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ecame an American Retro Novelist RAW novel - Chapter (100)
100.
『[나는 그 순간을 지금도 기억했다.
제이나를 처음 만났던 순간이었다. 그 아이는 검은 머리칼을 길게 기르고는 후드를 깊이 눌러쓰고 있었다. 긴장했는지 몇 번이나 주변을 두리번거렸고 누군가가 말을 걸 때마다 흠칫 놀라며 몸을 떨었다. 게다가 갑자기 왕궁 안에서 사역마를 소환하기도 했다.
그래서 처음에는 경계했다.
절대로 일반적인 모습은 아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지하로 내려갈수록, 나아가 모험이 이어질수록, 나는 그 아이의 진가를 알게 되었다.
아니, 정확히 말해 ‘그 아이들’의 진가를 보았다고 해야 할까.
최대한 올바른 선택을 하려고 하지만 때로는 감정에 휩쓸리는 모습을 보여주었던 클레어. 그녀의 옆에서 묵묵히 버팀목이 되어준 것이 바로 제이나였다. 클레어도 제이나를 신분과 상관없이 동등하게 대했고, 두 사람은 마치 자매처럼 사이좋게 지내게 되었다.
그 둘의 성장을 지켜보며 나는 과거의 상처를 조금씩 잊어갔다.
과거에 겪었던 뼈저린 실패를, 미래를 위한 안배로 생각할 수 있게 되었다.
나는 더 이상 두 사람을 가르치려고 들지 않았다. 오히려 보고 배웠다. 나이를 먹고, 머리가 돌처럼 굳어졌던 나는 온갖 난관 앞에서 두려워하지 않고 최선의 선택을 하고자 하는 아이들에게 감명을 받았다.
그러면서도 나는 그들을 지키고 싶었다.
이제 와서 생각해 보면 그마저도 만용이었지만, 그때는 그랬다.
나는 그 아이들이 감당할 수 있는 고난만을 겪으며 안전하게 성장했으면 했다. 그걸 방해하는 일은 나 혼자서 처리하자고 결심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나는 그 결심을 끝까지 이뤄내지 못했다. 그 오만과 만용의 대가로 나는 몸의 절반을 쓰지 못하게 되었다.
이후로 내가 할 수 있는 건 오직 기도뿐이었다.
나는 두 사람이 무사히 돌아오기를 진심으로 바랐다. 세상의 규칙에 얽매지 않고 살아가려는 그들이 이번 탐색을 계기로 크게 성장해서 돌아왔으면 했다. 나와 과거의 동료들이 그랬듯이, 클레어와 제이나 역시 언젠가는 용을 죽이고 대륙을 수호하는 존재가 되리라 믿었다.
그리고 안타깝게도 나는 둘 중 하나를 잃고야 말았다.
아니, 어쩌면 둘 모두를 잃은 걸지도 몰랐다.]』
로드 두푸스의 독백으로 시작되는 16화는, 읽는 이로 하여금 그동안 건즈 앤 소드 매거진에서 연재되어 온 ‘Princess quest’의 이야기를 되새기게 만드는 듯한 구조였다.
동시에 클레어와 제이나가 얼마나 로드 두푸스에게 소중한 존재였는지. ‘노 원’이라고 하는 신분을 가진 제이나와 ‘프린세스’ 클레어의 우정이 얼마나 특별했는지를 보여주었다.
두 소녀의 우정은 로드 두푸스가 수십 년 넘게 가져온 신분에 대한 인식을 무너뜨릴 정도로 인상적이었다.
하지만 세상은 혹독하다. 그 안에는 나름의 규칙이 있다.
따라서 그는 제이나를 자신의 양녀로 들여 ‘노 원’이라고 하는 신분으로부터 벗어나게 해주려고 했다. 올바른 마음과 용기를 가진 그녀가 자신들의 의지를 마음껏 관철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는 것이 그 모습에 감명 받고 옆에서 함께해온 자신의 의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 소망은 이루어지지 못했다.
탐색을 끝마치고 렝커스터 왕국으로 귀환한 클레어와 스탠에게 모든 이야기를 전해들은 로드 두푸스는 뭐라 형언할 수 없는 허망함과 슬픔에 휩싸였다. 미래의 영웅을 향해 기록을 남기듯, 일상처럼 적어 나가던 일기장을 꺼내 자신은 물론이고 지금껏 그 누구도 알지 못했던 다른 세계에 관한 공포를 덤덤히 기록했다.
그것으로 그는 절망을 직시하며 제이나를 추억했다.
그 아이가 만약 자신의 딸이 되었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주점에서 음유시인의 노래를 들을 때마다 티는 내지 않아도 무척이나 큰 흥미를 가졌던 소녀. 만약 그 아이가 자신의 딸이었다면 류트를 뜯으며 그 상냥한 시선으로 바라본 세상에 대해 아름답게 노래하지 않았을까.
갈 곳 없는 그리움은 더더욱 로드 두푸스를 힘들게 만들었다.
그리고 그 모습을 지켜보던 클레어는 결심했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제이나를 그 세계에서 다시 데려오고 말겠어.’”
비좁은 작가의 작업실.
한 남자가 비릿한 미소와 함께 그 대사를 읽었다.
검은 뿔테 안경, 근육질의 체격. 포마드를 발라넘긴 갈색 머리칼.
셔츠의 소맷자락을 거칠게 걷어 올린 채 담배까지 뻑뻑 피우고 있는 그의 모습은, 무슨 일을 해도 노련할 것 같은 이미지였다.
그리고, 실제로도 그랬다.
루퍼트 A. 하워드.
오랜 시간 소설가로서 활동해온 그는 50대의 원숙한 나이로 ‘로난 더 바바리안’이라고 하는 시리즈를 장수 연재해오고 있는 작가였다.
그는 오랜 기간 건즈 앤 소드 매거진에 로난을 실어오며 거의 1위를 놓치지 않았다.
처음에는 그 사실이 마냥 기뻤으나, 연재가 계속 이어지며 조금씩 걱정도 들었다. 이 업계는 끝없이 좋은 작품을 필요로 했다. 영원한 보안관 없이 보안관 배지의 주인이 바뀌며 순환하는 구조가 이루어지는 것이 이상적이었다.
로난의 인기가 압도적이라는 말은, 다시 말해 로난이 끝나면 미국 서부를 주름잡고 있는 건즈 앤 소드 매거진 자체가 휘청거릴 수도 있다는 의미였다.
따라서 사실, 오래전에 로난을 끝내고 싶었음에도 루퍼트는 어쩔 수 없이 계속 연재를 이어오고 있었다.
‘로난 더 바바리안’이라는 총을 든 고독한 보안관이었던 그는 ‘레인보우 월드’에 큰 기대를 걸 수밖에 없었고, ‘디피스트 던전’에도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두 작가를 직접 만나려 했을 정도였다. 하지만 브이 작가에게는 거절당했고, 정작 흔쾌히 만남을 수락한 윌 존스 작가의 경우, 함께 이 업계를 이끌어갈 사람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솔직히 말해서 그 인간은 그냥 자기 자식을 너무 좋아해서 소설을 쓸 뿐, 자신이나 무언가의 대의를 위해서 소설을 쓰는 부류의 작가가 아니었지.’
그가 들고 있는 두 자루의 리볼버는 이름이 ‘아들’과 ‘딸’이었지, ‘레인보우 월드’가 아닌 것이다.
그 사실에 실망하며 로난을 쓰러뜨릴 또 다른 작가를 기다려 왔던 루퍼트 하워드.
그리고 그의 앞에 ‘Princess quest’가 나타났다.
석양을 쫓듯 이 혼잡한 서부에 나타난 젊은 카우보이는 클레어와 제이나라는 이름의 리볼버를 각각 꺼내 들고, 그걸 쏘았다. 그리고 루퍼트가 들고 있던 로난이라는 이름의 리볼버가 순간적으로 튕겨져 나가 땅에 툭 하고 떨어졌다.
루퍼트는 미소를 지었다.
드디어 이 배지를 넘겨줄 사내가 나타났다.
자신은 드디어 로난을 묻고 새 리볼버와 이 업계로 돌아올 수 있게 되었다.
······라고 생각했으나 안타깝게도 ‘Princess quest’는 이번 호로 완결이 나게 되었다.
그래도 괜찮았다. 그의 작품이 자아낸 과정과 결말은 하나같이 무척이나 훌륭했고, 순위에 가파른 상승 곡선을 그리며 혜성처럼 1위까지 쟁취했으니까. 이 결과가 결코 우연이 아니라는 증거였다. 게다가 전작의 유명세도 그 사실을 뒷받침해 주었다.
신 작가는 신문 연재를 지나, ‘Princess quest’로 본격적으로 ‘업계’에 들어왔다. 이제 차기작으로 자신과 함께 오래도록 건즈 앤 소드 매거진을 지탱해, 이 업계를 지금보다 더 높은 곳으로 이끌어 주리라.
그러한 ‘동료’가 하나 생긴 것만으로도 기뻤다.
16화를 모두 다 읽은 루퍼트는 가볍게 기지개를 펴며 새 담배를 입에 물었다. 그러고는 문득 편집부에서도 이런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가 궁금해졌다.
‘내가 신경 써도 될 일인가? 아닌가? 에라, 모르겠다.’
미국의 기질에 어울리는 두터운 근육질의 몸을 만들어낸 남자답게 일단은 움직이고 보는 행동파였다. 그는 곧바로 편집장 직통 번호로 전화를 걸었다. 건즈 앤 소드 매거진 연재작 작가 중에서도 일부만 아는 번호였다.
[네, 전화 받았습니다.]“아서? 접니다. 루퍼트.”
[아, 작가님! 잘 지내셨어요? 하하, 바쁘신 분이 어인 일로 전화를 주셨나요.]그의 목소리를 듣자 아서의 태도가 순간 부드러워졌다. 루퍼트는 자신이 이곳 건즈 앤 소드 매거진에 가진 영향력을 확인하고 내심 만족스러워졌다.
“이번에 ‘Princess quest’가 완결이 났잖습니까?”
[예, 그렇죠. 좋은 이야기였습니다.]“그거, 작가 의도가 맞죠?”
[물론이죠. 계약할 때도 그랬고, 16화 분량으로 마무리 짓겠다고 누누이 말씀하셨죠.]“그럼 다행이군요. 하하, 뚝심 있네요. 이제 신작 들어가면 추가 계약해야겠군요. ······으음, 작가로서 괜히 참견하는 것 같아 말하기 좀 그렇지만, 저는 신 작가가 이 건즈 앤 소드 매거진에 굉장히 필요한 인재라고 생각합니다. 최대한 챙겨주는 편이 좋지 않을까 싶어서 말이죠. ‘느와르’에 빼앗기지 않도록.”
[음, 그게요. 작가님.]“······설마 그쪽으로 넘어갔다거나 한 건 아니죠?”
[물론 아닙니다. 다만 신 작가님의 개인 사정으로 추가 계약은 진행하지 않았습니다.]“그게 무슨 말이죠? 일단 계약으로 묶어둬야 하지 않겠습니까?”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만, 작가님이 앞으로 1년 정도는 잡지 연재를 하지 않겠다고 선언하셔서요.]“무슨 사정이라도······?”
[3학년 때는 졸업에 집중하고 싶다고 하셨습니다.]“College?”
[Highschool.]“······잉?”
상상도 못 한 신의 정체에 루퍼트의 눈이 휘둥그레 뜨였다.
***
1위를 먹은 시점에서 작품을 끝내는 것은, ‘건즈 앤 소드 매거진’이라는 잡지를 생각하면 딱히 좋은 행동이 아니기는 했다.
카우보이 둘이 결투를 벌여 이겼는데, 승자가 보안관 자격이 주어지는 배지를 가지지 않고 그대로 황야로 떠나는 셈이었으니까.
사실 운이 좋아서 이긴 걸 수도 있고, 계속 연재가 이루어지면 또 모르는 일이다. 하지만 어찌 되었든 나는 ‘Princess quest’가 1등을 찍은 상태에서 미련 없이 내려놓고 황야로 말을 몰았다.
다그닥, 다그닥.
어떻게 보면 나의 이러한 행동은 ‘작가주의’적 행동에 가까웠다.
순문학과 달리, 장르는 ‘시장’에 보다 더 큰 비중을 두었다. 그렇기에 장르 작가는 작가로서 작품에 대해 고민하는 동시에, 시장의 흐름을 읽고 행동해야 했다.
만약 내가 ‘시장주의’적 행동을 했다면, 1위의 자리를 거머쥔 이후로 계속 연재를 이어 나가다가 인기가 떨어지려는 조짐이 보일 때쯤에 완결을 냈을 테지.
그래, 그런 생각을 당연히 하고는 있다.
건즈 앤 소드 매거진에 대해서나, 시장에 대해서나, 앞으로의 목표 등등.
요즘 들어 나는 나 자신을 담아낸 글을 쓰면서, 막연히 이 업계의 흐름을 선도하는 인물이 되고 싶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가령, 느와르 퍼블리싱의 약진과 그로 인해 무너져 가는 각종 군소 세력의 몰락을 지켜보면서 안타까워했던 내 어린 시절을 한번 바꿔보고 싶다거나.
하지만 아직은 그럴 때가 아니었다.
이유는 간단했다.
‘글만 쓸 수는 없으니까.’
어느덧 9월이 지나며 나는 3학년이 되었다.
3학년은 바쁜 시즌이었다. 장래를 준비하며 취업을 알아보거나 대학에 갈 준비를 했으며, 학교 내부적으로는 학생들 중에서 가장 오래된 자로서 각종 행사를 주관하고 참석해야 했다. 전생에는 그런 학교행사 같은 건 바깥에서 지켜만 보았던 나였지만, 이제는 그때와는 상황이 많이 달라졌다. 우등생으로서도, 친구들 때문이라도, 무언가를 하게 되겠지.
그렇기에 신작을 쓸 생각이 없지는 않았지만, 스케줄이 하드코어한 잡지 연재는 어렵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더군다나 내 ‘일’은 소설만 있는 게 아니었다.
크리스마스 시즌을 노리고 소년들의 돈을 강탈할 사악한 계획 아래 편집 중인 ‘Double spy’ 종이책의 확인부터 시작해서, 얼마 전에는 ‘Knight’s of the wisdom’ 사에서도 업무 관련 연락이 왔다.
그날 업무 확인을 마친 후, 전설적인 게임 시스템 개발자인 잭 댄포스는 유쾌하고 호탕하게 껄껄 웃으며 ‘Princess quest’의 결말을 극찬했다. 16화에 ‘음유시인 제이나’ 설정을 언급한 나의 센스에 감탄한 것이었다. 대화를 나누며 나는 확실히 그가 난 인물은 난 인물이구나, 하고 생각했다.
그는 내가 소설에 넣은 모든 의도를 정확하게 맞췄다.
나는 로드 두푸스, 스탠, 클레어, 마지막으로 제이나의 시점을 번갈아서 보여주면서 이 소설의 결말이 무작정 어둡지만은 않음을 시사했다.
로드 두푸스는 절망에 빠졌으면서도 그 신념에 따라 약해진 몸으로도 인간의 미래를 위해 묵묵히 자신에게 주어진 일을 해내간다.
두 공주와의 만남을 통해 감화되고 자신이 모르는 세계를 접하게 되면서 생각이 크게 변화한 스탠은, 교단으로 돌아가 두 사람의 이야기를 전하며 과거의 자신처럼 경직된 교단 자체를 바꾸려고 든다.
왕궁으로 돌아간 클레어는 환영식을 준비한 아버지의 앞에서 공주의 신분을 포기하겠다고 선언하고 다시 성을 나온다. 왕은 클레어를 막아섰지만, 그녀의 결심은 흔들리지 않았다. 그녀는 제이나가 살아있으리라 믿고 다시 그 세계로 가서 구해내기로 마음먹는다.
별을 보며 희망을 놓지 않고, 동료들과 함께했던 즐거운 순간을 떠올리며 달밤의 숲길을 홀로 나아가는 클레어.
혼자가 된 그녀의 뺨으로 눈물이 흘러내렸다. 하지만 꿋꿋하게 닦아냈다.
그리고 한편, 다른 세계.
어딘지 모를 공간에서 눈을 뜬 제이나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 결말을 본 줄리아는 이렇게 평가했다.
[끝났지만, 끝나지 않았군요.]나도 그렇게 생각했다.
클레어와 제이나, 그리고 로드 두푸스와 스탠의 이야기는 앞으로 ‘Knight’s of the wisdom’ 사에서 발매할 ‘KOG’의 추가 규칙서, ‘Other worlds’에서 계속될 예정이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그쪽에서 각 플레이어가 원하는 결말을 맞이하게 된다고 해야 할까.
클레어와 제이나는 다시 만날 수 있을까?
‘심연’에 갇혀버린 제이나는 어떤 존재가 되었을까?
제이나를 잃은 로드 두푸스는 르네르 왕국이나 이름조차 없는 클레어의 소왕국에 복수할까?
스탠은 경직된 이 신분제 사회에서 교단의 일원으로 무엇을 할 수 있을까?
‘그 모든 선택을 연말에 발매될 ‘Other worlds’에서 즐기실 수 있습니다요.’
소설로서도, TRPG의 리플레이로서도 모두 만족할 수 있는 훌륭한 결말이었다.
그렇게 생각에 빠진 채 힐끗 시계를 확인했다.
‘밤 10시인가.’
잠깐 상념에 빠져 있었더니 훌쩍 30분이 지나갔다. 나는 한숨을 내쉬며 다시금 펜을 집어 들었다.
내일 아침에 낼 역사 숙제가 아직 끝나지 않았다.
미국 건국의 아버지들 중 하나를 선정해서 그 일생을 담은 요약하고 감상을 제출하라는 과제. 미래 같았으면 그냥 적당히 인터넷을 써서 검색하는 것만으로도 원하는 결과를 얻을 수가 있겠지만, 지금은 1982년이었다. 영혼의 파트너인 하드보일드 나인 싸우전드도 옆에 치워둔 채 나는 두꺼운 역사책을 이리저리 넘기면서 리포트를 작성해 나갔다.
사실, 그 미묘한 괴리감만 빼면 그렇게 어렵지는 않았다.
‘글이야 매번 쓰는 거니까.’
귀찮은 것만 빼면 오히려 좀 더 쉽기도 했다. 상상이 필요한 소설과는 달리, 리포트는 기술의 나열에 가까웠으니까.
나는 역사 과목을 맡은 미세스 그린이 극렬 민주당 지지자임을 떠올리고, 그 입맛에 맞춰 글을 써나갔다.
후후, 미세스 그린. 당신은 이 글을 보고 크게 감동하리라.
그러던 와중, 멀리서 소리가 들려왔다.
뚜르르르- 뚜르르르-.
“음?”
늦은 시간에 걸려온 전화.
시간을 확인해보니 다시 30분이 흘러 10시 반이었다.
‘이 늦은 시간에 누구지?’
어머니는 벌써 주무시고도 남을 시간이었다. 고개를 갸웃거리면서 나는 문을 열고 잰걸음으로 1층으로 내려갔다.
불이 꺼진 복도를 지나 현관문 근처에 둔 전화를 집어 들자,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여, 여여여, 여보세요?]“······알렉사?”
[시, 신! 받았구나아-! 다행이다!]“레더페이스한테 붙잡혔어?”
[갸악-! 그런 거 말하지 말라고!]“뭐야, 무슨 일인데?”
[지, 집인데. 그, 진짜 미안한데. 지금 우리 집에 아무도 없거든?]“어, 그래서?”
[잠깐, 와줄 수 있을까?]“······잉?”
나는 갑작스러운 요청에 할 말을 잃고 말았다.
[ Get to the top (5) >100.
『[나는 그 순간을 지금도 기억했다.
제이나를 처음 만났던 순간이었다. 그 아이는 검은 머리칼을 길게 기르고는 후드를 깊이 눌러쓰고 있었다. 긴장했는지 몇 번이나 주변을 두리번거렸고 누군가가 말을 걸 때마다 흠칫 놀라며 몸을 떨었다. 게다가 갑자기 왕궁 안에서 사역마를 소환하기도 했다.
그래서 처음에는 경계했다.
절대로 일반적인 모습은 아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지하로 내려갈수록, 나아가 모험이 이어질수록, 나는 그 아이의 진가를 알게 되었다.
아니, 정확히 말해 ‘그 아이들’의 진가를 보았다고 해야 할까.
최대한 올바른 선택을 하려고 하지만 때로는 감정에 휩쓸리는 모습을 보여주었던 클레어. 그녀의 옆에서 묵묵히 버팀목이 되어준 것이 바로 제이나였다. 클레어도 제이나를 신분과 상관없이 동등하게 대했고, 두 사람은 마치 자매처럼 사이좋게 지내게 되었다.
그 둘의 성장을 지켜보며 나는 과거의 상처를 조금씩 잊어갔다.
과거에 겪었던 뼈저린 실패를, 미래를 위한 안배로 생각할 수 있게 되었다.
나는 더 이상 두 사람을 가르치려고 들지 않았다. 오히려 보고 배웠다. 나이를 먹고, 머리가 돌처럼 굳어졌던 나는 온갖 난관 앞에서 두려워하지 않고 최선의 선택을 하고자 하는 아이들에게 감명을 받았다.
그러면서도 나는 그들을 지키고 싶었다.
이제 와서 생각해 보면 그마저도 만용이었지만, 그때는 그랬다.
나는 그 아이들이 감당할 수 있는 고난만을 겪으며 안전하게 성장했으면 했다. 그걸 방해하는 일은 나 혼자서 처리하자고 결심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나는 그 결심을 끝까지 이뤄내지 못했다. 그 오만과 만용의 대가로 나는 몸의 절반을 쓰지 못하게 되었다.
이후로 내가 할 수 있는 건 오직 기도뿐이었다.
나는 두 사람이 무사히 돌아오기를 진심으로 바랐다. 세상의 규칙에 얽매지 않고 살아가려는 그들이 이번 탐색을 계기로 크게 성장해서 돌아왔으면 했다. 나와 과거의 동료들이 그랬듯이, 클레어와 제이나 역시 언젠가는 용을 죽이고 대륙을 수호하는 존재가 되리라 믿었다.
그리고 안타깝게도 나는 둘 중 하나를 잃고야 말았다.
아니, 어쩌면 둘 모두를 잃은 걸지도 몰랐다.]』
로드 두푸스의 독백으로 시작되는 16화는, 읽는 이로 하여금 그동안 건즈 앤 소드 매거진에서 연재되어 온 ‘Princess quest’의 이야기를 되새기게 만드는 듯한 구조였다.
동시에 클레어와 제이나가 얼마나 로드 두푸스에게 소중한 존재였는지. ‘노 원’이라고 하는 신분을 가진 제이나와 ‘프린세스’ 클레어의 우정이 얼마나 특별했는지를 보여주었다.
두 소녀의 우정은 로드 두푸스가 수십 년 넘게 가져온 신분에 대한 인식을 무너뜨릴 정도로 인상적이었다.
하지만 세상은 혹독하다. 그 안에는 나름의 규칙이 있다.
따라서 그는 제이나를 자신의 양녀로 들여 ‘노 원’이라고 하는 신분으로부터 벗어나게 해주려고 했다. 올바른 마음과 용기를 가진 그녀가 자신들의 의지를 마음껏 관철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는 것이 그 모습에 감명 받고 옆에서 함께해온 자신의 의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 소망은 이루어지지 못했다.
탐색을 끝마치고 렝커스터 왕국으로 귀환한 클레어와 스탠에게 모든 이야기를 전해들은 로드 두푸스는 뭐라 형언할 수 없는 허망함과 슬픔에 휩싸였다. 미래의 영웅을 향해 기록을 남기듯, 일상처럼 적어 나가던 일기장을 꺼내 자신은 물론이고 지금껏 그 누구도 알지 못했던 다른 세계에 관한 공포를 덤덤히 기록했다.
그것으로 그는 절망을 직시하며 제이나를 추억했다.
그 아이가 만약 자신의 딸이 되었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주점에서 음유시인의 노래를 들을 때마다 티는 내지 않아도 무척이나 큰 흥미를 가졌던 소녀. 만약 그 아이가 자신의 딸이었다면 류트를 뜯으며 그 상냥한 시선으로 바라본 세상에 대해 아름답게 노래하지 않았을까.
갈 곳 없는 그리움은 더더욱 로드 두푸스를 힘들게 만들었다.
그리고 그 모습을 지켜보던 클레어는 결심했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제이나를 그 세계에서 다시 데려오고 말겠어.’”
비좁은 작가의 작업실.
한 남자가 비릿한 미소와 함께 그 대사를 읽었다.
검은 뿔테 안경, 근육질의 체격. 포마드를 발라넘긴 갈색 머리칼.
셔츠의 소맷자락을 거칠게 걷어 올린 채 담배까지 뻑뻑 피우고 있는 그의 모습은, 무슨 일을 해도 노련할 것 같은 이미지였다.
그리고, 실제로도 그랬다.
루퍼트 A. 하워드.
오랜 시간 소설가로서 활동해온 그는 50대의 원숙한 나이로 ‘로난 더 바바리안’이라고 하는 시리즈를 장수 연재해오고 있는 작가였다.
그는 오랜 기간 건즈 앤 소드 매거진에 로난을 실어오며 거의 1위를 놓치지 않았다.
처음에는 그 사실이 마냥 기뻤으나, 연재가 계속 이어지며 조금씩 걱정도 들었다. 이 업계는 끝없이 좋은 작품을 필요로 했다. 영원한 보안관 없이 보안관 배지의 주인이 바뀌며 순환하는 구조가 이루어지는 것이 이상적이었다.
로난의 인기가 압도적이라는 말은, 다시 말해 로난이 끝나면 미국 서부를 주름잡고 있는 건즈 앤 소드 매거진 자체가 휘청거릴 수도 있다는 의미였다.
따라서 사실, 오래전에 로난을 끝내고 싶었음에도 루퍼트는 어쩔 수 없이 계속 연재를 이어오고 있었다.
‘로난 더 바바리안’이라는 총을 든 고독한 보안관이었던 그는 ‘레인보우 월드’에 큰 기대를 걸 수밖에 없었고, ‘디피스트 던전’에도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두 작가를 직접 만나려 했을 정도였다. 하지만 브이 작가에게는 거절당했고, 정작 흔쾌히 만남을 수락한 윌 존스 작가의 경우, 함께 이 업계를 이끌어갈 사람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솔직히 말해서 그 인간은 그냥 자기 자식을 너무 좋아해서 소설을 쓸 뿐, 자신이나 무언가의 대의를 위해서 소설을 쓰는 부류의 작가가 아니었지.’
그가 들고 있는 두 자루의 리볼버는 이름이 ‘아들’과 ‘딸’이었지, ‘레인보우 월드’가 아닌 것이다.
그 사실에 실망하며 로난을 쓰러뜨릴 또 다른 작가를 기다려 왔던 루퍼트 하워드.
그리고 그의 앞에 ‘Princess quest’가 나타났다.
석양을 쫓듯 이 혼잡한 서부에 나타난 젊은 카우보이는 클레어와 제이나라는 이름의 리볼버를 각각 꺼내 들고, 그걸 쏘았다. 그리고 루퍼트가 들고 있던 로난이라는 이름의 리볼버가 순간적으로 튕겨져 나가 땅에 툭 하고 떨어졌다.
루퍼트는 미소를 지었다.
드디어 이 배지를 넘겨줄 사내가 나타났다.
자신은 드디어 로난을 묻고 새 리볼버와 이 업계로 돌아올 수 있게 되었다.
······라고 생각했으나 안타깝게도 ‘Princess quest’는 이번 호로 완결이 나게 되었다.
그래도 괜찮았다. 그의 작품이 자아낸 과정과 결말은 하나같이 무척이나 훌륭했고, 순위에 가파른 상승 곡선을 그리며 혜성처럼 1위까지 쟁취했으니까. 이 결과가 결코 우연이 아니라는 증거였다. 게다가 전작의 유명세도 그 사실을 뒷받침해 주었다.
신 작가는 신문 연재를 지나, ‘Princess quest’로 본격적으로 ‘업계’에 들어왔다. 이제 차기작으로 자신과 함께 오래도록 건즈 앤 소드 매거진을 지탱해, 이 업계를 지금보다 더 높은 곳으로 이끌어 주리라.
그러한 ‘동료’가 하나 생긴 것만으로도 기뻤다.
16화를 모두 다 읽은 루퍼트는 가볍게 기지개를 펴며 새 담배를 입에 물었다. 그러고는 문득 편집부에서도 이런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가 궁금해졌다.
‘내가 신경 써도 될 일인가? 아닌가? 에라, 모르겠다.’
미국의 기질에 어울리는 두터운 근육질의 몸을 만들어낸 남자답게 일단은 움직이고 보는 행동파였다. 그는 곧바로 편집장 직통 번호로 전화를 걸었다. 건즈 앤 소드 매거진 연재작 작가 중에서도 일부만 아는 번호였다.
[네, 전화 받았습니다.]“아서? 접니다. 루퍼트.”
[아, 작가님! 잘 지내셨어요? 하하, 바쁘신 분이 어인 일로 전화를 주셨나요.]그의 목소리를 듣자 아서의 태도가 순간 부드러워졌다. 루퍼트는 자신이 이곳 건즈 앤 소드 매거진에 가진 영향력을 확인하고 내심 만족스러워졌다.
“이번에 ‘Princess quest’가 완결이 났잖습니까?”
[예, 그렇죠. 좋은 이야기였습니다.]“그거, 작가 의도가 맞죠?”
[물론이죠. 계약할 때도 그랬고, 16화 분량으로 마무리 짓겠다고 누누이 말씀하셨죠.]“그럼 다행이군요. 하하, 뚝심 있네요. 이제 신작 들어가면 추가 계약해야겠군요. ······으음, 작가로서 괜히 참견하는 것 같아 말하기 좀 그렇지만, 저는 신 작가가 이 건즈 앤 소드 매거진에 굉장히 필요한 인재라고 생각합니다. 최대한 챙겨주는 편이 좋지 않을까 싶어서 말이죠. ‘느와르’에 빼앗기지 않도록.”
[음, 그게요. 작가님.]“······설마 그쪽으로 넘어갔다거나 한 건 아니죠?”
[물론 아닙니다. 다만 신 작가님의 개인 사정으로 추가 계약은 진행하지 않았습니다.]“그게 무슨 말이죠? 일단 계약으로 묶어둬야 하지 않겠습니까?”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만, 작가님이 앞으로 1년 정도는 잡지 연재를 하지 않겠다고 선언하셔서요.]“무슨 사정이라도······?”
[3학년 때는 졸업에 집중하고 싶다고 하셨습니다.]“College?”
[Highschool.]“······잉?”
상상도 못 한 신의 정체에 루퍼트의 눈이 휘둥그레 뜨였다.
***
1위를 먹은 시점에서 작품을 끝내는 것은, ‘건즈 앤 소드 매거진’이라는 잡지를 생각하면 딱히 좋은 행동이 아니기는 했다.
카우보이 둘이 결투를 벌여 이겼는데, 승자가 보안관 자격이 주어지는 배지를 가지지 않고 그대로 황야로 떠나는 셈이었으니까.
사실 운이 좋아서 이긴 걸 수도 있고, 계속 연재가 이루어지면 또 모르는 일이다. 하지만 어찌 되었든 나는 ‘Princess quest’가 1등을 찍은 상태에서 미련 없이 내려놓고 황야로 말을 몰았다.
다그닥, 다그닥.
어떻게 보면 나의 이러한 행동은 ‘작가주의’적 행동에 가까웠다.
순문학과 달리, 장르는 ‘시장’에 보다 더 큰 비중을 두었다. 그렇기에 장르 작가는 작가로서 작품에 대해 고민하는 동시에, 시장의 흐름을 읽고 행동해야 했다.
만약 내가 ‘시장주의’적 행동을 했다면, 1위의 자리를 거머쥔 이후로 계속 연재를 이어 나가다가 인기가 떨어지려는 조짐이 보일 때쯤에 완결을 냈을 테지.
그래, 그런 생각을 당연히 하고는 있다.
건즈 앤 소드 매거진에 대해서나, 시장에 대해서나, 앞으로의 목표 등등.
요즘 들어 나는 나 자신을 담아낸 글을 쓰면서, 막연히 이 업계의 흐름을 선도하는 인물이 되고 싶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가령, 느와르 퍼블리싱의 약진과 그로 인해 무너져 가는 각종 군소 세력의 몰락을 지켜보면서 안타까워했던 내 어린 시절을 한번 바꿔보고 싶다거나.
하지만 아직은 그럴 때가 아니었다.
이유는 간단했다.
‘글만 쓸 수는 없으니까.’
어느덧 9월이 지나며 나는 3학년이 되었다.
3학년은 바쁜 시즌이었다. 장래를 준비하며 취업을 알아보거나 대학에 갈 준비를 했으며, 학교 내부적으로는 학생들 중에서 가장 오래된 자로서 각종 행사를 주관하고 참석해야 했다. 전생에는 그런 학교행사 같은 건 바깥에서 지켜만 보았던 나였지만, 이제는 그때와는 상황이 많이 달라졌다. 우등생으로서도, 친구들 때문이라도, 무언가를 하게 되겠지.
그렇기에 신작을 쓸 생각이 없지는 않았지만, 스케줄이 하드코어한 잡지 연재는 어렵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더군다나 내 ‘일’은 소설만 있는 게 아니었다.
크리스마스 시즌을 노리고 소년들의 돈을 강탈할 사악한 계획 아래 편집 중인 ‘Double spy’ 종이책의 확인부터 시작해서, 얼마 전에는 ‘Knight’s of the wisdom’ 사에서도 업무 관련 연락이 왔다.
그날 업무 확인을 마친 후, 전설적인 게임 시스템 개발자인 잭 댄포스는 유쾌하고 호탕하게 껄껄 웃으며 ‘Princess quest’의 결말을 극찬했다. 16화에 ‘음유시인 제이나’ 설정을 언급한 나의 센스에 감탄한 것이었다. 대화를 나누며 나는 확실히 그가 난 인물은 난 인물이구나, 하고 생각했다.
그는 내가 소설에 넣은 모든 의도를 정확하게 맞췄다.
나는 로드 두푸스, 스탠, 클레어, 마지막으로 제이나의 시점을 번갈아서 보여주면서 이 소설의 결말이 무작정 어둡지만은 않음을 시사했다.
로드 두푸스는 절망에 빠졌으면서도 그 신념에 따라 약해진 몸으로도 인간의 미래를 위해 묵묵히 자신에게 주어진 일을 해내간다.
두 공주와의 만남을 통해 감화되고 자신이 모르는 세계를 접하게 되면서 생각이 크게 변화한 스탠은, 교단으로 돌아가 두 사람의 이야기를 전하며 과거의 자신처럼 경직된 교단 자체를 바꾸려고 든다.
왕궁으로 돌아간 클레어는 환영식을 준비한 아버지의 앞에서 공주의 신분을 포기하겠다고 선언하고 다시 성을 나온다. 왕은 클레어를 막아섰지만, 그녀의 결심은 흔들리지 않았다. 그녀는 제이나가 살아있으리라 믿고 다시 그 세계로 가서 구해내기로 마음먹는다.
별을 보며 희망을 놓지 않고, 동료들과 함께했던 즐거운 순간을 떠올리며 달밤의 숲길을 홀로 나아가는 클레어.
혼자가 된 그녀의 뺨으로 눈물이 흘러내렸다. 하지만 꿋꿋하게 닦아냈다.
그리고 한편, 다른 세계.
어딘지 모를 공간에서 눈을 뜬 제이나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 결말을 본 줄리아는 이렇게 평가했다.
[끝났지만, 끝나지 않았군요.]나도 그렇게 생각했다.
클레어와 제이나, 그리고 로드 두푸스와 스탠의 이야기는 앞으로 ‘Knight’s of the wisdom’ 사에서 발매할 ‘KOG’의 추가 규칙서, ‘Other worlds’에서 계속될 예정이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그쪽에서 각 플레이어가 원하는 결말을 맞이하게 된다고 해야 할까.
클레어와 제이나는 다시 만날 수 있을까?
‘심연’에 갇혀버린 제이나는 어떤 존재가 되었을까?
제이나를 잃은 로드 두푸스는 르네르 왕국이나 이름조차 없는 클레어의 소왕국에 복수할까?
스탠은 경직된 이 신분제 사회에서 교단의 일원으로 무엇을 할 수 있을까?
‘그 모든 선택을 연말에 발매될 ‘Other worlds’에서 즐기실 수 있습니다요.’
소설로서도, TRPG의 리플레이로서도 모두 만족할 수 있는 훌륭한 결말이었다.
그렇게 생각에 빠진 채 힐끗 시계를 확인했다.
‘밤 10시인가.’
잠깐 상념에 빠져 있었더니 훌쩍 30분이 지나갔다. 나는 한숨을 내쉬며 다시금 펜을 집어 들었다.
내일 아침에 낼 역사 숙제가 아직 끝나지 않았다.
미국 건국의 아버지들 중 하나를 선정해서 그 일생을 담은 요약하고 감상을 제출하라는 과제. 미래 같았으면 그냥 적당히 인터넷을 써서 검색하는 것만으로도 원하는 결과를 얻을 수가 있겠지만, 지금은 1982년이었다. 영혼의 파트너인 하드보일드 나인 싸우전드도 옆에 치워둔 채 나는 두꺼운 역사책을 이리저리 넘기면서 리포트를 작성해 나갔다.
사실, 그 미묘한 괴리감만 빼면 그렇게 어렵지는 않았다.
‘글이야 매번 쓰는 거니까.’
귀찮은 것만 빼면 오히려 좀 더 쉽기도 했다. 상상이 필요한 소설과는 달리, 리포트는 기술의 나열에 가까웠으니까.
나는 역사 과목을 맡은 미세스 그린이 극렬 민주당 지지자임을 떠올리고, 그 입맛에 맞춰 글을 써나갔다.
후후, 미세스 그린. 당신은 이 글을 보고 크게 감동하리라.
그러던 와중, 멀리서 소리가 들려왔다.
뚜르르르- 뚜르르르-.
“음?”
늦은 시간에 걸려온 전화.
시간을 확인해보니 다시 30분이 흘러 10시 반이었다.
‘이 늦은 시간에 누구지?’
어머니는 벌써 주무시고도 남을 시간이었다. 고개를 갸웃거리면서 나는 문을 열고 잰걸음으로 1층으로 내려갔다.
불이 꺼진 복도를 지나 현관문 근처에 둔 전화를 집어 들자,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여, 여여여, 여보세요?]“······알렉사?”
[시, 신! 받았구나아-! 다행이다!]“레더페이스한테 붙잡혔어?”
[갸악-! 그런 거 말하지 말라고!]“뭐야, 무슨 일인데?”
[지, 집인데. 그, 진짜 미안한데. 지금 우리 집에 아무도 없거든?]“어, 그래서?”
[잠깐, 와줄 수 있을까?]“······잉?”
나는 갑작스러운 요청에 할 말을 잃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