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ecame an American Retro Novelist RAW novel - Chapter (156)
156.
슬쩍 옆을 돌아보니 아침 햇살에 눈이 부셨다.
‘벌써 아침인가.’
사이먼은 뒤늦게 찾아오는 두통에 앓는 소리를 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커피를 여섯 잔인가 마셨으니까. 그는 방 안 가득 떠도는 커피의 향에 자기도 모르게 헛구역질을 하면서 창문을 활짝 열었다. 아침 햇살과 함께 쏟아져 들어오는 공기가 우울함에 심취했던 마음을 순간 정화하는 듯했다.
사이먼은 생각했다.
‘퇴사하고 싶다.’
퇴사하고 소설이나 실컷 읽고 싶다.
왜 사람은 일해야 하는 걸까?
어차피 이 거대한 세상 속에서 인간은 아무것도 아닌데.
“끄흑······.”
등과 어깨를 아르마딜로처럼 만 뒤, 그는 자신의 생각이 이상한 방식으로 흘러간다는 사실을 자각하면서 뒤를 돌아보았다.
테이블 위에 가지런히 정돈되어 놓여 있는 ‘Country of losers’의 원고가 보였다.
‘진짜 세상이 저렇게 된다면, 생각만 해도 끔찍하군.’
아니, 정말 끔찍할까?
어쩌면 차라리 그편이 낫지 않을까?
사이먼은 문득 그렇게 생각하고 마는 자신에게 두려움을 느꼈다.
올더스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처럼, 이 소설은 인간의 불행을 의도적으로 잘라내 모두가 행복한 사회를 추구하는 것처럼 전개되었다.
여기까지는 흔한 디스토피아물의 한 갈래였다.
모든 것이 완벽하기에 도리어 기괴하고 불편하게 느껴지는 세계관.
문제는, 이 소설이 현재와 과거 사회와의 대비를 보여 주면서 그것이 마치 인간에게 있어 올바른 선택이라는 양 역설하고 있다는 부분이었다.
적어도 사이먼에게는 그렇게 느껴졌다.
‘마지막까지는, 그랬지.’
충격적인 결말을 떠올리면서 깊은 한숨을 내쉰 후, 그는 출근 준비를 시작했다.
토스터기에 식빵을 넣고 샤워를 끝마치고 나왔다. 자리에 앉아 커피머신의 커피를 한 잔 더 따를까 하다가 진짜로 토할 것 같아서 그 대신 냉장고 안의 우유를 꺼냈다. ‘유통기한이 어제까지니까 괜찮겠지?’ 하고 중얼거리면서 컵에 따랐는데 걸죽한 요거트가 나왔다.
“······.”
그러고 보니 한 3일 정도 실온에 뒀었지.
귀찮아서 대충 싱크대에서 물을 한 잔 받아 자리에 앉았고, 이미 다 식은 식빵에 피넛 버터 앤 젤리 잼을 바르고 먹기 시작했다.
우물우물. 식빵을 씹는 내내 우울한 기분이 들었다.
‘나 진짜 왜 사는 거지.’
세상의 모든 직장인이 한 번쯤은 하는 생각.
이 성격 좋은 기자는 스물여섯이 되어서야 처음으로 그 생각을 하게 되었다.
모두 신 작가의 신작 소설, ‘Country of losers’ 때문이었다.
이 소설은 하루하루를 노력하며 사는 인간의 삶을 정면에서 부정하고 있었다.
***
‘Country of losers’의 2막은 대학에 다니는 한 청년, ‘드숀’의 시점에서 시작되었다.
그의 아버지는 치과 의사였고, 어머니는 변호사였다. 그런 ‘평범한’ 흑인 가정에서 태어난 드숀은 머릿속에 ‘더 북’을 삽입한 상태로 태어난 최초의 세대였다.
자신과 비슷한 환경을 가진 주변의 친구들과 함께 성장한 그는, 여타 디스토피아 소설의 주인공처럼 고뇌하고 저항하는 존재가 결코 아니었다.
이 세계의 사람들은 무언가에 지배되지 않았다.
괴로워하지도 않았다.
모두가 각자의 삶을 각자의 자리에서 살아갔다. 마치 ‘더 북’이 등장하기 이전의 시대로 돌아간 듯했다.
‘제임스’라는 한 과학자가 개발한 신기술에 의해 ‘더 북’이 뇌에 삽입되는 형태의 기기로 바뀌면서 이 세상은 더 완벽이라는 단어에 가까워졌다.
수많은 시민이 ‘더 북’을 통해 지식을 보급 받았으며, 인종차별과 포르노의 탐닉, 자극 추구와 같은 이전의 병폐는 적절한 통제 아래에서 사라졌다. 사람들은 여전히 포르노를 즐겼지만, 적정한 선을 유지했다. 그보다는 더 나은 삶을 살아가는 것을 추구했다. 절제에서 오는 미덕을 사랑했고 더 나아지기를 원했다.
그 대표적인 예시가 체중 관리였다.
더 북을 뇌에 삽입하면서 비만은 자연스럽게 사라졌다. 사람들은 머릿속의 책이 전해 주는 지식에 따라 체중을 관리했고, 조금씩 더 나아지는 기쁨을 맛보면서 성장해 나갔다.
더 북은 마치 최측근에서 인간을 관리하는 매니저 같은 존재였다.
신체의 건강은 정신에도 영향을 끼치기 마련이었다.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각자가 가진 최선의 모습을 유지하게 되었으며 서로가 가진 개성을 존중할 줄 알게 되었다.
드숀은 자주 다양한 인종의 친구들을 만났는데, 그때마다 서로의 피부색과 외모의 개성을 칭찬하고는 했다.
『“마리, 너의 새하얀 피부 위에 별처럼 박힌 주근깨는 너무 아름다운 것 같아.”
“그런 말 하지 마. 드숀. 너의 그 흑표처럼 새까만 피부가 훨씬 더 건강해 보이는데.”
“브룩의 가느다란 눈매도 우아해. 멋져.”
그들은 서로가 가진 개성적인 아름다움을 아무런 편견 없이 바라보았다.
드숀은 브룩의 아시안의 전형적인 얼굴을 가만히 감상했다.
차를 마시면서 깊은 대화를 나누는 시간. 그는 세상 만물을 깊이 관찰하고 즐기는 이 시간을 즐겼다. 머릿속에서 ‘더 북’이 도움을 주는 까닭에 그는 아시안 특유의 째진 눈매가 진화의 산물임을 알았다. 그것을 깊이 이해하자 상대의 얼굴이 더 아름답게 느껴졌다.
바로 그 순간이었다.
【권유 : ‘째진 눈’이라는 표현은 인종차별의 역사를 가진 단어입니다.】
‘아하.’
머릿속에 떠오른 생각과 함께 망막에 새겨지는 이미지.
블랙 페이스, 옐로우 페이스 등. 각종 인종차별에 대한 예시들을 확인한 드숀은 자신의 무지함을 반성하며 거기에 대해 서로 이야기하고 싶다는 생각에 휩싸였다.
“브룩, 하고 싶은 말이 있어.”
“뭔데, 드숀?”
“방금 너의 눈을 보면서 ‘째진 눈매’라고 생각했어. 그랬더니 머릿속의 ‘더 북’이 그것은 인종차별적인 표현이라고 하더라고. 너는 이 이야기를 듣고 솔직히 어떤 기분이 들었어?”
“딱히 기분이 나쁘지는 않았어. 너에게 인종차별의 의도가 없다는 사실을 나는 잘 알고 있으니까. 다만 확실히 좋은 표현 같지는 않아. 이유는 그 표현이 ‘원래 사람의 눈은 째지지 않았는데 그렇게 되었다’는 것처럼 느껴지기 때문이 아닐까?”
“맞아. 째졌다는 표현은 ‘찢어졌다’라는 표현의 변형이잖아? 단어 자체가 원래 눈이 찢어지지 않았는데 찢어졌다는 듯이 말하는 느낌이라 불쾌한 표현으로 받아들여진 게 아닐까?”
“너희의 생각을 이해했어. 나도 감정적으로 동의해.”
고개를 끄덕인 드숀은 친구들과의 대화를 통해 만들어진 생각을 머릿속 깊숙이 저장했다.』
그리고 이야기는 과거의 모습을 잠시 보여 주었다.
‘인터넷’이라는 가상의 공간에서 인종차별에 관한 담론이 나왔다.
모두가 처음에는 이성적으로 대화를 나누다가도, 악의를 가진 사람의 의견 하나에 담론의 장은 엉망진창이 되었다. 모두가 증오에 증오로 맞불을 놓았고 싸움은 끝없이 이어졌다.
끝없이 남과 비교하고 자신과 다른 이를 증오하는 사회.
그로써 얕은 쾌락에 취하는 시대.
사람들은 너무나 많은 정보를 접한 나머지 진실을 알아버렸다. 자신의 삶보다 더 나은 삶이 있음을 알았고, 그 열등감의 격류 속에서는 기존의 가치 체계가 제시하던 규칙도, 긍지도 존재하지 않았다. 사람들은 그저 더 많은 돈과 쾌락을 좇았다.
그것이 신이 제시한 ‘인터넷 사회’였다.
“저는 이 부분을 읽으면서 조금 의아하더라고요.”
사이먼은 신의 앞에 앉아 자신이 읽은 소설의 감상을 한창 늘어놓고 있었다.
모두가 불행했던 과거와 모두가 행복한 현재의 대비가 이어졌다.
거기에서 자연히 의문 하나가 뒤따랐다.
왜 뇌에 직접 ‘더 북’을 넣는 행위 하나만으로 사람들은 행복해졌는가? 과거와 달리 왜 싸우지 않고 올바른 판단을 하면서 자신을 더 낫게 하는 데 집중하게 되었는가?
“그 진실이 밝혀지는 순간에······ 고개를 갸웃거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마치 낭독회라도 하듯 감정에 심취해 이야기를 늘어놓는 사이먼.
그 앞에서 신은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진짜 재밌게 본 모양이네.’
좋은 반응에 마음이 편해졌으나, 과한 것 같기도 해서 조금 부끄러웠다.
사실 2막에서 제시한 상황을 보면,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세뇌’라는 방법을 떠올릴 터였다.
사이먼도 그랬다. 일반적으로 봤을 때, 가장 합리적이고 쉬운 방법이었다. 뇌에 삽입된 ‘더 북’이 어떤 형태로든 사람의 의식을 조종해서 불행한 감정을 잘라내고 오직 행복만을 남긴 것이 아닐까.
하지만 그 너머의 ‘진실’은, 드숀이 학과 수업에서 점점 낮은 점수를 기록하면서 밝혀졌다.
‘더 북’은 학업에 점점 뒤처지는 그에게 학습을 따라갈 수 있는 올바르고 합리적인 방법을 제시했다. 하지만 드숀은 그마저도 이해하지 못했다.
어느 순간부터 학습은 점차 쉬워졌고, 일반적인 고등학생 수준의 문제로 변질되었다. 그것을 맞추고 이해한 드숀은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그리고 더 북은 ‘생각’했다.
『유전자의 예상치대로 성장. 돌연변이 가능성 제로.
고등학생 수준의 지적 능력에 걸맞은 삶으로 재조정.
절대적인 행복만을 위한 정보를 주입합니다.』
그리고 드숀의 삶은 조금씩 ‘최적화’되었다.
“처음에는 이게 무슨 말인가 싶었습니다.”
하지만 이야기를 통해 차근차근 그 의미를 알게 되었다.
‘더 북’을 통해 드숀에게 주어지는 정보가 아주 조금씩 바뀌었다.
원래는 과학과 인지심리학과 관련된 정보만을 주로 접하던 드숀이었으나, 거기에 자극적인 이야기가 조금 더 나오기 시작했다. 여성을 유혹하는 법. 쾌락을 추구하는 섹스가 가져다주는 이점 등등. 그걸 보고 흥미가 생겼던 드숀은 대학 밖으로 나와 ‘더 북’이 추천하는 이들과 만남을 가지며 섹스를 시작했다.
모든 사람들이 올바르고 청빈한 삶을 추구하던 것이 아니었다.
드숀 역시 단지 그런 정보를 얻을 생각조차 하지 못해 몰랐을 뿐이었다.
“이 소설에서 묘사된 섹스가 쾌락을 위한 도구 정도로 무미건조하게 묘사되는 것도 참 좋았습니다. 사람들은 보통 섹스에 대한 어떤 환상을 갖고 있잖아요. 하지만······ 가상의 인격체인 더 북이 보기에 섹스는 단순히 동물 간의 번식 행위이자 쾌락의 도구에 불과하니까요.”
그렇게 점차 드숀은 열심히 공부하던 대학생에서 길거리의 한량으로 변해갔다.
하지만 본인은 행복했다.
예전에는 더 북이 제시하는 ‘과제’를 하나하나 수행하면서 조금 더 나은 자신이 되어간다는 사실에 기뻐하던 그였지만, 이제는 눈앞에 있는 매력적인 여성과 섹스하는 일에만 몰두했다. 그리고 그 삶에 대해 ‘더 북’은 긍정하는 메시지만을 보여 주었다.
“정보.”
사이먼의 입에서 선명히 유리되듯 나온 단어.
신은 고개를 끄덕였다.
“맞습니다.”
2막의 ‘더 북’이 추구하는, 인간이 행복해지기 위한 길은 정보의 통제였다.
그 개발자인 ‘제임스’가 생각한 바는 이러했다.
인간은 너무나도 많은 사실을 알았기 때문에 불행해졌다. 하지만 이미 그런 식으로 변해 버린 사회를 다시 되돌릴 수는 없었다. 그렇다고 해서 인간의 뇌를 조작하는 행위는 불가능에 가깝고, 제임스가 생각하기에 세뇌는 썩 올바르지 못한 일이었다.
그렇기에 제임스는 ‘더 북’을 발전시키는 데 집중했다.
그들이 인간의 절대적인 행복을 위해 일하도록.
그들이 인간을 이끌고 더 나아질 수 있게 하도록.
그 과정에서 누군가 모자라고 부족한 부분이 있더라도 스스로 만족하도록.
그 끝에서 탄생한 것이 2막의 ‘더 북’이었다.
모두가 더 북을 맹신했다. 아니, 더 북이 그렇게 할 수밖에 없도록 만들었다.
인간 개개인의 의지는 얼마든지 쉽게 조종당할 수 있었다.
그렇게 드숀은 삽시간에 건실하던 대학생에서 벗어나 집안의 문제아로 추락했다. 대학교를 중퇴하고 적당한 회사에 들어가 여자친구와 함께 지내기 시작했다.
그리고 여기에서 문제가 하나 발생했다.
다른 친구들은 괜찮았다. 어차피 지금 세계가 그렇듯, 마리와 브룩 같은 관계는 겉치레에 불과했으니 자연히 알아서 떨어져 나갔다. 하지만 가족은 그렇지 않았다. 혈연으로 연결된 관계는 그런 식으로 쉽게 끊어낼 수 있는 것이 절대로 아니었다.
드숀의 부모님은 크게 분노했다.
여기에서 소설은 의문을 하나 제시했다.
유전학에 따라, 더 북의 분석은 드숀이 분명 대학을 원활히 졸업하고 실리콘밸리의 개발자로 취업해 많은 돈을 벌어들이리라 예상했다.
하지만 그는 학업을 제대로 따라가지 못했고, 결국 더 북이 제시한 대안을 따라 대학을 중퇴하고 여자친구를 사귀었다.
그 이유는 무엇인가?
답은 하나밖에 없었다.
드숀은 치과 의사와 변호사의 아들이 아니었다. 그는 변호사가 한순간의 취기에 휘말려 펍에서 모르는 남자와 성관계를 맺은 끝에 낳은 아들에 불과했다.
드숀의 아버지는 자신의 머릿속에 있는 더 북을 통해 그 가능성을 알게 되었고, 유전자 검사를 진행한 끝에 진실을 깨달았다.
이혼과 함께 붕괴하는 가정.
그로써 더 북이 추구하는, 모두가 행복한 세계는 무너지는 듯했다.
하지만 아니었다.
“그조차, 더 북이 의도한 바였죠.”
더 북은 인간의 자유 의지를 빼앗지 않았다.
인간은 모든 것을 자유롭게 선택했다. 하지만 그 어떤 길을 택하고 걷더라도 더 북은 그들을 행복이라는 궤도에 기어코 돌려놓았다.
또다시 정보를 통제하고 길을 제시하면서.
드숀의 아버지는 이혼한 사람들이 모이는 모임에서 새로운 사랑을 찾았다.
드숀의 여자친구는 아이를 임신했고, 드숀과 드숀의 어머니는 드숀의 아이가 탄생하면서 모두 행복해졌다.
소설 초반에는 행복을 위해 불행을 거세했다는 듯이 말했으나, 그건 진실이 아니었다.
‘더 북’은 불행조차 행복을 위한 도구로 사용했다.
이야기의 마지막.
살아있는 모든 인류에게 보급된 ‘더 북’의 분석이 이어졌다.
『표정 분석, 심박수 분석, 감정 상태 분석.
행복도 100%. 이후 차츰 감소할 예정.
불행도 발생 확률 72.2%. 상승 필요.
정보를 제공해 인간의 행동을 유도합니다.
향후 행동 예상······ 최적화해야 할 인간의 수 12,676,093,724명.
최적화 예상 시간.
1.21초.
‘운명’이 발동합니다.』
“이건, 완전히 신(神) 아닙니까?”
사이먼은 허탈하다는 듯이 웃었다.
인간을 초월한 인공지능이 만들어 낸 가장 완벽한 세계.
마치 신에 의해 악마가 패퇴 당하기 위해 창조되었듯이, 시련과 고난이란 그 이후에 맞이할 행복만을 위해 존재하는 세계.
그것을 위해 ‘더 북’이 한 행동은 무척 간단했다.
인간을 조종하지도 않고, 그저 눈앞에 특정한 정보만을 보여 주었을 뿐이었다.
모든 선택은 인간이 했다.
거기에 강제성은 없었다. ‘더 북’은 단지 인간을 위해 모든 상황을 ‘최적화’했을 뿐이었다.
“작가님.”
“네, 사이먼.”
“저는 지금 만물의 허망함을 느끼고 있습니다.”
“그렇군요.”
“저는 기자로서, 정말 많은 것들을 봅니다. 인간 사회의 추악한 면과, 기업이 뒤에서 저지르는 더러운 행각을 수도 없이 보고 듣고 있죠. 그래서 환멸을 느낄 때도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지금껏 이 길을 택한 걸 후회하지는 않았어요. 인간이란 지식을 통해 더 나아져야 한다고 굳게 믿고, 그것을 제공하기 위해 노력해 왔으니까요. ······그래서, 저는 소설을 통해 사람들이 즐거움을 느끼고 ‘글’이라는 분야와 좀 더 친해졌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며 이 일을 하고 있었습니다.”
“······.”
하지만요. 작가님.
사이먼은 굉장히 슬픈 표정을 지었다.
“세상 모든 사람이 똑똑해진 끝에 저런 세계가 온다면, 그리고 그 세계가 나쁘지 않다고 느낀다면······ 저는 도대체 왜 이 일을 하고 있는 거죠?”
“······.”
신은 마찬가지로 대답하지 않았다.
한숨을 푸욱 내쉰 사이먼이 말을 이어 나갔다.
“어서 이 소설을 책으로 내도록 하죠. 지금 느끼는 이 허무함을 저만 느끼고 싶지 않으니.”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신은 진지한 표정의 사이먼을 보면서 미소를 지었다.
‘Country of losers’의 1막에서는 정보가 범람하는 세계에서 패배자가 될 수밖에 없는 인간을 그려냈다.
그리고 2막에서도 드숀의 이야기가 펼쳐지는 사이사이로 더 북이 정보를 통제하기 이전의 인간 사회를 보여 주면서 독자들에게 질문 하나를 던졌다.
소설에서 묘사되는 더 북에 의해 통제되는 사회는, ‘Country of losers’인가?
모든 것은 소설을 읽을 독자가 결정할 몫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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