
십 년 전이면, 잿빛 마법사가 막 잿빛 마탑에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한 시기다.
‘그리고, 라니아 교수님과는 접점이 있을 테지.’
십 년을 그 마법사의 그늘에서 산 인물이니까.
라니아 교수가 로셀 원로의 양녀로서, 제자로서 인정받은 건 최근이다.
장장 십여 년.
쉽게 짐작이 가지 않은 시간을, 그녀는 잿빛 마법사의 그늘에 숨어 살았을 것이다.
그런 인물에게 이런걸 묻는 것은 굉장히 무례할지도 모른다. 어쩌면 트라우마를 건드릴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레스티는 입을 열었다.
여태까지 묻지 못했던 것을 질문했다.
“···라니엘 님은 어떤 분이셨나요?”
“어떤 분이라니?”
“마탑에서 몇 번 본 적이 있어요. 그러나, 어떤 분인지 도저히 감이 잡히질 않아서···.”
계속해서 비교당했다.
그러나, 레스티는 정작 잿빛 마법사에 대해 아는 것은 얼마 없었다. 늘 업적으로만 그를 마주했다.
잿빛 마법사.
라니엘 반 트리아스.
업적으로서가 아닌, 사람으로서의 라니엘을 레스티는 알지 못한다. 그건 레스티 뿐만이 아닐 것이다. 잿빛 마탑의 마법사들도 그러하다.
라니엘이란 인물의 상징성을 안다.
그가 쌓아 올린 업적과 위업을 안다.
그러나, 라니엘이란 인물은 알지 못한다.
“그분이 어떤 분이셨을지.”
레스티는.
“차기 마탑주로서, 어떻게 살았을지.”
그것이 궁금했다.
“그걸 여쭤보고 싶어요.”
그렇게 질문을 입에 담고, 레스티는 라니아 교수의 눈치를 살폈다. 생각과는 달리, 기분 나빠 하지는 않는 것 같았다.
“으음···.”
오히려 난해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글쎄.”
이윽고, 그녀가 힘겹게 입을 열었다.
“너랑 닮은 것 같은데?”
“···네?”
예상치도 못한 대답이다.
그 대답에 레스티가 눈을 깜빡였다. 라니아 교수는 커피잔을 기울이며 말했다..
“잿빛 마법사가 차기 마탑주로 처음 올랐을 때, 당시의 마탑 상황을 알고 있니?”
“···아뇨, 그때는 제가 마탑에 없었어서.”
“잿빛 마탑에 언제 들어왔다고 했지?”
“들어온 지는 6년 정도 됐어요. 차기 마탑주로 선정된 건··· 3년 정도 전이에요.”
“6년 전이면··· 잿빛 마법사가 마탑을 뜨기 직전이구나? 그럼 모를 만도 하겠네.”
그녀가 쓰게 웃었다.
“그 사람도 너랑 썩 다르지 않았어.”
“···다르지 않았다뇨?”
“너처럼 무시당했단 소리야. 원로들한테 까이고, 동료 마법사들한테 따돌림당하고··· 뭐 그런것들. 잿빛 마탑이 어지간히 살벌해야지.”
“···네?”
그 잿빛 마법사가 푸대접을 받았다고?
‘나하고 닮았다고?’
레스티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마탑에 머무를 동안 우연히 마주쳤던 잿빛 마법사는··· 언제나 당당했다. 그 어깨를 움츠리는 일이 없었다.
그가 지나갈 때마다 마법사들은 자세를 바로잡는다. 연구 결과를 하나라도 더 보이고자, 라니엘의 시선이 닿는 곳에 깔짝대곤 한다.
잿빛 마법사 라니엘은, 그런 인물이었다.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빛나는 인물.
‘···그런 마법사가, 무시당했다고?’
그 모습이 쉽게 상상이 가질 않았다.
레스티가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자니, 라니아 교수가 말을 이었다.
“너, 출신 들고는 갈굼 받지 않지?”
레스티는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출신 가지고는 갈굼을 받아본 적이 없는 것 같았다.
“그건 다행이네.”
라니아 교수는 커피잔을 흔들려 말을 이었다.
“잿빛 마법사는 바로 그 출신 때문에 까였어. 고향도 잃은 비루한 출신의 마법사가 무얼 알겠냐고. 그런 식으로 까였지.”
“···고작 출신 때문에요?’
“응, 고작 그 출신 때문에. 일단은 트리아스 가문의 양자긴 했지만··· 피난민 출신이었으니까. 정말 우습게도, 논문이 더럽다는 이유로 봐주지도 않았다더라.”
듣다 보니 어이가 없을 지경이었다.
그런 레스티의 표정을 보며, 라니아 교수는 피식 웃음을 흘렸다.
“어이가 없지?”
“그게··· 네.”
“네 출신이··· 음, 좀 미안한 말이긴 하지만 너도 양녀로 들어왔지?”
“네, 고아원 출신이에요.”
“그래. 그래도, 원로들이 네 출신으로는 까지 않은 이유를 생각해보면··· 그걸 까면 잿빛 마법사까지 한꺼번에 까야 되니까 그럴 거야.”
“···원로들이 잿빛 마법사를 천대했다고 하지 않으셨나요?”
“다 옛말이지.”
그녀가 어깨를 으쓱였다.
“지금의 잿빛 마탑에선 그 누구도 잿빛 마법사를 까지 못할걸? 안 그래?”
“·····.”
레스티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그 누구보다 자신이 잘 알고 있다. 계속해서 비교를 받는 입장이었으니까.
“왜 그랬겠어?”
라니아 교수가 꾸욱, 하고 커피잔의 뚜껑을 검지로 눌렀다.
“찍어눌렀으니까.”
커피잔의 뚜껑이 움푹 들어갔다.
“업적으로 증명했으니까. 그 누구도 무시 못 할 실적으로, 원로들을 찍어 눌렀으니까.”
그녀가 레스티를 돌아본다.
“그리고, 그건 하루아침에 벌어진 일이 아니지.”
“·····.”
“굉장히 오래 걸렸어. 오랫동안··· 음, 계속해서 원로와 각을 세우며 싸웠거든.”
그 말에 레스티는 눈을 깜빡였다.
“난 그 사람을 가까이에서 봤어. 그 사람도, 처음에는 엄청 고생했거든. 하루에도 몇 번이고 마법사들을 다 때려죽이겠다며 이를 갈더라니까?”
레스티는 라니아 교수를 바라봤다.
그녀의 눈은 먼 곳을 바라보는 듯 했다.
“원로들을 갈아 마시겠다며, 잠도 줄여가며 레포트를 쓰곤 했어. 마탑에서 무시당하는 건 일상이었고, 집으로 돌아와선 어울리지도 않게 술을 처마시곤 했지. 스승님께 징징거리기도 했고.”
그 마법사에게, 그런 인간적인 면모가 있다고?
레스티는 눈을 깜빡이며 되물었다.
“···정말 그랬어요?”
“응, 가까이에서 봤으니까.”
라니아 교수는 커피를 홀짝이며, 그리운듯한 눈동자로 먼 곳을 바라봤다.
“다들 착각하는 거지. 천재라고 추켜세우고, 전무후무한 마법사라며 동경하지만··· 한 꺼풀만 까보면 말야.”
그녀가 웃었다.
“그 사람도, 너랑 별반 다를 거 없어.”
“·····.”
“그냥 버틴 거겠지. 열심히, 이 악물고.”
레스티는 입을 다물었다.
지금까지 들었던 말을 곱씹는다. 라니아 교수는 계속해서 말했다.
“잿빛의 차기 마탑주란게 그래. 그 자리에 앉기만 하면 뭐든 될 것 같은데··· 사실 그런 게 아닌 거지.”
툭.
“갈굼 받고, 자리에서 물러설 때까지 깎아내려. 계속해서, 끊임없이 말야. 눈엣가시 같은 존재니까. 차기 마탑주가 없어도 탑은 돌아갈 거고.”
툭.
“그러니, 여태까지 잿빛 마법사를 제외한 많은 차기 마탑주들이 꼭두각시가 된 거겠지. 다 귀찮아졌으니까. 남에게 떠넘기는 거지.”
커피잔을 건드리던 손가락을 든다.
“그래도.”
그 손가락이 가리키는 곳은 레스티다.
“너는 아니어 보여.”
“·····.”
“바라는 게 있지?”
“···네.”
“차기 마탑주의 자리는 아무래도 좋아. 다른 목적이 있는 거지? 사실 그 목적이 거창하지도 않을 거야.”
누구에게도 털어놓지 않은 속내다.
그러나, 레스티는 무심코 고개를 끄덕였다.
“···네, 있어요.”
“인정받고 싶다.”
툭, 하고 라니아 교수가 내뱉었다.
“한 명이라도 좋다. 그 사람이 날 자랑스럽게 여겨주면 좋겠다. 그 사람이 날 거둔 게 맞는 선택이었다고, 내가 증명하고 싶다.”
레스티가 숨을 삼켰다.
“그걸 어떻게···.”
“잿빛 마법사가 그랬으니까.”
그녀가 웃었다.
“내가 그랬고, 잿빛 마법사가 그랬을 테니까.”
라니아 교수가 먼 곳을 바라보며 미소지었다.
“사실은, 누가 날 뭐라 해도 좋아. 날 무시해도 괜찮아. 다 괜찮은데···.”
그녀가 말했다.
“나를 거둬준 사람을 무시하는 건 싫잖아. 그러니, 그 자리에 아득바득 올라가서 버티고 있는 거고.”
그랬다.
레스티는 무심코 고개를 끄덕였다.
‘···장로님이 무시당하는 게 싫었으니까.’
자신을 깎아내리는 목소리가 있다. 많았다.
그것은 단순히 자신만을 겨냥하지 않는다.
자신이 부정당한다는 것은, 자신을 거둔 장로가 부정당하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그것을.
그 무엇보다도, 그것을 레스티는 견딜 수가 없었다.
“그런 무언가 없이, 차기 마탑주 자리에 올랐다면··· 3년을 버틸 수 없었을 테니까.”
레스티는 그녀를 바라본다.
그녀의 푸른 눈동자를 마주한다.
“···라니아 교수님은.”
그리고, 아까 채 묻지 못했던 질문을 꺼냈다.
“잿빛 마법사님의 뒤를 잇는 자리가, 그 자리에 걸린 기대가 무겁다고 생각한 적이 없으세요?”
생각해보면 그렇다.
눈앞의 이 교수는, 십 년을 잿빛 마법사의 그늘에서 살아왔다. 비교당하며 살아왔다.
십 년의 기다림이다.
세간에 모습도 드러내지 못한 채, 십 년을 기다렸다.
그리고 바깥으로 나왔을 때.
로셀 원로에게 제자로 인정받고, 트리아스의 성을 받고 세간에 모습을 드러냈을 때.
‘그 처음부터.’
이 사람은 당당했다.
남의 시선 따위에 주눅 들지 않았다. 그 사실이 레스티는 마냥 신기했다.
자신이었다면.
쏟아지는 시선을 견디지 못했을 것이다.
“···그만두고 싶다고, 생각하지 않으셨나요?”
그 물음에, 라니아 교수는 눈을 깜빡인다.
감았다 뜬 눈동자가 가늘어진다.
착각이다.
그녀가 무엇을 묻는지, 라니아는 얼추 감을 잡았다. 그녀가 묻고 있는 것이 착각이란 것도 이해한다.
그러나.
레스티는 모를 일이지만, 그 착각은 마냥 틀린 것은 아니었다.
자리의 무거움.
자리에 기대되는 시선.
그런 것들은 잿빛 마법사가 매일 같이 느끼던 것이었으니까.
“글쎄.”
라니아를 연기하던 라니엘은 웃는다.
저건 착각이다. 그러나, 상대가 착각하였다 하여 자신이 꼭 거짓말을 할 필요는 없다.
그녀는.
라니아가 아닌, 라니엘로서 그 질문에 답한다.
“무겁긴 했지.”
차기 마탑주의 자리는 무거웠다.
용사파티의 현자라는 자리는, 더욱더 무거웠다.
“내 실수는 나만의 것으로 끝나지 않으니까.”
스승님의 평판에 금이 간다.
전장에서의 실수는 누군가의 죽음으로 이어진다.
“상징적인 자리가 다 그렇지, 뭐. 무겁기도 하고··· 때려치우고 싶다는 생각도 매일 같이 들었지.”
기대하는 바가 많다.
“언제나 완벽해야 하니까.”
잿빛 마탑의 마탑주로 있었을 때는 그나마 괜찮았다. 그러나, 전장에서는 달랐다.
현자, 라니엘 반 트리아스.
용사파티의 일원, 잿빛 마법사.
그 이름이 가지는 의미는 크다. 모두가 자신에게 기대를 한다. 자신이 전장에 나타났을 때는, 언제나 희망의 상징이 되어야만 했다.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도 희망을 가져야 했다.
흑룡에게 전선이 붕괴되고, 지휘관을 잃어 와해하는 기사단을 붙잡아야 했고.
수백 년을 살아온 고대 리치가 파둔 수많은 함정을 간파해야 했으며, 대응책을 마련 해야만 했다.
‘어디 그뿐이겠어.’
배교자 글레투스를.
죽음의 칼 가니칼트를 마주쳤을 때도.
답이 나오지 않는 상황에선, 기사단도, 용사도, 성녀도, 신궁도, 전부 라니엘을 바라봤다.
‘나라면, 답을 찾아줄 거라는 기대감 어린 시선으로 말야.’
언제나 그랬다.
별이여.
마왕을 마주했을 때 역시 마찬가지였다.
내 수명의 절반을 바치겠다.
라니엘은 어떻게든 방법을 찾아야만 했다. 그것이 현자에게 기대되는 역할이었으니까.
그 역할은 무거웠다.
당장이라도 그만두고 싶고, 때려치고 싶을 정도로.
“그래도, 말야.”
그때마다 라니엘은 생각했다.
라니엘.
스승에게 들었던 말을.
잃을 것을 두려워하여 도전을 망설이지 말아라. 마법사는 계산적인 존재기 이전에 도전하는 존재다.
그 말을 떠올리곤 했다.
네게 만족스러운 삶을 살 거라.
“때려치우면 후회할 것 같았거든.”
라니엘은 라니아로서, 교수로서, 어쩌면 스승으로서 레스티를 바라본다.
“무겁고, 힘들고, 더럽게 귀찮지만··· 관두면 후회할 것 같았거든. 내가 만족 못할 것 같았어.”
“·····.”
“너도 그렇지 않아?”
라니아는 커피를 한 모금 마신다.
그리곤 툭, 내뱉었다.
“후회할 것 같으니까, 아직 그 자리를 붙잡고 있는 거 아니야?”
“·····.”
천천히.
아주 천천히, 레스티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 모습에 라니아는 웃는다. 웃으며 생각한다.
‘나는 결국 후회할 선택을 했지만 말야.’
조금 더 버텨볼까, 그런 생각도 한다.
그래도 다 지나간 일이니, 먼저 비슷한 삶을 살아본 선배로서 라니아는 조언한다.
“마법사가 다 그렇더라.”
그녀가 웃었다.
“그러니까, 마법사가 제명에 못 죽는 거겠지.”
삶의 선배로서의 웃음이었다.
레스티는 한동안 그 웃음을 바라봤다.
3.
후회할만한 선택을 하지 마라.
만족할만한 선택을 해라.
‘참 별거 아닌 말인데···.’
우습게도, 가장 듣고 싶었던 말이었다.
‘누군가 그렇게 말해주길 바랐으니까.’
그 말은, 기억 속의 장로의 말과 닮은 구석이 있었다. 레스티는 그 말에 대해 생각해본다.
‘만족할만한 선택.’
결국에, 원점이다.
그러나 이제서야 출발선에 선 듯한 기분이 든다.
“···그렇네요.”
무심코 웃음이 새어 나왔다.
언제부턴가 스스로에게 묶어두었던 사슬은 이제 없다. 눈에 아른거리는 별빛을 의식하며 레스티는 다짐을 한다.
당장 바뀌는 건 아무것도 없다.
이제부터 바꿔 나가야 할 것들뿐이다.
여태까지와 다른 점이라곤. 그저, 그것들을 바라보는 시선이 조금 달라졌다는 것 뿐이다.
‘이제부터는···.’
레스티가 그렇게 다짐을 다지려는 순간이다.
“음···.”
문득 라니아 교수가 팔을 쭉 뻗었다.
“사실 고민을 좀 했는데.”
그리곤 레스티의 눈앞에서 손을 쫙 펼쳤다. 그 손에 들린 것을 레스티는 바라봤다.
“이 정도는 도와줘도 될 것 같아서.”
“···이게, 뭔가요?”
그 손에 놓인 것은 열쇠였다.
마나가 흐르는 것으로 보아, 마도구와 상호작용을 하는 종류의 열쇠인듯싶었다.
“마탑에 아직 잿빛 마법사의 연구실이 남아있지?”
“아, 네··· 혹시 돌아올 날을 고려해서 남겨두었다고 들었어요.”
“음··· A3 던가? A3 라인에 세 번째 서랍.”
“···네?”
라니아 교수가 쓰게 웃었다.
“잿빛 마법사가 떠나기 전에 남기고 간 거거든. 혹시라도··· 원로가 좆같게 굴면 그 서랍에 담긴 걸 눈앞에 던져버리라고.”
“···던져… 버리라구요?”
“나도 잘은 모르지. 그냥, 그걸 던지면서 요구사항을 말하면 어느 정돈 들어줄 거래.”
그녀가 눈짓했다.
“뭐해? 빨리 안 받아가고.”
“···이건, 라니아 교수님께 남긴 게 아닌···.”
“내가 잿빛 마탑에 가서 뭐 하게? 난 귀찮은 건 딱 질색이거든.”
레스티가 받아가지 않자, 결국 라니아 교수는 레스티의 손을 쫙 펼쳐 억지로 열쇠를 쥐여주었다.
“···이런 걸 제가 받아도 되는···.”
“그냥 받아놔.”
그녀가 어깨를 으쓱여 보였다.
“각 반 1등에겐 교수가 추천서라도 써주는 모양인데, 내가 당장 써줄 수 있는 추천서가 없으니··· 이거라도 주는 거지.”
“···1등이요?”
“응, 네가 1등. 이거 어디 가서 말하면 안 된다?”
그녀가 짓궂은 웃음을 흘렸다.
그 웃음에 레스티는 고개를 갸웃거린다.
“···다 못 풀었는걸요?”
“7번까진 풀었잖아. 그렇게까지 설명해줬는데, 다른 애들은 6번도 겨우 풀었더라고. 네가 독보적으로 1등이야.”
이상하지, 진짜?
풀만 한 문제였던 거 같은데.
그렇게 툴툴거리는 그 모습에, 레스티는 문득 웃음을 흘리며 답했다.
“문제가 너무 어려웠으니까요.”
“그렇게 설명을 열심히 해줬는데?”
“설명을 듣는다고 다 풀 수 있는 건 아니잖아요. 시간도 조금 촉박했고.”
뭔가, 이상하다.
“···그런가?”
“교수님 수업이 어렵긴 해요.”
“진짜? 하면 되던데···.”
이렇게 편하게 말해본 게 얼마 만일까.
목이 근질거리는, 조금 이상한 감각이었다.
“·····.”
레스티는 자신의 손에 놓인 열쇠를 바라봤다.
낡은 구릿빛의 열쇠.
그 열쇠를 손에 쥔 채, 레스티는 시계를 본다.
댕, 대엥.
때마침 종소리가 울렸다.
학생들이 각 기숙사로 돌아갈 시간이었다. 테러 사건 이후로 한시적으로 아플리아는 기숙사의 통금시간을 앞당겼다.
이제 막 해가 지는 시간임에도 불구하고, 슬슬 돌아갈 시간이 된 것이다.
“아, 벌써 돌아갈 시간이던가?”
라니아 교수가 고개를 끄덕인다.
레스티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둘은 정원을 따라 걸었다. 정원을 빠져나와 광장으로 향한다.
광장에 들어서는 순간, 갈림길이 나온다.
한쪽은 교수실로, 다른 한쪽은 중앙학관으로 향하는 길이다. 노을이 비추는 그 길에 라니아 교수는 잠시 멈춰 섰다. 그리곤 손을 흔든다.
“들어가 봐.”
“네, 교수님.”
레스티가 먼저 걷는다.
라니아는 자리에 멈춰서 그 뒷모습을 바라본다. 그러다, 그녀가 다시 발걸음을 옮기려는 순간.
“라니아 교수님.”
한 목소리가 그녀를 불러 세운다.
목소리를 따라 고개를 돌려 보면,레스티가 뒤를 돌아보고 있다. 보랏빛 머리칼이 불어오는 봄바람에 찰랑인다.
노을을 등진 채, 레스티는 미소 지었다.
언제나와 같은 엷은 미소도, 비웃음도, 헛웃음도 아닌 미소가 그녀의 입가를 타고 흘렀다.
“감사해요.”
해가 진다.
노을이 지는 정원에서 그녀는 환히 웃었다.
···아플리아는 배움의 요람이다.
수많은 인재들이 배움을 얻는다.
배움을 통해 깨달음을 얻는다.
그것은 단순히 마학(??)에 국한된 이야기가 아니다. 배움이란 조금 더 폭 넓은 의미로 쓰일테니까.
그리고, 여기 한 마법사가 있다.
그 마법사는 어리다. 어려서부터 마법을 배워왔으나, 제 뜻대로 마법을 펼쳐본 적이 많지는 않다.
그녀는 언제나 무언가를 두려워했다.
자신을 억누르는 무게를 이기지 못했다.
“·····.”
여기, 또 하나의 마법사가 있다.
그 마법사는 수많은 것을 경험했다. 마법사로서 이룰수 있는 업적의 대부분을 이루었다. 그러나, 그 끝에 남은 것은 후회다.
그 마법사는.
자신과 비슷한 길을 걷는 마법사를 본다.
“그래.”
자신과 닮은 아이를 보며 잿빛 마법사는 웃었다.
“응원할게.”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