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ecame an American Retro Novelist RAW novel - Chapter (149)
149.
음악은 소리를 재료로 삼는 시간의 예술이라는 말이 있다.
하지만 에드워드 맥밀란은 그러한 정의를 그저 머릿속에 기억만 해두고 있을 뿐, 곧이곧대로 그렇게 생각하지는 않았다.
그에게는 음악에 대한 나름의 정의가 존재했다. 그리고 그는 소설가란, 그리고 사람이라면, 응당 접하는 개념들에 대해 자신만의 정의를 붙이고 살아가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것들이 모여 자아가 되니까.’
사람이 살아가면서 허무에 빠지지 않으려면 꼭 필요한 부분이었다.
하지만 요즘 들어 그는 생각했다.
텔레비전과 같은, 인간의 의식을 손쉽게 조종하는 매체의 등장으로 사람들이 점점 자아를 잃고 언론과 정치가 말하는 바대로 휘둘리지 않는가.
인간은 물질적 세속주의에 지배되고 있지 않은가.
하지만 그렇게 비관적 허무주의로 향하려는 의식은 매년 들어오는 신입생의 모습을 볼 때마다 조금씩 그 속도가 늦춰졌다. 아직 원숙하지는 않아도, 50대 노인은 더 이상 할 수 없는 신선하고 특별한 자아의 발현을 볼 때마다 이 나라의 미래에 조금 더 기대하게 되는 것이었다.
신의 소설이 딱 그런 경우였다.
그는 음악을 사람 개개인이 가진 고유성이라고 정의했다.
‘음, 으음. 하는 그거’와 ‘기생충’의 분위기나 음악에 관한 표현은 서로 정반대였다. 하나는 마치 스케치 코미디처럼 밝고 따뜻한 분위기였고, 다른 하나는 스릴러에 가까웠다.
에드워드는 학생들이 신의 소설에 관해 이야기하는 동안, 다시 원고를 살펴보았다.
‘기생충’의 마지막 부분은 음악을 부정적으로 묘사하고 있었다.
정확히 말하면 그로 인한 ‘기억’이 말이다.
『드디어 떠올랐다.
하지만 떠올리는 게 아니었다. 집으로 돌아온 나는 참을 수 없는 불쾌감을 느끼며 냉장고에서 맥주 한 캔을 꺼내 들었다. 뚜껑을 따고 컵에 따를 여유도 없이 훅 들이켰다. 목구멍을 타고 내려가는 거품 섞인 액체처럼, 이 기억도 어딘가 깊은 곳에 가라앉게 하고 싶었다.
그럼에도 그건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그 개자식은 내가 사람을 두려워하게 만들었다.
‘야, 그러니까 네가 사람들한테 무시당하지! 뭐 이렇게 할 줄 아는 게 없어?!’
‘솔직히 나 아니면 누가 네 성격을 감당하냐? 그러니까 사회성 떨어진다는 소리나 듣지!’
온갖 가스라이팅으로 사람을 옭아맸고,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행동했다.
그것은 사귀는 사이라 할 수 없었다. 노예와 주인의 관계였을 뿐이지. 녀석의 행동으로 말미암아 나는 점점 위축되었고 주변 관계도 놈에 의해 서서히 끊어져서, 대학에 다니는 내내 누구와도 어울리지 못했다. 지금도 회사에서 사람들과 대화하는 게 무서웠다.
‘정신과 진료까지 받았지.’
그랬던 녀석은 결국, 다른 여자와 바람이 나면서 나를 떠나갔다. 아직도 그때가, 그 순간이 머릿속에 선명했다. 배신당했다는 슬픔보다도 나는 해방감에 눈물을 펑펑 쏟았다. 그리고 녀석이 남기고 간 상처를 치유하느라 나는 아직도 병원에 다녔다.
나는 병원에서 배운 호흡법을 수행하면서 어떻게든 이 생각을 떨쳐내고자 했다.
하지만 그 멜로디는 계속해서 머릿속을 맴돌았다. 더 강해졌다. 가사마저 떠올랐다. 그 개자식의 목소리마저도 선명해졌다. 나는 계속해서 맥주를 들이켰고, 지금 시간이 늦었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참지 못하고 LP로 방안 가득 노래를 틀었다. 빌 에반스의 노래였다.
하지만 녀석이 남긴 기생충은 더 크게 머릿속을 휘저었다.
“끄응······.”
녀석이 나를 처음 유혹할 때 기타로 쳤던 자작곡이었다.
옆집에서 찾아와 방문을 두들길 때까지, 나는 어떻게든 이 기억을 떨쳐내고자 필사적으로 노력했다.』
다른 작품과 똑같이 ‘이 노래가 뭐였더라?’ 하는 기억으로부터 출발한 소설.
하지만 그 결과는 서로 정반대였다.
하나는 노래에 대한 기억을 떠올리고, 그것을 서로 다르게 받아들인다는 사실로 인해 소요가 발생하지만, 그 과정조차 즐기는 부부의 유쾌한 일상을 다루며 끝났다.
다른 하나는 어떻게든 그 기억을 도로 잊으려는 여성의 노력을 보여 주면서 끝이 났다.
음악은 그 사람의 삶에 스며든 흔적과 같다.
하지만 그게 좋은 흔적이냐 나쁜 흔적이냐는 제각각 다르다.
연인하고 이별했을 때 들은 노래는 한참 시간이 지나 나중에 듣더라도 씁쓸한 맛을 느끼게 하는 법이었다. 그러므로 음악은······.
‘아, 이건 신에게 직접 물어보도록 할까.’
에드워드는 미소를 지은 채 한창 합평을 이어가고 있는 학생들을 바라보았다.
처음에는 적응이 안 됐는지 좀 어색해하더니 이제는 알아서들 떠들고 있었다.
“사실, 감평이라는 게 좋은 말만 하면 도움이 되지 않으니까, 최대한 단점을 찾아내고자 노력했는데, 어렵더라고요. 그래서 합평 시간에 다른 사람들의 생각을 듣고 싶었는데, 오히려 그렇게 되니까 다들 각자의 음악을 들려 줘서 작의가 더 선명해지는 듯해요.”
“맞아. 모두가 글로 쓰인 멜로디를 각자 다른 방식으로 읽는다는 점이 흥미로웠어!”
레베카 웡의 말에 존 스미스가 동의했다.
에드워드 맥밀란이 봤을 때, 두 사람은 서로 정반대 성향을 지닌 ‘작가’였다.
레베카 웡은 작품 하나하나를 세세하게 분석한 뒤, ‘글’이라는 예술을 구조적으로 해체하고 다루는 스타일을 가졌고, 존 스미스는 반대로 형식이라는 게 존재하지 않을 정도로 자유롭게 상상하는 스타일을 가졌다. 방금 감상에서도 상반된 성향이 묻어나는 듯했다.
어찌 되었든, 작품의 단점보다도 즐겁게 봤다는 의견이 대다수인 상황.
에드워드가 상황을 중재했다.
“재미있게 봤다면 그걸로 족하지. 굳이 무리해서 작품의 장단점을 세세하게 파악하려는 노력을 기울이는 것도 좋지만, 무리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하네. 작품 하나가 그 작가의 모든 것을 드러내지는 않으니까. 게다가 자네들은 아직 성장하는 도중에 있는 입장이고.”
에드워드는 신을 ‘SEEN’이라는 틀에 가둬놓고 생각하지만 않는다면 다 괜찮다고 생각했으나, 굳이 그 의견까지는 입에 담지 않았다. 그것을 말함으로써 학생들이 도리어 의식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면 이제 마지막으로 작가에게 질문해보도록 할까.”
그는 맨 뒤에 앉아 있던 신을 바라보았다.
“신, 자네가 이 작품을 통해 표현하고자 했던 음악은 뭐지?”
그 말을 들은 신은 순간, 눈을 동그랗게 뜨고 말았다.
소설은 예술이고, 예술은 세상에 던지는 무언가에 가깝지, 그 의도를 하나하나 설명하는 무언가는 아니라고 생각했던 터라 딱히 작의에 대한 해설은 준비해 오지 않았다.
하지만 아무래도 학교 수업인 만큼, 교수는 작가의 생각조차 학생들이 배우는 과정으로 활용하고 싶은 듯했다.
신은 머릿속에 떠도는 생각을 빠르게 정리하고 입을 열었다.
“저는 음악이란 감정을 담아내는 도구라고 생각합니다. 작곡가가 처음 자신의 음악을 제시하면, 우리는 제각각 원하는 형태로 응축해 기억에 저장하는 거죠.”
그 말을 듣고 곳곳에서 숨기지 못한 감탄사가 들려왔다.
방금 그 한마디가, 지금 이 두 개의 소설을 너무나도 잘 설명해 주고 있었다.
***
‘Writing 1’ 수업의 합평회는 계속해서 진행되었다.
거의 하나처럼 진행된 내 두 소설에 대한 합평이 끝난 시점에서 나는 가슴속에서 치밀어 오르는 고양감을 느꼈다.
내 소설이 이들에게 인정받았기 때문이기도 했으나, 그와 동시에 나와 전혀 다른 형태로 ‘음악’이라는 소재를 해석해 온 소설들에 관해 말할 기회가 생겼기 때문이었다.
존 스미스의 ‘Rock을 향한 여정’.
레베카 웡의 ‘어느 재즈 아티스트의 고백’.
클라크 개럿의 ‘나의 귀머거리에게’.
셋 다 좋은 작품이었다. 평가는 엇갈리겠지만, 내게는 그렇게 느껴졌다.
그리고 개중에서 내 작품 다음으로 가장 좋은 평가를 받은 건 레베카 웡의 작품이었다.
‘어느 재즈 아티스트의 고백’.
말년에 이르러 자신의 음악이 사실은 세간의 평가와는 달리 그다지 엄청난 영감으로 제작된 게 아니라고 고백하는 재즈 아티스트의 소회를 담아낸 작품.
대부분이 독백과 회상으로 이루어지는 소설을 읽으면서, 실제 그 인터뷰 현장에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나는 이 소설을 ‘올바르다’라고 평가했다.
문장 하나하나가 섬세하고 장면 전환이나 곳곳에서 느껴지는 디테일도 훌륭했다. 잘만 다듬으면 원숙한 프로 작가가 쓴 작품이라고 봐도 무리가 아닐 정도였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소재’의 활용은 조금 아쉬웠다.
‘음악’에 집중하기보다도, 그것에 곁가지로 따르는 소재에 포커스를 맞춘 것이다.
누군가는 피를 흘려가면서 노력해도 닿지 않는 영역에 손쉽게 이른 재즈 아티스트가 타인의 인정과 돈이 무의미하게 느껴지면서 마약에 빠져들기 시작했다는 이야기.
확실히 ‘음악’보다는 ‘재능’이라는 영역에 조금 더 치우쳐 썼다는 느낌이었다.
음악이라는 소재를 잘 살린 쪽은, 클라크 개럿의 ‘나의 귀머거리에게’였다.
청각 장애를 앓고 있는 여동생에게 음악이란 무엇인가를 설명하는 작품.
짧은 내용 안에 작가가 생각하는 음악이란 무엇인가를 잘 표현해냈다고 생각했다. 박자와 음의 높낮이 등을 통해 만들어지는 예술이 사람에게 어떤 감정을 불러일으키는지를 충분히 납득할 수 있게 설명한 소설이었다.
‘하지만 전반적으로 좀 무난한 느낌.’
다들 공감하면서 ‘그래, 그래. 음악이란 그런 거지.’라고 말할 수는 있어도, 작가가 그 이상의 논지를 제시하지 못해 약간 심심한 감도 없잖아 있었다.
그런 ‘기발함’의 영역에 있어서는, 존 스미스가 쓴 ‘Rock을 향한 여정’이 어처구니가 없어도 확실히 잘 표현했다.
‘Rock’이 ‘바위’가 아닌 ‘음악’이라는 반전은, 사실 소설의 초반부를 읽을 때쯤부터 알아차렸다. 하지만 반전을 마주할 때의 충격은 덜해도, 바위를 깎아서 드럼과 기타를 만들고 그것을 기합으로 연주했다는 상상력에서는 솔직히 말해 웃음과 감탄이 절로 새어 나왔다.
그리고 존 스미스는 그것이 바로 ‘음악’이라고 말했다.
고대로부터 이어져 온, 소리의 즐거움을 통해 사람을 움직이게 하는 힘.
작품 속에서 ‘음악’이란 사람을 결속시키는 힘이며, 인류가 이렇게까지 발전할 수 있게 한 원동력이라고 주장했다. 그것을 ‘바위 드럼’과 ‘바위 기타’ 같은 기발한 장치로 표현한 것이었다. 마치, 미래에 나올 ‘터네이셔스 D’ 같은 약간 마니악한 메탈 밴드에서 ‘설정’으로 차용할 것 같은 이야기였다.
결과적으로 학생들은 이 어처구니없는 소설을 강하게 비판했지만, 나는 반대로 크게 칭찬했다. 왠지 모르게 장르 소설 같은 맛이 있다고 느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이번에 뽑힌 소설들을 읽고 나니, 에드워드 맥밀란이 왜 이런 식으로 합평작을 구성했는지를 자연스레 알 것 같았다.
각 작품은 저마다의 매력이 존재하고 단점도 뚜렷했다. 나는 칭찬만 들었으나, 그와 별개로 아예 수정할 만한 구석이 없는 작품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두 개나 쓰려다 보니 좀 후다닥 쓴 감이 있지.’
두 작품을 하나로 봐서 메시지가 더 강렬하게 와 닿았지만, 그런 상황이 아니었더라면 아마도 지금보다는 힘이 약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것을 돌이키면서, 나는 반성했다.
‘다음부터는 확실하게 한 작품에만 집중하는 편이 좋을 것 같군.’
그래도 뭐랄까, 오늘 수업을 통해 왜 문예창작과라는 집단이 존재하는지 알 것 같았다.
같은 소재를 다른 시점에서 쓴 글을 보면서 나의 지평이 더 넓어지는 기분이었다.
“좋아······.”
그렇게 수업이 끝나고 난 뒤, 나는 자동차에 시동을 걸며 빙긋 웃었다.
첫 학기에는 학교 적응 문제도 있고 해서 그냥 정규 수업만 들을까 했는데, 수업을 들으면서 떠오르는 생각들을 종합하다 보니 이대로 가만히 있을 순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거기다 학교 측에서도 적극적으로 권장하고 있으니까.’
이 학교는 놀랍게도 청강에 아무런 제재를 가하지 않았다.
교수에게 말만 해둔다면 다른 수업을 듣는 데에 제한을 걸지 않았고, 나는 틈틈히 수업이 끝나고 학과 사무실 등에서 정보를 수집해 청강하고픈 수업을 몇 가지 정해 둔 상태였다.
내가 앞으로 쓸 소설을 쓰는 데 도움이 될 물리학 수업과 사회학 관련 강의들이었다.
‘물론 그 수업을 100% 이해할 수 있으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지만.’
그래도 일단은 들어봐야 하지 않겠는가.
나는 기대감에 미소를 지은 채 학교 반대편에 있는 다른 단과 대학으로 향했다.
***
한편, 로스앤젤레스.
백여 명을 수용 가능한 대기실 의자에 앉은 알렉사 플레어는 사시나무 떨듯 떨고 있었다.
‘어, 어어어, 어쩌지?’
드디어 이곳까지 오고야 말았다.
‘About T : Drama’의 오디션 현장 말이다.
단역 배우를 뽑는 자리였음에도 많은 지망생이 모여 들었다. 이 업계에서는 어떻게든 스크린에 얼굴을 한 번 올리는 것만으로도 커리어가 되기 마련이었다.
그리고 오늘 이 자리를 쟁취하기 위해서 모인 이들은 수백 명이었다. 이 대기실 말고도 다른 대기실이 있다는 뜻이었다. 그럼에도 웅성거림 없이 하나 고요하고, 가끔 이름이 불려 누군가 밖으로 나가는 소음밖에 나지 않아서 더 떨렸다.
치어리더 캡틴으로 전국 대회도 나가보고 학교에서는 그 누구의 앞에서도 떨지 않았던 알렉사였지만, 지금은 달랐다.
이곳은 사회였고, 동시에 현장이었다. 이런 상황을 처음 마주하는 그녀로서는 긴장하는 것이 당연했다.
거기다 주변에 있는 사람들은 하나 같이 다 키가 커서 알렉사로서는 더 위축될 수밖에 없었다. 피부도 어디서 태웠는지 아주 건강한 태닝 피부였고. 햇볕에 아무리 쪼여도 계속 새하얀 낯을 계속 유지하고 있는 알렉사로서는 침울할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그뿐 아니라 함께 온 동료(?)들과는 뿔뿔이 흩어져, 혼자 다른 대기실에 배정된 상황이기까지 했으니.
‘이게 대체 어떻게 된 거냐고요! 대표님!’
그렇게 잔뜩 긴장한 채로 있던 와중, 이름이 불렸다. 알렉사는 그래도 지난 몇 주 동안의 연기 연습을 생각하면서 마음을 진정시키고자 했다.
대기실 밖으로 나가고서 그녀는 또다시 긴 복도 대기줄 앞에 섰고, 오디션에서 요구하는 바를 기억하면서 집중하고자 노력했다.
표정 연기, 몸짓 연기, 그리고 자유연기.
그 세 가지를 각각 20초 동안 선보인다.
앞뒤의 인사를 포함하면 1분 30여 초밖에 되지 않는 짧은 오디션이었다.
그것은 마치 인간을 컨베이어 벨트에 실어서 나르는 현장 같았다. 대기줄이 천천히 줄어들었고, 먼저 오디션을 보고 돌아 나오는 이들의 표정은 전부 최악에 가까웠다. 그럴 수밖에. 이 오디션을 위해 수도 없이 연습했건만, 그걸 보여줄 시간은 지독히도 짧았으니까.
하지만 그것이 ‘연예계’라는 곳이었다.
실력이 특출 나거나, 따로 연줄이 있거나, 이미 이름이 알려져 있거나 하지 않은 이상, 이곳에서는 누구나 가축 같은 취급을 받았다.
그리고 그 현장에 스스로 뛰어든 알렉사는, 자신의 이름이 호명된 시점에 후다닥 안으로 들어가 배운 대로 인사부터 했다.
“안녕하세요! 91번, 알렉사 뿔레어입니다!”
그리고 단박에 실수를 저질렀다.
그 순간부터 더욱 긴장해 관자놀이로 식은땀을 흘리기 시작한 알렉사.
“어, 그래요······.”
그 맞은편에서 심드렁하게 그녀를 보던 캘리포니아 픽처스의 PD, 제레미 톰슨은 생각했다.
‘흰 피부네.’
도서관에서 앨리스한테 책을 빌리는 너드 소녀 캐릭터로 나오면 딱이겠군.
······그렇듯, 알렉사가 이 오디션에서 선발된 이유는 실력, 연줄, 명성에 있지 않았다.
바로 그녀가 콤플렉스로 생각하던 흰 피부 때문이었다.
말인즉슨, 단순한 운.
어떤 의미에서, 예술의 허망함을 시사하고 있는 지점이라 할 수 있었다.
[ Music is life (4) > 끝(1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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