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eautiful Top Star RAW novel - Chapter (96)
“그때는 정말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았어요.”
한국으로 오는 비행기 안에서 서혜승은 28년 전 그날의 일을 떠올리며 눈물을 훔쳤다.
이성욱은 말없이 아내의 손등을 토닥여 주었다.
서혜승은 그날의 일이 어제의 일처럼 또렷하게 떠올랐다.
LA 한인타운에 이민을 온 지 3개월밖에 되지 않았을 때의 일이다.
당시 서혜승은 영어가 서툴러 가능하면 외출을 삼갔고, 남편이 돌아올 때까지 해인이와 단둘이서 집에서 생활했다.
남편은 호텔의 요리사로 취직해 다른 사람보다 일찍 출근하고 가장 늦게 퇴근하며 열심히 일했다.
휴일에도 남편은 요리 연구에 여념이 없었다.
직장에서는 인정을 받았을지 몰라도 남편, 아빠로서는 썩 좋은 점수를 주기 어려웠다.
하지만 서혜승은 그런 남편이 조금도 서운하지 않았다.
원망하기는커녕 고마울 따름이었다.
먼 이국땅에 와서도 번듯한 직장을 가지고 있고, 열심히 하는 것은 결국 가정을 지키려는 책임감에서 비롯된 것이니까.
서혜승은 전혀 불만이 없었다.
그렇게 이민 생활에 조금씩 익숙해질 무렵 모든 것이 와르르 무너지는 사건이 일어났다.
사랑하는 딸, 해인이가 사라져 버린 것이다.
그날을 잊을 수 없다.
8월 14일, 오전 10시경.
서혜승은 당시 운전면허증이 없었기 때문에 차를 몰 수 없었다. 차가 없기도 했고.
차가 한 대 있었으나 남편이 출퇴근용으로 써야 했다.
딱히 차가 필요치도 않았다. 남편이 퇴근길에 필요한 물건은 모두 사다 주었으니까.
“당신이 출근하고 얼마 지나지 않았는데 해인이가 아이스크림이 먹고 싶다는 거예요. 마침 휴지도 다 떨어졌더라구요. 당신한테 전화를 할까 하다가 일하는 사람한테 아이스크림, 휴지 사다 달라는 전화를 하기가 미안한 거예요. 그래서 아이스크림 정도는 직접 사서 먹자, 하고는 마트를 가기로 했지요.”
아픈 기억이라 지금껏 묻지도 말하지도 않았던 말들이었다.
그 마트는 남편이 운전하는 차를 타고 두어 번 함께 간 적이 있었던 집 근처 대형마트였다.
혼자 간 적은 없지만 그리 먼 거리도 아니고 해서 용기를 냈다. 산책도 할 겸!
오랜만에 밖에 나온 해인이는 좋아서 어쩔 줄 몰라 했다.
서혜승도 그때까지만 해도 나쁘지 않았다.
산책하기에 딱 좋은 거리였고, 대형 마트를 다니며 이것저것 물건을 구경하는 일도 재미있었다.
“차로는 5분도 채 걸리지 않았는데 막상 걸어보니 20분이 족히 걸리더군요. 마트에 들어가서 느긋하게 에어컨 바람 즐기면서 쇼핑을 했지요. 그런데 어느 순간 해인이가 보이지 않는 거예요.”
찰나였다.
처음에는 금세 찾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집에서도 숨바꼭질을 하며 자주 놀았으니까 어딘가에 숨어서 까꿍 하면서 나타날 줄 알았다.
그런데 아이가 나타나질 않았다.
“해인이처럼 보이는 아이가 문을 열고 나가는 모습이 얼핏 보이더라구요. 쟤가 어디로 가나 싶어서 달려갔지요. 밖에 나왔는데 애가 안 보여요.”
영어가 서툴러서 급한 마음에 한국말로 작은 여자 아이를 못 보았는지 물으며 돌아다녔다.
“네 살짜리 여자애 못 봤어요? 키가 요만하고 하얀색 원피스를 입었거든요. 이름은 해인이에요. 이해인!”
한 시간쯤 그렇게 해인이를 찾아다니다가 남편에게 전화를 걸었다.
남편이 회사에서 달려왔다.
경찰에 신고를 하고 마트 주변을 샅샅이 찾아다녔다.
하지만 그 어디에도 해인이는 보이지 않았다.
다음날 경찰과 함께 마트의 CCTV를 확인했다.
엄마 손을 잡고 다니던 해인이는 엄마가 물건을 고르기 위해 잠시 손을 놓은 사이, 한 아이가 들고 있는 곰 인형에 눈이 팔려 그 아이를 따라가다가 매대 아래쪽에 인형을 발견하고는 쪼그리고 앉아 구경을 했다.
한참을 구경하다 일어나 엄마에게 갔는데 엄마가 보이지 않자 두리번거리다가 문 쪽으로 달려가는 엄마를 발견하고 서둘러 엄마를 따라갔다.
엄마를 따라 밖으로 나왔지만 엄마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엄마가 다른 출입문으로 마트 안으로 들어가는 모습을 보지 못한 것이다.
해인이는 엄마와 함께 걸어왔던 집 쪽으로 걸어갔다.
CCTV에 찍힌 해인이의 모습은 그게 다였다.
부부는 마트와 집으로 가는 길을 샅샅이 뒤졌다.
남편은 회사에 휴가를 내고서 해인이를 찾기 위해 동분서주했다.
한 달이 지나고 두 달이 지나도 해인이는 나타나지 않았다.
휴가가 끝난 뒤에도 복귀하지 않자 호텔에서 해고 통보가 날아왔다.
“해고까지 당하고 보니 땅이 꺼지는 것 같더구먼. 해인이만 아니었으면 한국으로 돌아갔을 거야.”
“당신 덕분에 살았어요. 당신 아니었으면 나는 아마 실성을 했거나 다른 마음을 먹었거나 했을 거예요. 귀한 자식을 잃어버린 사람인데 당신은 나한테 핀잔 한 마디 안 했지요. 그게 얼마나 고맙던지···.”
원망하는 마음 왜 없었겠는가.
여편네가 자식 하나 간수 못하고 애를 잃어버려?
속으로 원망도 했다.
그런데 자식을 잃었는데 자칫하다간 아내마저 잃게 생겼다는 걸 문득 깨달았다.
“이래서는 안 되겠다, 나라도 정신을 차리자, 싶었지. 먹고살면서 우리 딸도 찾을 수 있는 게 방법이 없을까 고민을 하는데, 눈에 푸드트럭이 들어오더라고. 음식 만드는 거라면 자신 있으니까 저거라도 하면서 해인이를 찾아다니자 했지.”
“해인이 전단지를 나눠 주려고 시작한 거 아니에요.”
“돈을 벌 목적이 아니라 해인이를 찾는 게 목적이었으니 싸게 팔았지.”
그게 대박이 날 줄 누가 알았겠는가.
싼 데다가 맛있기까지 하니 입 소문이 퍼진 것이다. 푸드트럭은 항상 자리를 옮겨 다녔는데 손님들은 전화까지 해서 어디에 있냐고 물어 찾아올 정도였다.
“한 6개월 지났나. 해인이 찾는 광고를 해야 되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고. 광고를 하려면 돈이 있어야겠다 싶은 거야. 그래서 값도 좀 올리고 메뉴도 다양하게 개발했지.”
“그때는 당신이 LA 돈을 다 쓸어 담는 줄 알았어요.”
“사람들이 우리 사연을 알고 팔아준 것도 있을 거야.”
“그것도 한두 번이죠. 음식이 맛없어 보세요. 한두 번 오다 말았을 거예요. 당신 음식이 맛있으니까 사람들이 계속 찾은 거지요.”
“돈 벌어서 해인이 찾는 광고를 해야겠다고 했더니 당신도 그때부터 두 팔 걷어붙이고서 도와 주었잖어.”
장사는 잘 됐다.
1년 뒤쯤에는 푸드트럭을 하나 더 만들어서 아내와 두 팀으로 나누어 장사를 했다.
“당신이 나보다 더 잘 벌었어. 은근히 자존심이 상하데. 허허허! 영어도 잘 못하는 사람이 무슨 장사를 그렇게 잘하는지 원···.”
“당신이 만들어준 재료로 했으니까 팔린 거지요. 맛 없었으면 왔겠어요? 그 장사하면서 영어 많이 늘었네요. 해인이 잃어버렸을 때 영어를 못해서 얼마나 답답했는지 몰라요. 그 한 때문에 손님들 오면 수다를 떨었어요. 그랬더니 영어가 쑥쑥 늘데요. 그 덕분에 단골도 많이 늘고.”
“본점 차렸을 때 기억나세요? 당신 단골하고 내 단골손님이 개업식 때 와서 같은 테이블에 앉았다가 그게 인연이 되어서 결혼까지 했잖아요.”
“그랬지. 좋은 일도 많았지만 별별 일도 많이 겪었잖어. 권총 강도를 두 번이나 당하고 말이야.”
“화재도 났었잖아요.”
“다 태워 먹었지.”
“그래도 당신은 사업운이 참 좋은 사람이에요. 프랜차이즈가 그렇게 잘 될 줄 누가 알았겠어요. 콩나물 자라듯이 자랐잖아요.”
“자식복 없는데 사업복이라도 있어야지. 그때는 그렇게 생각했어. 자식을 잃어버렸는데 그깟 돈 좀 벌었다고 성이 차나. 가슴 한쪽이 뻥 뚫려 있는데.”
“사람들은 다들 돈 많이 벌었다고 우리를 부러워하는데 속 모르는 소리지요.”
“당신하고 내 속을 누가 알아.”
이성욱은 아내 서혜승을 손을 꼭 잡고서 좌석에 등을 기대고 눈을 감았다.
부부는 비즈니스 석에 나란히 앉아 손을 꼭 잡은 채 눈을 붙였다.
눈을 감았지만 잠은 오지 않았다.
우혁의 전화를 받은 뒤로 부부는 며칠 동안 잠을 제대로 이루지 못했다.
잃어버린 딸을 다시 만난다는 생각에 잠이 오지 않았다.
요즘 들어 시도 때도 없이 눈시울이 뜨거워진다.
이성욱의 눈에서 눈물 한 방울이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아내 몰래 조용히 손을 들어 눈물을 훔쳤다.
***
부부가 인천공항에 도착했을 때, 휴대전화로 문자 메시지가 도착해 있었다.
출산이 임박했다는 소식이었다.
“어쩌누! 이를 어쩌누!”
서혜승은 딸의 출산 소식에 속이 탔다.
공항 입국장에는 우혁의 소속사 매니저 두 사람이 우혁 대신 나온다고 했다.
입국장 게이트를 나갔을 때 두 사람을 금세 찾을 수 있었다.
곰처럼 덩치가 커다란 이가 ‘강우혁’이라고 적혀 있는 피켓을 들고 있는 게 한눈에 들어왔다.
백곰도 두 분을 금세 알아볼 수 있었다.
두 분의 모습에서 형수의 모습이 보였던 것이다.
수수한 옷차림의 두 분을 보는 순간 코끝이 찡했다.
피곤해 보이는데다가 안색도 좋지 않았다.
얼마나 힘겹게 살아왔는지 손을 보면 알 수 있다고 했는데 두 부부의 손은 굳은살과 상처투성이였다.
백곰은 두 분이 미국에서 얼마나 힘들게 살고 있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두 분에게 강우혁이 얼마나 유능한 배우인지 돈을 얼마나 잘 버는지 알려주고 싶었다.
두 분은 말년에 복 터진 거다.
그때였다.
너무나 낯익은 사람이 옆으로 다가오더니 부부에게 깍듯이 인사를 올렸다.
“회장님! 사모님! 오셨습니까?”
백동원!
요식업으로 대성공을 거두고 방송인으로도 승승장구를 거듭해 그를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유명한 사람이 아닌가.
회장님?!
백곰과 정 실장은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배드민턴 동호회 회장님은 아니실 테고!
“백 사장이 여기 어쩐 일이야?”
“회장님 오신다는 말씀 듣고 왔습니다.”
“그건 어떻게 알았어?”
“미국에 전화했다가 김 사장님한테 들었습니다. 저는 지금 미국 가는 길입니다. 회장님 뵐까 해서 전화들 드렸더니 한국에 오신다고 해서 몇 시 비행기냐고 물어봤습니다.”
“요즘 사업이 아주 잘 되는 것 같더구먼.”
“회장님에 비하면 구멍가게죠 뭐.”
백동원이 구멍가게라고?
연매출이 700억이라는 인터넷 기사를 얼핏 본 것 같은데, 그게 구멍가게라니!
“구멍가게는 무슨. 곧 날 따라잡겠더구만 뭘.”
“회장님 따라가려면 아직 멀었습니다. 한국은 어쩐 일이세요? 한국 잘 오지 않으시잖아요.”
“볼일이 있어서···.”
“출국 시간이 임박해서 가봐야 할 것 같습니다. 볼일 잘 보시고 돌아가십시오.”
“그래그래. 나중에 미국 들어오면 전화해.”
“예, 회장님!”
백동원이 두 분에게 다시 한 번 허리를 깊이 숙였다.
스승과 제자 사이 같았다.
백곰과 정 실장은 놀란 눈으로 시선을 교환했다.
두 분을 모시고 산부인과를 향해 달렸다.
“강우혁이라는 배우, 어떤 사람인가요?”
우혁의 장인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백곰과 정 실장은 공항에서 병원까지 도착할 때까지 강우혁에 대해 자랑을 끝도 없이 늘어놓았다.
그동안 우혁이 했던 영화와 드라마들.
시청률 기록들.
받았던 상들.
앞으로 할 작품들.
그리고 우혁이 보여 주었던 미담들까지.
정 실장은 인터넷 기사들을 찾아서 보여주기도 했다.
“한마디로 흠잡을 데 없는 배우이고, 앞으로가 더 기대되는 배우입니다.”
“우혁 형은 좋은 배우이기 이전에 정말 좋은 사람이에요.”
부부는 두 매니저의 말을 하나도 빠뜨리지 않고 귀담아들으며 흐뭇해했다.
가장 가까운 곳에서 지켜보았을 매니저의 말에는 입에 발린 소리가 아니라 진심이 느껴졌던 것이다.
“여보! 당신 좋아하는 영화감독들 몇 있잖아요. 나중에 소개 좀 시켜줘요.”
우혁의 장모가 남편에게 말하는 소리, 귀 밝은 백곰이 들었다.
그 말을 듣고 그냥 지나갈 백곰이 아니었다.
“아버님! 할리우드 감독들하고 친하세요?”
“친할 것도 없어요. 얼굴이나 알고 지내는 거예요.”
우혁의 장인이 심드렁하게 대답했다.
“영화 투자, 이제 고만하세요. 이제 재산 물려줄 사람도 있는데 조심해야지요.”
우혁의 장모가 장인에게 속삭였다.
“짜투리 돈으로 하는 건데 뭘 그래.”
“짜투리 돈도 아껴야지요.”
“알았어요.”
부부가 아웅다웅했다.
백곰과 정 실장은 눈이 휘둥그레졌다.
영화 투자를 짜투리 돈으로 한다고?!
“미국에서 보낸 물건은 잘 오고 있나 모르겠네요?”
“잘 오고 있겠지!”
***
우혁은 아녜스 수녀, 세실리아 수녀와 늦은 점심 식사를 마치고 병원 로비에 들어서다가 두 분을 보았다.
장모는 아녜스 수녀와 분위기가 매우 유사했다. 연령대도 비슷하고 키와 외모도 비슷했다.
엄마를 잃어버린 아내가 아녜스 수녀에게 집착한 이유를 알 것 같았다.
두 분 모두 처음 뵙는 분이었지만 전혀 낯설지가 않았다.
두 분에게 다가갔다.
“어머님! 아버님! 먼 길 오시느라 수고 많으셨습니다.”
우혁이 두 분을 향해 허리를 깊이 숙였다.
“고맙네! 고마워!”
장모가 우혁의 손을 잡고서 눈시울을 붉혔다.
장인도 장모 옆에 서서 우혁을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장인의 눈도 붉게 충혈되어 있었다.
“두 시간 전에 출산했습니다. 둘 다 건강합니다.”
“옆에서 애썼겠구먼.”
“지금 자고 있을 겁니다만 올라가시죠.”
그때 어머니와 아버지가 로비로 내려왔다.
사돈 간의 첫 만남이었다.
“어머님! 아버님! 저희 어머니 아버지입니다.”
우혁이 장인 장모에게 어머니 아버지를 소개했다.
민서에 빠져 있던 장인 장모가 그 말을 듣고 어머니와 아버지를 향해 깊이 허리를 굽혔다.
“안녕하셔요! 사부인! 사돈어른!”
장모가 손바닥으로 눈물을 훔치고는 황급히 인사를 올렸다.
장인도 손수건으로 눈물을 닦고서 머리를 숙였다.
어머니 아버지에게는 오늘 오전에 장인 장모를 찾았고, 장인 장모가 미국에서 오는 중이라고 귀띔했다.
아버지와 장인은 서로를 향해 허리를 깊이 숙인 뒤 악수를 했다.
“오시느라 수고 많으셨습니다.”
“이렇게 뵙게 되어 반갑습니다.”
아버지와 장인이 뻣뻣하게 만나는 동안 어머니와 장모는 서로의 손을 마주잡고서 격하게 서로를 반겼다.
“아이구 사부인! 얼마나 마음고생이 많으셨어요.”
“우리 아이 거둬 주셔서 고맙습니다, 사부인!”
“세상에 그렇게 착한 며느리는 없습니다. 심성이 아주 고아요. 누굴 닮아 그리 예쁜가 했더니 사부인을 꼭 빼닮았네요. 잘 오셨어요. 잘 오셨어.”
“고맙습니다! 고맙습니다!”
“입원실로 올라갑시다. 그동안 얼마나 보고 싶었겠어요.”
“잠이 들었다고 하던데···.”
“좀 전에 깬 거 보고 왔어요. 아이구 이런 내 정신 좀 봐라. 사돈어른께 인사도 안 드렸네. 먼 길 오시느라 고생 많으셨습니다.”
어머니와 장인, 아버지와 장모가 인사를 나누었다.
***
잠에서 깬 예은은 민서가 눈에 아른거렸다.
오늘 따라 엄마, 엄마가 보고 싶었다.
얼굴도 모르는 엄마가.
죽을 것 같은 고통을 겪을 때 떠오른 이름은 엄마였다.
가끔은 엄마의 얼굴을 떠올려 보려고 애를 써보았지만 떠오르지 않았다.
아녜스 수녀님의 얼굴만 아른거렸다.
초등학교 입학하기 전까지만 해도 아녜스 수녀님이 엄마인 줄 알았다.
엄마가 누구냐고 하면 수녀님을 가리켰다.
수녀님이 나를 낳아준 엄마가 아니라는 사실을 이해할 수 없었다.
아녜스 수녀님을 엄마처럼 여기고 살았는데 어느 날 수녀님이 차갑게 대했고,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그때의 느낌은 아직도 또렷하다.
버림받았다는 생각.
예은은 부모에게 버려졌다고 생각했다.
보육원에 있으면서 부모에게 버림받는 아이들을 수도 없이 보았다.
그 부모들을 볼 때마다 자신을 낳은 부모를 남몰래 원망했다.
그 사람들은 잘 키우지도 못할 거면서 왜 날 낳았을까?
원망의 절정은 사춘기 때였다.
그 시기를 지나자 원망마저 사라졌다.
대신 그리움도 완전히 사라져 버렸다.
만나고 싶다는 생각조차 들지 않았다.
만나서 뭐해?
혹시라도 만난다면?
만날 일도 없지만 만나고 싶지도 않고 만난다 해도 무덤덤할 것 같았다.
결혼을 하고 나서는 더더욱 부모 생각이 나지 않았다.
어머니 아버지가 내 부모라고 여겼다.
아니, 두 분이 내 어머니 아버지다.
다른 부모는 필요치 않다.
그랬는데···.
오늘!
죽을 것 같은 고통을 겪으면서 엄마가, 나를 낳아준 엄마가 간절히 그리웠다.
이렇게 배 아파 하며 낳아주신 것만으로 고맙고 감사했다.
민서!
우리 민서는 어떤 일이 있어도 내가 겪은 고통을 겪게 하지 않으리라.
어떤 일이 있더라도!
민서가 너무 보고 싶다.
딱 한 번 봤는데도 이렇게 민서가 그리운데, 나를 낳아준 엄마는 얼마나 내가 그리웠을까?
자식을 버렸다 해도 자식에 대한 그리움까지 버리진 못했을 텐데···.
나를 버린 엄마를 이해할 것 같다.
복도가 시끌시끌하다.
어머니 목소리가 들린다.
예은은 티슈로 눈가에 맺힌 눈물을 닦고 미소를 지었다.
아녜스 수녀님과 세실리아 수녀님이 다시 오신다고 했는데 두 분이 오신 모양이다.
“이쪽이에요.”
어머니의 목소리에 이어 문이 열렸다.
그리고 낯선 중년 여인이 천천히 안으로 들어왔다.
분명 처음 보는 분인데 낯이 익다.
중년 여인 뒤로 풍채가 좋으신 신사분이 뒤따라 들어왔다.
역시 낯익다.
번뜻 떠오르는 사람이 있었다.
눈사람 아저씨!
“해인아!”
중년 여인이 예은에게 천천히 다가왔다.
해인이?
처음 들어보는 이름인데 왜 이토록 귀에 익지?
중년 여인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 내렸다.
신사분의 눈에서도.
“여보! 해인이가 맞어요. 우리 해인이에요. 어릴 때 모습이 그대로 있잖아요.”
중년 여인이 신사분을 돌아보며 말했다.
신사분은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이며 웃음인지 울음인지 알 수 없는 소리로 흐느꼈다.
“아이구 해인아! 해인아!”
중년 여인이 예은을 부둥켜안고서 오열했다.
예은은 우혁을 바라보았다.
우혁의 눈에도 눈물이 그렁그렁 맺혀 있었다.
설마 이분들이?
어머니가 눈물을 훔치며 말했다.
“에미야! 인사 드려라. 널 낳아주신 부모님이시다.”
말도 안 돼!
신사분이 양복 안주머니에서 사진 몇 장을 꺼내어 예은에게 건네주었다.
그 사진들을 보는 순간, 신기하게도 모든 것이 떠올랐다.
특히 엄마의 얼굴은 너무나 선명하게 떠올랐다!
예은은 자신을 부둥켜안은 채 오열하는 중년 여인에게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네 살짜리 해인이로 돌아가서.
“···엄마?!”
[ 상봉 > 끝ⓒ 길밖의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