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eautiful Top Star RAW novel - Chapter (131)
뤼순 감옥의 사형장 세트장.
1910년 3월 26일.
안중근이 사형을 당한 날이다.
초라한 죄수복을 입은 우혁이 포승줄에 묶인 채 서 있다.
‘액션!’ 신호가 떨어지길 기다리는 중이다.
이 장면을 끝으로 6개월 동안의 촬영이 끝난다.
이것을 끝으로 1년 정도는 미국에서 생활하며 할리우드 영화 두 편을 찍게 된다.
지난 6개월이 주마등처럼 스치고 지나간다.
[안중근 장군>의 주인공을 찾고 있다는 말을 들었을 때 두 번 생각할 것도 없이 출연을 결정했다.출연을 결정한 이래로 일주일에 한두 번씩 꾸준히 안중근을 추체험했다.
안중근은 1879년 황해도 해주부 수양산 아랫마을에서 양반지주의 아들로 태어났다.
소년 안응칠(安應七)은 어린 시절부터 활쏘기와 말타기를 좋아했고, 집 안에 드나드는 포수꾼들의 영향으로 사냥하기를 즐겼다.
드라마 [안중근 장군> 1, 2회에서는 안중근의 부친 안태훈을 통해 당시의 19세기 말엽의 정치적 상황과 시대적 배경을 그리는 데 공을 들였다.
소년 안중근의 모습은 2회가 되어서야 등장하고, 우혁은 아예 등장하지도 않는다.
10퍼센트 초반의 시청률을 기록한 이유였다.
문 PD는 1, 2회가 반드시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재미도 중요하지만 안중근이 태어날 무렵의 시대적 배경을 알아야 안중근이 왜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할 수밖에 없었는지의 당위성을 확보할 수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강화도조약, 임오군란, 갑신정변, 동학 농민 전쟁, 청일전쟁, 명성황후 시해 사건이 다루어졌다.
사극 전문 PD다운 선택이었다.
시청자들의 반응은 썩 좋지 않았다.
-역사 다큐인 줄…
-안중근은 언제 나오는겨?
-2회가 끝났는데 주인공 강우혁은 코빼기도 안 보인다!
3회부터 우혁이 등장했다.
1905년 일본에 의해 강제적으로 맺은 을사늑약이 체결됨으로써 외교권을 일본에게 빼앗겼다는 소식을 듣고 안중근의 부친 안태훈은 원통해서 눈물을 흘린다.
그해 통감부가 설치되고 이토 히로부미가 초대 통감으로 부임하자 안태훈은 치를 떨었다.
“저 놈을 죽여야 한다! 저 놈을 죽여야 해!”
이 말을 들은 응칠은 활쏘기와 사격 연습을 할 때 ‘이토 히로부미’의 이름을 적은 표적지를 사용한다.
응칠은 표적지를 향해 총을 쏜다.
탕!!
표적지에 적힌 ‘이토 히로부미’의 이름 위를 총알이 뚫고 나간다.
다음 장면에서 응칠 역을 맡았던 아역 배우 대신 우혁이 표적지를 조준하는 모습이 나타난다.
드디어 성인 안중근이 등장한 것이다.
인터넷 사이트에 댓글들이 달리고, SNS와 스마트폰 매신저를 통해 그 사실이 퍼져 나갔다.
-오! 장면 전환 인상적인데!
-강우혁 등장!!
-등장부터 강렬하네. 눈빛 봐라. 크아~~
-지릴 뻔 -.,-
1907년 고종 황제가 헤이그 특사 사건으로 강제 퇴위를 당하고 이완용 내각은 하루 만에 찬성하여 순종의 재가를 얻어 한일신협약을 체결한다.
협약은 전문 7조로 되어 있으며 모든 행정ㆍ사법 사무를 통감부의 감독 아래에 두는 것을 내용으로 하고 있다.
결국 일제는 이 협약에 의거하여 1910년 강점할 때까지 사법권·행정권·관리 임명권을 탈취하는 등 한국의 식민지화를 위한 마지막 기반을 조성해갔다.
통감부의 통감 이토 히로부미가 모든 실권을 쥐고 흔들 수 있게 된 것이다.
조선의 임금 순종은 허수아비일 뿐.
“이토 히로부미! 내 저 자를 반드시 죽이고 말 것이야!”
안중근은 책상을 내려치며 격분했다.
한일신협약에 반발한 조선 병사들이 전국적으로 의병을 일으키자 안중근도 떨치고 일어나 강원도에서 의병을 일으키는 데 가담한다.
이후 황해도 의병대의 한사람으로 일본군과 싸우다가 자신이 직접 국외에서 의병부대를 창설하기 위해서 블라디보스토크로 건너간다.
그곳에서 계동청년회(啓東靑年會)에 가입하고, 강렬한 리더십을 발휘해 계동청년회의 임시사찰(臨時査察)에 선출된다.
1908년 7월 전제덕(全齊德)의 휘하에서 대한의군참모중장(大韓義軍參謀中將) 겸 특파독립대장(特派獨立大將) 및 아령지구(俄領地區) 사령관의 자격으로 엄인섭(嚴仁燮)과 함께 100여 명의 부하를 이끌고 두만강을 건너 국내로 침투하여 일본군 수비대를 기
습 공격하여 전멸시킨다.
그때부터 그의 부하들은 안중근을 ‘장군’이라고 호칭했다.
이후 본격적인 국내 진공작전을 계획, 감행하여 함경북도 경흥군과 신아산 부근의 야산에서 일본군과 교전하여 전과를 올린다.
그 전투에서 일본군 포로들을 잡았으나 다른 의병대원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안중근은 국제공법에 의거해서 석방해 주었다.
치명적인 실수였다.
포로들 중 일부가 은혜를 저버리고 일본군에게 안중근 부대의 위치를 알려준 것이다.
포로에 의해 위치가 노출되어 회령군 인근에서 일본군의 기습을 받아 부대가 와해되었다.
안중근은 산악지대를 통과하여 구사일생으로 귀환하였으나 죽고 싶은 심정이다.
자신의 판단 착오로 인해 부대가 와해되었으니 말이다.
이 장면이 방송으로 나갔을 때 시청자들도 화를 냈다.
-안중근 왜 그랬대? 이해할 수가 없네.
-고구마 100개 먹은 기분이야. 으으으~
-강우혁! 왜 그랬니? 그건 아니잖아!
이 일로 의병의 신임을 잃은 안중근은 블라디보스토크로 건너가 새로이 의병을 다시 일으키려고 했으나 아무도 그를 따르지 않았다.
안중근은 깊은 절망에 휩싸여 고통스러운 나날을 보내다가 일제의 폭압에 시달리는 조선 사람들의 고통을 목도하고 다시금 일어선다.
안중근은 동지 11인과 함께 동의단지회(同義斷指會)를 결성하고 일제를 몰아내는 데 목숨을 바칠 것을 결의하며 왼쪽 손 약지 한 마디를 끊는다.
이때부터 안중근의 목표는 오직 한 가지.
이토 히로부미 저격!
그해 늦가을, 드디어 기회가 왔다.
“장군! 10월 26일 이토 히로부미가 러시아 제국의 재무장관 블라디미르 코콥초프와 회담하기 위해 하얼빈에 도착한답니다.”
동지 중 한 명이 안중근에게 알려 주었다.
“하늘이 기회를 주셨군!”
안중근은 이토 히로부미를 암살하기 위해 비밀 결사대를 조직한다.
안중근은 의거를 거행하기 전 ‘장부가(丈夫歌)’를 지어 동지 우덕순에게 준다.
이 시에서 대한제국을 침탈하고 국가를 멸망에 이르게 한 이토 히로부미를 ‘쥐새끼’라고 지칭하며 강력한 적대감을 드러낸다.
10월 21일에 대동공보사 기자 이강(李剛)의 지원을 받아 블라디보스토크를 떠난 안중근은 우덕순과 조도선, 유동하와 함께 하얼빈에 도착한다.
당초 계획은 동청철도(東淸鐵道)의 출발지인 장춘의 남장춘(南長春), 관성자(寬城子)역과 도착지인 하얼빈, 채가구(蔡家溝)역의 4개 지점에서 암살을 시도하려 하였으나 자금과 인력이 부족하여 도착지인 하얼빈과 채가구에서 저격하기로 계획을 변경한다.
우덕순과 조도선은 채가구역, 안중근은 하얼빈역을 맡는다.
이토 히로부미 일행이 남장춘역에서 기차에 올라 우덕순과 조도선이 기다리고 있는 채가구역을 지난다.
작전 실패!
우덕순과 조도선의 행동을 수상하게 여긴 러시아 병사 때문에 달아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안중근 동지 혼자서 해낼 수 있을까요?”
“도착지에서는 경비가 더욱 삼엄할 겁니다.”
“빌어먹을!”
이토 히로부미를 태운 열차가 달리고, 안중근은 모든 준비를 마치고 하얼빈역으로 향한다.
러시아 경찰과 일본 경찰들 옆을 지나갈 때마다 조마조마하다.
10월 26일 오전 9시.
이토 히로부미가 탄 기차가 하얼빈 역에 도착한다.
이토 히로부미는 러시아 재무대신 블라디미르 코콥초프와 열차 안에서 회담을 가진 후, 9시 30분경 러시아 군대의 사열을 받기 위해 하차한다.
안중근은 브라우닝제 반자동권총 M1900를 품에 지닌 채 하얼빈 역사를 움직인다.
크로스 커팅으로 긴장감은 더욱 고조된다.
이토 히로부미가 러시아 군대의 사열을 받는다.
기회를 노리는 안중근.
사열을 마치고 열차로 돌아가던 이토 히로부미.
탕!
탕!
탕!
탕!
탕!
탕!
탕!
일곱 발의 총성이 울려 퍼진다.
피를 흘리며 바닥으로 쓰러지는 이토 히로부미.
일곱 발 중 세 발이 이토 히로부미를 명중했다.
나머지 세 발은 수행비서관 모리 타이지로우(森泰二郞), 하얼빈 주재 일본 제국 총영사 가와카미 도시히코(川上俊彦), 남만주 철도의 이사 다나카 세이지로우(田中淸次郞)을 향해 격발했다.
“코레아 우라!(Корея! Ура!)”
안중근은 달아날 생각도 하지 않은 채 권총을 든 손을 높이 치켜들며 하얼빈 역사가 떠나가도록 외쳤다.
‘한국 만세’라는 뜻의 러시아 말이었다.
안중근은 자기를 잡으러 오는 러시아 공안들에게 아무런 저항도 하지 않고 평온한 표정으로 사로잡힌다.
안중근의 체포와 수감 소식이 전해지자 당시 국내외에서는 변호 모금 운동이 일어났고, 안병찬과 러시아인 콘스탄틴 미하일로프, 영국인 더글러스 등이 무료 변호를 자원한다.
그러나 일제는 일본인 미즈노 기타로(水野吉太郞)와 가마타 세이지(鎌田政治)를 관선 변호사로 선임한다.
안중근은 체포된 뒤 일본 교도관과 법관들 앞에서 당당한 자세를 취하고, 미소를 머금은 채 평온한 표정을 짓는다.
재판정에서 일본인 검사가 이토 히로부미를 죽인 이유를 묻자 안중근은 질문을 한 법관을 무서운 눈길로 노려보며 우렁찬 목소리로 또박또박 15가지 이유를 밝힌다.
“내가 이토를 죽인 이유 15가지를 밝히겠다. 한국의 명성황후를 시해한 죄! 고종 황제를 폐위시킨 죄! 5조약과 7조약을 강제로 맺은 죄! 무고한 조선인들을 학살한 죄! 정권을 강제로 빼앗은 죄! 철도와 광산, 산림, 천택을 강제로 빼앗은 죄! 제일은행권 지폐를
강제로 사용한 죄! 군대를 해산시킨 죄! 교육을 방해한 죄! 조선인들의 외국 유학을 금지시킨 죄! 교과서를 압수하여 불태워 버린 죄! 조선인이 일본인의 보호를 받고자 한다고 세계에 거짓말을 퍼뜨린 죄! 조선과 일본 사이에 경쟁이 쉬지 않고 살육이 끊이지 않는
데 태평 무사한 것처럼 위로 천황을 속인 죄! 동양 평화를 깨뜨린 죄! 일본 천황의 아버지 태황제를 죽인 죄!”
우혁이 법정에서 일본 법관에게 호통을 치는 연기는 압권이었다.
발성, 호흡, 리듬, 라임이 절묘했다.
“나는, 조선의 의병 중장 자격으로, 죄인을 처단한 것이다.”
안중근이 일본 법관에게 일갈했다.
일본 법관이 죄인이고 안중근이 법관 같았다.
1910년 2월 14일.
판사가 최종 판결을 한다.
“명치(明治) 43년(1910년) 3월 24일, 관동도독부(關東都督府) 지방법원 검찰관에 대하여 아래 자(者)에 대한 사형집행을 명한다. 한국 평안도 진남포 무직 안응칠. 33세. 죄명 살인범. 형명 사형!!!”
땅! 땅! 땅!
방청객석에서 탄식과 울음소리가 들린다.
그러나 안중근의 표정은 더없이 평화롭다.
안중근은 사형을 기다리며 옥중 생활을 이어나간다.
독서와 집필을 하고, 가끔 먹을 들어 붓글씨를 쓰기도 했다.
一日不讀書口中生荊棘(일일부독서구중생형극)
‘하루라도 책을 읽지 않으면 입속에 가시가 돋는다.’
이 유묵도 그때 쓴 것이다.
안중근의 당당한 태도에 감복한 안중근을 존경하던 일본인 간수 지바에게 준 글귀도 있다.
爲國獻身 軍人本分(위국헌신 군인본분)
‘나라를 위하여 목숨을 바침은 군인이 해야 할 일이다.’
이 글귀는 현재 대한민국 국군의 표어 중 하나가 되었다.
수감 중에 ‘동양 평화론’을 저술하였으나 끝내 완성시키지 못한다.
안중근은 사형이 임박했음을 예감하고 유언을 남긴다.
**
내가 죽은 뒤에 나의 뼈를 하얼빈 공원 곁에 묻어두었다가 우리 국권이 회복되거든 고국으로 반장하라.
나는 천국에 가서도 또한 마땅히 우리나라의 회복을 위해 힘쓸 것이다.
너희들은 돌아가서 동포들에게 각각 모두 나라의 책임을 지고 국민된 의무를 다하며 마음을 같이 하고 힘을 합하여 공로를 세우고 과업을 이루도록 하라.
대한 독립의 소리가 천국에 들려오면 나는 마땅히 춤추며 만세를 부를 것이다!
**
“카메라 준비 됐습니까?”
“예!”
“조명?”
“예! 준비 완료!”
“음향?”
“옙!”
“다들 준비 됐지요. 갑니다. 스텐바이!”
조연출 이 PD가 팀들을 호명하며 준비 상황을 확인한 뒤 ‘스텐바이’를 외쳤다.
긴장감이 감돈다.
우혁은 심호흡을 한 뒤 아주 천천히 숨을 내쉬었다.
“액션!”
카메라 세 대가 동시에 우혁을 촬영한다.
대사는 없다.
우혁은 평화롭기 그지없는 표정으로 정면을 응시한다.
“하실 말씀 있습니까?”
사형집행관이 묻는다.
우혁은 잠시 침묵을 지키다가 조용히 입을 연다.
“나의 이 거사는 동양 평화를 위하여 결행한 것이므로 임석 제원들도 앞으로 한·일 화합에 힘써 동양 평화에 이바지하기 바란다.”
우혁의 대사가 끝나자 교도관 중 한 명이 우혁에게 흰 두건을 씌운다.
흰 두건을 뒤집어쓰자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안중근을 추체험했을 때가 떠오른다.
안중근은 두건을 쓰기 전, 일본인 교도관과 사형집행인이 볼 때까지 전혀 감정을 드러내지 않았으나 두건으로 얼굴을 가린 뒤 조용히 눈물을 흘렸다
부모님과 아내 김아려, 큰딸 현생과 둘째아들 준생에게 고맙고 미안하다.
일곱 살 때 먼저 하늘로 간 큰아들 문생의 모습도 눈에 선하다.
부모님과 아내, 민서를 두고 먼저 떠나야 한다면?
상상만으로도 가슴이 미어졌다.
우혁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만약 안중근이 이 시대에 태어났더라면 어떤 삶을 살았을까?
33세의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나지는 않았을 텐데···.
안중근은 35세인 우혁보다 어린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그의 희생 덕분에 연기자로 살아갈 수 있는 행운을 얻은 게 아닐까!
그의 삶을 연기할 수 있다는 사실이 고맙다!!
[ [안중근 장군> 마지막 촬영 날 > 끝ⓒ 길밖의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