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eautiful Top Star RAW novel - Chapter (64)
박용구와 통화를 끝낸 뒤 최 감독에게 전화를 걸었다.
좀 전에 통화할 때만 해도 잠결에 받은 목소리였는데 지금은 생생하다.
– 원래 12시까지 자는 사람인데 전화 끄는 걸 잊고 잤어요. 잠결에 한 대 얻어맞은 줄 알았네.
“죄송합니다. 주무시는 줄 알았으면 오후에 전화드렸을 텐데, 기다리실 것 같아서 일찍 전화드린다는 게 그렇게 되고 말았습니다.”
– 그런 전화는 빨리 해주는 게 좋지. 그런데 이번엔 왜 전화했어요?
“다름이 아니라 감독님 작품 읽고 나서 박용구 조감독이 쓴 시나리오를 읽었습니다.”
– 길 밖의 새?
“예, 맞습니다. 그 시나리오 혹시 읽어 보셨는지요?”
– 5년 전에 처음 읽었지. 용구가 5년 동안 내내 그것만 다듬고 또 다듬었을걸. 작품 좋아요. 좋은데, 우혁 씨도 영화판 현실 대강 알잖아. 제작자가 지원을 안 해줘.
“감독님께서 좀 밀어주시면 되지 않을까요?”
– 내가 왜 안 밀었겠소. 용구 입봉시키려고 나만큼 애쓴 사람도 없을 거요. 그런데 안 먹혀.
“만약 박용구 감독이 제작사 찾으면 박 감독 밀어주실 건가요?”
– 제작사, 투자자를 찾는 게 힘들지 그 다음이야 내가 도와주고 말고 할 게 있나요. 그런데 그 얘기는 왜 하는 거요?
“제가 박 감독 영화에 출연할까 해서요.”
– 아까는 자는 사람을 깨우더니 이젠 다시 기절시켜서 잠재우려고 합니까. 허허허!
“감독님 영화에는 출연하지 않겠다고 한 지 10분도 지나지 않아서 다른 영화에 출연하겠다고 하는 꼴이 되고 말았습니다. 죄송합니다.”
– 죄송할 거 전혀 없어요. 혈육은 아니지만 용구는 내 동생 같은 친굽니다. 동생보다 더 애틋하지요. 능력 있는 친군데 실력 발휘할 기회가 주어지지 않으니 답답한 노릇이에요.
“가능성이 전혀 없을까요?”
– 우혁 씨가 출연하는 게 확실하다면 가능성 있어요. 있는 정도가 아니라 서로 하겠다고 할지도 모르지. 영화하겠다고 시나리오 들이밀잖아요. 투자자가 시나리오 들여다볼까? 돈이 몇 10억, 몇 100억이 투자되는 거니까 열심히 볼 것 같죠? 천만에. 안 봅
니다. 시놉도 길다고 몇 줄로 줄이라고 하는 사람들이에요.
최 감독이 코를 팽 풀고는 말을 이었다.
– 그 사람들이 뭘 볼 것 같습니까? 감독하고 주인공이에요. 감독도 잘 안 봐. 주인공만 좋으면 투자합니다.
물을 벌컥벌컥 들이켜는 소리가 들렸다.
– 강우혁을 주인공으로 캐스팅했다. 승산 있지. 우혁 씨가 출연하는 게 확실하다면 나도 옆에서 훈수 정도는 둘 수 있을 겁니다.
“고맙습니다.”
– 누가 할 소릴! 용구 잘 부탁합니다.
최 감독이 의외로 흔쾌히 상황을 이해해 주었다.
최 감독과 통화를 끝낸 뒤 박용구에게 전화를 걸어 회사 로비에서 만나기로 약속을 정하고 백곰과 함께 회사에 나갔다.
“회사 오랜만에 나오시네요.”
정 실장이 반갑게 맞아주었다.
안 대표를 비롯해 회사 사람들과 인사를 나누고 정 실장과 회의실에 마주 앉았다.
“혹시 박용구 씨 시나리오 검토하셨나요?”
“우혁 씨가 관심이 있는 것 같아서 출근하자마자 검토했습니다. 직원들하고 회의를 했는데 우혁 씨 결정에 따르기로 결론 내렸습니다.”
“[길 밖의 새>에 출연할까 합니다.”
“알겠습니다. 다만 일요일에 [알람> 공연을 하면서 영화 촬영까지 하려면 힘드시지 않을까 걱정입니다.”
“아직 제작사도 구하지 못한 상황이라 촬영 일정 논의는 전혀 하지 못했습니다만, 무리하지 않도록 유의하겠습니다.”
“박용구 씨 진즉에 입봉했어야 할 사람이라고 하더라구요. 30대 초반부터 입봉 얘기가 나올 정도로 기대를 한 몸에 받았는데 여의치 않았던 모양이에요. 어디나 비슷하겠지만 이 바닥은 그 어느 분야보다 신인들한테 진입장벽이 높지 않습니까.”
입봉 기회를 잡기가 하늘의 별 따기만큼 어려운 것이 현실이다.
“우선 제작사부터 구해야 하겠네요. 우혁 씨가 하겠다면 모르긴 몰라도 하자는 데 꽤 있을 것 같습니다. 저도 제작사 구하는 데 힘을 보태겠습니다. 제작사도 구하지 못한 신인 감독 작품을 하는 경우는 처음이라 조금 당황스럽긴 하네요.”
정 실장은 우혁의 결정을 따를 뿐만 아니라 힘을 보태겠다고 한다.
고마운 일이다.
소속사는 작품 선택 시 소속 연예인의 수익을 가장 우선으로 꼽는다.
시청률이 높을까 낮을까.
관객이 많을까 적을까.
요컨대 돈이 될까 안 될까!
그런데 정 실장은 우혁에게 그 부분을 전혀 언급하지 않았다.
한 해 동안 우혁이 충분한 수익을 올렸기 때문이다.
앞으로 1년 정도는 아무런 수입 없이 휴식기를 가진다 해도 뭐라고 말할 수 없을 만큼.
그런데 우혁은 휴식 없이 곧바로 영화를 하겠다고 한다.
고마울 수밖에.
어설픈 영화보다는 차라리 작품성 있는 영화가 우혁의 장래를 위해서 훨씬 좋다는 걸 정 실장도 잘 알고 있다.
수익도 내지 못하는 상황이라면 우혁의 결정이 반가울 리 없었을 것이다.
박용구는 입봉을 위해 긴 시간 동안 칼을 갈아온 숨은 실력자다.
조감독 생활만 10년.
반대할 이유?
없다.
시도하다가 안 되면?
어쩔 수 없는 거고.
회사도 배우도 잃을 건 없다.
정 실장은 이번 일을 계기로 우혁이 이 작품을 왜 선택했는지 조금은 알 것 같다.
우혁은 멀리 보고, 길게 보고 있다.
이번 작품은 멀리 가기 위한 디딤돌이자 포석일 것이다.
[길 밖의 새>의 시나리오를 보는 순간 답이 나왔다.해외영화제 공략.
국내 흥행에 신경 쓸 필요 없다.
박용구는 많은 예산 들이지 않고 자기 색깔을 가진 작품을 꾸준하게 생산하는 감독으로 방향을 잡아야 한다.
색깔도 없이 예산만 많이 들어가는 상업 영화를 하다가 엎어지면 그것으로 끝이다.
투자자도 관객도 더 이상 그 감독에게 기대하지 않는다.
반면 자기 색깔을 가진 감독은 롱런할 수 있다. 투자자도 있게 마련이고.
배우는?
망해도 남는 장사.
안 망하면 더 남는 장사.
일종의 꽃놀이패.
우혁은 이런 계산을 하고서 [길 밖의 새>를 선택한 것 같지는 않다.
박용구의 시나리오에는 도무지 답이 없는 절망으로 가득하다.
그런데 희망을 놓지 않는다.
실낱같은 희망!
눈물겨운 희망!
개떡 같은 세상, 폭삭 망해 버려라.
저주를 퍼붓지 않는다.
현실에 의해 철저하게 소외된 아웃사이더이면서도 희망의 끈을 결코 놓지 않는다.
우혁은 그 점에 끌렸을 것이다.
[길 밖의 새>의 주인공은 강렬하다.주인공의 비중이 90퍼센트를 차지하는 영화.
우혁이 이 영화를 찍게 된다면 이렇게 정의할 수 있을 것이다.
우혁의,
우혁에 의한,
우혁을 위한 영화.
***
소속사로 찾아온 박용구와 회의실에 마주앉았다.
“제작사 찾아가실 때 저하고 같이 가시죠.”
“배우님께서 같이 가 주신다구요?”
“시나리오만 전달하고 오면 시나리오 검토도 늦게 할 뿐만 아니라 검토 자체를 안 할 수도 있습니다. 소속사에도 원고들이 수도 없이 오는데 사람이 직접 전달하는 게 효과가 가장 좋은 것 같더라구요.”
“그렇죠.”
“제작자도 여기저기 가기보다는 두세 군데를 골라서 지속적으로 찾아가는 게 좋겠어요. 문전박대 당하더라도 포기하지 말고 계속해서 가는 거죠. 제작사에 가서 일주일 죽치고 있는 겁니다.”
“아, 예!”
박용구가 고개를 끄덕였다.
“우선 제작사를 정해야 할 것 같습니다. 어느 제작사가 마음에 드세요?”
우혁이 박용구에게 물었다.
“어디든 상관없기는 한데···.”
“아뇨! 제일 마음에 드는 곳을 고르세요. 1주일 동안 그 제작사로 찾아가는 겁니다. 안 되면 다음 후보지로 옮기고, 거기서도 안 되면 세 번째로 가고, 세 번째에서 안 되면 다시 첫 번째 갔던 곳으로 가는 겁니다.”
물수건으로 손을 닦으며 우혁이 말했다.
박용구가 제작사 세 군데를 꼽았다.
그리고 신중하게 1위부터 3위까지 순위를 매겼다.
1순위 필름박스
2순위 cine MA
3순위 몽타주
“좋습니다. 점심 든든하게 먹고 나서 필름박스를 어떻게 공략할 것인지 의논을 하시죠. 학연, 지연, 혈연, 이웃사촌까지 다 동원해야겠습니다.”
“사촌 이웃도!”
박용구가 멋쩍게 웃으며 말했다.
“사촌 이웃도!”
우혁이 박용구에게 웃어 보였다.
“감독님! 외람된 말씀입니다만, 제작사에 찾아갔을 때 절대 자세를 낮추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저희가 그분들을 찾아가는 건 구걸하러 가는 게 아니라 선물을 주러 가는 거니까요.”
“···알겠습니다!”
우혁이 지금까지 추체험한 이들은 한 가지 공통점이 있었다.
이소룡, 토니 슬리디니, 허균, 홍길동, 임꺽정, 장길산, 율 브리너, 말론 브란도, 프랭크 시나트라.
당당한 자존감!
자기 자신이 이 세상에 그 무엇과 바꿀 수 없는 가장 소중한 존재라는 인식!
자만심이 아니었다.
열등감에서 비롯된 자존심도 아니었다.
이 세상에 단 하나밖에 없는 귀하디귀한 존재라는 생각.
연약한 어린아이나 하찮은 풀보다 자신을 낮출 수는 있지만 천하를 호령하는 황제 앞에서도 비굴하지 않았다.
우혁은 박용구의 모습에서 자존감이 바닥까지 떨어져 있던 과거의 자신을 볼 수 있었다.
추체험을 하기 전과 이후의 우혁은 육체적으로 변한 게 없다.
변한 게 있다면 내면.
구걸하는 걸인에게 허리를 굽힐지언정 자신을 짓밟으려는 자에게는 털끝 하나 굽힐 생각이 없다.
자신을 짓밟으려는 자 중 가장 악랄한 자는 바로 자기 자신.
과거에는 자기 자신에게 굴복한 적이 많았으나 이제는 결코 굴복하지 않는다.
과거의 자신은 쉽게 좌절하고 절망하고 포기했지만 지금은 결코 좌절하거나 절망하거나 포기하지 않는다.
지금 박 감독에게 가장 절실하게 필요한 것이 자존감이었다.
“일단 오늘은 얼굴 도장만 찍고 오죠. 원고 출력본은 가지고 가되 영향력이 있는 사람이 아니면 도로 가지고 오도록 하죠.”
“예!”
“필름박스에서 가장 영향력이 있는 분은 누구인가요?”
“윤기훈 이사님이라는 분이 실질적인 업무를 장악하고 계십니다. 사장님도 계신데 그분은 업무에 거의 관여하지 않으시고요.”
윤기훈 이사라면 우혁도 들어보았다.
필름박스에 있는 줄은 몰랐지만 영화계에서 꽤 영향력이 있는 분이었다.
“그럼 오늘 가셔서 윤 이사님을 뵈러 왔다고 해주세요.”
“윤 이사님을요? 그분은 만나기 어려울 겁니다. 워낙 파워가 막강한 분이고, 웬만한 감독은 만나 주지도 않습니다. 최 감독님도 무척 어려워하는 분이거든요. 윤 이사님 말고 그 밑에 실장급을 만나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김 실장이라는 분이 있는데 그분
은 제가 안면이 조금 있습니다. 그분부터 만나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그분도 만나기 쉽지 않을 거예요.”
“일단 윤 이사님을 시도해 보고 안 되면 실장급으로 내리죠.”
“···알겠습니다.”
박 감독이 대답은 했으나 만나기 쉽지 않을 거라는 표정을 지었다.
식사를 마친 뒤 밴을 타고 필름박스 사무실이 있는 빌딩으로 향했다.
우혁은 휴대전화로 윤기훈 이사를 검색해 보았다.
뭔가 도움이 될 만한 정보라도 있을까 해서.
막연하게 알고 있던 것보다 훨씬 막강한 영향력이 지는 분이었다.
백룡영화제 심사위원이기도 했다.
필름박스 사무실 앞에 도착하자 박 감독은 문전박대의 아픈 기억이 되살아났는지 어깨가 움츠러들었다.
하지만 심호흡을 크게 한 번 한 뒤 사무실 안으로 들어갔다.
박 감독이 앞장서고 우혁과 백곰이 그 뒤를 따랐다.
박 감독은 안내 데스크를 찾아가 업무를 보느라 책상의 서류를 살펴보고 있는 여직원에게 말을 건넸다.
“윤 이사님 뵈러 왔는데요.”
“지금 회의 중이십니다. 무슨 일 때문에 그러시죠?”
“뵙고 드릴 말씀이 있어서요.”
“그러니까 뵙고 무슨 말씀을 하려고 하시냐고요.”
여직원이 다소 퉁명스럽게 말했다.
여직원은 원고 봉투를 들고서 아무런 약속도 없이 불쑥 찾아오는 사람을 한두 번 상대한 게 아니었다.
딱 보면 안다.
신인 감독 아니면 시나리오 작가.
“시나리오가 하나 있는데···.”
“원고 투고는 인터넷으로 해주시는 게 좋습니다만 출력본 가지고 오셨으면 저한테 접수하시면 됩니다.”
“윤 이사님 직접 뵙고 말씀드리고 싶은데요.”
“회의 중이라니까요.”
“기다리겠습니다.”
뒤에서 듣고만 있던 우혁이 나섰다.
여직원은 우혁 쪽은 보지도 않고 책상 위의 서류를 들춰 보며 말했다.
“회의 끝나시고 바로 나가실지도 모릅니다. 그러니까 기다리지 마시고···.”
여직원이 무심코 고개를 들었다가 우혁을 알아보고는 깜짝 놀라서 말을 멈추었다.
“혹시··· 강우혁 씨 아니세요?”
“예, 강우혁입니다.”
“안녕하세요?”
여직원이 반색했다.
“그런데 여긴 무슨 일로···?”
“윤 이사님 뵈러 왔습니다.”
“윤 이사님요? 혹시 약속은 하셨나요?”
“아뇨! 뵙고 드릴 말씀이 있어서 찾아왔습니다.”
“그러세요. 잠시만요.”
여직원이 어딘가로 전화를 했다.
잠시 뒤, 30대 후반의 한 남자가 사무실로 들어왔다.
그 남자를 발견한 박 감독이 자리에서 일어나 그 남자에게 인사를 했다.
“실장님, 안녕하세요?”
“어쩐 일이세요?”
그 남자가 박 감독에게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아, 예! 그···.”
박 감독이 방문 목적을 말하려는데 그 남자가 박 감독 뒤쪽에 서 있는 우혁을 알아보고 반가워하며 우혁에게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세요, 강우혁 씨! 반갑습니다.”
그 남자가 인사를 하며 명함을 건넸다.
김 실장이었다.
“윤 이사님을 뵙고 싶다구요?”
“예!”
“잠시만요.”
김 실장은 휴대전화로 전화를 걸었다.
“이사님! [생강>의 ‘고문기술자’ 역할을 맡았던 강우혁 씨가 이사님을 뵙고 싶다고 찾아왔는데요.”
김 실장이 공손하게 두 손으로 휴대전화를 들고서 통화했다.
“예, 맞습니다. 이사님께서 백룡영화제 신스틸러상 후보로 추천하시겠다고 하신···.”
김 실장의 작은 소리로 얘기했지만 사무실이 워낙 조용해 박 감독과 백곰, 우혁 모두 다 들었다.
박 감독과 백곰은 놀란 표정으로 서로를 쳐다보았다.
우혁도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백룡영화제 신스틸러상 후보?!
“예예! 알겠습니다. 그쪽으로 안내하겠습니다.”
[ 백룡영화제 신스틸러상 후보?! > 끝ⓒ 길밖의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