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eautiful Top Star RAW novel - Chapter (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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늙은 소를 타고 오신 아버지
술자리를 파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소파에 누워서 잠들었던 백곰은 신기하게도 우혁이 ‘동수야, 집에 가자’라는 말 한마디에 벌떡 일어났다.
백곰은 장 작가에게 깍듯이 머리를 숙이고, 문 피디와는 ‘잘 가라 동수야!’, ‘잘 있어, 형!’ 하면서 요란하게 인사를 나눈 뒤에야 오피스텔을 나섰다.
대리운전 기사를 불러 백곰을 집 앞에서 내려 원룸까지 데려다준 뒤 집으로 갔다.
“오빠! 엄마, 아빠 설득했어.”
집에 들어서자 기다리고 있던 아내가 활짝 웃으며 말했다.
“우리하고 같이 사시겠대?”
“응!”
“오빠도 좋지?”
“나야 당연히 좋지만···.”
“엄마, 아빠가 불편하실까 봐?”
“당신이 불편할 것 같아서 걱정이지.”
“나는 좋다니까 그러네. 내일 이사 갈 집 좀 알아보려고 하는데 같이 가 줄 수 있어? 엄마, 아빠도 내일 오신다고 하셨거든.”
여기를 오신다고 하셨다고? 설마 그 똥차를 끌고 오시진 않겠지?
“마침 잘 됐네. 회사 차를 내가 가지고 왔거든. 회사에다 말하고 내일 두 분 모시고 다니면 되겠다.”
“택시 타고 다니려고 했는데 잘 됐다.”
“이사 갈 집은 알아봤어?”
“마음에 꼭 드는 집이 있어. 인터넷 사진으로 봤을 때는 마음에 드는데 직접 가봐야 알 것 같아. 이 집이야.”
아내가 휴대전화로 사진을 보여 주었다.
2층짜리 전원주택이었다. 마당과 작은 정원까지 있는.
“어때?”
“좋기는 한데···. 우리가 가진 돈으로 가능할까?”
아내는 나무 전속 계약금과 광고 출연료, 재채기 저작권료, 드라마 출연료 등을 차곡차곡 은행에 저축하고 있었다.
“가능하니까 보여주는 거지.”
아내가 그 집의 전세가를 알려주었다. 대출 없이 충당할 수 있는 가격이었다.
“지역이 어디야?”
“양평.”
“위치 괜찮네.”
[홍길동전>을 남양주 영화종합촬영소와 SBC 방송국 스튜디오, 가평, 파주 등에서 촬영하니까 위치가 딱 좋다.촬영 차 다녀본 양평은 풍광이 아름다워 꼭 살아보고 싶은 곳이기도 했다.
“내일 이 근처 다른 집들도 보기로 했어. 피곤할 텐데 어서 씻고 자.”
샤워를 한 뒤 작은 방에 들어가 [홍길동전> 대본을 훑어보았다.
가슴이 설렜다.
마음 같아서는 밤을 새워 읽고 싶었지만 참았다.
대본을 손으로 쓰다듬어 주고 밖으로 나왔다.
다음 날 아침, 평소와 다름없이 아침에 일어나 가벼운 스트레칭부터 시작해 운동을 했다.
운동을 마치고 간단하게 샤워를 하고 나서 작은 방에 들어가 [홍길동전>의 대본을 읽었다.
아침을 먹으면서도 손에서 대본을 놓지 않았다.
손을 뗄 수가 없었다. 너무 재미있었던 것이다.
장길승 작가의 저력을 느낄 수 있는 대본이었다.
장 작가는 박진감 넘치는 스토리와 개성 넘치는 등장인물들을 통해 인간 사회에서 일어날 수 있는 다양한 사건 사고들을 드라마 속에 잘 버무리기로 유명했다.
장 작가가 집필한 [홍길동전> 대본은 원작에 기반을 두되 극의 재미를 극대화하면서도 옛사람들의 고통과 애환, 기쁨과 슬픔, 사랑과 이별 등 인간사의 일면을 담아내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묵직한 주제 의식이 작품 전체를 관통해 일견 통일성이 없어 보이는 사건 사고와 에피소드를 하나로 꿰고 있었다.
조선시대를 배경으로 하지만 오늘날을 살고 있는 현대인들도 공감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 문 피디와 장 작가의 공통된 생각이었다.
우혁은 [홍길동전> 대본 4회분을 다 읽고 나서 기쁨에 들떴다.
오디션을 준비하며 읽었던 원작과 자료들에서 느낄 수 없었던 극적 재미와 감동, 웃음, 페이소스, 현실과 정치 풍자 등이 어우러져 있었다.
드라마 [홍길동전>의 주인공 홍길동은 문무를 겸비한 실력자로서 만능 무술 실력, 역술과 도술에 능하며, 단호함과 인자함을 동시에 겸비한 인간적 리더십을 지닌 캐릭터였다.
‘가난한 백성들을 돕는 무리’라는 뜻의 ‘활빈당(活貧黨)’을 만들어 이상향을 실현하는 인물이었다.
문 피디의 오피스텔에서 백곰이 소파에서 잠든 사이에 문 피디, 장 작가와 나누었던 대화들이 떠오른다.
“우혁 씨는 우리 드라마에서 가장 중요하게 다루어졌으면 하는 게 뭔가?”
문 피디가 우혁에게 물었다.
“도적의 소굴이 아름답게 그려졌으면 좋겠습니다.”
“활빈당이 모여 사는 곳 말이지?”
“그곳에는 차별과 폭력, 억압과 굴종이 없는 곳입니다. 우리가 꿈꾸는 유토피아나 이상향에 가까운 공간이죠.”
“콩 한 쪽이라도 나눠 먹으면서 말이야.”
“도둑들이 모여 살지만 그곳에는 도둑이 없을 겁니다.”
“그렇지. 도둑이 있으면 낙원이 아니지.”
“그곳에 사는 사람들은 비록 가난하지만 부유할 것 같습니다.”
“마음이 부유하다?”
“물론 부유하면서 행복하기보다 가난하면서 행복하기가 어려운 것도 사실입니다만.”
“그렇지.”
“가난을 미화하고 낭만적으로 그리는 건 고통의 인내를 종용하는 기득권자들의 논리에 불과하다고 생각합니다.”
“가난과 인내를 예찬하면서 정작 자기들은 배고픈 걸 못 참는 게 기득권자들 아니겠나.”
“차별 없는 사회에서 모두가 행복을 누릴 수 있는 공동체는 홍길동의 꿈이고 그 꿈이 실현된 모습을 보여 주는 게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바로 그거야, 그거! 내가 [홍길동전>을 만들려고 하는 목적이 바로 그거라고. 다같이 함께 꿈을 꾸자 이거지. 그 꿈들이 하나씩 모이면 사회적 목표가 될 수도 있는 거 아닌가. 꿈을 잃으면 개인이나 사회나 희망이 없는 거 아니겠어.”
문 피디와 장 작가가 우혁의 말에 번갈아가면서 대답을 하거나 추임새를 넣었다.
문 피디와 장 작가는 많은 대화를 통해 서로의 생각을 공유하고 있어서 [홍길동전>의 핵심 가치에 대한 생각이 유사했다.
우혁은 문 피디, 장 작가와 대화하면서 깨달았다.
두 사람은 단순한 직업인이 아니라 드라마를 쓰고, 드라마를 연출하는 사람으로서 이 세상을 아름답게 만들겠다는 꿈을 가진 몽상가라는 사실을.
그런 점에서 우혁도 마찬가지였다.
돈을 많이 벌고 유명해지는 것도 중요하지만 연기자로서 세상을 조금이라도 아름답게 가꾸는 데 일조하고 싶다.
동지를 만난 기분이랄까.
그래서 그런지 나이 차이가 많음에도 불구하고 주거니 받거니 대화는 막힘이 없었다.
이런 문 피디가 왜 무섭다는 거지?
정 실장의 말에 의하면 김길빈은 문 피디를 처음 만났을 때 울었다는데 우혁으로서는 이해가 가지 않았다.
어쩌면 작품에 대한 독서나 사전 지식, 고민 등이 전혀 되어 있지 않은 것에 대한 꾸지람을 문 피디에게 들었을지도 모르겠다.
문 피디의 질문들은 우혁을 길들이거나 군기를 잡기 위한 목적이 아니었다.
연기자가 단순히 대본의 대사를 암기하는 데 그치지 않고 연출자와 작가가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공유하고 싶어 하는 거였다.
그것이 연기자로서는 부담스러울 수도 있다.
대사나 잘 외워서 연기를 하면 되지 작품의 주제까지 굳이 알아야 하나?
하지만 우혁은 전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오히려 연기에 들어가기 전에 반드시 필요한 작업이라고 여겼다.
[홍길동전> 대본을 읽고 나서 우혁은 흥분을 감출 수 없었다.문 피디가 야단을 치면 기꺼운 마음으로 야단을 맞을 수 있을 것 같다.
연기가 왜 그 모양이냐, 대사를 왜 그 따위로 치느냐, 왜 자꾸 엔지를 내느냐, 그게 울분을 토하는 거냐, 영혼 저 밑바닥에 있는 슬픔까지 끌어올려서 울 수는 없는 거냐···.
하지만 문 피디가 야단할 게 없도록 만들 것이다.
왜냐?
완벽하게 준비할 테니까.
***
“오빠! 엄마, 아빠 오셨어.”
아내가 부른다.
참, 오늘 부모님이 오시기로 하셨지.
우혁은 [홍길동전> 대본을 덮고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
“오셨어요?”
어머니는 ‘오냐!’ 웃으시며 손을 마주잡고, 아버지는 ‘그래!’ 하시고는 소파로 가 앉으신다.
아내와 어머니는 손을 잡고서 놓지를 않는다.
몇 년 동안 헤어졌다가 상봉한 것 같지만 지난달에도 부모님댁에 가서 뵈었다.
“오시느라 고생하셨죠?”
아내가 어머니와 아버지에게 살갑게 군다.
“요 앞까지 와서 뱅뱅 돌았다. 차 댈 데가 있어야지 말이야. 서울만 들어서면 심장이 두근두근 거려. 차들이 왜 그리 불쑥불쑥 끼어들고 닿을 듯이 따라오는지 모르겠더라. 빵빵거리기는 또 왜 그리 빵빵거리는지 원. 늬 시아버지가 고생했지 뭐.”
아버지는 아무 반응도 없으시다.
하지만 꽤 고생을 하셨는지 손수건으로 연신 목덜미와 이마를 닦으신다.
“혁아, 차에 가서 짐 좀 꺼내오너라. 김치랑 도토리 가루 좀 가져왔다.”
어머니가 말했다.
아버지에게서 키를 받아 주차해 둔 곳을 묻고 밖으로 나왔다.
길가에 초라하게 서 있는 아버지의 차가 보인다.
아버지의 차는 굴러가는 게 신기한 1톤 트럭.
아내가 차를 바꿔드린다고 했지만 아버지는 펄쩍 뛰셨다. 머지않아 운전대에서 손을 놓을 텐데 새 차를 사서 무얼 하겠냐는 것이다.
모양은 초라하지만 아버지는 이 차를 끔찍하게 아낀다.
늙은 소 같은 존재.
폐차하시라 말씀드려도 들은 척도 하지 않는다.
우혁은 차 문을 열고 운전석에 앉았다.
가끔 한 대씩 때려야 나오는 라디오, 늘어진 뽕짝 테이프, 닳고 닳아 반질반질한 운전대···.
비록 낡았지만 먼지 하나 묻지 않았다.
아버지의 애정이 느껴진다.
남들 눈에는 똥차지만 아버지에게는 오래된 동무이다. 무거운 짐도 실어주고, 아들네에 올 때도 함께 오는.
아마 아버지는 운전대에서 완전히 손을 떼더라도 늙은 소를 폐차하지 않을 것 같다. 마당 한 구석에 세워 놓겠지.
키를 꽂고 시동을 걸었다.
쿨룩쿨룩쿨룩!
늙은 소가 밭은기침을 했다.
시동이 걸리지 않을까 걱정했는데 용케도 시동이 걸린다.
늙은 소가 일어난 것이다.
집 근처로 늙은 소를 옮겼다.
늙은 소는 느릿느릿 움직인다.
사람들이 늙은 소를 흘낏거린다.
집 근처에 늙은 소를 주차했다.
시동을 끄려다가 잠시 그대로 차 안에 앉아 있었다.
늙은 소의 심장소리를 듣고 싶었다.
아버지의 품에 안기면 이런 기분일까.
까닭 없이 눈시울이 뜨거워진다.
아버지 품에 안긴 적이 있던가?
기억에 없다.
등에 업힌 기억은 있다. 아주 오래 전 일이지만.
초등학교 들어가기 전이었을 것이다.
심한 장염에 걸린 적이 있는데, 아버지 등에 업혀 읍내 병원에 간 기억이 가물거린다.
입대를 하고 첫 휴가를 나오던 날 친구들과 신나게 놀다가 차를 놓쳐 읍내에서 집까지 걸어갔다.
집으로 걸어가는 길이 너무 길어 투덜거리다가 문득 그 거리가 어른 걸음으로 한 시간이 걸린다는 걸 깨닫고 가던 길을 멈추고 한참을 가슴 먹먹했던 기억이 난다.
어머니의 말에 의하면 그날 아버지는 병원에 도착할 때까지 내내 잠시도 쉬지 않고 빠른 걸음으로 걸었다고 한다.
“걸음이 어찌나 빠른지 쫓아가느라 애를 먹었다. 병원에 도착하니까 땀에 홈빡 젖었더라니까. 그러니 네 아버지는 오죽했겠니. 아버지한테 잘해.”
어머니는 그때 일을 종종 들려주었다.
말끝은 언제나 ‘아버지한테 잘해.’였다.
모르겠다. 아버지하고는 서먹서먹하다.
지금이야 그렇지 않지만 사춘기 때는 아버지에게 불만이 많았다.
어머니를 고생시키는 사람.
술에 취해 들어와서 잠이 와 죽겠는데 일장연설을 늘어놓던 사람.
초등학교 저학년 때 동네 바보를 놀렸다는 이유로 한 시간 동안 무릎을 꿇고 손을 들고 있게 사람.
장난으로 동네 꼬부랑 할아버지 등에 ‘의자가 아닙니다. 앉지 마시오.’라고 적힌 종이를 붙였다고 종아리를 스무 대나 때린 사람···.
지금은 오히려 고맙게 생각하지만 철 없을 땐 아버지가 싫었다.
아버지에 대한 감정이 풀린 건, 입대 첫 휴가 때 집으로 걸어가면서였다.
그렇다고 달라진 건 없다.
여전히 서먹서먹, 데면데면.
살갑게 굴고 싶은데 그게 안 된다.
그런데 아내가 그렇게 하고 있다. ‘아빠’라고 부르며 친딸처럼 군다.
무뚝뚝한 아버지, 생전 웃지 않는 사람인데 아내한테는 웃는다.
무슨 조화인지 모르겠다.
우혁은 코를 풀기 위해 휴지를 찾다가 조수석 앞의 수납공간인 글로브 박스를 열었다.
휴대용 휴지를 꺼내다가 코팅된 신문지 몇 장을 발견했다.
코팅된 신문지는 글로브 박스뿐만이 아니라 운전석과 조수석 전면 상단에 있는 루프 박스에도 있었다.
그 신문지는 모두 우혁에 관한 기사였다.
어쩌면 아버지는 이 기사들을 늙은 소에게 자랑하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운전석에 앉아 늙은 소에게 기사를 읽어 주셨을 것이다.
아버지는 텔레비전에 우혁이 나오는 걸 보면서도 표정의 변화가 없는 분이다.
“아들이 텔레비전에 나오니까 좋으시죠?”
아내가 물어도 아버지는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는다.
어머니는 눈물까지 훔치며 좋아하는데 아버지는 텔레비전에 나온 아들을 소 닭 보듯 한다.
섭섭하지도 않았다. 아버지는 원래 그런 사람이니까.
아니다. 섭섭했다.
한 가정을 이루고 나이 서른이 넘었지만 아버지의 무덤덤한 반응이 못내 섭섭했다.
아버지 자식이 맞기는 한가?
딴따라가 된 자식이 창피하신가?
잠깐이지만 그런 생각도 들었다.
코팅된 신문 기사를 살펴보았다.
기사 내용은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가위로 자른 흔적이 눈에 들어온다.
눈도 안 좋으신 양반이 깔끔하게도 자르셨다.
가위로 신문 기사를 자르는 아버지의 모습이 떠오른다.
돋보기안경을 끼고서 등을 구부린 채 가위로 신문지를 자르는 모습.
코끝이 찡하다.
코팅된 신문 기사를 제자리에 넣아 두었다.
휴지로 코를 풀고 나서 운전석 루프 박스에서 코팅된 신문 기사를 도로 꺼냈다.
글로브 박스에 들어 있던 사인펜을 꺼내 코팅 기사에 사인을 했다.
‘아버지 아들, 강우혁!’
늙은 소가 흐뭇하신 모양이다. 웃으신다.
클클클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