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eat the Hero Party RAW novel - Chapter 95
〈 95화 〉 칼과 방패(3)
* * *
벨노아는 직전의 전투를 복기한다.
‘라니아 교수님은 어쨌는지 모르겠지만···.’
벨노아와 라크에겐 격렬한 전투였다. 시야가 흔들리며 몇 번이고 정신을 잃을 뻔했다. 아직도 얻어맞은 갈비뼈와 쇄골이 시큰하다.
‘······너무, 시야가 좁아져 있었다.’
격렬한 전투 속에서 사람의 시각은 자연스레 좁아지는 법이다. 상대의 동작을 읽기에 바쁘다. 다음 동작을 생각하는 것으로 벅차다.
그러나, 전투가 끝나고 처음부터 하나씩 되짚어 보면······ 의외로 많은 것이 눈에 들어온다.
“라크.”
벨노아가 나무에 기댄 채 입을 열었다. 바닥에 엎어져 있던 라크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뭐지.”
“움직일 수 있겠어?”
“십 분 정도만 쉬면 괜찮아질 것 같다. 의외로 절묘하게 위력을 조절하셨더군.”
라크가 자신의 복부를 문지르며 말했다.
“그럼 10분간 잘 들어.”
“무언가 계획이 있나.”
“한두 번 해선 안되겠지만··· 있긴 하지.”
벨노아가 라크의 손도끼를 들어 올렸다. 꽤 무게가 나갔다. 묵직한 손도끼를 몇 번 휘두르는 시늉을 하며, 벨노아가 말했다.
“이거, 나 잠깐만 빌려줄 수 있어?”
“······무기는 전사의 육체이자 동반자다.”
“그 동반자를 휙휙 집어던진 게 누군데.”
라크가 잠시 고민하다 고개를 끄덕였다.
“음, 잠깐이라면 빌려줄 수 있다.”
벨노아는 라크의 도끼를 거꾸로 쥔다. 그리곤 도낏자루에 그림자를 감기 시작했다. 라크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뭘 하는 거지. 벨노아.”
“내게 있어 무기는 소모품이야. 단검은 얼마든지 만들어낼 수 있어서, 나는 무기가 잡히면 망설임 없이 터뜨렸지.”
동문서답이다.
벨노아는 혼잣말을 중얼거리듯 말을 이었다.
“그래서, 눈치채지 못했어. 그런데 네가 싸우는 걸 보니까 알겠더라.”
“알았다고?”
“어. 생각해보면 이상하지 않아? 회전하며 날아오는 도끼를, 정확하게 자루 부분만 노려서 내려쳤어. 그만한 동체 시력과 반응속도를 가진 교수님이야.”
라크가 고개를 끄덕였다.
교수님의 섬뜩할 만큼 정교한 그 움직임은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으니까.
“그렇다면, 굳이 도끼를 바닥에 찍을 필요가 있었을까?”
“···그게 무슨 소리지?”
“무기를 뺏어서 손에 안 드는 거야, 형평성 문제라고 할 수 있어. 그래도 무기를 줍기 힘들게 멀리 쳐내버리는 것 정도는 할 수 있는 거 아니야? 아니면 붙잡은 다음 멀리 던져버릴 수도 있고.”
그런데, 하고 벨노아가 말했다.
“교수님은 단 한 번도 그러지 않았지. 그냥 곧장 바닥에 던지거나 놓을 뿐이었어.”
“······.”
“생각해 봐. 너, 전투 중에 도끼를 몇 번이고 주워서 다시 썼잖아. 도끼는 항상 네 발치 근처에 놓여있지 않았어?”
라크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인다.
“···생각해보니 그렇군.”
“그리고 우리가 싸운 건 그루터기에서 다섯 걸음 안팎이었지.”
라크의 시선이 공터로 향한다.
그루터기에서 다섯 걸음 안팎의 공간. 그 공간에서 전투는 벌어졌다. 정확히 그 부분에만 도끼가 틀어박혔던 흔적이 남아있었다.
‘도끼뿐만이 아니다.’
벨노아가 폭발시켰던 단검의 잔해도, 전부 그 범위 안에 떨어져 있었다.
“그 말은······.”
“그래, 붙잡힌 건 무조건 저 범위 안에 떨어진다는 거야. 교수님은 절대로 무기를 쓰지 않아. 어딘가로 던지지도 않아. 그저 바닥에 놓아줄 뿐이야.”
그것이, 다섯 번째 제약이다.
제약을 이해한 라크가 질문했다.
“그럼, 무기가 붙잡힐 것을 두려워 하지 마라?”
“그거지. 게다가 넌 도끼를 두 개 쓰잖아. 하나를 붙잡혀도 괜찮아. 곧장 다른 도끼를 휘둘러버려.”
벨노아가 그림자를 매듭지었다.
“그럼, 교수님은 네 도끼를 놓고 다시 손을 뻗겠지. 그게 제약이니까.”
그림자가 묶인 도끼를 벨노아는 휙, 맞은편의 나무를 향해 던졌다. 콰직, 하고 그 날이 나무 기둥에 틀어박혔다.
“그렇게 되면.”
벨노아가 도끼와 연결된 그림자를 쥔다. 그대로 확 하고 휘둘렀다.
팍!
나무에서 뽑혀 나온 도낏자루가 벨노아의 손으로 돌아온다. 도끼를 붙잡은 벨노아가, 도낏자루에 묶인 그림자 줄을 가리켰다.
“내가 회수해줄게.”
“·····그런가.”
“그림자는 대충 열 걸음 정도까지 늘어나. 그리고, 줄에도 주문을 스톡해둘 수 있지.”
라크가 도끼를 건네받는다.
“작전은 별거 없어. 아까처럼, 구체적으로 세우지도 않을 거야. 넌 생각할 거 없어.”
벨노아는 남은 도끼에도 그림자를 묶으며 말했다.
“나한테 대련할 때 썼던, 그거.”
“···그거라면.”
“그거 있잖아. 눈 시뻘개져서 달려드는 거.”
“그걸 쓰면 나는 상황 판단을 못 한다. 이성보다 본능에 우선해 달려들게 된다. 그래도 괜찮나?”
“상관없어.”
벨노아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상황판단은 내가 해. 본능대로 움직여. 남은 건 내가 알아서 맞출 테니까.”
라크도 힘겹게 몸을 일으켜 세운다.
“조율하는 데는 좀 걸리겠지만.”
그들은 하늘을 바라본다.
아직 해는 중천에 떠 있다. 삼일의 시험 중, 아직 첫날의 해도 지지 않았다.
“시간은 흘러넘칠 만큼 남아있으니까.”
“그런가.”
라크가 시선을 옮겼다.
그 시선이 향하는 곳은 공터의 중심이다. 그곳에는 다리를 꼰 채 이쪽을 바라보고 있는 라니아 교수님이 있다.
초인적인 움직임.
빠른 상황판단.
북방의 노련한 전사들과 비교해도, 밀리기는커녕 압도할 만큼의 실력을 갖춘 여인.
‘두렵다.’
그러나, 두려움은 극복하는 것이다.
라크는 호흡을 가다듬으며 도끼를 심장 앞으로 들어 올린다. 도낏자루에 스톡(Stock)된 주문을 심장에 향하게 한다.
······북방의 전사들은 멈춤을 모른다.
그들은 얼어붙은 땅 위에서, 그 누구보다 뜨겁게 살아간다. 그들의 열기는 눈 폭풍 속에서도 식지 않는다.
‘북방의 전사는 뜨거운 불이요.’
라크가 툭, 하고 도낏자루로 심장을 건드린다. 스톡(Stock)된 주문이 빛을 발한다.
‘영원히 담금질 되는 식지 않는 철이다.’
가열(Heating).
쿠웅.
붉었던 라크의 눈동자가, 조금 더 붉어진다.
2.
“······.”
라니아는 본능적으로 위화감을 느꼈다. 경계선에서 다가오는 라크의 상태가 심상치 않다.
눈동자가 붉게 충혈돼있다.
손도끼를 쥔 팔뚝을 따라 핏줄이 도드라진다. 설산의 한복판에 서 있기라도 한 양, 그가 숨을 내뱉을떄마다 김이 서린다.
‘저건.’
라니아는 라크의 상태를 보고 떠올린다. 전장에서 마주쳤던 북방의 전사들을. 그들이 사용하던 독특한 신체 강화법을.
‘가열(Heating).’
본래 무기를 달구는 데 쓰는 주문을, 육체에 거는 무식하기 짝이 없는 강화법. 그 주문이 가져오는 반동은 말 할 것도 없다.
‘평범한 사람은 그 반동을 견딜 수 없다.’
설산에서 나고 자란 북방의 전사들, 그중에서도 극히 일부만이 사용할 수 있는 육체 강화법. 라크의 몸에 걸린 것은 분명 그것이다.
“······하.”
라니아는 웃음을 터뜨린다.
재능은 진작에 알아봤다. 그 타고난 전투 감각은 충분히 보았다. 그러나, 가열을 견뎌내는 육체를 보고 있자니 무심코 웃음이 흘러나온다.
‘진짜로.’
탁, 하고 한 걸음 앞으로 내디딘다.
그녀는 처음으로 자신이 그어둔 경계선 바깥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루터기에서 한 걸음 더 멀어진다.
그리고.
그녀가 발걸음을 옮김과 동시에 라크가 땅을 박찬다. 이전과는 그 속도가 비교도 되지 않는다. 순식간에 거리를 좁힌다.
‘키울 맛 나는 애들뿐이네.’
라크가 도끼를 휘두른다. 그 움직임은 이전처럼 깔끔하지 않다. 짐승이 팔을 휘두르듯, 날카롭기보다는 거친 움직임이다.
캉.
붙잡는 것을 포기한다. 쳐낸다. 캉, 카앙하고 도끼를 쳐내는 소리가 연달아 울린다. 쳐내면 쳐낼수록, 라크의 도끼는 빨라진다.
“······.”
라니아는 눈살을 찌푸린다.
가열(Heating)을 사용하는 라크의 재능에는 흥미를 느낀다. 그러나, 라니아는 가열이란 주문 자체를 그닥 높게 평가하진 않는다.
가열은 육체를 한계의 너머까지 끌어올린다.
그 독특한 강화법이 가져오는 초인적인 육체능력은 무시할 게 못 된다. 그러나, 육체를 달구는 가열은 이성을 마비시킨다.
‘본능에 따라 움직이는 맹수.’
북방의 전사들이 괜히 광전사라 불리는 게 아니다. 멈추지 않고 달려들기만 하는 그들은 언제나 코앞에서 죽음을 마주해야 한다.
‘이건 안 좋은 버릇인데.’
일류 전사들은 가열을 조절한다. 그러나, 라크는 아직 그 경지에까진 못 이르렀다. 본능에 따라 날뛸 뿐이다.
“흠.”
라니아는 눈살을 찌푸린 채, 도끼를 튕겨내며 시야의 사각에서 무릎을 굽혔다. 시야가 좁아진 라크는 그것을 보지 못한다.
‘이건 상황을 보고 쓰라고 말을 해야겠네.’
그런 생각을 하며 라니아가 무릎으로 라크의 복부를 갈기려는 순간이다.
콱!
무언가 라크의 팔을 잡아당긴다. 덩달아 라크의 몸이 한 바퀴를 빙글 돈다. 라니아의 무릎이 허공을 찍는다.
후웅!
공격을 피한 라크가 다시 공세로 전환한다.
라크의 눈은 여전히 붉게 충혈되어있다. 그 시야가 넓어진 것은 아니다.
“···아하.”
라니아는 깨닫는다.
라크의 손에 들린 도끼를, 그리고 그 도끼에 이어진 그림자와 그것을 쥔 벨노아의 존재를.
‘이런 식으로 메꾸겠다, 그거지.’
벨노아가 양손에 그림자를 묶은 채, 라크의 움직임을 보조한다. 라크의 움직임을 따라 달리고, 멈추고, 팔을 휘두른다.
“쯧.”
라니아는 연결된 그림자를 끊으려고 해보지만, 그때마다 번번이 라크의 도끼가 방해를 한다. 때로는 그림자에서 비수가 치솟고, 멀리서 벨노아가 단검을 투척한다.
콰릉!
강타를 통해 주문을 요격하다 보니, 어느새 3회를 채우고 만다. 짐승처럼 달려드는 라크를 상대하며 동작을 취할 여유는 없다.
조금씩, 라크가 밀어붙이기 시작한다.
라니아의 입가에 미소가 번진다.
‘조금 더.’
벨노아와 라크의 움직임이 완전히 맞지 않는다. 그 합의 빈틈을 노려 라니아는 발로 라크의 도끼를 내려찍었다. 도끼날이 바닥에 박힌다. 그러나, 그도 잠시다.
투확!
도끼가 그림자에 이끌려 튀어 오른다.
라니아가 고개를 젖힌다. 튀어 오른 도끼는 어느새 라크의 손으로 돌아가 있다.
‘아직 모자라다.’
라니아는 웃음을 터뜨린다.
‘조금만 더.’
가능성이 보인다. 라크와 벨노아가 도달할 수 있는 도달점이, 어렴풋이 그 눈에 보인다.
성장의 가능성.
그리고, 그 성장을 자신이 앞당길 수 있다. 그 사실이 라니아는 기껍다. 즐겁다. 성장해 나가는 학생들을 보는 건 꽤 즐거운 일이었다.
“집중해.”
짧게 말하며 라니아가 주먹을 내지른다.
벨노아와 라크의 움직임에 버벅거림이 생긴 순간을 노린 공격이다.
“커흡!”
라크의 몸이 붕 떠, 경계선 바깥으로 밀려난다. 라크의 육체에 걸린 강화가 풀린다.
툭툭.
처음으로, 라니아의 옷에 흙더미가 묻었다. 그 흙더미를 털어내며 라니아가 눈짓했다.
“얼마 안 남았어.”
그녀의 입을 통해 가능성이 발음된다.
바닥에 엎어진 라크는 웃음을 흘리며, 일어선다. 벨노아는 식은땀을 닦으며, 그림자를 더욱 강하게 묶는다.
중천에 뜬 해가 기울기 시작한다.
시험은 이제 막 시작된 참이었다.
3.
해가 기울었다. 노을이 지기 시작한다. 라크는 거친 숨을 몰아쉬며 다시 한번 심장을 건드렸다. 어느샌가 육체에 활력이 돈다.
‘이렇게까지 연속해서 써본 적은 처음이다.’
육체에 부하가 걸렸다.
아마도, 이번 가열을 쓰고 나면 축 늘어질 게 뻔했다. 그러나, 라크는 멈추지 않는다.
‘고지가 멀지 않았다.’
목표가 눈앞까지 다가왔다.
라크가 땅을 박찼다. 그 움직임을 따라 벨노아도 땅을 박찬다. 둘은 동시에 움직였다.
탁.
벨노아와 라크의 움직임에 더이상 버벅거림은 없다. 둘의 움직임이 매끄럽게 연계된다.
비수가 솟구친다.
그림자가 폭발한다.
공양된 주문이 라니아를 덮친다.
콰릉!
세 번의 섬광이 번뜩인다. 그 계획에 놀아나 주겠다는 듯, 라니아는 기꺼이 그들의 뜻대로 움직여줬다. 주문 세 발이 모두 소모됐다.
라크는 달려든다.
본능에 충실히 몸을 움직인다. 본래, 육체를 달군 북방의 전사들은 제 몸을 사리지 않는다.
그러나, 라크는 다르다.
라크가 가진 전투 감각은, 예언에 가까운 위기 감지 능력은 본능의 영역이다. 본능적으로 공격을 피한다. 다음 공격을 직감한다.
피하고, 휘두르고.
쳐내고 날아간 도끼를 붙잡으며 휘두른다.
캉, 카앙 하고.
경쾌한 소리가 연달아 들려온다. 붉게 충혈된 눈은 맹수와 같다. 맹수의 눈이 사냥감을 관찰한다. 그 틈을 노린다.
‘몰아붙인다.’
오직그 생각만이 머릿속에 가득하다.
‘조금 더.’
라크의 도끼는 계속해서 빨라진다. 그러나, 여전히 라니아가 더 빠르다. 흐름을 놓치는 순간 반격당한다. 흐름을 꿰뚫고 들어오는 공격이 있다.
콱.
그때마다, 벨노아가 움직임을 멈춰 세운다. 비수를 쏘고, 주술로 라크를 보조한다. 그래도, 피할 수 없는 공격도 있다.
뻐억.
주먹이 라크의 복부를 파고든다.
그러나, 견뎌낸다. 라크는 이를 악물고 도끼를 휘둘렀다. 흔들리는 시야로도 정확히 상대의 목덜미를 노린다.
캉, 카앙.
그렇게 얼마의 공격이 오갔을까.
한 걸음 뒤로 물러서던 라니아가 라크의 도끼가 헤집어둔 땅을 밟는다. 그 발이 미끄러진다. 그녀의 몸이 뒤로 기울었다.
“······!”
라크의 눈이 가늘어진다.
틈이었다. 사냥감이 목덜미를 보였을 때, 맹수는 그것을 절대 놓치지 않는다. 라크는 어느 때보다 빠르게 그 품 안으로 파고들었다.
한계까지 달구어진 육체가 초인적인 움직임을 선보인다. 휘두른 도끼가 라니아의 가슴팍을 노린다.
그리고, 그 순간이다.
콱, 하고 벨노아의 그림자가 라크의 팔을 잡아당겼다. 그러나, 라크의 움직임을 이기지 못해 그림자가 투두둑 끊어진다.
맹수를 제어하던 목줄이 풀렸다.
흥분으로 좁아진 시야탓에 라크는 보지 못한다. 뒤로 기울어지는 자세에서도, 순식간에 균형을 잡고 휘두르는 라니아의 주먹을.
후욱.
라니아의 주먹이 노리는 곳은 라크의 턱이다. 그것을 맞으면 기절할 것이 분명하다. 라크의 도끼보다 그녀의 주먹이 더 빨랐다.
“라크!”
벨노아가 소리를 지른다.
라크의 귀에는 그 소리가 닿지 않는다. 그의 눈동자는 오롯이 도끼날에 못 박혀있다. 붉게 충혈된 눈동자에는 제 무기만이 담긴다.
‘회로.’
그리고.
‘주문.’
쭉 늘어진 체감시간 속에서, 라크는 도끼날에 새긴 회로를 보았다. 회로를 보는 순간 머릿속에 무언가 스쳐 지나간다.
라크.
스쳐 지나간 것에는 목소리도 섞여 있다.
너, 일단은 마법사다?
마법사.
‘어느 상황에서도 이성을 잃지 않는 존재.’
뜨겁게 달구어진 머릿속에서도, 라크는 그 목소리를 기억한다. 그가 눈을 크게 떴다. 시야가 순식간에 넓어진다.
육체는 뜨겁되, 머리는 차갑게 식는다.
설산의 눈 폭풍이 머릿속을 휩쓸고 지나간 듯 하다. 본능 속에서 이성이 싹튼다. 기이한 감각이 몸을 지배한다.
‘주먹.’
라크는 라니아의 주먹을 보았다.
그것이 자신의 턱을 향함을 느낀다. 이성과 본능이 한순간에 일치한다. 느껴지는건 일치감이다.
우득.
라크는 공격을 포기한다.
뼈를 뿌득이며 고개를 틀었다.
핏.
주먹이 볼을 스치고 지나간다.
주먹을 피했으나, 강제로 자세를 틀은 대가로 라크의 균형이 무너진다. 라니아는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무릎을 쳐올렸다.
뻐억!
그녀가 무릎으로 라크의 안면을 찍었다.
라크의 고개가 뒤로 확 젖혀진다. 코피가 터져 주륵, 하고 피가 흘렀다.
으득.
그러나 라크는 쓰러지지 않는다.
이를 악물고 마지막 공격마저 견뎌낸다. 곧장 추가타를 이으려던 라니아가 움찔, 하고 멈춰 섰다.
“정말이지······.”
멈춰선 그녀가 웃음을 터뜨렸다.
“그래.”
라니아가 한걸음 뒤로 물러선다.
물러서서, 그녀는 라크의 발끝을 가리켰다.
“너희가 이겼어.”
마지막 순간, 라크가 공격을 포기하고 쭉 뻗은 발이 나무 그루터기에 닿아 있었다. 라크가 천천히 고개를 당겼다.
“큽, 으읍.”
주륵, 흐르는 코피를 손등으로 훔치며 라크가 되물었다.
“통과 한 겁니까?”
“응.”
라니아가 고개를 끄덕이며 미소지었다.
대견하다는 듯한 미소다. 그 미소를 보고 나서야, 라크의 몸이 뒤로 기울었다.
털썩.
라크가 바닥에 엎어진다. 뒤이어 벨노아도 털썩, 하고 자리에 주저앉았다. 거의 동시에 바닥에 엎어진 그들은 하늘을 올려다본다.
지평선 너머로 해가 저물고 있다.
그러나, 아직 완전히 저물지는 않았다.
첫째 날의 해 질 녘.
둘의 학생이 시험을 통과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