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eat the Hero Party RAW novel - Chapter 89
〈 89화 〉 사흘의 끝(完)
* * *
날이 덥다.
아직 여름이 채 오지도 않았거늘 덥구나.
해야 할 것이 많거늘, 힘이 나지는 않는구나.
“후우···.”
제 1 왕녀, 르뤼엘은 길게 숨을 내뱉었다. 뱉은 숨은 뜨겁다. 숨만 뜨거운 것이 아니었다. 온몸에 열이 올랐다.
등줄기를 타고 식은땀이 흘렀다.
눈을 뜨고 있는지, 감고 있는지 분간이 가질 않는다. 꿈과 현실의 경계선을 거니는 듯 하다.
날이 덥다.
땀방울이 흐른다.
잠옷을 적시는 땀방울이 썩 찝찝하다.
그런 생각을 하며 르뤼엘은 눈을 감았다. 눈을 감으면 수많은 것들이 떠오른다. 떠올라서는 금세 스쳐 지나갔다. 기억들은 쉽게 흩어졌다.
사셔야 합니다.
저는 죽습니다. 살지 못합니다. 저 자신이 그걸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언니는 안 돼요.
언니만큼은 살아남아야 합니다.
흩어지는 기억 속에서도, 강렬하게 자리를 잡은 기억들이 몇 있다. 천천히, 아주 천천히 르뤼엘은 그것을 더듬었다.
‘봄날이었는가.’
아니면 한겨울이었는가.
르뤼엘은 헛웃음을 흘렸다. 땀방울과 함께 웃음이 흘러내린다. 목덜미에 고인다.
‘그 둘 전부였다.’
제2 왕녀는 봄날에 죽었다.
제3 왕녀는 겨울날에 죽었다.
벚꽃잎이 만개한 봄날에 장례식을 치렀다.
눈이 소복이 쌓인 어느 겨울날에, 또다시 장례식을 치렀다.
그들이 관에 담기던 장면을 떠올렸다.
교회의 사제들이 피안에 드시길, 이라고 기도하던 것을 르뤼엘은 기억한다.
기억하고, 또 기억한 것들이 머릿속을 가득 메운다. 어찌하여 그런 것이 지금 떠오르는가. 자신 또한 죽음을 코앞에 둔 까닭이다.
“······.”
죽음은 무색무취했다.
소리도, 형태도, 향도 없이 다가오나··· 그것이 다가온단 사실만큼은 뚜렷하게 느낄 수 있다.
다가오는 죽음의 앞에서 인간은 자신의 삶을 돌아본다. 르뤼엘 또한 마찬가지다.
르뤼엘은 자신의 삶을 반추한다.
내키는 대로 살고 싶었으나, 그렇지 못했다. 미친개라 불리는 그녀였지만, 그녀에겐 언제나 보이지 않는 목줄이 걸려있었으며, 보이지 않는 입마개가 채워져 있었다.
살고 싶었다.
살려면, 오라비의 말을 따라야 했다.
그래서 그리했다. 오라비가 짖으라면 짖고, 다물라면 다물고, 기라면 기는 개새끼가 되었다. 그렇게 삶을 연명했다.
‘그것이 정녕 삶을 사는 것인가?’
두 자매의 관을 보고 나니 그런 생각이 들었다.
‘아니다.’
그래서 결정했다.
‘내일 죽더라도 나는 오늘을 살겠다.’
목줄을 뜯었다. 입마개를 벗었다.
오라비를 위해서가 아닌, 막내를 위해 짖었다. 그 누구도 그를 바라지 않았지만, 르뤼엘 스스로가 그것을 바랬다.
죽음이 한 발짝 다가왔다.
르뤼엘은 죽음을 느낀다. 느끼되, 공포에 떨지는 않는다. 다가오는 죽음을 의연히 맞이한다.
죽음이 다시 한발짝 다가온다.
르뤼엘은 눈을 떴다. 눈앞에서 부자연스러운 연기가 뭉쳐진다. 뭉쳐진 연기는 기괴하다. 그것이 자신에게 닥친 죽음인 양 싶었다.
자매를 삼켰던 죽음이.
자매를 찢어 삼켰던 죽음이 코앞에 있다.
끼릭, 끼리릭.
르뤼엘의 목덜미에 새겨진 문양이 서서히 움직인다. 완성된 회로가 연기에 형(?)을 부여한다.
연기에 눈구멍이 생긴다.
쭈욱, 찢어지더니 눈과 입이 생겨난다.
죽음이 미소지었다. 죽음에 종류가 있다면, 저것은 고귀하지 못한 존재였다. 타인의 삶을 수확하는 이가 있고, 타인의 삶을 게걸스럽게 먹어치우려 드는 이가 있다면, 저것은 명백한 후자의 것이다.
고귀하다기보단 추잡하다.
긍지 높기보단 비굴하다.
그것은, 자신에게 어울리는 죽음이 아니었다. 르뤼엘은 파르르 떨리는 입가를 틀어 올렸다.
“지···.”
힘겹게 목소리를 짜냈다.
“···금이다, 교수.”
뒷말은 발음하기보단 숨소리에 가깝다. 그러나, 그 의미는 분명히 전달되었다.
탁, 하고.
의자가 흔들리는 소리가 들렸다.
르뤼엘의 코앞에 뭉쳐진 죽음을 향해 누군가 손을 뻗었다. 새하얀 장갑이 연기를 파고든다.
연기는 잡히지 않고 흩어지려 한다.
그러나, 손아귀는 그것을 놓치려 들지 않는다.
포착(Capture).
마나가 피어올랐다.
피어오른 마나는 잿빛이다. 잿빛이되, 그 속에서는 별무리가 반짝인다.
막내에게서 보았던 별빛.
아름다워, 보는 이로 하여금 희망을 품게 하는 별빛이 잿빛의 마나 사이에서 꿈틀거린다.
콰득, 콰드드득!
붙잡힌 연기가 바스러지는 소리가 들렸다. 실체화된 죽음이 손아귀에 붙잡힌 채, 삼켜냈던 삶을 토해내기 시작한다.
끼릭, 끼리릭···.
르뤼엘의 목덜미에 새겨진 회로가 역(?)으로 회전한다. 회전하면 할수록 문양은 엷어져 갔다.
파삭.
이윽고 회로가 박살 나 흩어진다.
덩달아 연기 또한 형(?)을 잃는다. 흩어지는 연기 사이로, 잿빛 마나가 너울 친다.
“아.”
참았던 숨이 입가를 비집고 새어 나온다.
“···쿨럭.”
르뤼엘은 마른 숨을 뱉으며, 천천히 몸을 일으켜 세웠다. 몸을 달구었던 열기는 사라졌다. 열어둔 창문 너머로는 서늘한 바람이 불어온다. 불어온 바람이 몸을 식힌다.
사락.
불어오는 바람에 그녀의 머리칼이 흔들린다.
목덜미에 고인 땀방울을 옷깃으로 닦아내며, 르뤼엘은 고개를 들었다.
“······.”
눈앞에는 교수가 있다.
라니아 반 트리아스라는 이름을 가진, 마법사가 있다. 그녀가 자신을 바라보고 있다.
그 시선을 마주한 채.
“그런가.”
르뤼엘은 미소 지었다.
“그대가.”
비웃음이 아닌, 엷은 미소를 지은 채 그녀는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백금색의 머리칼이 목덜미를 타고 흘러내렸다.
“그대가, 나를 살린 거로군.”
바람이 불어왔다.
불어온 바람은 서늘해서 기분이 좋았다.
“약속을 지켰군, 교수.”
“그런가요?”
“그렇다. 어찌했는가, 라고 묻는 건 실례인가?”
“실례일 것까지야.”
교수가 어깨를 으쓱였다.
그리곤 약간의 장난기가 담긴 웃음과 함께 그녀는 한마디를 발음했다.
“하니까 되던데요?”
“아하.”
르뤼엘이 미소지었다.
“참으로 그대스러운 대답이로군.”
문양이 나타난 지로부터 일주일이 흘렀다.
그 누구도 넘지 못했던 7일째의 밤을, 르뤼엘은 넘는 데 성공하였다.
‘성공하였으니, 다음을 준비해야겠지.’
쉬고있을 틈은 없었다.
탁.
르뤼엘이 천천히 침대에서 내려왔다.
침대의 곁에 놓인 겉옷을 어깨에 둘렀다. 그 모습을 본 교수가 묻는다.
“어디 가십니까?”
“오라비가 깔아둔 함정을 정면에서 돌파했지 않나. 본녀가 죽었으리라 기대하는 이들이 저 별궁의 복도에 가득하지 않겠는가?”
그녀가 침실의 문을 가리켰다.
“그렇다면 보여줘야지.”
무엇을?
“본녀가 이다지도 건재함을, 너희들을 향해 짖을 기력이 남다 못해 아예 흘러넘침을.”
그녀가 자신의 머리칼을 쓸어넘겼다.
“보여주어야 하지 않겠는가?”
그리곤, 언제나처럼 짓궂은 웃음을 흘린다.
“문을 열어라, 교수.”
2.
7일째의 밤이 지났다.
8일째의 아침이 밝았을 때, 별궁의 복도에 남은 사람은 없었다.
제 1 왕자에게 ‘오늘 밤이 지나면 어떻게든 될 테니, 기다려라.’ 라는 말을 듣고선, 밤까지만 해도 별궁의 복도를 기웃거리던 이들이 전부 어디로 갔는가?
땅으로 꺼졌는가, 하늘로 솟았는가.
그것을 아는 이는 없다.
그저, 그들은 소리소문없이 사라졌다. 별궁의 지하실이 미어터지려 한다는 소문만이 무성할 뿐이다.
별궁에는 한 가지 소문이 돈다.
『별궁에는 미친개가 산다.』
그건, 소문이랄 것도 없는 이야기였다.
* * *
“그대가 내 오라비의 얼굴을 봤어야 했다.”
르뤼엘 왕녀는 환히 웃었다.
그녀는 속이 다 시원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내 곁에서 걸었다.
본래대로라면, 내가 그녀의 뒤를 따라 걸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왕녀는 그러기를 원치 않았다.
말했지 않나?
이제 본녀의 모든 것은 그대의 것이다. 그대는 본녀와 동등한 취급을 받을 것이다.
그렇게까지 말하는데, 굳이 뭐라 덧붙이기도 그래서 그냥 시키는 대로 했다.
‘사실 시키는 대로 한다는 점부터가 좀···.’
깊게 생각하면 나만 피곤할 뿐이다.
“오늘 아침에 마주했거늘, 그 표정이 아예 썩어들어가더군. 노골적으로 표정을 구기는데, 아주 볼만한 표정이었어.”
그녀는 쿡쿡, 하고 소리 내 웃었다.
“내 오라비는 더는 내게 손을 대지 못하겠지. 본녀가 무엇을 가졌는지도, 어디까지 알고 있는지도 짐작이 안 갈 테니까.”
“그래도 위험하지 않을까요?”
“무얼, 내 오라비는 확신이 안 선다면 결코 움직이지 않는 인물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잠깐의 뜸을 들인 그녀가 입을 열었다.
“당장 별궁으로 돌아가면, 왕가의 사냥개들이 나를 지킬 것이다.”
“하운드(Hound) 말씀이세요?”
“그래, 개중에서도 가장 유능하고 긍지 높은 하운드가 내 호위기사 역을 수행할 거라더군.”
아무리 내 오라비라 해도, 사냥개가 눈을 부릅뜨고 있는데 제멋대로 굴진 못하겠지.
르뤼엘 왕녀는 그렇게 중얼거렸다.
나는 궁금증이 생겨 문득 질문했다.
“가장 유능하고 긍지 높은 하운드가 누굽니까?”
“최전선과 마경을 두루두루 경험한, 추적자(Tracker), 칼트 경을 말하는거겠지.”
“···예?”
“음?”
“그 개코··· 아니, 칼트라는 기사분이 가장 유능한 하운드랍니까?”
“그렇다. 언제나 딱딱하고, 말이 적은 데다가 원칙주의적인 게 흠이라고는 하나··· 본녀가 보기에는 전장의 기사다워 더욱 마음에 들더군.”
칼트 그놈이?
“딱딱? 말이 적어···?”
“침묵의 기사라는 이명도 가지고 있다더군.”
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내가 아는 그 개코 칼트가 맞나?’
트래커라는 걸 보면 맞는 것 같긴 한데, 뭔가 기분이 미묘했다.
“···뭐 걸리는 거라도 있는가?”
“아뇨, 그냥 뭐··· 아는 사람인가 싶어서요.”
그렇게 중얼거리며 우린 나란히 발걸음을 옮겼다. 나와 르뤼엘 왕녀가 걷는 곳은, 별궁의 뒤편에 있는 정원이었다.
르뤼엘 왕녀의 최측근이 관리하는 정원.
이 정원에는 궁중 도서관으로 빠져나가는 비밀통로가 있다길래, 나는 이곳을 통해 별궁을 이탈할 생각이었다.
그리고, 왕녀는 그런 나를 배웅하고자 내 곁을 따라 걷고 있었다. 그렇게 걷다 말고 르뤼엘 왕녀가 문득 입을 열었다.
“···본녀의 모든 것은 그대의 것이라고 한 말은 기억은 하고 있나?”
“예? 아, 예. 기억합니다.”
“그런데 왜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지.”
“당장 지금은 생각나는 게 없어서요.”
나는 옆을 따라 걷는 왕녀를 흘겨봤다.
뭔가 불만스러운 눈치였다.
“본녀의 모든 것이, 그대에겐 별 값어치가 없는 것인가?”
“예?”
“그렇다면, 그건 꽤··· 상처로군. 이래 봬도 본녀는, 본녀가 가진 것들에 꽤 자신이었었다만.”
“어···.”
당장 필요한 게 있나?
솔직히 말하자면, 딱히 보상을 노리고 한 일은 아니었다.
‘내가 돈이 필요한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신분이 부족한 것도 아니다.
그냥, 당장 할 일이 없는 데다가··· 이야기를 들어보니 간섭할 필요가 있다고 느꼈을 뿐이다.
나는 잠시 고민하다 입을 열었다.
“당장은 없어도, 나중에는 생길 것 같은데요?”
“그런가?”
“아마도요?”
르뤼엘 왕녀가 피식, 웃음을 흘렸다.
“그럼 이걸 받아가도록.”
왕녀가 내게 마도구 하나를 건넸다.
그것은 내가 잘 알고 있는 마도구였다.
‘···이거, 주문 서신 아닌가?’
전장에서 쓰던 마도구다.
한쪽에서 편지를 쓰면, 다른 한쪽으로 전달되는, 두 개가 한 쌍을 이루는 마도구.
내가 의문 어린 시선을 보내자, 왕녀가 말했다.
“전장에서 기사들이 쓰는 서신을 주고받는 마도구라고 하더군. 그곳에 편지를 써서 보내면, 본녀가 답장하겠다.”
그녀가 말을 이었다.
“본녀가 가진 것들이, 혹은 본녀가 필요하다면 언제든지 불러라. 왕실은, 아니, 적어도 본녀는 은혜를 잊지 않는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곤, 편지지를 주머니에 넣었다. 주변을 둘러보니 어느새, 정원의 끝자락에 도착해 있었다.
정원의 끝에 선 왕녀가 가볍게 발을 굴렀다.
풀숲이 갈라지고, 왕실 도서관으로 향하는 숨겨진 통로가 모습을 드러냈다.
“이 길을 따라 쭉 가면 될 거다.”
“네.”
“복장은 적당히 상황을 보고 갈아입도록. 여기, 그대가 입고 온 옷이다.”
통로의 초입에 놓인 옷 가방을 챙긴 채, 나는 뒤를 돌아보았다. 그러고 보니, 묻고 싶었던게 하나 남아 있었다.
“그, 왕녀님?”
“뭔가, 교수.”
“굉장히 사적인 질문이긴 한데요.”
나는 기억을 더듬으며 입을 열었다.
“일단, 들은 이야긴데···.”
“사족은 집어치우고 본론만 말해라. 어디서 듣고, 어디서 알게 된 정보인지 본녀는 구태여 물을 생각이 없으니.”
“···그게, 용사, 카일 토벤···경에게 ‘너 같은 병신도 용사를 하는 걸 보니, 세상이 참 말세로구나.’ 라고 말씀하신 적이 있으시죠?”
“음? 아니다. 조금 틀렸군.”
왕녀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너 같은 병신도 용사를 하는 걸 보니, 세상 돌아가는 꼬라지가 참 알만하도다, 라고 말했다.”
···거기서 거기 아닌가?
“그런데 그건 왜 묻는 거지?”
“왜 그런 말씀을 하셨는지 궁금해서요.”
흐음, 하고 왕녀가 입가를 매만졌다.
“본녀는 여러 용사를 보았다. 대략 다섯 정도의 용사를 본 듯 한데, 내가 보았던 용사 중에서 최악을 꼽자면 카일, 그 병신이었다.”
“오···.”
“물론, 카일이란 그 작자의 실력이 출중함은 안다. 다른 용사들에 비해도, 월등한 실력을 갖추고 있더군. 허나, 실력과 마음가짐은 별개다.”
그녀가머릿속으로 카일을 떠올린 듯, 눈살을 찌푸린 채 말을 계속했다.
“그 용사 놈의 눈동자에는 패기가 없다. 신념을 이룰 고집도, 아집도 없다. 그 눈에 들어찬 건 내 오라비와 같은 종류의 것이었다. 본녀가 질리도록 봐온 것이지.”
“···같은 것, 이요?”
“권력욕. 과시욕. 그리고, 열등감.”
“······.”
“자기 자신을 남에게 보여주고 싶어하는 것. 잘난 자신의 모습에 취하는 것. 그리하여, 사치에 목마른 자의 인상이다.”
그런 자가 용사라니.
그리 중얼거린 왕녀가 피식, 웃음을 흘렸다.
“그딴 병신에게 붙은 이들도, 한 명을 빼면 다 고만고만하더군. 성녀란 작자는 세상살이를 개좆으로 배운 듯 하고, 신궁이란 엘프는 저 자신의 안위밖에 모르지.”
나는 고개를 몹시 끄덕이고 싶은 것을, 억지로 참으며 그녀의 말에 귀 기울였다.
“세상을 구한다는 파티가, 그 꼬라지인걸 보고 있자니 본녀가 세상살이에 환멸을 느끼는 것도 어찌할 수 없는 일 아니겠나?”
“느낄만하네요.”
“그렇지. 그래도, 뭐··· 실력은 출중하니 전장에 큰 도움을 주는듯 싶더군. 물론, 그마저도 이제 끝나겠지만.”
끝난다니, 뭐가?
내가 의문 어린 눈초리로 왕녀를 바라보자, 그녀가 어깨를 으쓱이며 말을 이었다.
“그런 인물은, 옆에서 퍼지지 않게 끌고 가줄 인물이 필요한 법이다. 성녀와 신궁은 그럴만한 인상이 안 된다. 그럼 남은 게 누군가?”
본녀가 아까, 하나를 제한다고 하지 않았나.
르뤼엘 왕녀가 손을 뻗어 나를 가리켰다. 순간이지만, 나는 덜컹하고 심장이 내려앉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바로, 그대의 오라비지.”
‘깜짝이야, 시팔.’
나는 두근거리는 심장을 애써 가라앉혔다.
“그들을 이끄는 것이 바로, 잿빛 마법사의 존재였을 테지. 사실상, 용사보다 그자가 구심점이 되었으리라 추측한다.”
“······.”
“하지만, 그런 인물이 은퇴했다.”
왕녀가 한숨과 함께 답했다.
“남은 셋으로는 얼마 가지 못하리라 예상한다. 구심점이 빠진 파티는 와해하거나, 망가지기 마련이니.”
뭐지.
나는 눈을 깜빡였다. 용사 파티의 실상을, 나는 다른 사람에게 말한 적이 없었다. 기사단장인 하인켈 아저씨조차 그 실상을 잘 모른다.
‘그나마 알고 있는 건···.’
아마, 우리와 함께했던 칼트 뿐일 거다.
칼트 조차도 카일이 본격적으로 부패하기 시작할 때는 은퇴했으니··· 그 심각성은 모를 것이다.
내가 말하지 않았으니까.
보다 정확하게는, 알리지 못했다.
차마, 말할 수 없었으니까.
수많은 이들의 희생으로 유지되는 용사 파티가 그렇게까지 부패했다곤 차마 말할 수 없었다.
‘···기사단의 사기도 박살 날 거고.’
나는 그러기를 원치 않았다.
비록 카일이 하반신에 뇌를 지배당했다 한들, 그 자식은 아직까진 상징적인 존재였으니까.
그래서 숨겼다.
‘숨겨 왔는데···.’
내가 그토록 이나 숨겨왔던 것을.
‘이 사람은 알아보는구나.’
왠지 모르게 신기한 기분이 들었다.
“···그래요?”
“으흠? 그 목소리는 뭐지? 처음 듣는 목소리로군.”
“음, 으음···.”
나는 입가를 가렸다.
자꾸만 입꼬리가 올라가려 했다. 그를 드러내긴 좀 부끄러워서, 난 입가를 가린 채 고개를 끄덕였다.
음, 으음. 하고.
입 바깥으로 긍정도, 웃음도 아닌 미묘한 소리가 흘러나왔다.
“흐응.”
그런 나를 바라보며, 왕녀가 눈을 가늘게 떴다.
“교수, 그대는 그대의 오라비와 사이가 퍽 괜찮은가 보군.”
“···예?”
“부러운 일이야. 제 오라비를 칭찬하는 말을, 꼭 제 칭찬처럼 들으며 기뻐하고 있지 않은가.”
···그게 그렇게 되나?
내가 눈을 깜빡이고 있자니, 왕녀가 빙글, 한 바퀴 몸을 돌렸다.
“슬슬 나는 가봐야겠군. 더 지체했다간, 하운드가 여기까지 올지도 모르는 일이니.”
그녀가 고개만을 뒤로 돌린 채, 나를 바라봤다. 흘러내리는 백금발이 오후의 햇살에 반짝였다.
“지난 사흘간 제법 즐거웠다, 교수.”
그녀가 미소지었다.
“조심히 돌아가도록 하여라.”
처음 왕궁에 발을 들였을 때와는, 제법 다른 미소였다. 그 말을 남긴 채 그녀는 걸음을 옮겼다. 나는 그 모습을 잠시 지켜보았다.
···지난 며칠간, 나는 이곳저곳 깽판을 치고 다녔다. 그러나, 끝끝내 건드리지 못한 곳이 있다.
제 1 왕자의 거처.
그곳을 뚫으려면 나로서도 ‘그냥’은 불가능했다. 무언가, 이질적인 것이 그곳에 자리를 잡고 있었으니까.
‘할 거면, 아예 날려버려야 해.’
손대중을 두기는 힘들다. 해야 한다면, 왕성을 무너트려야 했다. 거기까지는 하지 않았다. 그랬다간 당장 혼란만 더 커질 것 같았으니까.
‘그래서 남겨두긴 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곤 하나, 찝찝함은 남는다.
“왕녀님.”
내 부름에 그녀가 뒤를 돌아봤다.
무엇을 말해야 할까. 일단 그녀를 부르긴 했지만, 쉽게 입이 열리진 않았다.
“그···.”
“그대가 무엇을 본 지는 모르겠으나.”
내가 할 말을 고르고 있자니, 그녀가 선수를쳤다.
“그건 그대가 걱정할 필요가 없는 부분이다.”
그녀가 미소지었다.
“이 뒤는 본녀의 몫이다. 그대는 할 일을 성공적으로 마무리했다. 그대가 있어야 할 곳으로 돌아가도록.”
그 목소리는 확신에 차 있다.
자신감이 묻어나오는 목소리로, 그녀가 말을 계속했다.
“왕실은 내가 정리할 것이다. 오라비가 무엇을 준비하던 간, 두 번은 당해줄 생각이 없다. 그리고, 그대가 모아준 자료 또한 본녀에게 큰 도움이 되었다. 차근차근 해나갈 일이지.”
그녀가 발걸음을 멈춘 채 나를 바라봤다.
엷은 금빛을 머금은 눈동자를 담은 눈꼬리가, 살짝 휘었다.
“아일라에게는 이렇게 전해주면 좋겠군.”
그녀가 말했다.
“왕성은 내게 맡기고, 학업에 집중하라고. 많은 것을 배우고, 많은 것을 보고, 듣고, 경험하고돌아오라고.”
르뤼엘 왕녀는 나를 바라보며 미소 지었다.
“마지막으로, 라니아라는 교수와 친하게 지내라고.”
“···하.”
나 또한 무심코 웃음을 흘렸다.
‘하여간, 독특한 사람이라니까.’
그 말을 마지막으로, 우리는 발걸음을 돌린다.
왕녀는 자신의 별궁으로, 나는 내가 있어야 할 곳인 아플리아 아카데미로. 각자의 무대로 돌아가는 길에는, 봄날의 햇살이 길게 드리워져 있었다.
사실, 봄날이라 부르기엔 꽤 더운 날이었다.
그것이 봄이 끝나감을 가리키는 양 했다.
봄이 가고 여름이 다가온다.
아마도, 여름은 봄 보다 조금 더 바빠지지 않을까 싶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