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ecame an American Retro Novelist RAW novel - Chapter (126)
126.
좋은 로맨스 소설이란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줄리아 챈들러는 적절한 ‘의외성’이 중요하다고 여겼다. 그리고 그것을 잘 드러내기 위해서는 직전까지의 빌드 업과 그것을 활용하는 방식이 무엇보다 중요했다.
인물의 심리를 적절하게 쌓아 올리다가 독자들의 예상보다 한 박자 빠르게, 혹은 꼬아서 반 박자 늦게 터뜨린다.
그것은 일반적인 소설에도 중요한 기술이었으나, 좋은 로맨스 소설에는 필수적이었다.
줄리아는 그것이 로맨스 소설이 가지는 장르적 특징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로맨스는 결국, 등장인물 간의 ‘감정적 교류’를 다루는 작품이었다.
추리 소설이 사건의 발생과 해결을 치밀하게 풀어가는 것으로 독자를 만족시켜야 하듯이, 로맨스 소설은 등장인물 간의 감정적인 교류로 납득할 수 있는 결론을 보여 주면서 독자를 만족시켜야 했다.
그리고 어떤 의미에서 추리보다 로맨스가 쓰기 어려운 이유는, 감정에는 정답이 없기 때문이었다.
수만 명의 독자가 같은 글을 읽더라도, 제각각 다른 결론을 내릴 수 있다.
그렇기에 독자가 생각하는 결론을 최대한 작가의 의도에 걸맞게 수렴시키기 위해서는, 상황을 보편적인 정서로 끌어들이는 것이 중요했다.
‘의외성’의 기술을 추구하는 것은, 바로 그것을 위한 안배였다.
누군가를 사랑할 때, 속이 배배 꼬이고 천당과 지옥을 오가는 듯한 그 경험을, 소설에서도 똑같이 느끼도록 하는 것이다.
‘물론, 극단적인 예시기는 하지.’
좋은 소설은 둘 모두를 적절하게 쓸 줄 알았다.
사건도 흥미롭게 풀고, 그 사건 안에서의 감정적인 교류 역시 놓치지 않는다.
요는, 어느 부분을 더 중시하느냐였다.
그리고 줄리아가 생각하기에 ‘About T’ 시리즈는, 1부와 2부가 노리는 포인트가 달랐다.
1부에서는 주로 사건의 전개를 통해 빌드를 쌓아 올렸다면, 2부에서 로맨스적 무드를 한껏 드러내면서 감정적인 부분을 크게 건드렸다.
토니는 2부 내내 앨리스를 아끼고 신경 쓰는 모습을 보여 주었다. 분명 사랑에 빠진 소년의 모습이었다. 하지만 그것을 앨리스의 시점에서 묘사하며 뭔가 좀 모호하게 느끼게 만들었다.
그러다 토니가 참지 못하고 ‘너에게 멋진 모습을 보이고 싶었다.’라는 말을 갑작스럽게 건네면서, 거기에서 비롯된 ‘의외성’이 독자들의 허를 찔렀다.
결국 그동안의 빌드업에 독자들은 열광했고, 토니의 고백이 실린 11화가 연재된 이후로 로스앤젤레스 타임스에는 팬레터가 미친 듯이 쏟아져 들어왔다.
그 후 12화와 13화에서는 원래대로의 방식으로 홈커밍 데이의 마지막 준비와 주최를 묘사하며 폭풍전야와 같은 긴장감을 느끼게 했고, 미식축구 경기를 진행하는 14화에서 다시 토니의 시점으로 돌아가 그가 어떤 식으로 앨리스를 생각하고 있는지를 보여 주었다.
경기 초반, 토니는 좋은 플레이를 하지 못했다.
미식축구 클럽 내에서 A팀과 B팀으로 나뉘어 치르는 경기. 하필 팀의 주전 라인맨과 리시버, 러닝백은 다 토니의 상대 팀으로 가버렸다. 그런 상황에서 주전 쿼터백인 토니가 정신을 차리지 못하자, 그의 팀은 속수무책으로 밀렸다.
그 답답한 상황에 토니는 점점 위축되었고, 시야가 좁아져 패착만을 거듭한다.
앨리스의 앞에서는 별거 아닌 듯이 말하기는 했지만, 토니는 아직 작년의 기억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집으로 돌아가는 차 안에서 아버지가 자신을 비난하던 순간이 다시금 떠올랐다.
바로 그때, 불현듯 누군가의 목소리가 토니의 귀에 또렷하게 들려왔다.
『“힘내! 토니!!”
관중들의 환호와 응원, 선수들의 고함과 기합으로 가득한 실외 경기장.
라인이 뚫리고 수비 선수들이 자신을 향해 달려드는 영점 몇 초의 시간.
이상하게도 그 목소리가 또렷이 들려왔다.
눈동자가 옆으로 굴러갔다.
헬맷으로 가려진 시야 안에서도 정확하게 발견했다.
관중 사이에서 자신을 똑바로 바라보고 응원해 주는 유일한 사람을.
시계가 다시 넓어졌다.
필드의 상황이 한눈에 훤히 들어왔다.
상대 수비 사이의 빈 공간으로 질주하는 리시버.
토니는 공을 던졌다.
타원형의 공이 포물선을 그리며 날아가 리시버의 품 안으로 빨려 들어갔다.
터치다운.』
급박한 순간 속에서 극적으로 흘러가는 상황을 묘사하기 위해 툭툭 끊듯이 친 묘사.
토니의 팀은 짜릿한 역전승을 거뒀고, 그는 팀원들과 승리를 자축하고는 곧바로 관중 사이에 서서 박수를 보내고 있던 앨리스에게 달려간다. 그리고 남들이 뭐라 하건 아랑곳하지 않고 고맙다고 이야기한다. 앨리스는 당황해하지만, 이내 축하한다고 말하며 환하게 웃었다.
“진짜 청춘 그 자체란 말이지.”
14화의 마지막 부분을 읽으며 줄리아는 미소를 지었다.
3부작으로 끝나는 게 아쉽다 싶을 정도로 멋진 소설이었다.
***
1984년 5월 4일.
대망의 ‘About T : homecoming’ 15화가 연재되었다.
아침 일찍 일어난 케이트 무어는 두근거리는 마음과 약간의 아쉬움을 함께 느끼며 로스앤젤레스 타임스를 읽기 시작했다.
아침으로 어머니가 차려준 빵과 샐러드를 먹으면서 읽는 소설의 마지막 화는······ 도저히 그녀가 이 이야기에 집중할 수 없도록 만들었다.
‘Shin이 SEEN이었다고?’
여전히 머릿속에 그런 의문이 가득한 채였다.
그래서인지 처음 읽기 시작할 때는 소설에 잘 집중이 되지 않았다. 하지만 이어지는 내용은 또 정말 좋아서, 몇 줄 읽다 보니 예전처럼 자연스럽게 빠져들었다. 14화 때도 똑같이 그랬었다.
1부 때와 마찬가지로 에필로그 같은 형식으로 전개되는 15화는, 홈커밍 데이가 끝나고 앨리스의 삶이 어떻게 변화했는지를 보여 주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앨리스는 학교 내에서 일약 유명인사가 되었다.
학생회의 한나 앤더슨과 클럽 밴드의 문제아 메이 조를 비롯해서, 교내 온갖 계층의 수많은 사람들이 그녀를 좋게 보았고, 얼마 남지 않은 3학년의 시기 동안 더욱 가까워지고 싶어 했다.
항상 조용하게 지내왔던 앨리스로서는 어디를 가도 자신을 알아보고 말을 건네는 이들이 많은 상황이 기분 좋으면서도, 내심 부담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끝나고 같이 공부하자는 한나. 끝나고 같이 밴드 공연을 들으러 가자는 메이. 결국 그 두 사람의 제안을 차마 거절할 수 없어 하나하나 승낙하고 약속을 잡았다.
그 장면을 읽으면서 케이트는 강한 대리만족을 느꼈다.
하지만 직후, 이 소설을 쓴 사람이 신이라는 생각을 떠올라 마음에 다시 동요가 일어났다.
‘그러니까, 이렇게 재미있는 소설을 그 음침한 범생이가 썼다고?’
사람의 마음을 이토록 뒤흔드는 멋진 글을?
차마 그 혼란스러운 감정을 표정이나 말로 표현할 수 없었던 케이트는 신문을 내려놓고 여느 때처럼 양손을 써서 안경을 스윽- 밀어 올렸다.
이성으로 자신을 추스른 그녀는 다시 소설의 마지막 부분을 차근차근 읽어 나갔다.
『토니는 앨리스의 푸념을 듣고는 황당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너 바보야?”
“윽······.”
“그냥 거절하면 되잖아!”
“미, 미안.”
“아, 아니. 나야말로 언성 높여서 미안.”
순간 떠오르는 감정대로 말을 내뱉었던 토니는 어깨를 움츠리며 사과하는 앨리스를 보고 정신을 차렸다. 자신이 왜 그랬을까. 소년은 친구와 약속이 많이 생긴 소녀를 보면서 ‘질투’라는 감정을 느꼈으나, 그것을 제대로 자각하지 못한 상태에서 말을 이어갔다.
“시간은 한정되어 있어. 네가 원하는 걸 위해 태클을 걸어도 모자랄 판에, 문제만 계속 늘어나고 있잖아. 그렇게 계속 약속을 늘리면 결국은 꼬이고 말걸? 너 그런 스케줄 감당하면서 나랑 같이 계속 놀 수 있어? ······우리 이번 주에도 미술관 가잖아.”』
Time, Tackle, Trouble, Twist, Together, This week.
1부 때와 유사하게, ‘T’로 이루어진 단어로 운율을 이루며 한탄 섞인 핀잔을 주는 토니.
그 앞에서 앨리스는 수줍은 미소를 지으며 말한다.
『“네가 그렇게 말하지 않아도, 내가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T’는 따로 있으니까.”』
그 대사를 읽은 케이트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앨리스가 말하는 ‘T’는 토니가 처음에 말한 ‘Time’일까? 역시 ‘Tony’겠지?’
부디 자신의 추측이 맞기를 간절히 바랐다.
‘······흐아아악-!!’
잠시 동안 엔딩의 여운에 젖어 있다가, 글자의 수용을 마친 뇌가 다시금 작가의 정체를 떠올렸고, 케이트는 마음속으로 큰 비명을 내질렀다.
하지만 그 복잡한 머릿속과는 달리 양 손바닥을 펼쳐 침착하게 안경을 밀어 올릴 뿐이었다.
같은 학년 안에서 유일한, 자신보다 공부를 더 잘하는 소년.
그에게 뒤지지 않기 위해 케이트는 부단히 노력했다. 결국 1학년 말미에 공부로는 도저히 이길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방송반 같은 대외 활동을 통해 어떻게든 차별점을 만들고자 했으며, 졸업을 앞두고 그것은 성공적으로 이루어진 듯했다.
그런데, 공부만 잘하는 줄 알았던 신이, 사실은 1학년 때부터 이런 멋진 소설을 쓰던 소설가였다고?
‘이건 사기야!’
심지어 그 장본인은 그것을 별로 대수롭게 여기지 않는 것 같이 구는 것이 너무나도 얄미웠다. 거기다 더 화가 나는 부분은, 정체를 들켜 당황할 법도 한데 정말로 아무렇지도 않아 한다는 점이었다.
‘응, 맞는데?’ ‘그래서 네가 뭘 할 수 있는데?’ 그런 식의 말을 들은 케이트는 묘한 패배감과 더불어, 알 수 없는 경쟁심을 함께 느꼈다. 신이 당황해하는 꼴을 보지 않으면, 이대로는 억울해서 밥도 잘 넘어가지 않고 잠까지 설칠 듯했다.
이 소설을 마지막까지 정말 즐겁게 봤기 때문에 더더욱.
‘그래, 도저히 안 되겠어.’
감동과 울분에 복받쳐 혼란스러운 상태로 엉망진창인 판단을 내렸다는 것조차 깨닫지 못한 채, 케이트는 다시 신과 대화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
나는 내 앞을 떡하니 가로막고 있는 케이트 무어를 바라보며 슬쩍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 그걸로 끝나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지.’
수업이 다 끝나고 학교를 빠져나가던 길.
입시 서류도 다 제출했고, ‘About T : homecoming’도 연재가 끝났지만, 찾고 있는 누군가도 잘 보이지 않아 하루 정도는 마음이라도 정리할 겸 일찍 돌아가 쉴까 했더니 또 일이 생겼다.
잔뜩 성이 난 표정으로 서 있던 케이트 무어가 먼저 입을 열었다.
“뭐, 뭐야. 왜 사람을 보자마자 한숨이니?”
“네가 내 비밀을 가지고 협박하는 미래가 보여서.”
“사, 사사사, 사람을 대체 뭐라고 생각하는 거야!”
“그래서, 무슨 일인데?”
“어······.”
“협박하려고 온 거 맞지?”
“협박은 아니야! 그, 그냥! 나는 알고 있다고! 네가 작가인 거!”
“그래서? 네가 뭘 어쩔 수 있지? 이제 여기에서 ‘사람들한테 말할 거야!’라고 말하면 협박이잖아.”
“어, 어어······!”
순간 당황해 말문이 막히는 케이트.
진짜 애다, 애.
“그럼 안녕.”
“잠깐!”
“또 뭔데.”
“하, 할 말이 있다고.”
“응, 해.”
“소, 소······.”
“소?”
“소설 재밌었다고! 이 멍청아!”
“재밌으면 재밌는 거지 무슨 욕까지 곁들이냐?”
“이이익······.”
차분한 지적에 이를 아득바득 가는 케이트.
“아무튼 고마워. 할 말 다 끝났으면 나 간다.”
“너, 너!”
“응?”
“사인······ 대, 대학은 어디 갈 거야?!”
“고민 중이야. 정해지면 말해 줄게. 사인도 그때.”
“그, 그래! 알겠어! 나중에 봐!”
“잘 가.”
나는 짧게 대답하고 돌아섰다.
묵은 감정을 흘려보내고 난 뒤임에도, 적당히 마무리될 줄 알았던 케이트와의 관계가 묘한 이유 때문에 계속 이어지는 것에 약간은 당혹스러움을 느꼈다.
‘하필 쟤가 가장 먼저 알게 되다니. 천하의 케이트도 소설을 다 읽었군.’
그로 인한 감정을 딱히 겉으로 드러내진 않았지만, 속으로는 일이 대체 왜 이렇게 되었나 싶어 내심 혼란스러웠다.
‘뭐, 졸업하면 적당히 떨어져 나가겠지.’
그렇게 생각하며 몇 걸음 걸어갔을 때, 복도 끄트머리에서 고개만 빼꼼 내밀고 서 있던 누군가와 눈이 마주쳤다.
“······.”
“······.”
알렉사 플레어였다.
잠깐 시선이 교차한 직후, 그녀의 머리가 마치 두더지 게임처럼 쏙하고 사라졌다. 나는 그녀를 쫓아 후다닥 모퉁이를 돌았지만, 이미 학생들 사이로 파고들고 있었다.
그 뒷모습을 잠시 동안 멍하니 지켜봤고, 바라지 않는 오해가 깊어질 수도 있겠다는 생각에 긴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
그래, 최근 녀석은 명백하게 나를 피하고 있다.
휴대폰도 보급되지 않아서, 한쪽에서 그러기 시작하면 정말 만나기 어려운 시대였다.
아무튼 그 이유가 뭔지는 대충 짐작이 가서, 이 상황이 더욱 답답하게 느껴졌다.
“이쪽도 준비가 필요한데 말이지······.”
그럼에도 오해를 산 채로 놔두고 싶지는 않았다.
나는 내가 알고 있는 알렉사라면 어디로 갔을지 생각하며 뛰기 시작했다.
***
알렉사 플레어는 머릿속에 떠오르는 온갖 상념을 정리하지 못한 채 교정을 휘적휘적 거닐었다.
‘뭐야? 도대체 무슨 상황이야?’
수업이 끝나고 은퇴를 앞둔 팀의 캡틴으로서 후배들 연습을 봐주러 가던 도중, 그녀는 불현듯 심장이 저리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복도에 서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던 신과 케이트 무어를 발견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뭔가 죄라도 지은 사람처럼 복도 모퉁이 너머에 숨어서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알렉사는 신을 잘 알았다. 그렇기에 그가 케이트 앞에서 얼마나 ‘편한 모습’으로 행동하는지 어렵지 않게 알아차릴 수 있었다.
그리고 방송반 리더인 케이트에 대해서도 모르지는 않았고, 그녀 역시 마찬가지로 신을 허물없이 대한다는 것을 한 박자 늦게 깨달았다.
가볍게 틱틱대면서 절대 밀리지 않는 신과, 그 앞에서 절절매다가 화내기를 반복하는 케이트.
그래, 두 사람은 서로를 편하게 대하고 있다. 모르는 곳에서 어떤 인연이 있던 모양이다.
그리고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건지를 상상하자 가슴이 욱신거리기 시작했다.
학교에서 제일가는 두 모범생.
무척 어울리는 그림이었다.
‘대학 어디 가냐고? 아, 둘 다 대학교에 진학한댔지? 같은 데 가나?’
멍하니 그렇게 생각하고 있던 찰나, 이야기를 마치고 뒤돌아선 신과 눈이 마주쳤다.
그리고 알렉사는 허용량을 초과시키는 상황 앞에서 그대로 도망칠 수밖에 없었다.
‘아, 아아아. 그렇, 그렇지? 세상일이란 게 뭐든 내 뜻대로 될 수는 없는 거지?’
아직 어린 나이였지만, 알렉사는 냉혹한 세상의 진리를 인지하게 되었다.
문제는, 인지와 수용의 간극으로부터 왔다.
건물을 빠져나가고 얼마나 뛰었을까.
이대로는 체육관에서 기다리고 있을 후배들을 만나러 갈 수 없다.
알렉사는 멍한 눈으로 주변을 살피고는 차마 떨어지지 않는 발을 돌려 체육관으로 향했다. 그리고 후들거리는 걸음걸이로 걸어가다가 ‘히잉.’ 하고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자리에 쪼그려 앉았다.
누군가를 좋아했기에 받아들여야 하는, 어떤 상실감에 힘이 쭈욱 빠졌다.
‘당장은······ 치어리더 클럽 일이 있으니까.’
그녀는 그 눅눅한 감정을 잠깐이라도 마음 어딘가에 치워 두자고 생각하며 가볍게 뺨을 두드렸다.
아주 빠르지는 않았지만 어떻게든 서서히 전환이 이루어졌다.
“쪼아아······.”
다시 원래의 알렉사 플레어로 돌아가자.
그렇게 겨우 마음을 다잡은 순간이었다.
“후우, 알렉사.”
“갸악-!!”
갑작스레 뒤에서 들려온 익숙한 목소리에 알렉사는 비명을 내지르며 후다닥 뒤를 돌아보았다.
무릎을 짚은 채로 숨을 고르고 있는 신과 같은 높이에서 눈이 마주쳤다.
“후우, 뭘 그렇게 도망가고 그래?”
“어, 어어, 어. 안녕?”
“하아······. 아까 나 봤으면서 왜 그냥 갔어.”
“글쎄, 그랬나? 왜일까? 그럼 갈게!”
신이 돌아서려던 알렉사의 손목을 덥석 붙잡았다.
“최근에 계속 나 피하고 있잖아.”
“············.”
알렉사는 마치 그곳만 뜨겁게 타오르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팔목에서 시작된 열기는 팔을 타고 올라와 어깨, 목을 거쳐 얼굴에 도달했고, 양 빰이 붉게 물들었다.
당연히 그 반응이 무엇 때문인지 모르지 않았던 터라, 신은 다시금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뭐, 됐고.”
“······.”
“나 할 말 있음.”
“으, 응.”
“너한테 프롬포즈(Prompose) 할 거야.”
“······앙?”
“원래 하기 전까지 비밀로 하려고 했는데······ 젠장, 지금처럼 웃기지도 않는 뻔한 오해는 받고 싶지 않다고.”
“앙?”
“왜 자꾸 앙앙거려?”
제대로 반응하지 못하고 망가진(?) 그녀 앞에서 고개를 갸웃거리는 신.
하지만 과도한 데이터 입력으로 과부하가 걸리고 만 알렉사의 뇌는, 명령을 기다리고 있는 몸에게 생존을 위한 가장 단순한 행동을 지시내릴 수밖에 없었다.
얼굴을 붉힌 채, 아무 말도 않고 손을 쏙 당긴 다음 도망치는 알렉사.
도주였다.
“······오늘만 저걸 몇 번째 보는 건지 모르겠네.”
보일 만하면 사라지고, 잡힐 만하면 도망가고.
바쁜 흰 토끼처럼 뛰어가는 알렉사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신은 생각했다.
‘이거 무슨 ‘About T’냐?’
어느 봄날의 일이었다.
[ 『About T : Homecoming』 (5) > 끝(1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