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ecame a game character in the apocalypse RAW novel - Chapter 267
종말 속 게임 캐릭터가 되었다 2부 13화
오혜선을 따라 두꺼운 롱패딩을 입고 터널을 걸었다.
가로 폭 7m에 달하는 드넓은 터널.
“이름이 박재형이라고 했죠?”
“아, 네.”
“혹시 여러분 혈액을 뽑을 수 있을까요?”
“네?”
뜬근없는 소리에 놀란 눈으로 쳐다보자, 오혜선은 쓴웃음을 지으며 얘기했다.
“여러분 혈액에 독 안개에 대한 내성이 있다면…… 어쩌면 백신이나 치료제를 만들 수 있지 않을까, 해서요.”
“연구원이세요?”
“저는 아니고, 구현희 씨 남편이 생명과학 분야에 종사하고 계세요.”
오혜선의 표정에 악의는 보이지 않았다.
그녀의 의도를 곡해해서 들을 필요는 없기에, 머리를 긁적이며 물었다.
“여기 연구시설도 있나요?”
“시드볼트는 인류 최후의 날을 위한 저장고에요. 다시 말해서 벙커의 역할도 하죠.”
하긴, 핵전쟁이 일어나도 버틸 수 있어야 하니, 웬만한 벙커의 역할도 할 것이다.
“혈액을 뽑는다고 해서 백신이나 치료제를 만들 수 있나요?”
“DNA구조의 특이점은 찾을 수 있겠죠?”
“예를 들면요?”
“예를 들면…… 청산가리는 탄소와 질소, 칼륨의 결합이죠. 하지만 칼륨 대신 수소가 들어가면 치클론 B가 돼요.”
“그게 뭐예요.”
“청산 가스. 나치가 유대인 수용소에서 사용한 독가스죠.”
어벙한 표정으로 쳐다보자, 오혜선은 계속해서 말을 이어나갔다.
“우리 몸의 미토콘드리아는 산소와 음식물을 결합해서 에너지를 생성합니다. 하지만 청산 가스를 흡입하면 세포에 산소 공급이 차단돼서 질식사하게 되죠.”
“저희한테 내성이 있으면, 내성을 지닌 요소를 찾아서 독 안개를 흡입해도 생명활동에 지장이 없도록 만들 수 있다는 거예요?”
“맞아요.”
그러자 뒤따라오던 설여원이 입을 열었다.
“아쉽게도 그건 불가능해요.”
“네?”
“저희도 독 안개에 내성은 없어요.”
“아니 그럼…… 여기까지 어떻게 온 거예요?”
“이거요.”
설여원은 머리 위에 있는 독 안개 제거기를 가리켰다.
오혜선은 천장을 쳐다보더니,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그러고 보니…… 아까부터 계속 따라오던데, 그게 뭐예요?”
“독 안개 제거기요. 지구의 기술이 아니에요. 라스트아크의 기술이죠.”
“…….”
오혜선은 대답 대신 독 안개 제거기를 유심히 쳐다봤다.
흥미가 돋는 건가?
눈빛이 반짝이고 있었다.
이에 헛기침을 하며 화제를 돌렸다.
“그건 그렇고, 롱패딩은 왜 입으라고 한 거예요?”
“씨앗 저장고로 들어갈 거예요.”
“저장고가 많이 추워요?”
“지금 들어가는 곳은 영하 20도가 유지되는 장기 저장고에요.”
영하 20도?
전기가 끊겼는데, 그 온도를 어떻게 유지하는 거지?
이 부분을 묻자, 오혜선은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얘기했다.
“아까 말씀드렸잖아요? 여긴 벙커라고. 당연히 비상 발전기가 있고, 외부에서 전력을 끌어오지 않더라도 자급자족할 수 있는 시설이 완비되어 있습니다.”
“…….”
“화재, 침수 등의 대비도 완비되어 있고, 씨앗의 생명을 다루는 만큼 공기정화 장치도 완벽하죠. 물론 아무리 그래도 1년에 한 번씩, 저장고의 공기를 갈아줘야 하지만요.”
“식량은 어떻게 해결해요?”
“여긴 벙커라니까요? 벙커가 뭔지 몰라요? 최소 20인의 사람이 5년간 생활할 수 있는 식량이 비축되어 있어요.”
더 질문해 봐야 나만 바보가 될 것 같아서, 차라리 입을 다물었다.
오혜선은 정면으로 보이는 철문을 열며 얘기했다.
“들어오세요.”
“확실히 춥네요.”
“아직 전실이에요. 영하 20도의 저장고로 가기 위해 몸을 적응시키는 거죠.”
“여긴 몇 도예요?”
“0도요.”
전실에서 1분 정도 기다린 뒤, 오혜선은 맞은편의 철문을 가리키며 얘기했다.
“자, 이제 들어갑시다. 갑자기 기온이 바뀌면 심장이 놀랄 수도 있으니, 다들 심호흡해요.”
오혜선의 말에 따라 심호흡을 몇 번 하고, 영하 20도가 유지되는 장기 저장고로 들어갔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갑작스러운 냉기에 다들 전신을 부르르 떠는 모습을 보였다.
뒤이어 믿을 수 없는 규모에 입이 떡 벌어졌다.
“와…… 대박.”
설여원은 떡하니 입을 벌린 채 좌우를 살폈다.
드넓은 지하 공간에 수십 개의 캐비닛 같은 게 설치되어 있었다.
잘 정돈된 도서관처럼 보이기도 했다.
오혜선은 내부를 살피며 얘기했다.
“대한민국 시드볼트는 야생식물 종자를 주로 수집, 보관하고 있어요. 스발바르 제도에 있는 시드볼트는 주로 작물 식물을 보관하고 있죠.”
세계 농업의 미래를 위한 보험이라더니, 그 규모가 어마어마했다.
오혜선은 계속해서 말을 이어나갔다.
“물론 한국도 벼, 보리, 콩, 조, 수수 등의 식량 작물의 일부를 보관하고 있습니다. 현재 보관하고 있는 종자는 대략 9000종, 20만 점이 넘죠.”
“그렇게 많아요? 예전에 들었을 때 10만 정도라고 들었는데…….”
“그건 제2저장고를 건설하기 전 얘기죠. 세간에 알려지지 않았지만, 이미 제2저장고까지 완공됐어요. 최대 200만 점을 보관할 수 있고요.”
“그럼…… 여기 있는 씨앗들이 살아있는지, 죽었는지는 어떻게 알아요? 전부 발아할 수 있는 거예요?”
“그건 걱정할 필요 없어요. 전부 검수 완료된 종자들입니다.”
검수 과정까지 있다니.
보잘것없는 씨앗이라도, 대충 심어서 싹이 나는 게 아니었다.
“검수 과정은 어떻게 됩니까?”
“단기 저장고에 미성숙한 종자를 두고 장기저장에 알맞도록 성숙해질 때까지 기다려요. 그후 중기 저장고에 종자들을 옮기죠.”
“…….”
“중기 저장고는 장기 저장고와 같은 영하 20도죠. 장기 저장고로 보내기 전, 건조실에서 종자의 습도를 최대한 낮추고요.”
“습도까지 조절해요?”
“당연하죠. 종자를 3주 정도 두고 수분 함량을 5% 이내로 만들어요. 오래 보존할 준비죠. 그렇게 짧게는 5년, 길게는 800년 가까이 살아있는 씨앗이 됩니다.”
800년이라는 말에 멍한 표정을 짓자, 오혜선은 엷은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예전 고려, 신라 시대 때 연못 터를 어떻게 알아냈는지 알아요?”
“어떻게요?”
“거기 있던 연꽃 씨앗으로 알아냈어요. 더욱 놀라운 건…… 그 씨앗은 살아서 발아에 성공했죠.”
씨앗의 생명력이 보통이 아니었다.
1000년 가까이 진흙 속에 갇혀 있다가, 세상 밖에 나와서 발아에 성공했다는 게 아닌가?
감탄사를 터뜨리며 넋놓고 있자, 오혜선은 손목 시계를 살피며 얘기했다.
“여기 있는 씨앗들, 전부 안전하게 옮길 수 있겠어요?”
“…….”
인벤토리의 성능이 얼마나 되는지 모르겠다.
영하 20도에 습도까지 조절해야 하는데, 그런 기능이 있으려나?
“확답은 못 드리겠네요.”
“그럼 드릴 수 없습니다. 단 한 번의 실수도 용납할 수 없어요.”
얼굴은 웃고 있지만, 말투는 단호했다.
쉽사리 답을 내릴 수 없는 문제라서, 일행의 얼굴을 쳐다봤다.
다들 입을 열지 못하기에, 결국 쓴웃음을 지으며 얘기했다.
“조금만 더 생각해 보죠.”
“그래요. 그럼, 나갈까요? 여긴 5분 이상 있으면 안 돼요.”
“씨앗 때문에요?”
“씨앗 때문도 있지만, 안전상의 문제도 있죠. 장기 저장고에 들어올 때는 원래 2인 1조로 들어와야 돼요. 한 명이 쓰러지면 다른 사람이 데리고 나갈 수 있도록.”
하긴, 이곳의 추위는 보통이 아니었다.
갑작스러운 기온 변화로 인해 숨이 턱 막히는 신기한 경험까지 했다.
우린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저장고를 빠져나갔다.
오혜선은 마지막으로 저장고를 나오며 물었다.
“아직 듣고 싶은 얘기가 더 있는데, 남은 얘기는 가서 할까요? 아까 변종에 대해서 설명하다 말았는데.”
“네, 그러죠.”
가는 길에 벙커의 구조에 대한 설명을 들었다.
또한 국립백두대간수목원에 대한 이야기도 들을 수 있었다.
규모가 보통이 아니라고 생각은 했는데, 아시아 최대규모의 수목원이자, 전 세계에서 두 번째로 큰 수목원이었다.
* * *
오혜선은 간만에 사람을 만나서 들뜬 모습을 보였다.
수목원과 시드볼트의 역사까지 줄줄이 얘기해 주었다.
장기 저장고에는 종자를 기부한 곳에 따라 A부터 L까지 분류가 되어 있다고 한다.
가장 오래된 종자는 고려대에서 기증한 쥐보리종자라나?
또한 고려대 모 교수님이 평생 모은 종자를 이곳에 맡겼다는 이야기까지 들었다.
구구절절 듣고 있을 수 없기에, 우리에게 궁금한 것은 없냐고 물었다.
오혜선은 굉장히 섬세한 사람이었다.
상세한 부분까지 짚고 넘어가야 직성이 풀리는 성격.
결국 에스파디아와 나눈 이야기까지 상세하게 들려주고, 우리가 겪은 모든 일을 설명한 뒤에야 완벽하게 신뢰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렇게 두 명의 남자가 정신을 차린 뒤에야, 오혜선의 수다는 멈췄다.
이정우는 진이 빠진 표정으로 내 옆에 앉으며 물었다.
“몇 시간이나 지났어?”
“대략 4시간이요.”
“후…… 확실히 일반인이랑 플레이어의 격차가 더 벌어졌어.”
“어떤 점이요?”
“일반인의 면역력이 훨씬 떨어지는 것 같아. 플레이어는 5분이면 치료될 일이 4시간이나 걸렸잖아.”
정신을 차린 남자들에게도 설명할 시간이 필요하기에, 이는 오혜선에게 맡기고 우린 저녁 식사를 준비했다.
포만감 알약을 먹으면 간단하게 해결할 수 있지만, 지금처럼 안전한 상태에선 미각의 행복을 포기할 수 없었다.
* * *
정신을 차린 남자들과 간단한 통성명을 주고받았다.
시드볼트에서 일하는 남자의 이름은 한민욱, 그리고 구현희의 남편 이름은 공석훈이라고 한다.
두 사람은 태양광 패널을 확인하기 위해 밖에 나갔다가, 갑작스레 퍼진 독 안개로 인해 죽다 살아난 경우였다.
“상황은 와이프에게 들었습니다. 고맙습니다.”
공석훈은 이정우에게 허리 숙여 감사 인사를 전했다.
생명의 은인에게 감사 인사를 전하는 게 당연하다고 여길 수도 있지만, 세상에 당연한 건 없었다.
40대 후반의 남자가 20대 초반의 젊은 남자에게 허리 숙여 감사를 표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만큼 고지식한 부분 없이, 정서가 올바른 사람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저녁 식사와 함께 가벼운 대화가 오가고, 모든 이야기를 들은 한민욱이 오혜선의 눈치를 보며 얘기했다.
“정신 차리자마자 이런 말씀 드려서 죄송합니다만…… 실장님, 이 학생들 말에 따르는 게 좋지 않을까요?”
실장이라면…… 오혜선을 두고 하는 말인가?
오혜선은 한숨을 내쉬며 고민하는 모습을 보이더니, 이정우와 내 얼굴을 번갈아 쳐다보며 얘기했다.
“아까도 얘기했지만, 씨앗의 안정이 확인되지 않으면 꺼낼 수 없어요.”
그러자 국그릇을 옮기던 윤혜리가 입을 열었다.
“이러면 어떨까요? 예를 들어 소나무 씨앗이 있다고 치면, 하나만 있는 게 아니잖아요?”
“…….”
“하나만 꺼내서 저희 인벤토리에 넣어보면 되지 않을까요?”
윤혜리의 입에서 나온 간단명료한 방법에, 이정우는 오혜선을 쳐다보며 얘기했다.
“씨앗 하나만 양보해 주시죠.”
“……정말 하나만 있으면 알 수 있는 거예요?”
“네.”
오혜선은 아랫입술을 깨물더니, 땅이 꺼지도록 한숨을 내쉬며 입을 열었다.
“혹시라도 나중에, 이거 제가 꺼내줬다고 하면 안 돼요.”
그게 걱정이었어?
이미 국가라는 개념 자체가 무너졌다.
사실상 시드볼트가 어떻게 되든, 신경 쓰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뒤이어 오혜선의 나지막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내가 죽는 날까지 여기 있는 씨앗이 밖에 나가는 일은 없기를 빌었는데…… 결국 이렇게 됐네요.”
오혜선의 입장을 이해하지 못하는 건 아니었다.
시드뱅크도 아니고, 시드볼트에 있는 씨앗이 세상 밖으로 나간다는 건…… 세계의 종말을 뜻하는 것과 다를 바 없으니까.
“따라와요. 지체해서 좋을 건 없겠죠.”
수색대는 다시금 롱패딩을 걸치고, 오혜선을 따라 장기 저장고로 향했다.
영하 20도의 온도는 쉽사리 적응할 수 없었다.
상상 이상으로 춥다고 해야 좋을까?
따뜻한 곳에 있다가 들어와서 그런지, 체감 온도는 영하 40도는 될 것 같았다.
오혜선은 씨앗의 상태를 살피더니, 내게 자그마한 씨앗 하나를 건네주었다.
“달맞이꽃 씨앗이에요. 한번 확인해 보세요.”
긴장되는 마음을 가라앉히며 인벤토리를 열고, 그곳으로 씨앗을 옮겼다.
띠링-
-아이템에 생명이 존재합니다.
-생명체를 보관하기 위해선 생명유지장치를 가동해야 합니다.
-생명체의 종류와 크기에 따라 적절한 생명유지장치가 제공되며, 크기와 조건에 따라 추가 비용이 발생합니다.
눈앞의 홀로그램을 보고 놀란 눈으로 일행을 쳐다보자, 정진영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생명유지장치? 추가 비용? 이게 뭔 소리냐. 돈 내라는 거야?”
“그런 것 같아요.”
달맞이꽃 씨앗을 인벤토리에 넣자, 또다시 홀로그램이 떠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