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ecame an American Retro Novelist RAW novel - Chapter (127)
127.
알렉사가 도망친 뒤, 나는 혼자서 쓸쓸히 가게에 앉아 생각에 잠겼다.
‘내가 마지막으로 여자를 만난 게 언제였더라.’
대충 30대 후반이었을 때로 기억한다.
어머니가 돌아가시기 전에 아들이 결혼하는 모습이 보고 싶다며 소개해 준, 한인 교회를 다니는 30대 초반의 여성.
사실 서로 나이가 있었던 터라 당연히 둘 다 첫눈에 반하거나 하진 않았다. 그 대신 우리는 주말마다 만나 대화를 나누면서 상대방에 대해서 조금씩 알고자 노력했다.
그리고 그 과정 속에서 서서히 깨달았다.
나는 누군가를 사랑하기에는 너무도 늙어 버렸다고.
언제나 불현듯 닥쳐오며 나를 짓눌렀던 현실의 벽. 고슴도치처럼 가시를 세우며 버텨온 지난 세월의 무상함. 그런 식으로 어렴풋이 표현할 수 있는 수많은 시간의 흔적들이 나를 마모시키고 내 안의 감정을 앗아갔다.
사랑이라는 순수하고 뜨거운 불씨를, 도저히 피워 올릴 수가 없었다.
상대 역시 그것을 깨달았으나, 그래도 서로 호감 정도는 있다고 생각하니 결혼해서 안정적인 가정을 꾸려보는 것이 어떻겠냐고 제안했다.
그 말을 들은 순간, 나는 자연스레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참 현명하고 올바른 사람이구나.
이 사람이라면 함께 삶을 살아가는 파트너로서 제격이겠구나.
하지만 나는 결국, 거절하고 말았다.
이유는 간단했다.
‘타인의 감정을, 수단으로써 소모하고 싶지는 않으니까.’
상대 여성은 무척이나 좋은 사람이었고, 우리의 결혼은 노후 대비와 외로움의 해소라는 측면에서는 최고의 해답일 터였다.
하지만 나는 아마 평생 현실과 타협했다는 생각을 가지며 결혼 생활을 이어 나가겠지.
그리고 그 감정을 컨트롤하지 못하고 상대에게 삐뚜름한 미소를 보내는 순간이 필연적으로 찾아오겠지.
그때 나는 무슨 죄악감을 느낄까. 그것을 본 상대는 어떤 비참함을 느낄까.
그 예정된 순간을 견뎌낼 수 있으리라는 생각이 도저히 들지 않아, 그렇게 작별을 고했다.
그 후 차라리 메마른 감정을 홀로 견뎌내며 살아가자고 마음먹었다.
그리고 한 번의 삶을 돌아온 이후로도, 그 사실은 딱히 바뀌지 않을 줄 알았다.
아무리 어려졌어도 ‘나’라는 존재는 그대로였으니까. 삶의 풍파를 겪고 지쳐, 누군가와 감정을 섞고 감정적으로 하나가 되는 과정을 무의미하고 불편하게 느끼는 남자였으니까.
하지만 어느 순간, 메말랐던 땅에 누군가가 씨앗을 심었다.
바로 알렉사 플레어였다.
썩 좋다고만은 할 수 없는 첫 만남.
그 이후로 함께 지내면서 딱히 그녀가 나와 잘 맞는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우리는 너무나도 달랐다.
내가 실내에서 책을 읽는 것을 좋아하면, 알렉사는 뛰어노는 것을 좋아했다.
내가 코믹북 스토어를 좋아하면 알렉사는 롤러스케이트를 좋아했다.
나는 모범생에 너드였고, 알렉사는 치어리더 캡틴이자 미식축구 클럽의 쿼터백보다 더 유명한 학교의 우상이었다.
그럼에도, 우리는 계속 어울렸다.
‘왜일까.’
일단은 서로가 서로를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보아서였기 때문이리라.
아니, 그것은 알렉사뿐만 아니라 두피와 지우도 그랬다. 우리는 서로 눈치 보지 않고 자기 할 말을 했으며, 가장 편하게 있는 모습 그대로를 인정했다.
그러니 거기까지였다면, 알렉사와는 단지 좋은 친구만으로 남았을 터였다.
하지만 어느 순간, 알렉사가 심은 씨앗이 피어나기 시작했다.
그 계기는, 딱히 없었다.
그냥······ 어느 순간부터 항상 내 소설을 재미있게 읽어 주고, 누구보다 큰 리액션을 해 주던 모습이 계속 머릿속에 맴돌았다.
무슨 일이 있어도 내 편을 들어 주고, 같이 집에 돌아가다 아이스크림도 사 먹고, 브이와도 함께 만나고, 코믹북 스토어도 함께 가고.
그러는 사이 내 마음에 다시 꽃이 피어났다.
마치 자연의 섭리처럼.
내 안이 그녀로 채워졌다. 그녀가 나를 다시 사람으로 만들어 주었다.
그 감정을 자각한 순간은, 치어리더 클럽의 일을 겪을 때였다.
평소에는 항상 밝게 웃는 그녀가 축 처진 모습을 본 순간, 무슨 수를 써서라도 그 문제를 해결해 주고 싶었다. 소설을 위해서라는 이유가 있기는 했지만, 그것이 아니라도 나는 최선을 다해 알렉사를 도왔을 터였다. 심지어 평소에는 쓰지 않던 작가로서의 권력(?)마저 활용했다.
알렉사가 기뻐서 방방 뛰는 모습을 보자 비소로 마음이 놓였다.
그리고 그제야 내 안에 자라난 감정을 인정할 수 있게 된 것이었다.
아마 이 감정이 나 혼자만의 일방적인 마음이었다면, 메마른 내면에 꽃이 다시 피었다는 기적 자체에 감사하면서 조용히 지냈겠지.
하지만······.
‘그렇게 티내는데, 대체 누가 모르겠어.’
가만히 있어도 사람이 좋아서 꼬리가 흔들리고 있는 골든 리트리버가, 특별히 더 좋다고 달려드는 느낌이라고 해야 할까.
그래서 알렉사가 프롬 이야기를 꺼냈을 때, 대충 그녀의 바람을 알아차렸다.
그리고 다시 고민이 이어졌다.
내가 알렉사에게 다가가는 게 맞나. 함께 프롬 파티에 가는 게 맞나.
하지만 그렇게 주저하는 마음이 있다고 해서, 그녀가 나 아닌 다른 사람과 프롬 파티에 가는 꼴은 보고 싶지도 않았다.
결국 그 결론에 이르러, 나의 인생을 또다시 바꿔 보기로 결심했다.
‘이후, 우리의 관계가 어떻게 되더라도.’
나는 알렉사의 파트너로서 프롬 파티에 갈 것이다.
‘뭐, 내가 프롬포즈를 하겠다고 말하자 도망쳤지만.’
그 모습을 떠올리자 나도 모르게 미소가 지어졌다.
귀엽다. 정말.
그 순수한 애정이. 터져 나오는 감정을 감추지 못해 혼란스러워하는 그 모습이.
그러나 마음 한 구석에서는 내가 그런 그녀에게 과연 어울리는 인물일까 걱정하고 있다는 것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산전수전 모두 다 겪었다고 말할 수는 없었지만, 외면과는 달리 나는 분명 나름대로 긴 삶을 산 아저씨였다. 알렉사가 어떻게 행동할지, 어떤 말을 했을 때 그게 어디서부터 오는지 모두 분석하고 사고했다. 거기다 그 내용을 각색해 소설에 쓰기도 했다.
알렉사는 이런 닳아빠진 나를 받아들여 줄까.
그야 당장은 받아 주겠지. 하지만 그것이 과연 옳은 일일까.
그것을 나만이 알고 있음에도, 나는 이 관계를 받아들일 수 있을까.
‘아니, 자학은 그만.’
나 자신을 부정하는 것도, 이제는 지쳤다. 전생에서부터 할 만큼 하지 않았나.
게다가 내 몸은 알렉사와 같은 나이다. 외부에서 봤을 때 전혀 문제가 없다는 말이다.
무엇보다 아무리 생각하고 생각해도, 이것 한 가지는 확실했다.
그녀가 나에게 있어 중요한 존재라는 것을 받아들인 순간부터, 어떤 독점욕 같은 것이 피어나고 있다는 것.
너무도 오랫동안 잊고 있던, 무척이나 뜨겁고 질척한 감정이었다.
나는 그것을 연료 삼아 다시금 다짐했다.
‘그 애가 다른 놈하고 프롬 파티에 가게 내버려 두지 않는다.’
그러니 반드시 제대로 해 주겠다.
프롬포즈.
‘······근데 어떻게 하는 거였지.’
아저씨는 그런 거 잘 기억 안 난다고.
***
······다행히 바로 다음 날부터 좋은 ‘예시’가 나오기 시작했다.
심지어 등교할 때부터 그랬다.
“제이미! 나하고 같이 프롬에 가자!”
“꺄아아악-!!”
“미쳤다아아아-!!”
한 남학생이 거대한 피자 박스를 대동하고 여학생의 앞에 나타났다. 주변에 모여 있던 학생들은 손으로 휘슬을 불고 완전 난리도 아니었다. 그리고 여학생은 당황했지만 싫지는 않은 눈치였다.
거의 한 조각에 피자 한 판 정도 크기는 되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거대한 피자 박스.
그것을 열자 안에서 ‘Prom?’이라고 적힌 카드가 나왔고, 주변에 모인 여학생들은 다시금 새된 비명을 내질렀다.
나는 그것을 보면서 생각했다.
‘확실히 이때는 사람들이 수치심을 몰랐군.’
아니, 저들만 그런가.
저기 당당하게 서 있는 말콤이라고 하는 친구는 스쿨 미식축구 선수로서 나 같은 인간과는 사는 세계가 완전히 달랐다. 운동부인 만큼 언제 어디서나 당당했고, 프롬포즈를 위해 같은 미식축구 팀 멤버들이 거대한 피자 박스를 들고 오는 것을 도와줬을 정도였다.
“받아 줘! 받아 줘! 제이미!”
“멋지다! 너희!!”
“올해의 첫 프롬 커플인가?!”
이제 졸업을 앞둔 3학년은 몇 배나 더 신이 난 모양이었다.
프롬은 학생들에게 그 정도로 특별한 의미를 가지고 있는 행사였다. 오히려 홈커밍 데이보다 더 크다고 해야 할까.
학생들은 어떤 규격에 맞춘 지역 행사로서의 의미가 강한 홈커밍 데이보다, 학생들만의 파티인 프롬 쪽을 더더욱 기대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그냥 신나게 놀면 그만이었으니까.
결국, 제이미가 말콤의 프롬포즈를 승낙했다.
[Waaaaaaaaaaaaaaaaggggghhhhh-!!]일대에 휘몰아치는 엄청난 환호.
‘무슨 프로레슬링 쇼의 반응 같군.’
그들 덕분에 모두가 기뻐하고 즐거워하고 있었다.
“자자! 아침 안 먹은 사람들은 와서 피자 좀 먹으라고! 오-! 신!”
“좋은 아침, 말콤.”
“너도 피자 먹고 가라! 히히.”
얼굴이 새빨개진 채로 순박하게 웃는 말콤.
그의 제안을 거절하지 않고 나는 누군가 나서서 솜씨 좋게 적당한 크기로 잘라 놓은 피자 한 조각을 집어 들었다.
학생들은 점점 모여들었고 교문 앞에서는 작은 피자 파티가 벌어졌다.
우물우물, 맛있군.
‘하나만 더 먹을까.’
식으면 맛없으니까.
그렇게 생각하며 손을 뻗는데, 사람들에게 피자를 권하던 말콤이 다시 내 옆으로 다가왔다.
“응? 왜?”
“야, 근데. 너는 어떻게 할 거냐?”
“······글쎄.”
“할 거지? 프롬포즈. 이 학교의 ‘여왕’에게.”
“언제 즉위했대?”
“벌써 세 명이나 차였다고.”
“그래?”
“응, 완전 칼같이 거절하던데. 피해자가 더 생기기 전에 어서 하라고.”
“허······.”
이거, 예정된 일정을 앞당길 수밖에 없을 듯했다.
머릿속이 복잡해지고 있던 와중, 검은 손이 초대형 피자 박스로 손을 뻗어 왔다. 이 학교에서 가장 참된 카우보이라고 할 수 있는 두피 킹스턴이었다.
“두피, 좋은 아침.”
“음.”
씹지도 않고 피자 한 조각을 흡입하는 두피.
“축하한다. 말콤. 멋진 프롬포즈였다.”
“고맙다! 두피! 자자, 사양하지 말고 마음껏 먹어!”
“그러면 거절하는 것도 실례이니.”
우물우물우물우물.
두피는 순식간에 피자의 대군을 죽여 나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남은 피자 조각이 많았고, 상황을 눈치챈 교사들이 학생들을 제지하기까지 피자 파티는 계속해서 이어졌다.
잠시 후 이놈 아저씨가 된 교사들이 달려 나오는 것을 보자마자 나는 두피와 함께 적당히 자리에서 빠졌다. 그리고 도중에 뭔가가 왠지 허전해서 두리번두리번 둘러보자니, 우리 멤버의 막내딸 지우가 두피 뒤에서 폴짝 뛰어 나왔다.
아빠 코알라와 새끼 코알라인가.
“안녕하세요!”
“안녕, 지우. 잘 잤어?”
“굿 모닝이다. 지우.”
“아침부터 소란스럽네요. 프롬 직전이라 그런가.”
“앞으로 더 시끄러워질 거다. 곳곳에서 프롬포즈가 이어질 테니까.”
“와아······.”
먼발치에서 혼나고 있는 말콤과 친구들을 흥미롭다는 듯 돌아보는 지우.
나는 두 사람을 슬쩍 학교 안으로 이끌었다.
“어라, 알렉사는 안 기다려도 돼요?”
“아마도. 오늘은 괜찮을 거야. 그보다, 프롬 한 번도 안 가 봤어?”
“네에, 하필 프롬 파티 할 때마다 이사를 다녀서. 아하하.”
“······.”
어색하게 웃는 지우의 등 뒤에서, 두피의 안경이 냉철한 의무감으로 싸늘하게 번쩍였다.
‘이걸로 하나의 프롬 커플이 더 탄생하겠군.’
그러자니 지금이 묻기 적당한 타이밍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두피.”
“음.”
“너는 프롬포즈 할 상대 있어?”
“글쎄. 남자의 비밀은 석양 너머에 묻어져 있지.”
“······프롬포즈는, 어떻게 하려고?”
“마찬가지다.”
“그러면 질문을 바꿔서.”
아무래도 지우가 옆에 있으니 곧이곧대로 대답하기 곤란할 수도 있겠다 싶어서, 나는 솔직한 궁금함을 담아 되물었다.
“보통 프롬포즈 어떻게 하지?”
“다양하지. 피자 박스가 일반적으로 자주 쓰이지만, 사람마다 중요하게 생각하는 상대와의 특별한 이야기가 있을 테니.”
“아.”
머릿속에 여러 가지 기억이 떠올랐다.
그래, 이 시절의 프롬포즈는 보통······ 상대와 자신에게 특별한 무언가에서 따오는 경우가 많았다. 프롬포즈를 신청할 정도면 서로에 대해 전혀 모르는 사이일 수가 없으니까.
‘물론 지금 알렉사가 겪는 것처럼, 무작정 들이대는 녀석들도 있기는 하지만.’
미식축구 선수와 치어리더 사이라면 조금 전처럼 미식축구 클럽원의 도움을 받기도 했고, 그 반대의 경우도 있었다.
너드들은 서로 좋아했던 책에 쪽지를 끼워서 줬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그쪽은 이런 식으로 화려하고 요란한 프롬포즈를 준비하지는 않는 터라 학교에서 보기는 힘들었다.
그 후로도, 교내에서 각양각색의 프롬포즈가 이어졌다.
연극 클럽 같은 경우에는 즉흥극을 하다가 갑자기 ‘그러니까 같이 프롬 가자!’ 말하고.
어떤 농구 클럽 남자애는 간이 골대를 들고 있으라 하더니 멋지게 골을 넣고서 골대 뒤편에 붙여 놓은 ‘Prom?’ 카드를 건넸다.
“으음.”
수많은 레퍼런스를 직관해서 그런지, 학교가 끝날 때쯤 머릿속에 대충 좋은 방법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역시 그것밖에는 없군.’
와, 근데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나만 할 수 있는 일이지만······ 동시에 굉장히 유치할 것 같았다.
하지만 그 유치함이야말로 틴에이저만이 누릴 수 있는 맛이지 않을까.
***
“아, 아아아, 알렉사!”
“······응?”
“나와 프롬에 함께 가 줘!”
“아, 미안. 싫어.”
알렉사 ‘더 블랙 맘바 모드’ 플레어의 말에, 또다시 한 소년이 사나이가 되기 위한 좌절을 겪었다.
하지만 그 모습을 보면서 알렉사는 더더욱 마음을 다잡았다.
원하는 바를 이루기 위해서는 누군가를 상처 입힐 줄도 알아야 하는 법. 신이 프롬포즈를 하겠다고 공언한 이상, 자신은 그 어떤 프롬포즈를 받더라도 거절해야 하는 입장이었다.
‘걔하고 가고 싶으니까!’
그날 이후 걱정은 수그러들고, 알렉사는 다시 에너지로 넘쳐났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신의 얼굴을 아무렇지도 않게 볼 수 있는 건 아니었다. 오늘도 신에게 말을 걸지 못한 자신이 한심해서 한숨만 푹푹 쉬었다.
늦은 저녁까지 이어진 치어리더 클럽의 연습이 끝났다.
그리고 돌아가는 길에도 프롬포즈를 받아서, 오늘 하루만 벌써 여섯 번째 거절을 단행해야 했다.
추욱 늘어진 채 상대를 찾아가지 못한 ‘Prom?’ 카드를 구깃구깃 접으며 돌아가는 남자애들을 바라보다가, 알렉사는 신의 약속을 떠올리고 단호한 표정으로 돌아섰다.
그러자 그녀 곁에 서 있던 세 명의 치어리더들이 능글맞은 목소리로 물었다.
“누굴까아~?”
“알렉사가 기다리는 프롬 파티 파트너는 누구일까아~?”
“동양인에 키 훤칠하고 귀엽게 생긴 그 남자애일까아~?”
“······.”
도발에 넘어가지 않고 침묵한 채 걸어 나가는 알렉사.
하지만 그 귀가 새빨갛게 물들었다. 오늘 하루 동안 제각각 프롬포즈를 승낙한 세 사람은 그 모습이 귀여워 킥킥 웃으면서 함께 교문으로 향했다.
그리고 그녀들은 오늘 오후까지만 해도 없었던 무언가가 교문 앞에 있는 것을 발견했다.
“아이스크림 트럭?”
“저게 왜 여기에 있지?”
아이스크림의 보관을 맡은 적재함 위로 거대한 아이스크림콘 판넬이 붙어 있는 트럭 앞에서 소녀들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평소 다운타운 곳곳을 돌며 수제 젤라또 아이스크림을 판매하는 명물 트럭이 교문 앞에서 장사 중이라니. 무슨 환상을 보는 건가 싶었지만, 그녀들처럼 늦게 나온 몇몇 학생이 아이스크림을 사 가는 것으로 보아 실재한다는 것이 여실히 증명되었다.
고된 클럽 활동으로 인해 평소보다 더욱 당분이 당기는 틴에이저 소녀들의 걸음은 자연스럽게 그 앞으로 향할 수밖에 없었다.
“초코.”
“바닐라.”
“딸기.”
메뉴판도 보지 않고 각자 취향에 따라 매끄럽게 하나씩 주문했고, 알렉사도 뒤이어 평소처럼 자신의 모스트 픽을 골랐다.
“민트초코.”
“OK, 접수.”
알렉사에게는 무척 얼굴이 익숙한 사장이, 수제 젤라또 아이스크림을 하나씩 가득 퍼서 콘에 담아 주었다. 그렇게 초코, 바닐라, 딸기가 순서대로 나왔고, 세 소녀는 꺅꺅 소리를 내며 허겁지겁 먹기 시작했다.
그리고 사장은 기대감에 들뜬 알렉사의 얼굴을 슬쩍 보더니 곤란한 듯 이야기했다.
“아가씨. 미안한데, 민트초코는 다 팔렸어.”
“아, 그래요? 그럼······.”
알렉사가 다른 메뉴를 고르려던 순간이었다.
트럭 뒤에서 민트초코 아이스크림을 가득 담은 반투명한 플라스틱 통이 불쑥 내밀어졌다.
“어?”
뭔가 싶어 그것을 바라본 직후, 그녀는 순간적으로 심장이 멈추는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트럭 뒤에서 소녀가 아는 것보다 더 진지한 얼굴을 한 소년이 걸어 나왔다.
“내가 다 샀어. 너 주려고.”
애써 무뚝뚝하게 말하고 있지만, 신의 얼굴은 새빨갛게 물든 채였다. 그리고 덩달아 알렉사의 얼굴도 똑같은 색으로 뒤덮이기 시작했다.
아이스크림을 먹던 치어리더들은 전혀 예상하지 못한 타이밍에 나온 프롬포즈에 경악을 금치 못했고, 사장은 두툼한 팔뚝으로 팔짱을 낀 채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그러니까, 나하고 같이 프롬 가자.”
“어, 어······?”
신은 아무 반응도 못하고 있는 알렉사에게 다가가, 그 품에 민트초코 아이스크림 통을 안겨 주었다.
그리고 바지 뒤에 꽂아둔 ‘Prom?’이라고 적힌 카드를 꺼내 내밀었다.
“꺄아아아아아악-!!”
“미쳤어! 미쳤어! 완전 미쳤다고!”
“내가 이 순간을 실시간으로 직관하다니!”
치어리더들이 잔뜩 흥분해서 요란스럽게 구는 것과 별개로, 두 사람 사이에는 잠깐의 침묵이 스쳐 지나갔다.
그리고 알렉사 플레어의 반응은 다음과 같았다.
“뿌애애애애애애애앵-!!”
이제야 마음이 놓인 듯, 어린아이처럼 목 놓아 울기 시작했다.
[ Prompose > 끝(1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