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ecame a game character in the apocalypse RAW novel - Chapter 382
종말 속 게임 캐릭터가 되었다 외전 쫓고 쫓기는 자 1화
스스로 저렇게 얘기하니, 뭐라고 위로해야 좋을지 모르겠다.
아니, 위로하는 게 맞나?
이에 구레나룻을 긁적이자, 뒤이어 에스파디아가 말을 이었다.
‘미안하구나, 잠시나마 감상에 젖었어. 시간 없다고 보채 놓고 이런 꼴이라니.’
“괜찮아요.”
‘나도 나이를 먹긴 먹었구나.’
“많이 드셨죠. 상상도 못 할 정도로.”
‘하하!’
가벼운 농담으로 분위기를 전환하고, 지구로 통하는 게이트를 열었다.
“이제 아슈루 행성의 사람들을 다시 이곳으로 불러야죠?”
‘그래야지.’
“지구에서 아슈루의 모성으로 넘어오면 기억이 소각되도록 설정해 둘게요. 지구로 이동했던 기억과 제 존재를 잊도록.”
‘그렇게 하거라.’
“그리고 에스파디아.”
‘얘기하거라.’
“우리 잘하고 있어요.”
‘…….’
“약해지지 말고 끝까지 같이 갑시다. 저 보조해 주셔야죠.”
에스파디아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엷은 미소를 짓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민망한 마음에, 헛기침과 함께 말했다.
“자, 갑시다!”
‘가자.’
“그거 내 대사라니까.”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게이트로 걸음을 옮겼다.
* * *
생명의 태동이 느껴지지 않는 회갈색의 세상.
황량한 벌판과 희뿌연 안개가 내려앉은 장소.
그 끝에 위치한 거대한 성의 회랑에서 대화 소리가 들려왔다.
“피그리티아는 왜 죽였지?”
아랫배가 불룩 튀어나온 굴라가 묻자, 아이라는 덤덤한 목소리로 얘기했다.
“옮겨야 한다.”
“옮기다니.”
“에스파디아가 찾아올 테니까.”
피그리티아의 몸에서 에스파디아의 파편이 느껴졌고, 이에 망설임 없이 꼬리를 잘랐다.
하지만 피그리티아가 이곳에 발을 디딘 이상, 에스파디아가 모성의 위치를 알아챘을 가능성이 농후하다.
모성의 위치를 기억에서 지우지 않은 피그리티아 때문에, 아이라는 곤혹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굴라는 마른침을 삼키며 눈을 눌리더니, 초조한 목소리로 물었다.
“현 상황에 에스파디아와 싸워서 이길 가능성은?”
“쉽지 않아. 피그리티아의 몸에 있던 파편은…… 우리가 알던 에스파디아의 마력이 아니었어.”
“그럼?”
“생동감이 넘치는, 때 묻지 않은 마력이었다.”
“생동감? 파편 스스로 마력을 운용한다고? 근원이 아니고는 불가능한 가설이다.”
“가능한 방법이 하나 있지 않느냐.”
“에스파디아가 성배를 만들었단 말이냐?”
굴라가 불안한 목소리로 묻자, 아이라는 못마땅한 표정을 지으며 두 주먹을 말아쥐었다.
이마 위로 불끈 솟아난 핏줄이 그의 심정을 대변하고 있었다.
굴라는 머뭇거리는 모습을 보이더니, 퍼석한 입술을 핥으며 얘기했다.
“아이라, 걱정하지 말아라. 루드라바의 근원은 내게 있으니.”
“그러니 더더욱 문제 아니더냐. 피그리티아와 인비디아가 당했다는 건 성배에 에스파디아와 아슈루의 근원이 들어갔다는 말이다.”
“…….”
“성배의 힘을 끌어내기 위해, 에스파디아가 루드라바의 근원을 찾으러 올 게야.”
“그럼…… 대체 어디로 간단 말이냐. 모든 준비는 이곳에서 하고 있었는데.”
굴라의 물음에 아이라는 한숨을 내쉬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타개책이 없었다.
아이라는 앞머리를 쓸어넘기며 혼잣말을 읊조렸다.
“이래서 내 직접 나서야 했는데…….”
“네가 없었다면 루드라바의 근원을 담을 수 없었다.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어.”
둘 사이로 무거운 침묵이 내려앉았다.
마땅한 방안이 떠오를 때까지, 그 침묵은 깨지지 않았다.
뒤이어 굴라의 머릿속으로 한 가지 방안이 떠올랐다.
굴라가 아이라의 눈치를 보자, 이를 파악한 아이라가 물었다.
“왜 그렇게 쳐다보지?”
“아이라, 방법이 없는 건 아니야.”
“……?”
“성배를 지닌 에스파디아를 상대할 수 있는 방법이 있다.”
“얘기해라.”
“그 녀석을 이용한다면…… 제아무리 성배를 지닌 에스파디아라도 우리를 방해할 수 없다.”
“그 녀석? 설마 루시퍼를 말하는 게냐?”
굴라가 고개를 끄덕이자, 아이라는 눈살을 찌푸리며 얘기했다.
“그걸 방안이라도 제시하는 게냐?”
“다른 방안이 있느냐?”
아이라는 반박 대신 세차게 혀를 찼다.
굴라가 제시한 방안은 변수가 너무 많았다.
하지만 다른 선택지가 없는 것도 사실이었다.
아이라는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더니, 떨떠름한 목소리로 물었다.
“루시퍼의 위치는.”
“아스모데우스가 알고 있다.”
“아스모데우스의 위치는.”
“너도 아는 곳이야. 바로 이동하겠느냐?”
“시간을 끌어서 좋을 게 없다. 당장 이동하지.”
아이라의 지시에 굴라는 양손을 번쩍 들고 체내의 마력을 끌어올렸다.
그의 손끝에서 시작된 칠흑 같은 마력이 가지처럼 뻗어 나가자, 서서히 게이트의 모습을 갖추기 시작했다.
이윽고 걸쭉한 타르처럼 생긴 어둠의 게이트가 생성되고, 굴라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도착하면 아스모데우스와 우호적인 태도를 취하게. 자네 내키는 대로 행동하면 비협조적으로 나올 테니.”
“내게 따르지 않으면 죽일 것이야.”
“제발 성격 좀 죽이게.”
“…….”
아이라는 아랫입술을 깨물더니, 한숨을 내쉬며 말을 이었다.
“아스모데우스는 루시퍼의 손을 들었어. 난…… 지금의 아스모데우스가 탐탁지 않아.”
“하지만 루시퍼가 필요한 것도 사실이지.”
“너는 루시퍼의 힘을 모른다. 그놈은 우리와 달라.”
아이라의 대답에 굴라는 눈꼬리를 치켜뜨며 물었다.
“왜 그렇게 미워하는 거지? 루시퍼가 자네의 심기를 건드린 적은 없을 텐데.”
“루시퍼는…… 타락한 성배의 조각이다.”
예상치 못한 대답에 굴라는 두 눈을 휘둥그레 뜨더니, 본인의 아랫배를 문지르며 물었다.
“타락한 성배라면…… 오그도아드의 조각이라고?”
“그렇다. 만약 루시퍼가 언노운의 근원을 4개 이상 흡수한다면…… 오그도아드의 부활이나 다름없어.”
“우리가 바라는 것도 오그도아드의 부활이 아니더냐.”
“틀려. 방향도, 결과도, 이상도 다르다. 우린 오그도아드의 힘을 추구하는 것이고, 루시퍼는 오그도아드가 되는 것을 바라는 거야.”
“그럼 루시퍼가 언노운의 근원을 흡수한다면…….”
“관리자나 우리나, 모두 사라지는 거야. 어쩌면 우리의 계획을 양분으로 삼을지도 모른다.”
“네가 그토록 루시퍼를 배제한 이유가 그것 때문이었나?”
“…….”
“배제가 아니었구나. 넌 처음부터 루시퍼를 경계한 거야.”
아이라는 대답 대신 시선을 회피했다.
굴라는 본인의 아랫배를 쳐다보며 얘기했다.
“재밌구나. 언노운의 일방적인 공격인 줄 알았는데, 살기 위한 발버둥이었나?”
“…….”
“이제 루시퍼와 관리자, 이 둘의 공격을 받을지도 모른다. 자신 있는 게냐?”
“역부족이다. 그러니 루시퍼와 에스파디아의 성배를 싸우게 만들어야지.”
“가능하겠는가?”
“해봐야지.”
둘은 칠흑 같은 게이트를 지나 음욕의 악마, 아스모데우스의 행성으로 이동했다.
* * *
붉게 물든 하늘, 폐허로 변한 도시, 절규와 비명으로 점철된 아스모데우스의 행성.
굴라는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얘기했다.
“우리가 만든 행성을 이렇게 꾸며놓다니, 여전히 저질스러운 풍경을 좋아하는구나.”
“어쩌겠는가. 아스모데우스의 취향인 것을. 게이트는 확실히 닫았겠지?”
“물론이지. 에스파디아가 우리의 모성을 찾아와도 좌표는 남아 있지 않을 거야. 성을 부수는 게 아니라면.”
“……만약 부순다면?”
“그럼 이곳도 안전하지 않겠지.”
“빨리 정리하고 이동한다. 아스모데우스는 어디 있지?”
“따라오게.”
굴라는 절규하는 영혼들을 발로 차며 성큼성큼 나아갔다.
반면에 아이라는 끔찍하기 짝이 없는 영혼들을 바라보며 혀를 찼다.
“아스모데우스가 모성을 떠난 이유가, 고작 이런 세상을 만들기 위함이었나?”
“이유야 많지 않겠는가? 루시퍼와 생각이 비슷한 녀석이었으니, 더더욱 본인의 행성을 가지고 싶었겠지.”
“관리자도 아닌 것이, 관리자를 흉내 내는 꼴이군.”
아이라와 굴라는 절규하는 영혼과 피로 물든 대지를 지나 저 멀리 보이는 아스모데우스의 성으로 이동했다.
파지직-
그 순간, 성곽으로 마력이 집중되는 걸 확인할 수 있었다.
붉은 선혈이 응어리지는 것처럼, 질척하고 불쾌한 마력이었다.
이를 발견하고, 아이라는 거대한 날개를 활짝 펼치며 읊조렸다.
“주제도 모르는 놈이, 손님 대접까지 형편없구나.”
아이라의 날개로 회갈색의 마력이 응축되더니, 반 박자 빠르게 성곽으로 날아들었다.
쾅-!!!!!
붉게 응축된 마력은 아이라의 공격을 버티지 못하고 그대로 폭발하는 모습을 보였다.
동시에 성곽이 허물어지고, 자욱한 흙먼지가 일대를 뒤덮었다.
아이라가 날개를 펄럭이며 허공에 떠오르며 얘기했다.
“모습을 드러내라. 아스모데우스.”
그러자 자욱한 흙먼지를 뚫고 도도한 자태를 뽐내며 걸어 나오는 여성.
아스모데우스는 양손을 허리에 얹으며 물었다.
“500년 만에 찾아와서는, 여전히 교만하기 짝이 없구나. 아이라.”
“교만한 것은 네가 그토록 좋아하는 루시퍼겠지.”
“허!”
그녀는 콧방귀 뀌며 말을 이었다.
“네놈이 매력 없다는 소리를 돌려 말하는구나.”
“여전히 기분 나쁜 녀석이구나.”
“왜, 나도 추방하려고?”
“굳이 추방할 필요도 없지. 스스로 우리의 모성을 떠나 이곳에 터를 잡지 않았느냐?”
“너처럼 센스 없는 녀석이 관리하는 모성, 줘도 안 가져.”
아이라는 아스모데우스의 반응을 보고 호쾌하게 웃어젖혔다.
“500년이 지나도 변한 게 없구나.”
“그러는 너는? 500년간 소식도 없더니 다짜고짜 찾아와서 남의 성을 때려 부수는 그 성깔, 그거 언제 고칠 생각이지?”
“내가 묻는 말에 똑바로 대답한다면, 남은 부분은 부수지 않겠다.”
“…….”
아스모데우스는 눈살을 찌푸리며 못마땅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아이라와 대적하는 건 역부족이기에, 팔짱을 끼며 물었다.
“원하는 게 뭐야.”
“루시퍼.”
아스모데우스의 눈꼬리가 꿈틀거렸다.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자, 아이라는 턱을 치켜들며 얘기했다.
“잔머리 굴리면 네 성과 함께 너도 죽여주마.”
“누가 잔머리 굴렸다고 그래?”
“네놈의 징그럽기 짝이 없는 전갈 꼬리가 좌우로 움직이지 않느냐? 넌 예전부터 그랬지. 생각이 많을 때 꼬리부터 흔들었어.”
“…….”
아스모데우스는 꼬리의 움직임을 멈추며 아이라를 노려봤다.
뒤이어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물었다.
“루시퍼를 어쩔 셈이지?”
“네가 루시퍼를 예뻐하고, 그를 챙기는 건 모두가 알고 있다. 하지만 그 집착이 모든 것을 파멸로 이끌 수도 있어.”
“묻는 말에 대답이나 해.”
“목숨은 거두지 않을 테니 좌표를 얘기하거라.”
“부탁하는 태도가 너무 거만한 거 아니야?”
아스모데우스가 못마땅한 표정을 지으며 묻자, 아이라는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부탁으로 들렸느냐?”
“…….”
아스모데우스와 아이라 사이로 날카로운 기 싸움이 오가자, 굴라가 다가오며 얘기했다.
“아스모데우스, 걱정하지 말아라.”
“넌 빠져 돼지 새끼야.”
살기를 내뿜는 아스모데우스의 눈빛을 보고, 굴라는 멋쩍을 표정을 지으며 얘기했다.
“우린 루시퍼를 죽이러 온 게 아니야.”
“…….”
“루시퍼를 죽일 생각이라면 굳이 너를 찾아오지도 않았다. 네가 반대할 게 뻔한데 찾아올 필요가 없지. 차라리 마몬과 연락할 방법을 취했을 게야.”
“루시퍼한테 무슨 말을 하려고? 원하는 게 있으니 500년 만에 통보도 없이 찾아온 것 아니야?”
“에스파디아가 성배를 만들었다.”
성배라는 말에 아스모데우스의 눈꼬리가 꿈틀거렸다.
뒤이어 아이라를 올려다보더니, 조소를 지으며 물었다.
“아이라 너, 그동안 그렇게 떵떵거리더니…….”
“…….”
“푸하핫!”
아스모데우스는 배꼽을 잡고 폭소를 터뜨렸다.
뒤이어 눈물까지 찔끔 흘리며 물었다.
“아 웃겨. 살고 싶어서 찾아온 거야? 루시퍼한테 살려달라고 애원하려고?”
“…….”
“진짜 없어 보인다.”
“그 입, 여전히 천박하구나.”
“천박?”
“천박한 건 싫어서 말이지.”
파즈즈즉-!
아이라의 날개로 마력이 응축되더니, 그대로 아스모데우스의 머리 위로 쏟아졌다.
떠더더더덩-!!! 터더더덩!!!
폭격에 가까운 공격이었지만, 아스모데우스의 마력장에 저지당했다.
아이라가 의외라는 표정을 짓자, 아스모데우스는 정색하며 얘기했다.
“여기가 어디라고 생각하는 거냐.”
“…….”
“앞마당에 똥개가 들어왔는데, 집주인이 가만히 있겠어?”
드드드드드드드드드-
뒤이어 대지가 진동하며 천지의 핏물이 일렁이기 시작했다.
공기 중에 퍼져 있던 붉은 마력이 아스모데우스에게 흡수되자, 그녀의 두 눈으로 붉은 이채가 번뜩였다.
“지금도 내가 500년 전과 달라진 게 없다고 생각하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