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ecame a game character in the apocalypse RAW novel - Chapter 386
종말 속 게임 캐릭터가 되었다 외전 쫓고 쫓기는 자 5화
조심스레 손을 떼자, 에스파디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결국…… 이렇게 됐구나.’
“알고 있었어요?”
‘루시퍼는 악마들 사이에서 따돌림을 당했지. 그런 루시퍼를 챙겨준 이는 아스모데우스가 유일했고.’
“루시퍼가 따돌림을 당해요? 타락한 성배의 조각이라서?”
‘맞아, 언노운의 근원을 탐할 거라 생각한 루시퍼를 달갑게 여긴 악마는 없었지.’
“조금 불쌍하네요.”
씁쓸한 마음에 입맛을 다시자, 에스파디아는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루시퍼가 유일하게 기댈 수 있는 악마가 아스모데우스였는데, 아이라의 손에 당했으니 그 분노는 가늠조차 되지 않는구나.’
“이제 어쩌죠? 이미 아이라랑 굴라는 다른 차원으로 도주한 것 같은데.”
‘우선 아스모데우스의 성을 확인해야지. 어쩌면 저곳에도 비밀 통로가…….’
터벅-
그 순간, 우측에서 느껴지는 인기척에 황급히 검파를 말아쥐며 고개를 들었다.
창백하다 못해 서릿발처럼 흰 피부, 인정이라고는 느껴지지 않는 냉혹한 눈빛의 남자가 이곳을 쳐다보고 있었다.
아직 전투의 상흔이 사라지지 않은, 산발의 남자였다.
두근-
동시에 심장에서 아찔한 진동이 느껴지고, 에스파디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조심해라.’
‘네?’
속으로 묻자, 에스파디아의 긴장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루시퍼다.’
이에 황급히 상체를 일으키자, 루시퍼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당신은…….”
“…….”
넋이 나간 사람이라고 해야 좋을지, 영혼이 없다고 해야 좋을지, 루시퍼의 눈빛에서 아무런 기운도 느껴지지 않았다.
마력도 개방하지 않고, 공격 의사가 없는 허수아비처럼 보였다.
루시퍼의 모습을 위아래로 훑으며 속으로 물었다.
‘에스파디아, 뭔가 이상해요.’
‘무엇이 말이냐.’
‘감지를 사용했을 때, 분명 감지에 잡히는 생명체는 없었어요.’
‘루시퍼의 다른 이름이 뭔지 아느냐?’
‘저 라틴어 몰라요.’
아이라의 편에 붙은 악마들은 라틴어를 사용하고, 루시퍼와 아스모데우스는 영문 표기의 이름이었다.
또 라틴어 얘기를 하려는 줄 알았는데, 에스파디아는 다른 이야기를 꺼냈다.
‘아침의 아들, 이단아, 타락 천사.’
‘……그게 뭐요.’
‘감지로 파악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야. 언노운에 속하지만, 따지고 보면 마물도, 관리자도 아닌 존재다.’
‘쉽게 말하면 천사도 악마도 아니라고요? 아무리 그래도 악마들의 근원을 흡수했으니 감지에 잡혀야 정상 아니에요?’
‘새까만 그릇에 물감을 담았을 때, 그릇 속의 물감이 어떤 색인지 알 수 있느냐?’
‘……모르죠.’
‘그게 루시퍼다.’
두근거리는 심장을 진정시키며 루시퍼를 바라보자, 멀뚱멀뚱 서 있던 루시퍼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너는…… 에스파디아가 아니구나.”
“…….”
“에스파디아가 만들었다는 성배. 맞지?”
“그럼 내가 왜 여기 있는지 알겠네?”
루시퍼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더니, 양팔을 활짝 펼치며 얘기했다.
“죽여라.”
응?
예상 밖의 대답에 망설이자, 루시퍼는 서글픈 표정을 지으며 말을 이었다.
“영생의 이유를…… 조금 전 알게 되었다.”
“…….”
“평생을 고통 속에, 사랑하는 이의 죽음을 목도하며 살아가는 것, 그것이 영생이다.”
정신이 무너진 건가?
뒤이어 에스파디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잠시 육체를 빌려도 되겠느냐?’
‘괜찮을까요? 루시퍼가 갑자기 공격하면 반응하기 어려울 텐데.’
‘아무리 루시퍼라도 성배를 일격에 부수는 건 불가능해.’
‘…….’
에스파디아는 괜찮다고 하지만, 만약의 사태를 대비해서 명왕의 갑주를 유지한 채 제어권을 넘겨주었다.
에스파디아는 한 차례 심호흡을 하더니, 근엄한 목소리로 얘기했다.
“오랜만이구나, 루시퍼.”
루시퍼는 명왕의 갑주를 유심히 바라보더니, 눈꼬리를 치켜뜨며 물었다.
“이 무게감…… 낯설지 않군요.”
“…….”
“제 목을 치고, 언노운의 모성에 버린 군주. 에스파디아.”
루시퍼의 눈빛과 목소리에서 서늘한 살기가 느껴졌다.
이에 마른침을 삼키며 에스파디아에게 물었다.
‘에스파디아, 시비 걸지 말아요.’
‘시비 걸 생각 없어.’
‘노파심에 하는 말이에요.’
‘…….’
‘루시퍼가 조금씩 마력을 개방되고 있어요. 억누르려는 것 같지만, 흘러나옵니다.’
‘많이 강해졌구나. 고작 2개의 근원을 흡수했을 뿐인데.’
‘긴장 풀지 말아요.’
신신당부하며 다시금 루시퍼의 모습에 집중했다.
에스파디아도 루시퍼의 모습을 응시하더니, 착잡한 표정을 지으며 얘기했다.
“네 충성심을 의심한 적은 없다.”
“그럼 왜 그러셨습니까. 당신을 믿고 따른 저를, 기나긴 세월 당신의 충실한 개로 살아온 저를…… 왜 죽이셨습니까.”
“생명을 소중히 여기지 않았으니까.”
“…….”
“내가 관리하던 행성들, 기억하느냐?”
“어찌 잊겠습니까. 당신의 명에 따라 그곳에 평화를 안겨준 게 접니다.”
루시퍼의 대답에 에스파디아는 못마땅한 표정을 지으며 얘기했다.
“네가 추구하는 평화와 내가 추구하는 평화의 차이점을, 아직도 모르는 게냐?”
“지성을 지닌 생명체가 존재하는 한 안식은 찾아올 수 없습니다.”
“그렇다고 그 행성의 생명체를 학살한 네가, 스스로를 정의라 칭할 수 있느냐?”
“모조리 죽이지 않았습니다.”
“태반을 죽였지.”
“그 덕에 평화가 찾아오지 않았습니까?”
“그것은 평화가 아니야. 절망이지. 살아갈 의욕을 잃은 움직이는 시체나 다름없다.”
“아직도 모르시겠습니까? 그것이 평화입니다.”
“…….”
둘 사이에 불화가 발생한 이유를 조금은 알 것 같다.
엉켜버린 실을 풀기 위해 노력하는 에스파디아와 달리, 엉켜버린 실을 끊어버리는 게 루시퍼였다.
문제해결 방식이 너무나도 다르다.
루시퍼는 억울하다는 듯이 얘기했다.
“그래서, 당신이 내린 선택이 뭐였습니까? 저와의 관계를 해결하기 위해 노력하는 대신, 제 목숨을 끊은 것 아닙니까?”
“네게 몇 번이나 기회를 줬어.”
“기회? 제 목숨을 앗아갈 명분이 필요했던 건 아니고요?”
“루시퍼야…….”
“됐습니다!”
루시퍼는 언성을 높였지만, 에스파디아는 침착함을 유지하며 얘기했다.
“네 선택이 어떤 결과를 가져오는지 직접 보고, 겪어보길 바랐다.”
“하!”
“그런 네가 교만의 악마가 되었을 때, 내가 얼마나 마음 아팠는지 아느냐?”
“변명입니다.”
“변명이 아니라…….”
“변명이야!!”
루시퍼가 이마에 핏대를 세우며 소리치자, 에스파디아는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누구의 말이 옳을까.
이걸 내가 판단할 수 있을까?
들어보니 루시퍼가 에스파디아의 파편이던 시절, 훈육이 필요했던 건 사실이다.
다른 생명을 소중히 여기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에스파디아의 과도한 훈육으로 더욱 엇나가버렸다.
필멸의 삶을 살아가는 인간도 쉽게 판단할 수 없는 문제인데, 영생을 살아가는 이들의 판단에 왈가왈부할 수 없었다.
루시퍼는 바득바득 이를 갈며 말을 이었다.
“당신의 선택 때문에, 난 기나긴 세월을 고독과 절망, 고통 속에 살았어.”
“네가 지은 죄에 대한 벌이라 생각하거라.”
“그놈의 빌어먹을 벌!!”
루시퍼는 아이라에게 들었던 말이 겹쳐 보였는지, 마력을 방출하며 분노를 과시했다.
에스파디아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자, 루시퍼는 오만상을 찌푸리며 물었다.
“내가 뭘 그리 잘못했는데?”
“생명을 앗아간다는 건, 네 생명도 한 줌의 먼지처럼 사라질 수 있다는 걸 깨달아야 한다.”
“차라리 영혼마저 죽이지 그랬어? 악마로 다시 태어난 뒤로 나는…… 정말…….”
루시퍼가 울먹이자, 에스파디아는 착잡한 표정을 지으며 얘기했다.
“네 고통의 깊이는 가늠할 수 없지만, 여전히 엇나간 선택을 하고 있다.”
“…….”
“오그도아드가 되어 세상의 멸망을 초래할 생각이라면 여기서 멈추거라.”
“싫다면.”
“또다시 내 손에 죽어야 할 게야.”
“할 수 있다면 그리 해보시죠.”
루시퍼의 두 눈에 이채가 번뜩이더니, 거대한 날개가 등 뒤로 펼쳐졌다.
금방이라도 핏방울이 떨어질 것 같은 선홍빛 날개.
이에 두 눈을 휘둥그레 뜨며 에스파디아를 불렀다.
‘빨리, 빨리 육체 제어권 넘겨요.’
‘아직이야.’
‘아직은 무슨 아직!’
‘루시퍼는…… 공격 의사가 없다.’
‘……예?’
그걸 어떻게 알아?
이러다간 눈 뜨고 육체를 잃게 생겼는데 어떻게 보고만 있으라는…….
그런데 이게 무슨 일인가?
분노에 휩싸였던 루시퍼는 날개를 펼친 상태 그대로, 미동도 하지 않았다.
에스파디아는 루시퍼의 얼굴을 지그시 쳐다보더니, 나지막한 목소리로 얘기했다.
“안타깝구나.”
“…….”
“너무나 안타깝고, 불쌍해.”
에스파디아의 말에 루시퍼는 두 주먹을 파르르 떨었다.
심술이 난 것 같기도, 화가 난 것 같기고, 억울한 것 같기도, 너무나 많은 감정이 엿보였다.
에스파디아는 폐부 깊숙이 숨을 들이쉬더니, 한숨에 가까운 목소리로 얘기했다.
“그리도 인정받고 싶더냐.”
“…….”
“잘했다고, 수고했다고, 고생 많았다고, 그렇게 내게 인정받고 싶더냐.”
루시퍼의 얼굴이 붉게 물들기 시작했다.
분기에 차오른 것 같은데, 공격 의사는 보이지 않았다.
에스파디아는 서글픈 눈으로 루시퍼를 쳐다보더니, 안쓰럽다는 듯이 얘기했다.
“네 노력을 인정하고, 칭찬해 주지 않은 건 미안하구나.”
“…….”
“네가 잘못을 하더라도 노고는 인정하고, 그 뒤에 질책을 해야 했는데…… 너무 질책만 했어.”
어린아이를 타이르듯이, 에스파디아는 진심을 담아 루시퍼에게 얘기했다.
그러자 루시퍼의 두 눈에서 피눈물이 뚝뚝 떨어지기 시작했다.
얼마나 억울하고 악에 받치면 피눈물을 흘릴까.
에스파디아는 애잔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엇나간 네가 세상의 멸망을 바라는 것도, 모든 것이 부질없다고 생각하는 것도, 네 노력에 대한 보상이나 인정이 뒤따르지 않아서 그런 게 아니더냐.”
“…….”
“세상이 썩은 것 같고, 네게만 모진 것 같으냐? 아니면 내가 사무치게 미웠더냐.”
“…….”
루시퍼는 한참이나 말이 없더니, 사무친 마음을 심호흡으로 달래며 입을 열었다.
“주변에서…… 저를 뭐라 불렀는지 기억하십니까?”
“아침의 아들 루시퍼.”
“예, 에스파디아의 관심을 한 몸에 받는 충신. 아침을 여는 여명, 아침의 아들이라 불렀습니다.”
“…….”
“하지만…… 제가 그런 말을 들을 때마다 어떤 심정이었는지 아십니까?”
에스파디아가 함묵하는 모습을 보이자, 루시퍼는 바득바득 이를 갈며 얘기했다.
“껍데기에 갇힌 느낌이었습니다.”
“…….”
“아침의 아들? 여명? 정작 저는…… 잠자리에 들 때마다 내일 아침이 오지 않기를 바랐습니다.”
“…….”
“하루하루가 고통이었습니다. 아무리 노력해도 인정받을 수 없고, 나를 알아주지 않는 에스파디아 당신이 원망스러웠습니다.”
루시퍼는 앞머리를 쓸어넘기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뒤이어 격해진 마음을 가다듬으며 얘기했다.
“제 속은 썩어 문드러지고 있는데, 남들 앞에서는 선의의 천사인 양 웃었습니다. 모두가 저를 인정하는데, 오직 당신만이 저를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의 미소가 진심이라 생각하느냐? 아니면 살기 위한 가면이라 생각하느냐.”
“예?”
루시퍼의 눈꼬리가 꿈틀거리자, 에스파디아는 착잡한 표정을 지으며 얘기했다.
“정녕…… 어째서 교만이란 이름의 악마가 되었는지 모르겠느냐?”
루시퍼는 망치로 머리라도 맞은 것처럼 얼빠진 표정을 지었다.
에스파디아는 관자놀이를 지그시 누르며 한숨을 내쉬었다.
머리가 지끈거리는지, 다소 지친 목소리로 얘기했다.
“아니, 아니다. 네가 교만해진 것도 전부 내 불찰이지. 내게 얻지 못한 신뢰를 나약한 생명체들을 통해 얻으려던 것 아니더냐.”
“…….”
“미안하구나.”
지난날은 캐묻지 않으려고 했는데, 어쩌다 보니 루시퍼와 에스파디아 사이의 불화를 전부 알게 되었다.
그 순간, 루시퍼의 입에서 서늘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사과하지 마.”
“……뭐?”
“당신은 뭐가 달라.”
목소리 어조부터 달라졌다.
이건…… 위험하다.
루시퍼의 이마에 핏줄이 솟아나고, 그의 입에서 분기에 차오른 심정이 속사포처럼 쏟아졌다.
“그렇게 나를 지적하더니 당신은 다른가? 성배를 제작하기 위해 모성에 있던 생명체의 태반을 죽였다지? 이제 와서 사과하고 인정하면 내 분노가 사라질 것 같나?”
눈빛부터 맛이 갔다.
에스파디아가 루시퍼를 죽인 이유를 알 것 같다.
대화로 해결할 수 없고, 결코 갱생할 수 없는 존재.
이에 황급히 에스파디아를 불렀다.
‘육체 제어권 넘겨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