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eautiful Top Star RAW novel - Chapter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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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마운 친구
“회사에 확답을 얻어올 테니까 우혁 씨, 잘 좀 지켜보고 있어.”
정의찬 실장은 민환에게 부탁했다.
그러고는 빠른 걸음으로 주차장 쪽으로 걸어갔다. 차에 들어가서 전화 통화를 할 생각이었다.
국내 3대 연예인 기획사 와우(WOW)의 윤대성 실장이 강우혁을 어떻게 해서든 오늘 중으로 회사에 데리고 가서 계약을 하겠다는 전화 통화를 들었다.
이대로 있을 수 없다.
적어도 와우에게 강우혁을 빼앗기고 싶지는 않다.
정 실장이 몸담고 있는 기획사 ‘나무’는 ‘와우’에 비해 그 규모가 2분의 1도 되지 않지만 ‘나무’의 안창현 대표를 비롯해 직원들은 ‘와우’를 경쟁 회사라고 여겼다.
넘어야 할, 넘어서고 싶은 목표랄까.
정 실장은 팀장, 본부장에게 졸라보고 여의치 않으면 안창현 대표에게 읍소를 해서라도 강우혁 계약 문제의 확답을 얻어내기로 했다.
안창현 대표는 정 실장의 외삼촌이었다. 어머니의 막내 동생.
외삼촌은 어머니보다 아홉 살이나 어리고 일찍 돌아가신 외할머니 대신 엄마 역할을 했던 정 실장의 어머니를 엄마처럼 생각한다. 그래서 외삼촌은 어머니의 말이라면 거절하지 못한다.
어머니와 외삼촌은 정 실장이 절박할 때 쓸 수 있는 카드이다. 지금처럼.
모든 매니저가 그렇듯 좋은 신인 배우를 보면 눈이 돌아간다. 풍선을 좋아하는 아이가 근사한 풍선을 보면 그냥 지나치지 못하는 것처럼.
손에 든 풍선이 있더라도 그냥 지나칠 수가 없는 것이다.
하나쯤 더 갖고 싶어 미치겠는데 어쩌겠는가.
그 풍선이 정말 근사하고, 게다가 다른 아이가 눈독을 들이고 있다는 걸 알게 된다면 더더욱.
엄마한테 풍선을 사 달라고 조르는 수밖에 없다.
전쟁 통이나 다름없는 연예인 기획사 일을 하면서도 정 실장은 평상심을 유지하며 차분하게 일처리를 한다.
느리고 답답한 것 같지만 한 번 물면 절대 놓지 않는 집요함과 끈기, 고집이 있다.
[생강>의 주인공 역할도 정 실장의 그 집요함과 고집으로 따낸 것이다.최희락 감독이 누군가.
대중성과 작품성을 동시에 성취한 감독이 아닌가.
흥행 성적이 최상위급은 아니지만 누구나 인정하는 한국의 대표 감독 중 한 사람이다.
최 감독의 이번 영화 [생강>의 주인공 역할은 스타로 막 발돋움한 설민환에게 연기의 스펙트럼을 넓힐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흥행 면에서 좀 더 성공할 수 있고 설민환이 연기하기에도 편한 로코 영화를 두고 최종 선택 논의를 할 때 정 실장은 [생강>을 고집했다.
로코는 안창현 대표가 물어온 것이었는데 말이다.
정 실장은 배우의 단물만 빨아먹고 버리는 짓은 하고 싶지 않았다. 뿌리 깊은 나무로 성장할 수 있도록 도와 주고 싶었다. 그게 외삼촌인 안창현 대표의 사업 마인드이기도 하고. 그래서 사명을 ‘나무’라고 짓지 않았던가.
[생강>은 설민환이라는 배우의 장기적인 연기 인생을 생각해서 고른 작품이다.책임감 때문에 정 실장은 로드가 아님에도 민환의 로드인 조해진이 오늘처럼 사정이 있을 때는 자신이 직접 민환의 로드 역할을 흔쾌히 맡았다.
그런데 뜻하지 않게 근사한 풍선을 발견했다.
처음 보는 풍선도 아니었다. 예전에는 그저 그런 평범한 풍선인 줄 알았다. 그런데 오늘 보니 놓치기 싫은, 남에게 빼앗기기 싫은, 너무나 멋진 풍선이 아닌가.
정 실장이 빠른 걸음으로 주차장에 주차해 둔 차를 향해 걸어가는 모습을 보며 민환은 웃지 않을 수 없었다.
양반나리라는 별명답게 그 와중에도 뛰지는 않는다.
좋은 매니저다.
하지만 민환은 정 실장보다 우혁 편이다.
우혁이 좋은 조건으로, 좋은 기획사에서, 좋은 시스템의 혜택을 받으며, 좋은 배우들로부터 많은 것들을 배워서, 반드시 성공하길 바란다.
민환은 파란 하늘을 올려다보며 지난날의 기억을 더듬었다.
우혁이 아니었으면 지금의 민환은 없었을지도 모른다.
우혁은 민환이 연기를 포기하려고 할 때 잡아준 사람이다.
3년 전, 수입은 없고, 비전도 보이지 않고, 소속사는 망하고(당시 우혁과 같은 소속사의 배우였다), 나이 어린 스타 배우에게 조롱까지 당하면서 배우 생활에 깊은 회의가 찾아왔다.
게다가 엄마까지 암에 걸렸다는 소식을 들었다.
목돈이 필요했다.
그런데 외아들인 자신은 연기를 한답시고, 서른이 코앞인데도 집에서 돈을 가져다쓰는 실정이었다.
민환은 그의 사정을 잘 알고 있던 우혁을 저녁마다 불러내 소주를 마시며 신세한탄과 눈물, 울분을 쏟아냈다. 한 달 내내 하루도 빠짐없이.
우혁은 묵묵히 얘기를 들어주고 함께 소주를 마셔 주었다.
그러던 어느 날, 기적처럼 영화 출연 제의가 들어왔다.
연기 생활 중에서 가장 비중 있는 역할이었다. 출연 배우들도 당대 내로라하는 거물들이었고.
앞뒤 따질 것도 없이 제의 받아들였고, 계약금을 받아 엄마의 수술비로 썼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 역할은 우혁에게 제의가 들어온 것이었다.
우혁에게도 최고의 기회였을 텐데 양보했던 것이다.
그 영화는 민환의 연기 인생에 주요한 변곡점이 되었다.
그때 엄청난 배우들을 만났고, 그들의 연기를 보면서 많은 것들을 배웠다.
연기를 대하는 자세, 연기에 몰입할 때의 무시무시한 에너지.
그들은 연기 괴물이었다.
그 괴물들을 보면서 자신의 연기가 얼마나 얄팍한지 민환은 뼈에 사무치도록 깨달았다.
그러면서 민환의 연기는 일취월장했다.
영화가 개봉되자 반응이 왔다.
영화, 드라마 출연 제의가 쏟아졌다.
영화가 끝난 뒤에야 감독으로부터 모든 사실을 들었다. 우혁에게 먼저 출연 제의를 했는데 자기보다 이 역할을 잘할 사람이 있다며 민환을 소개해 주었다는 사실을.
그날 술에 잔뜩 취해 우혁에게 전화를 걸어 화를 냈다. 미안하다고 사과는 하지 못할망정, 고맙다고 인사는 못할망정.
다음날 아침에 제정신을 차리고 나서야 자책했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그때 이후로 내내 부채감에 시달려 왔다.
만약 우혁이 자신에게 그 역할을 양보하지 않았다면 우혁이 그 선배들을 만났을 것이고, 많은 것들을 배우고 깨달으면서 우혁의 연기 폭과 깊이가 그 전과 완전히 달라졌을 것이다.
그 영화 출연을 계기로 민환이 승승장구하는 동안 우혁은 작은 배역과 역할을 맡아 정체된 채 머물러 있었다.
그런데 오늘, 우혁의 연기에서 어마무시한 에너지를 느꼈다.
시선이 마주쳤을 때, 친구 우혁이 아니라 고문기술자의 눈을 보았다.
온몸에 소름이 돋아서, 우혁의 눈빛과 기에 압도되는 바람에, 대사가 자꾸 꼬였다.
최근 들어 엔지를 이렇게 많이 낸 적이 있었던가.
우혁은 혼자 터득한 것이다.
재능은 우혁이 민환보다 뛰어났다. 노력하지 않아도 연기가 자연스러웠다. 아이처럼 순수하달까.
처음 시작은 분명 우혁의 연기가 우위였다.
그러나 발전이 없었다.
그런데 오늘은 달랐다. 완전히 다른 사람을 보는 것 같았다.
민환은 최근 몇 개월 동안 바쁘다는 핑계로 우혁을 만나지 못했다. 실제로 바쁘기도 했고.
그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아참, 얼마 전 통화할 때 제수씨가 임신을 했다고 얼핏 들었던 것 같은데.
그건가?
아빠가 된다는 것.
책임감과 인생의 무게?
그럴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우혁의 눈빛에서 책임감보다는 슬픔이 보였다.
전에 볼 수 없었던 슬픔이 가득했다.
무슨 일이 있었나?
가장 좋아하는 친구라면서 친구의 슬픔조차 들여다볼 틈이 없었다니.
조만간 시간을 내서 한잔해야겠다.
우혁이 이쪽으로 걸어오고 있다.
휴식 시간이 주어진 모양이다.
“형 진짜 멋있다. 어휴, 이 땀 좀 봐.”
백곰이 우혁에게 수건을 내밀었다.
“대역배우한테 맡기지 왜 사서 고생을 하고 그래.”
민환의 말에 우혁은 숨이 찬지 대답도 못하고, 상자 위에 걸터앉아 땀을 닦았다.
백곰은 어디서 구해 왔는지 커다란 수건으로 연신 바람을 만들어 우혁의 땀을 식혀 주었다.
민환은 우혁 옆에 앉았다.
잠시 그대로 앉아 하늘을 보았다.
“너랑 연기하니까, 참 좋다.”
민환이 입을 열었다.
우혁은 고개를 가볍게 끄덕였다.
“우혁아, 생각 나니? 대학 다닐 때 엑스트라 알바했던 거.”
“그럼.”
“그때 참 서러웠어, 그지? 사람이 아니라 물건 취급당했잖아.”
“지나고 보니 다 추억이다.”
“추억은 무슨. 떠올리고 싶지도 않다. 푼돈 벌겠다고 그 짓을 하다니.”
“엑스트라 알바 안 했으면 널 못 만났을 거 아니야.”
“그러고 보니 그러네. 인연이라는 게 있나 봐. 참, 제수씨는 건강하지?”
뒤에서 민환의 말을 들은 백곰이 부채질을 멈추었다.
우혁은 대답 대신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았다.
“형!”
백곰이 민환에게 눈치를 준다.
“왜?”
백곰은 우혁의 눈치를 살피며 민환에게 귓속말을 했다.
“혁이 형 아기, 50일 전에 하늘나라로 갔어요.”
그 말을 듣는 순간 민환의 목구멍을 무언가가 콱 틀어막는 느낌이 들었다.
아, 그거였구나.
이제야 우혁의 눈빛에서 보였던 슬픔의 정체가 무엇인지 알 것 같았다.
친구라는 사람이 친구의 아이가 세상을 떠난 지 벌써 50일이 되도록 모르고 있었다니.
“우혁아!”
“응?”
“···.”
목이 메어 말이 나오지 않는다. 말을 하면 울음이 터져 나올 것 같다.
“그런 일이 있었으면 나한테 연락이라도 하지. 연락했으면 만사를 제쳐 두고 나갔을 거 아니야. 힘들 때 친구 불러서 소주 한잔하자고 할 수 있는 거잖아.”
“아내 혼자 두고 소주는 무슨. 내 슬픔이 1이라면 아내 슬픔은 백억, 천억 아니었겠냐. 아이를 속에 품었던 사람인데.”
우혁은 하늘에 시선을 부려놓은 채 말했다.
우혁이 속 깊은 친구라는 걸 새삼 깨닫는다.
배울 점이 많은 친구다. 동갑이고 친구이지만 형처럼 여겨질 때가 많다.
고맙다. 이런 사람을 친구로 두어서.
문득 1년 전 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때가 떠오른다.
우혁은 사흘 동안 장례식장을 지켜 주었다.
문상객 중에서 술에 취해 주정을 부리면 달래고, 화투를 놀자고 하면 놀아 주고, 문상객이 없는 시간에는 홀로 상을 차지하고 꼿꼿이 앉아 소주잔을 기울였다.
문상객이 많아 자리가 모자랄 때는 자신의 자리를 양보하고 어디로 갔는지 사라졌다가 문상객이 드물 때면 다시 나타나 자리를 차지했다.
이틀째 되는 새벽에 문상객이 아무도 없을 때가 있었다.
장례식장에 사람 없는 것만큼 쓸쓸할 때가 있을까.
문상객은 우혁 한 사람밖에 없었다.
민환이 우혁 자리로 가려는데 아버지가 먼저 우혁 맞은편에 앉으셨다.
두 사람은 술잔을 주거니 받거니 할 뿐 딱히 얘기를 주고받는 것 같지도 않았다.
아버지도 말이 없는 사람이고, 우혁도 입이 무거운 친구라 서로의 술잔이 비면 술을 따라 주는 게 다였다.
장례가 끝난 뒤 아버지가 말씀하셨다.
“이름이 강우혁이던가? 환이 네가 전생에 큰 덕을 쌓은 모양이다. 그런 친구를 둔 걸 보면. 친하게 잘 지내거라.”
1년 전 아버지의 말씀이 떠오른다.
민환은 하늘을 보고 있는 우혁의 옆모습을 흘낏거렸다.
생활비는 있는지 물어보려다 그만 두었다.
민환은 우혁이 현재 어떤 상황에 처해 있을지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장 실장에게 현금을 좀 빌렸다.
그런데 이걸 어떻게 줘야 할지 모르겠다.
자존심 상하지 않게, 기분 안 나쁘게 줘야 할 텐데.
현금 몇 푼이 문제가 아니라, 좋은 조건으로 소속사나 찾을 수 있으면 좋으련만.
“실례하겠습니다.”
누군가가 불쑥 끼어들었다.
아까 우혁을 회사로 데려가 계약을 하겠다고 전화 통화를 하며 지나가던 그 남자다.
남자가 강우혁에게 명함을 내밀며 자신을 소개했다.
“안녕하세요. 저는 와우 기획사의 윤대성이라고 합니다.”
와우 기획사?
민환은 깜짝 놀랐다.
국내 3대 기획사가 아닌가.
오호라. 이거 재미있게 돌아가는군.
민환은 슬그머니 일어나 윤대성에게 자리를 양보했다.
우혁과 같은 소속사에 소속되면 좋기는 하겠지만 민환이 좀 더 좋은 조건으로 계약 맺기를 바란다.
정 실장은 아직 통화중인가?
정 실장은 신중한 대신 아무도 꺾을 수 없는 고집쟁이니까 자신의 주장을 관철시키긴 할 텐데, 한 발 늦는 거 아닌가 모르겠다.
마침 정 실장이 차에서 내려 이쪽으로 오고 있다.
민환은 정 실장에게 손짓하며 남자를 가리켰다. 실실 웃으며.
강우혁을 서로 차지하려고 경쟁을 붙여 놓으면 좀 더 호조건을 제시하는 쪽이 이기는 거다.
볼 만한 구경이 벌어지겠군.
정 실장이 급하긴 급했나 보다.
우혁 옆에 앉아 있는 남자의 정체를 알아보았는지 걸음이 점점 빨라진다. 거의 경보 수준이다.
정 실장은 전생에 분명 양반이었을 거라고 해서 별명이 ‘양반나리’가 아닌가.
웬만큼 급해선 뛰는 법이 없는데, 지금은 뛴다.
엄청나게 빠르다. 우사인 볼트인 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