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eat the Hero Party RAW novel - Chapter 94
〈 94화 〉 칼과 방패(2)
* * *
완벽한 인간은 없다. 인간은 자신에게서 부족한 것을 타인에게서 찾는다. 필요에 따라 인간은 타인과 협력한다.
“제약 하나, 선제공격하지 않음.”
경계선에 선 벨노아가 입을 열었다. 벨노아의 팔에 휘감긴 그림자가 꿈틀댄다.
“제약 둘, 주문은 강타(Smite)로 한정. 또한, 주문을 요격하는 데만 사용됨.”
그림자에 회로가 새겨진다. 스톡(Stock)된 주문의 개수를 가늠하며 벨노아가 라크를 흘겨봤다.
“제약은 총 다섯 개야. 두 개는 이미 교수님이 말씀해주셨고··· 나는 남은 셋 중 하나를 찾았어.”
“그런가. 나도 하나 발견했다.”
라크가 양손에 쥔 도끼를 캉, 카앙하고 맞부딪친다. 불똥이 튀기며 도끼에 스톡(Stock)된 주문이 가열된다.
“······이, 내가 찾아낸 제약이야.”
“······가, 내가 찾은 제약이다.”
벨노아와 라크는 전투 방식이 다르다. 방식이 다르므로, 전투를 읽는 시각도 다르다. 다름은 언어로 드러난다. 벨노아의 말과 라크의 말은 서로 겹치지 않았다.
두 개의 제약이 밝혀졌다.
남은 제약은 하나뿐이다.
벨노아는 계획을 설명했고, 라크는 들었다. 이야기를 다 들은 후 라크는 짧게 한마디를 뱉었다.
“그런가.”
긍정하는 대답은 아니다. 그러나, 라크는 무릎을 굽힘으로써 대답을 대신한다. 라크가 자세를 낮게 낮춘다.
꾸국.
라크의 신발이 땅에 파고든다. 흙더미가 뒤로 밀려난다. 바닥을 기듯이 자세를 낮춘 그가 도낏자루를 땅에 붙였다.
가속(Accel).
근력 향상(Muscular).
쿠웅, 하고 라크의 심장이 거칠게 뛴다. 라크의 호흡이 빨라진다. 빨라진 호흡을 가다듬으며, 라크가 수를 센다.
“하나.”
벨노아가 그림자를 뽑아낸다.
“둘.”
뽑아낸 그림자가 날카로운 송곳의 모양새로 휘감긴다. 휘감긴 그림자는 총 다섯이다.
“셋.”
셋, 하고 발음한 순간 라크가 땅을 박찬다. 투확, 하고 흙더미가 튀어 올랐다. 흙더미 너머에서 벨노아는 왼손을 까딱였다.
그림자 비수(ShadowNeedle).
비수가 사출된다. 사출되는 비수보다 빨리, 라크가 라니아를 향해 달려든다.
2.
한걸음 내디딜 때마다 거리가 확확 좁혀진다. 라크는 눈을 부릅뜬 채 땅을 박차며 달렸다. 거리가 다섯 걸음 안팎까지 줄어든다.
탁.
그러나, 여전히 교수님은 움직일 생각이 없어 보인다. 선을 넘지 않으면, 선제공격을 하지 않겠다는 제약이 걸린 탓일까? 아니면, 그저 여유일까.
알 수 없다.
알 수 없지만, 라크가 할 일은 정해져 있다.
라크가 속도를 줄이지 않은 채 팔을 등 뒤로 젖혔다. 한 걸음 더 내디디며, 간격을 세 걸음 안팎까지 줄인다.
후웅!
뒤로 젖혔던 오른팔을 앞으로 휘둘렀다. 손도끼가 바람을 가르는 소리를 내며, 라니아를 향해 투척 된다.
“······”
말없이 도끼를 응시하던 라니아가 손을 휘두른다. 라크는 눈을 부릅떴다.
‘오른손.’
빙글빙글 도는 도끼날의 자루 부분을 정확하게 가격한다. 손도끼의 궤도가 수직으로 꺾여, 바닥에 처박힌다.
탁.
그 시점에서, 라크는 간격을 한걸음까지 좁혔다. 라니아가 그어둔 경계선을 넘었다. 자세를 낮춘 채 파고든 라크를, 라니아가 내려다봤다.
그 시선은 차분하다.
그 움직임은, 여전히 여유롭다.
라크는 마른침을 삼키며, 왼손에 쥔 도끼를 쳐올렸다. 그 움직임은 빠르다. 그러나, 라니아가 훨씬 더 빠르다.
콱.
그녀는 도끼날을 맨손으로 움켜쥔다.
‘오른손.’
또다시 오른손으로 도끼를 붙잡은 그녀가, 몸을 살짝 굽힌다. 무릎이 라크의 복부를 향해 다가온다.
‘빠르다!’
피할 수 없다. 그러나, 여기까진 예상한 흐름이다. 라크는 빠르게 몸을 옆으로 틀었다.
쉬익!
라크의 등 뒤로 가려져 있던 그림자 비수가 모습을 드러낸다. 시야의 사각에서 덮치는 주문이다. 그러나, 이번에도 라니아는 반응했다.
그녀가 왼 손가락을 까딱인다.
쿠웅!
일순간 꽂힌 강타가 그림자 비수를 전부 쳐낸다. 그러나, 동작과 동작 사이에 끊김이 발생한다. 그 틈을 이용해 라크는 도끼를 놓으며 바닥을 굴렀다.
바닥을 구르며, 땅에 박힌 도끼를 뽑는다.
‘왼손.’
라크는 방금의 전투에서 확신을 얻는다.
‘모든 주문은 ‘왼손’으로만 사용한다.’
도끼를 뽑으며, 라크는 왼쪽으로 파고든다. 탁, 하고 다가오는 벨노아의 발걸음 소리에 귀 기울인다.
‘오른손을 쓸 수 있는 상황에서도 왼손을 사용한다. 그리고, 그건 반대도 마찬가지다.’
라크는 왼쪽으로 돌며 도끼를 휘둘렀다.
왼손을 뻗으면 쉽게 잡을 수 있는 상황이지만, 이번에도 라니아는 오른손을 뻗는다.
‘붙잡은 도끼를 놓아가면서까지.’
너무나도 부자연스러운 움직임이다.
‘모든 타격, 잡기, 공격 등··· 물리적 간섭은 오른손만을 사용한다.’
라크가 도끼의 궤도를 틀며, 한 걸음 더 옆으로 뛴다. 라니아의 오른팔이 매섭게 허공을 가른다.
‘심지어.’
틀어진 도끼의 궤도는 라니아의 다리를 향한다. 그녀의 오른손은 이미 허공을 가르고 있다. 왼손은 쓰지 않는다. 그렇다면, 올 것은 하나다.
다리.
아니나 다를까, 그녀의 다리가 움직인다. 무릎이 굽히며 발차기가 들어온다. 그것을 보며, 라크는 입가를 틀어 올렸다.
‘다리마저도 제약의 일환이다.’
오른쪽 다리가 움직이리라 예측했다.
‘이것이, 교수님이 내건 제약 중 하나다.’
다가오는 발꿈치에 라크는 도끼의 날을 가져다 댄다. 캉, 소리를 내며 도끼날과 라니아의 신발 굽이 맞부딪친다.
“큽!”
밀려난 쪽은 라크다.
라크의 신발이 바닥에 끌린다. 자세를 고쳐잡을 틈도 없다. 이번에는, 라니아가 라크를 향해 한 걸음 내디뎠다.
그녀의 발걸음은 경쾌하다. 가볍다.
그러나, 들어오는 공격은 묵직하다. 그녀가 팔꿈치를 굽힌다. 주먹이 들어온다.
그림자 비수(ShadowNeedle).
그러나, 또다시 가시가 날라온다. 이번에는 가시뿐만이 아니다. 그녀의 등뒤에서 벨노아가 단검을 역으로 쥔 채 내려찍는다.
강타(Smite).
콰직! 비수가 꺾임과 동시에, 그녀가 몸을 회전한다. 잿빛 머리칼이 나부낀다. 회전이 실린 발차기가 벨노아의 옆구리를 강타한다.
“커흡!”
발차기에 얻어맞은 벨노아가 바닥을 구르며 일어선다. 라크 또한 바닥을 구르며 도끼를 줍곤, 다시 거리를 벌렸다.
“흠.”
라니아가 툭툭, 발끝으로 땅을 건드렸다.
그 모습을 보며 라크는 마른침을 삼켰다. 등줄기를 타고 땀방울이 흐른다.
긴장된다.
그러나, 긴장보다 흥분이 더 크다.
“······하.”
라크의 입가에는 웃음이 맺힌다.
‘보인다.’
답이 보였다.
한걸음, 한 걸음 앞에 답이 있다. 라크가 눈을 크게 떴다. 동공이 흔들리며 라니아의 작은 움직임 하나 하나를 전부 관찰한다.
‘된다.’
라니아를 사이에 두고, 라크는 벨노아와 시선을 교환한다. 벨노아가 그림자 단검을 투척했다. 단검이 폭발하며 그림자가 솟구쳤다.
그림자에 라니아가 반응한다.
콰릉!
섬광이 번뜩인다. 아래에서 위로 번개가 치는듯한 섬광이다. 강타가 그림자를 찢어발긴다. 흩어지는 그림자 사이로 라크는 접근한다. 도끼를 휘두른다.
후웅.
발차기가 날라온다. 오른 발이다.
고개를 숙여 피한다. 어느 다리가 어떤 식으로 움직여질지 안다면, 피할만 했다.
피하며 도끼를 쳐올린다. 라니아는 상반신을 뒤로 젖힌다. 처음으로 보인 회피 동작이다.
젖힌 등 뒤에서 벨노아가 단검을 찌르고 들어온다. 라니아는 그것을 보지도 않은 채 오른팔을 등뒤로 뻗는다. 단검을 잡아낸다.
묘기에 가까운 움직임이다. 등 뒤에 눈이라도 달린 게 아닌가, 하는 의심마저 든다.
‘그래도, 괜찮다.’
조건은 달성됐다.
‘남은 건.’
라크는 위로 향했던 도끼를 내려친다.
벨노아에게 향한 라니아의 경계를 어떻게든 자신의 쪽으로 끌고온다.
‘시간을 끄는 것뿐이다.’
그녀가 단검을 놓는다. 허리를 틀며 몸을 돌려 팔꿈치로 라크의 복부를 가격한다. 라크가 숨을 헛삼키며 뒤로 밀려난다.
그러나, 쓰러지진 않는다.
라크는 다시 달려든다.
이를 악물고 도끼를 휘두르고, 때로는 피하고, 때로는 얻어맞는다.
한 대 한 대를 맞을 때마다 시야가 흔들린다. 쓰러질 것 같다. 그러나, 라크는 견뎌낸다. 하나의 승기를 붙잡기 위해서.
‘벨노아가 말했다.’
버틴다.
‘그 동작을 취하게 만들지 말라고.’
부릅뜬 눈으로 라크는 라니아의 왼손을 응시한다. 그 장갑을 뚫어져라 바라보며, 그녀가 장갑에 손을 대려는 순간마다 뛰어들었다.
‘2초.’
속으로 수를 센다.
바닥을 나뒹굴면서도, 다시 일어선다.
‘1초.’
벨노아가 약속한 시각이 다가온다.
급기야 라크는 도끼를 집어 던져가면서 까지 시간을 끈다. 두 개의 도끼를 전부 던졌다. 그렇게 1초를 벌었다.
‘지금.’
라크는 눈을 부릅뜨고, 맨손으로 달려들었다. 지치지도 않고 달려드는 라크를 바라보던 라니아 교수의 눈동자가, 잠깐이지만 흔들린다.
그녀의 고개가 휙 돌아간다.
등 뒤를 바라본다. 등 뒤에서 벨노아가 손을 쭉 뻗고 있다. 그의 주변에 그림자 비수가 흔들린다. 흔들리는 건 비수뿐만이 아니다.
공양(Offering).
벨노아의 두 손가락이 꺾여있다. 완성된 회로가 빛을 뿜기 직전이다. 반사적으로 왼쪽 손가락을 까딱이려던 그녀가 쯧, 하고 혀를 찬다.
회로를 잡아 뜯으려는 듯 손을 뻗는다.
그러나, 그 손이 벨노아에게 닿는 일은 없다.
콱.
맨손으로 달려든 라크가 라니아의 오른팔에 매달렸다. 동작을 멈추진 못하지만, 그 속도를 확실히 줄인다.
번쩍.
이윽고, 섬광과 함께 회로가 완성된다. 짐승의 형상을 띈 그림자가 아가리를 쩌억, 벌린다.
거래는 이루어졌다.
별은 벨노아에게 마땅한 현상을 부여했다.
‘완성됐다.’
비수는 몰라도, 그림자 짐승을 주문 없이 쳐내기란 어렵다. 무려 손가락 두 개분의 그림자 짐승이다.
‘그리고.’
라크는 미소짓는다.
‘교수님은, 주문을 쓰지 못하지.’
시작 전 벨노아에게 들었던 제약.
라니아 교수님은 주문을 세 개밖에 안 써. 한 차례에 세 개. 그리고, 세 개를 쓴 다음에는 반드시 그 동작을 취해.
왼손의 장갑을 끌어당기는 동작.
그 동작을 취하기 전까지는 주문을 안 썼어. 그러니까, 그 동작을 어떻게든 막으며 시간을 끌어.
그렇게만 해준다면.
우리가 이긴 거야. 주문 없이 막을 수 없는 주술을 쏴버릴 테니까.
아가리를 벌린 짐승이 라니아를 덮친다. 거대한 짐승에 비해 그녀는 너무나도 작아 보인다. 벨노아와 라크는 승리를 직감한다.
‘······어?’
그러나, 그 순간이다.
라니아의 팔에 매달려있던 라크는 이변을 눈치챈다. 라크는 라니아의 얼굴을 보았다. 정확하게는, 그 푸르른 눈동자를.
차분하다.
여전히 흔들림이 없다.
덮쳐드는 그림자 짐승의 아가리 앞에서 그 눈동자만이 빠르게 움직인다. 빠르게 움직이던 눈동자는 마지막으로 라크를 향한다.
멈칫.
그 눈동자가 멈춘다. 꼭 시간이 멈춘 것만 같다. 라니아와 눈을 마주한 라크는 본능적으로 느꼈다. 전투를 거듭하며 쌓인 직감이 경고한다.
‘실패했다.’
계획이 박살 났음을.
그러나, 그를 벨노아에게 알릴 틈은 없다.
뻐억!
“커흡!”
한순간 무슨 일이 일어난 지 이해하지 못했다. 시야가 흔들리고 바닥에 엎어졌다. 가슴팍에서 고통이 느껴졌다.
‘무릎으로, 찍은 건가.’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빨랐다.
그러나, 움직임은 거기서 그치지 않는다. 라크는 바닥에 엎어진 채 라니아를 바라봤다.
탁, 하고 그녀가 땅을 박찬다.
쏟아지는 비수를 피한다. 쳐내거나, 붙잡지도 않는다. 몸을 틀고, 고개를 젖히고, 달리는 것만으로 비수를 피해낸다. 그림자 짐승 또한 그녀를 뒤쫓고는 있지만 느리다. 너무나도 느렸다.
“······!”
벨노아가 숨을 삼키며, 그루터기 쪽으로 움직인다. 그러나, 그보다 교수가 더 빠르다. 파고든 그녀가 손을 뻗어 벨노아의 머리를 움켜쥔다.
오른손으로 벨노아를 잡아당긴다.
그녀가 골반을 틀며 다리를 뻗는다. 가느다란 다리가 벨노아의 목덜미에 걸린다.
“아.”
그대로 휘두른다.
콰앙!
땅에 처박힌 벨노아의 몸이 들썩인다. 기절에 가까운 충격이다. 벨노아의 시야가 점멸한다. 그는 간신히 정신줄을 붙잡았다.
술자의 정신이 온전하다면.
어떠한 상황에서든 주술은 멈추지 않는다.
뒤늦게 그림자 짐승이 달려든다. 그 모습을 라니아는 고개를 살짝 돌려 바라볼 뿐이다. 그녀가 왼손을 들어 올린다. 장갑을 쭈욱, 잡아당겼다.
“하······.”
벨노아는 헛웃음을 흘렸다.
계획의 실패를 예감한 그는 고개를 푹 숙였다.
따악.
손가락을 튕기는 경쾌한 소리가 울린다. 손가락을 튕기는 소리를 뒤따라 번개가 치듯 섬광이 번뜩인다. 섬광이 그림자 짐승의 아가리에 박힌다.
투확!
강타 한 발에 그림자 짐승이 흩어진다.
주술이 흩어짐을 인식한 벨노아가, 땅에 고개를 박은 채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손가락 두 개나 공양한 건데.’
얄짤이 없다.
“진짜 이길 수 있는 거 맞나······?”
그런 중얼거림이 튀어나온 것도,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도무지 답이 보이질 않았다.
“후우···.”
그렇게 바닥에 엎어진 채 숨을 몰아쉬던 벨노아의 시선에, 무언가가 닿았다.
‘도끼.’
라크가 급히 내던졌던 도끼다. 그것이 땅에 비스듬히 박혀있다. 그것을 바라보던 벨노아의 뇌리에 무언가 번뜩였다.
‘찾았다.’
그가 속으로 중얼거렸다.
‘마지막제약.’
그리고, 어쩌면 이길 방법까지도.
3.
“흠.”
바닥에 나란히 엎어진 라크와 벨노아를 바라보며, 나는 턱을 매만졌다.
“제법이네.”
그리곤 흐트러진 해골바가지를 고쳐 썼다.
나는 팔짱을 낀 채 툭툭, 팔뚝을 손가락으로 두들겼다. 제약을 알아차리라고 힌트를 많이 주긴 했다. 했지만, 설마 이렇게까지 빨리 알아차릴 줄은 몰랐다.
‘처음 계획은 해가 질 때까지 쥐어패면서 가르치는 거였는데.’
아무래도, 그렇게까지 오래 걸리진 않을 것 같았다. 상상 이상으로 관찰력이 뛰어났다. 벨노아 뿐만 아니라 라크까지도.
‘그래도, 아쉽긴 하네.’
나는 라크의 앞으로 걸음을 옮겼다. 바닥에 쓰러져 있는 라크의 앞에서 무릎을 굽혀 자세를 낮췄다.
“라크.”
“···컥, 쿨럭. 예, 교수님.”
라크는 연신 기침을 토하며 나를 바라봤다. 일어설 기력도 없는 듯, 바닥에 드러누운 채로.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나는 잠시 고민했다.
고개를 살짝 숙이자, 내 머리칼이 라크의 얼굴 위로 흘러내렸다. 나는 라크와 눈을 마주한 채로 천천히 입을 열었다.
“너, 일단은 마법사다?”
“예?”
“네가 마법사라는 걸 잊지 말라고.”
라크가 눈을 깜빡였다.
나는 한숨을 뱉으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당장은 이 정도 조언만 해주는 게 좋겠지. 아직 시험은 끝나지 않았으니까.
“그래서.”
나는 그루터기에 걸터앉아 다리를 꼬았다.
“더 할 거야?”
“······조금 이따, 다시 도전하겠습니다.”
내 물음에 벨노아가 비틀거리며 땅에서 일어섰다. 벨노아는 라크의 팔을 잡고 일으켜 세우려 했으나, 라크는 번번이 바닥에 철퍼덕 엎어졌다.
“···뭐하냐.”
“일어설 수가 없다. 힘들다.”
“경계선 바깥으로 가야될거 아냐.”
“음, 그냥 끌어 주면 좋겠군.”
벨노아는 한숨을 내쉬며, 라크의 발목을 붙잡았다. 그는 라크를 질질 끌며 경계선 바깥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악, 잠깐. 벨노아. 잠깐.”
“왜.”
“입에 흙 들어간다.”
“그럼 반대로 눕던가.”
“과연, 그런 방법이 있군.”
라크가 빙글 돌려 누웠다.
나는 무심코 웃음을 흘렸다. 문득, 옛 기억이 떠오른 까닭이다.
······일어설 수가 없다.
빨리 가야 할 거 아냐. 여기가 그렇게 누워있을 만한 곳도 아니고.
조금 있으면 회복된다. 당장 못 움직이는 것뿐이다. 업어줄 수 있나?
미쳤냐? 나도 발목 아작난거 안 보여? 그냥 질질 끌고 간다.
······너무하군.
생각해보면, 라크와 벨노아는 나와 카일과 비슷한 구석이 좀 많은 것 같기도 했다.
‘라크가 카일 그 개자식보다 몇백 배는 낫지만.’
그런 실없는 생각을 하고 있자니, 문득 귓가에 목소리가 들렸다.
『그으, 라니아 교수?』
맥하트 교수였다. 나는 귀에 꽂아둔 마도구를 툭툭, 건드리곤 입을 열었다.
“예. 말씀하세요.”
『그, 다름이 아니고··· 내가 좀 자네를 지켜보고 있었단 말일세?』
“예, 그런데요.”
『너무 심한 것 아닌가···? 그러다가 뼈라도 부러지는 것 아닌지, 조금 걱정이 된다만······.』
뼈가 부러져?
‘겨우 이렇게 몇 대 툭툭 쳤다고?’
나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답했다.
“겨우 이걸로요? 이렇게 살살 쳤는데?”
『······.』
“맥하트 교수님도 전장 출신의 기사면, 군기 좀 잡아본 적 있지 않으세요?”
『있기야 하지.』
“그냥 그런 거죠, 뭐. 걱정 안 하셔도 돼요.”
『걱정밖에 안 된다마는···.』
맥하트 교수의 중얼거림을 난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렸다. 별로 중요한 말은 아닌 것 같기에.
“······.”
그렇게 통신을 정리하는데, 문득 라크를 질질 끌고 가던 벨노아와 눈을 마주쳤다. 벨노아가 눈을 가늘게 뜬 채 나를 흘겨보고 있었다.
“왜?”
“그······.”
“뭐.”
“아무것도 아닙니다······.”
벨노아는 갈비뼈를 문지르며 한숨을 내쉬었다. 무척이나 억울한듯한 표정이었다.
‘왜 저래?’
진짜 살살 쳤는데.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