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ecame a game character in the apocalypse RAW novel - Chapter 121
종말 속 게임 캐릭터가 되었다 121화
이정우는 입술을 굳게 다문 채 내 가설을 머릿속으로 정리했다.
뒤이어 김희연이 입을 열었다.
“허무맹랑하게 들릴 수도 있지만…… 전 충분히 가능하다고 봐요. 이하진이나 철민 같은 놈들은 어디에나 있을 수 있잖아요.”
가만히 있던 정진영도 콧잔등을 긁적이며 얘기했다.
“나도 재형이 말이 맞는 거 같아. 두 달간 이 근방을 수색하던 플레이어들이 동시에 실종됐다는 거잖아? 잡혀간 게 아니고서야, 한 명도 살아남지 못했다는 게 좀…… 의아하긴 하네.”
이정우는 오른손으로 턱을 괸 채 입술을 달싹이더니, 긴가민가한 표정을 지으며 얘기했다.
“나도 불가능하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야. 하지만…… 너무 적은 정보로 많은 걸 유추하다 보니 혼란스러운 것도 사실이고.”
이정우의 말에 난 바깥을 가리키며 얘기했다.
“그럼 올라가서 확인하죠.”
“올라가? 어디로.”
“오후 회의요. 아까 임시초소 앞에서 들었거든요. 오늘 오후 회의가 있다고.”
난 슬쩍 고개를 틀어 윤혜리를 쳐다봤다.
이정우도 덩달아 윤혜리를 쳐다보더니, 눈꼬리를 치켜뜨며 물었다.
“혜리를 데려가자고? 현이가 아니라?”
“현이 보다 혜리가 상대방을 방심하게 만들기 좋아요. 대표들의 속마음을 알면 실종자에 대한 실마리가 생길지도 모르죠.”
이정우는 불안한 눈초리로 윤혜리와 내 얼굴을 번갈아 쳐다봤다.
그러거나 말거나, 난 일행을 쳐다보며 얘기했다.
“상황 들어보고, 우리 가설이 맞으면 플레이어라는 거 밝힐게요.”
“그건 왜.”
“주도권부터 잡아야 합니다. 성김공, 너무 나대요.”
* * *
저녁노을이 내려앉은 무렵, 이정우와 이덕배, 윤혜리를 데리고 한지현의 방으로 향했다.
오후 회의에 참석해도 된다는 승낙을 미리 받았기에, 회의실로 들어서는 걸음에 망설임은 없었다.
현관을 지나 중문으로 들어서자, 이미 소파에 앉아 있는 각 대표들을 발견할 수 있었다.
김 대표와 공 대표는 우리를 보고 당황스러운 표정을 짓더니, 반사적으로 성 대표를 쳐다봤다.
성 대표는 못마땅한 표정을 지으며 한지현에게 물었다.
“한 대표, 이 자리를 더럽힐 생각입니까?”
그의 입에서 앞뒤 가리지 않은 막말이 나오자, 이정우는 눈살을 찌푸리며 내 얼굴을 쳐다봤다.
난 싱겁게 웃으며 이정우의 등을 토닥였다.
지금은 그러려니 넘겨야지, 달리 어쩌겠는가?
반면에 한지현은 태연한 목소리로 얘기했다.
“제가 불렀습니다. 바깥에서 석 달간 생존한 분들이니, 비결이 있다면 저희도 배워야죠.”
“머리에 피도 안 마른 놈들한테 뭘 배울 게 있다고…….”
성 대표가 구시렁거리자, 이덕배는 빠드득 이를 갈며 소파로 걸어가 앉았다.
그러고는 성 대표를 마주 보고 앉더니, 옆에 있는 강요한에게 얘기했다.
“강 대표, 나 커피 좀 줄 수 있습니까?”
“아, 예.”
강요한은 당황한 모습을 보였지만, 금세 자리에서 일어나 부엌으로 향했다.
그 모습을 보고 성 대표는 콧방귀를 뀌며 얘기했다.
“기강이 다 죽었구먼. 외지인이 안방에 들어왔는데 커피나 내리고 말이야.”
“어이, 화초.”
이덕배는 눈시울을 위로 치켜뜨며 성 대표를 불렀다.
그러자 성 대표는 좌우를 살피더니, 어처구니없다는 듯이 웃으며 물었다.
“자네 지금…… 나한테 한 말인가?”
“그래 화초. 밖에 나가지도 못하고 안에서 고귀한 척, 깨끗한 척, 온갖 사치는 다 부리는 온실 속의 화초. 딱 당신이네.”
“허, 누가 야만인 아니랄까 봐. 나이도 먹을 만큼 먹은 분이…… 말이 짧습니다?”
“어, 내가 좀 짧아. 그렇다고 다 짧은 건 아니고.”
“……뭐?”
“너처럼 톡 치면 부러지는 화초는 아니거든.”
이덕배는 검지를 치켜들고 까닥거렸다.
그 모습을 보고 반사적으로 웃음이 터지고 말았다.
황급히 입술을 다물고, 헛기침과 함께 마음을 다잡았다.
반면에 윤혜리는 창피하다는 듯이 시선을 회피했다.
뒤이어 성 대표의 입꼬리가 씰룩이고, 이마 위로 핏줄이 솟아나는 걸 확인할 수 있었다.
성 대표는 한지현을 쳐다보며 물었다.
“이래도 인성 검사가 필요 없다고 생각하는 겁니까?”
한지현도 이건 옹호하기 힘든지, 덤덤한 목소리로 얘기했다.
“그런 언행은 자제 부탁드립니다.”
이덕배는 어깨를 으쓱이며 우리에게 소파로 오라고 손짓했다.
덕분에 현관 앞에 멀뚱멀뚱 서 있던 우리는 편안하게 소파에 앉을 수 있었다.
이정우의 말대로 나이가 주는 힘이 있었다.
성 대표는 흐름에 말렸다고 생각했는지, 언짢은 표정을 지으며 혀를 찼다.
뒤이어 한지현이 입을 열었다.
“공 대표님부터 일과 보고 바랍니다.”
“우리는 별일 없었어요. A 구역 바로 앞에 있는 아파트라 좀비들의 공격이 제일 적어요. 식량도 뭐…… 아직 여유 있고요.”
공 대표도 우리와 겸상하는 게 불편한지, 대충 얼버무리듯이 얘기했다.
이에 한지현은 한숨을 내쉬며 얘기했다.
“제가 누누이 말씀드렸잖아요. 정확하게 며칠을 버틸 수 있는지, 식량 보급 상황은 어떤지, 상세하게 기록하셔야 한다니까요.”
“많으면 많은 거지. 412명이나 되는 사람이 하루에 먹는 식량이 얼마나 되는 줄 알아요? 그걸 나 혼자 어떻게 조사해.”
“공 대표님 밑에 있는 분들이랑 같이 조사하면 되잖아요.”
“어머? 우린 안 바쁜 줄 알아요? 좀비들이 언제 올지도 모르는 마당에 그걸 하나하나 계산하고 있을 시간이 어디 있어.”
공 대표는 떨떠름한 표정을 지으며 한지현의 시선을 외면했다.
평소엔 이 정도는 아닐 것이다.
우리가 있어서 기선제압 차원으로 저렇게 뻔뻔한 태도를 보이는 것 같다.
누가 우위에 있는지, 직접 두 눈으로 보라는 건가?
한지현은 미간을 찌푸리며 공 대표를 노려보더니, 앞머리를 쓸어넘기며 한숨을 내쉬었다.
뒤이어 김 대표를 쳐다보며 물었다.
“김 대표님, 일과 보고 바랍니다.”
“우리도 뭐…… 평소랑 똑같지요. A 구역이랑 B 구역에 병력 배치하고, 좀비들 처리하고, 정신없습니다.”
“최근 B 구역 좀비들 동향은 어떤가요?”
“똑같아요.”
“그러니까 똑같은 게 뭐냐고요.”
김 대표는 성 대표의 눈치를 보더니, 헛기침과 함께 다리를 꼬고 앉았다.
이것들 아주 막 나가네?
한지현과 강요한이 이런 쓰레기들과 어울리는 이유가 뭘까.
남은 110명의 생존자 때문이 아닐까?
한지현이 성 대표를 쳐다보자, 성 대표는 시선조차 주지 않았다.
“성 대표님, 성 대표님도 하실 말씀 없으세요?”
“오늘따라 공기가 퀴퀴한 게, 미세먼지가 심한가 봅니다.”
대놓고 우리를 무시하는 발언.
이에 참다못한 강요한이 부엌에서 외쳤다.
“정말 다들 너무하십니다!”
“넌 커피나 내려.”
성 대표가 인상을 찌푸리며 얘기하자, 강요한은 붉으락푸르락해진 얼굴로 다가왔다.
“그만. 강 대표님 그만.”
그러자 상석에 앉아 있던 한지현이 오른손을 들며 차분하게 얘기했다.
강요한은 씩씩거리며 성김공을 노려보더니, 세차게 혀를 차며 안방으로 들어갔다.
그 모습을 보고 성 대표는 싱겁게 웃으며 얘기했다.
“젊은 친구라 그런지, 분을 못 가라앉히네요?”
그러자 김 대표는 히죽거리며 장단을 맞추었다.
“그러게 말입니다. 솔직히 강 대표가 대표 자격이 있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정말이지…… 예전 곽 대표가 그리워요.”
공 대표는 가식적인 표정을 지으며 한지현을 쳐다봤다.
말은 그립다고 하지만, 표정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그러자 한지현은 도끼눈을 뜨며 공 대표를 노려봤다.
한지현의 표정을 보고 숨이 턱 막히는 것을 느꼈다.
살기가 담긴 눈빛이라는 게…… 저런 건가?
공 대표는 합죽이가 되며 어깨를 움츠렸다.
곽 대표는 누구지?
처음 듣는 이름이었다.
정황상 강요한의 자리에 선임자가 있었던 것 같은데…….
혹시 실종된 수색대 중의 한 명이 3단지의 대표였나?
뒤이어 한지현의 두 주먹이 파르르 떨리는 걸 확인할 수 있었다.
한이 맺힌 사람처럼, 분기를 다스리지 못했다.
성 대표는 한지현의 모습을 유심히 살피더니, 입꼬리를 올리며 얘기했다.
“한 대표, 걱정하지 말아요. 우리 수색대가 열심히 찾고 있으니까.”
“수색…… 제대로 하고 있는 건 맞습니까?”
한지현의 목소리에서 냉기가 나오는 것처럼 느껴졌다.
뼛속까지 시린 한이 담긴 목소리는 오금을 저리게 만들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성 대표는 거만한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저를 못 믿는 겁니까? 우리 수색대가 목숨 걸고 찾고 있습니다. 모두가 한마음 한뜻으로 곽 대표의 무사 귀환을 바라고 있어요.”
“…….”
한지현은 아랫입술을 깨물며 파르르 떨더니, 결국 고개를 떨구고 말았다.
반박해 봐야 아무 소용없다는 걸 아는 것이다.
지난 한 달간 한지현이 어떤 심정으로 살아왔는지, 어째서 다크서클이 내려왔는지, 왜 만성피로에 시달리는 사람처럼 보였는지, 굳이 묻지 않아도 알 것 같았다.
더는…… 못 봐주겠다.
난 참다못해 성김공을 쳐다보며 얘기했다.
“안 그래도 그것 때문에 말씀드릴 게 있습니다.”
그러자 성 대표는 사람 좋은 미소를 지으며 내게 물었다.
“학생은 예절교육을 잘 받았나 보네?”
여전히 거만한 태도지만, 난 엷은 미소를 지으며 얘기했다.
“저희도 이곳에서 지내려면 똑같이 일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 안 그래도 B 구역 수비가 부족한 상황이야. C 구역은 우리 한 대표가 잘 막고 있으니 보강할 필요 없지요?”
바리케이드가 A, B, C 구역으로 설치된 모양이다.
한지현이 주로 담당하는 구역이 C 구역인 것 같다.
저렇게 능글맞게 얘기하는 것으로 보아, 수비 병력까지 흡수하려는 성 대표의 의도가 엿보였다.
이에 난 방긋방긋 웃으며 얘기했다.
“저는 수비 싫어요. 수색대 일을 하고 싶습니다.”
“……뭐?”
성 대표의 표정으로 당황한 기색이 스쳤다.
그 찰나의 표정을 확인하고, 난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얘기했다.
“저흰 석 달간 밖에서 지낸 탓에 생존에 필요한 지식이 많거든요. 수색대 일을 돕고 싶습니다. 성 대표님, 분명 도움이 될 거예요. 뽑아주세요.”
거실에 있던 대표들은 예상치 못한 의견에 다들 얼빠진 표정을 지었다.
이는 한지현도 마찬가지였다.
그러자 김 대표가 허탈하게 웃으며 얘기했다.
“학생, 그 마음은 높이 사지만…… 힘들게 여기까지 왔으니 좀 쉬어야지? 아저씨가 B 구역 알려줄 테니까…….”
“아니요. 들어보니 수색대가 가장 핵심인 것 같은데, 열심히 할 테니 많이 챙겨주세요.”
“…….”
“아시다시피 제 일행에 아이들이 많거든요.”
김 대표가 어쩔 줄을 모르자, 옆에 있던 성 대표가 입을 열었다.
“학생의 젊은 패기가 보기 좋구먼. 그럼…… 수색대에 자리를 마련해 주지.”
엷은 미소를 짓고 있지만, 그 속에 숨은 비릿한 미소가 훤히 보였다.
대표들의 눈에는…… 내가 욕망에 눈이 먼 한낱 대학생으로 보일 것이다.
줄을 선다고 생각하겠지.
난 자리에서 일어나 대표들에게 손을 내밀었다.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하하! 그래요.”
성 대표는 대수롭지 않게 내 악수를 받아주었다.
그러자 옆에 있던 이정우와 윤혜리도 일어나 대표들과 악수를 주고받았다.
하지만 이덕배는 끝까지 뚱한 표정으로 입맛을 다시며 대표들의 시선을 회피했다.
성 대표는 이덕배의 표정을 살피더니, 조소를 지으며 흡족한 모습을 보였다.
이덕배와 우리가 갈라섰다고 생각한 모양이다.
난 악수를 주고받은 뒤 곁눈질로 윤혜리를 쳐다봤다.
윤혜리는 다소 긴장한 모습으로 소파에 주저앉았다.
대체 무슨 기억을 들여다본 걸까?
일단…… 표정 관리가 시급하다.
은근슬쩍 윤혜리의 팔을 툭 치자, 윤혜리는 언제 그랬냐는 듯이 다시금 해맑게 웃었다.
* * *
오후 회의가 끝나고, 성김공은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돌아갔다.
상석에 앉아 있던 한지현은 다른 대표들이 현관 밖으로 나가는 걸 확인한 뒤, 내 얼굴을 쳐다보며 물었다.
“당신들은…… 다를 줄 알았어.”
한지현은 양손으로 얼굴을 감싸며 연신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의 어깨가 잔잔하게 떨리는 걸 확인할 수 있었다.
아이들과 임산부를 데려온 우리라면…… 본인의 손을 들어줄 것이라 생각한 모양이다.
우리가 성김공에게 붙었다고 생각하는 건가?
하긴, 회의의 주도권을 성김공이 잡고 있었으니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그 반대였다.
윤혜리를 통해 성김공의 계획이나 지금껏 해온 과오를 확인하고 싶었을 뿐이다.
살인의 정당성이 많아야, 우리가 느끼는 죄책감이 줄어들 테니까.
사람의 마음은 참 간사하다.
분노가 크면 클수록, 죄책감은 사라지고 허망함이 자리 잡는다.
죄책감은 마음을 병들게 하지만, 허망함은 모든 것을 무로 되돌리기에, 다시 일어설 수 있는 힘이 생긴다.
난 윤혜리를 쳐다보며 속삭이는 목소리로 물었다.
“성김공, 쓰레기 맞아?”
“개쓰레기예요.”
확신이 생겼으니, 턱짓으로 한지현을 가리켰다.
윤혜리는 고개를 끄덕이며 한지현의 곁으로 다가갔다.
뒤이어 한지현의 어깨에 조심스레 양손을 얹으며 물었다.
“괜찮으세요?”
말은 상냥하게 하지만, 한지현의 생각을 들여다보며 오묘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윤혜리의 연기력은 날이 갈수록 좋아지고 있었다.
순수하던 결인들은 망해버린 세상에 완벽하게 적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