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ecame an American Retro Novelist RAW novel - Chapter (167)
167.
“······신, 한?”
눈이 마주친 순간 케이트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나는 순간 어색한 기류를 느끼며 웃었다.
“어, 안녕?”
“네가 왜 여기에 있어?”
“왜 있냐니. 당연히 화장품 사러 왔지.”
“화장품? 남자면서?”
와, 되게 나쁜 말이다.
남자도 기초 화장품 좀 바를 수 있지.
이해는 한다. 남자가 화장품 가게에 들어가는 행위가 딱히 불법은 아니었으나, 지금 시대에서는 거의 사회적으로 용인되지 않는 분위기이기는 했다.
화장품 가게에 들어온 나나 존 스미스가 이상한 거였지.
‘나는 그렇다 쳐도.’
존 스미스는 도대체 얼마나 깨어(?) 있어서 아무렇지도 않게 나와 함께 들어온 걸까.
그렇게 생각하자니 눈을 반짝거리며 다가온 녀석이 활짝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안녕~! 스탠퍼드?”
“아, 응.”
“오, 반가워. 신하고 아는 사이 같네? 나는 얘랑 같은 문예창작과 1학년 존 스미스야.”
갑자기 대화의 장이 열렸다.
역시 알렉사와 두피를 더해 반으로 나눈 듯한 성격의 존 스미스. 멋진 친화력이다.
케이트의 반응이 어떨까 궁금해 바라보자니, 역시나 예상한 대로였다.
“······사회학과 1학년 케이트 무어야. 만나서 반가워. 존.”
사회적으로 정확히 용인될 만한 깔끔한 태도로 존과 악수를 나누는 케이트.
그러더니 자연스레 질문으로 이어갔다.
“여기는 무슨 일로 왔어?”
“아, 생필품 사러 잠깐 나왔는데 신이 오자고 해서.”
“그렇구나. 뭐 사려고?”
“······.”
내가 슬쩍 눈을 가늘게 뜨며 바라보자 시치미를 떼는 케이트.
방금까지 존이 못 듣는 동안 내 앞에서 ‘남자가 무슨 화장품이냐.’며 놀라던 녀석이 맞나 싶을 정도였다.
하지만 그런 이중적인 녀석에게 익숙해질 만큼 익숙해진 고로, 나는 적당히 맞춰 주었다.
“로션. 너는?”
“아, 나는 그냥 구경하던 중이었어.”
슬쩍 손에 들고 있던 색깔이 들어간 화장품을 내려놓는 케이트.
그러더니 뭔가 불만이라는 듯 눈을 가늘게 뜨며 날 바라보았다.
“누구 소설이 이러라고 해서 말이야.”
“······?”
“‘About T’를 말하는 거야.”
뭐야. 얘.
왜 존 스미스가 옆에 있는데도 틱틱거리지? 설정 오류인가?
“오, 케이트 너도 ‘About T’ 팬이야?”
“내 인생 소설이야. 존, 너도?”
“나는······.”
“눈치 보지 말고.”
내가 슬쩍 등을 떠밀자 존이 어색하게 웃었다.
“그 정도까지는 아닌데, 응! 팬이야!”
왜 갑자기 화장품 가게 안에서 ‘About T’ 이야기로 불이 붙었을까.
어쨌거나 존은 눈을 반짝이며 계속 말을 이어 나갔다.
“이번에 내용 진짜 좋지 않아? 앨리스가 학교 밖에서 여러 사람과 만나면서 온갖 재미있는 걸 다 보고 돌아온 다음에, 자기가 지금 하고자 하는 일이 무엇인지 확실하게 끝맺잖아.”
“맞아. 그런 리프레시 과정을 똑같이 경험해 보고 싶더라고.”
“오오, 나도 그랬어! 뭔가 ‘About T : College’를 읽고 나니까 내가 지금 제대로 공부에 매진하는 게 아니라 관성적으로 시간에 쫓겨서 하고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더라고!”
“맞아. 정말 멋진 소설이야. ······응?”
“신, 왜 그래? 구석에 숨어서.”
“아, 아니야.”
두 사람이 내 소설에 관한 이야기로 꺅꺅 떠드는 장면을 듣기 부끄러웠기에 나는 기둥 뒤편에 몸을 숨겼다가 겨우 다시 나왔다.
사인회 때는 일이라서 그런지 나름 괜찮았는데, 이처럼 안전장치가 전혀 없는 상황에서는 여전히 얼굴이 빨개지고 마는 나였다.
어쨌든, 다시 두 사람 앞에 선 나는 상황을 정리했다.
“뭐, 두 사람 다 ‘About T’ 때문에 영감을 얻었다면 좋은 일이군.”
“다 우리 작가님 덕이죠.”
“감사를 표하고 싶어. 신. 오늘 나한테 앨리스처럼 재미있는 일이 생긴다면 나중에 또 만나게 됐을 때 이야기해줄게.”
“고, 고맙다.”
그런 식으로 대충 이야기를 마무리한 나는 로션을 사서 존과 함께 밖으로 나왔다.
처음에는 살짝 얼떨떨했으나 이내 입가에 미소가 지어졌다.
‘나름대로 문제를 인식하고 해결하고자 하는 마음은 있는 모양이로군.’
사인회에서의 경험과 ‘About T : College’의 메시지가 강렬하게 와 닿은 모양이었다.
여러모로 이제야 제대로 출발 지점에 섰다는 느낌의 케이트 무어였으나, 이제는 괜찮겠지 싶었다.
***
깊은 밤.
“후우.”
하루 종일 걸어서 지친 발걸음으로 케이트 무어가 방으로 들어왔다.
그 양손에는 오늘 바깥에 나가 얻은 전리품으로 가득했다.
평소에는 방에 돌아올 때마다 오늘 해야 할 과제를 가장 먼저 떠올렸던 그녀였지만, 오늘은 지칠 대로 지쳤다. 방 안에서 과제하던 룸메이트와 인사를 나누고 나서 잠옷으로 갈아입고 겨우 세안만 끝마친 뒤 침대에 털썩 엎어졌다.
“후우.”
다시금 이어지는 한숨.
이, 뭐랄까.
‘전혀 예상하지 못했는데.’
굉장한 충족감이 들었다.
그녀는 잠이 들기 직전까지 오늘의 멋진 일을 머릿속에 떠올렸다.
무척 한가득했다.
그동안 머릿속 가득히 추구했던 ‘완벽한 사람’은 오늘 잠깐 지워졌다.
미국에서 손에 꼽히는 명문인 스탠퍼드 대학교는 그 위상만큼 주변 도시에도 많은 영향을 끼쳤다.
대표적으로 스탠퍼드 바로 앞에 있는 ‘팔로 알토’가 그랬다. 스탠퍼드가 포함된 이 도시와 인근의 다른 도시는 미국의 최첨단 기업과 연구소의 요람과도 같은 곳이었다. 소위 말하는 ‘실리콘밸리’가 바로 이곳으로, 교육열도 어마어마했고 집값도 무척이나 비쌌다.
그런 만큼 복합 문화 단지나 공원의 구성도 잘 되어 있어서, 여자 혼자서 돌아다니더라도 딱히 심심하지는 않았다.
아침 일찍 기숙사에서 나와 계획성 있게 막 문을 연 서점에서 가이드북을 구매했다.
그리고 카페에서 모닝커피를 마시며 가고 싶은 장소에 하나씩 동그라미를 쳤다.
오늘은 정말 아무 생각도 하지 않을 생각이었다.
앨리스가 그랬듯이 완전히 자신을 비워내고 그 안에 새로운 자신을 차곡차곡 쌓아 넣는 작업을 하고 싶었다. 그러한 결심을 끝마치면서 커피를 다 마셨고, 케이트는 가지고 있는 가장 튼튼한 운동화에 의지해 팔로 알토를 걸어 다니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조금 어색했다.
아무래도 혼자서 마음 편히 시간을 보낸 날이 그동안 거의 없어서일까.
혼자 영화를 보려고 마음먹었으면서도, 티켓을 사기 직전까지 쭈뼛거렸다. 영화 자체는 그녀가 좋아하는 로맨스 장르라서 굉장히 쉽게 몰입이 되었다. 그래서 더 즐거웠다.
그때쯤부터 마음이 풀어진 케이트는 혼자서 달달한 디저트를 즐기고 공원을 걷다가 비둘기 모이를 사서 땅에 뿌리면서 놀기도 했다.
그리고 그때 다가왔던 마음씨 좋아 보이는 할머니 한 분이 기억에 강하게 남았다.
[어머나, 오늘 내가 할 일을 빼앗겼네.]은퇴 후, 비둘기 모이 주는 낙으로 하루하루를 보낸다는 할머니.
처음에는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어색했으나, 케이트는 마음속에서 앨리스를 떠올렸다. 앨리스도 자신처럼 전혀 모르는 사람과 이야기 나누는 것을 어려워했으나, 용기를 낸 끝에 결국은 멋진 경험들을 얻었다.
케이트도 마찬가지였다.
스탠퍼드에 재학 중이라는 이야기에 감탄한 할머니는 자신이 살아왔던 긴 인생 속의 작은 깨달음을 들려주었다. 이른 나이부터 교사로 지냈으나, 사실은 공부가 더하고 싶었다. 해서 후회하는 편이 안 하는 것보다는 백 배 낫다.
케이트는 그 말이 왠지 모르게 가슴 깊숙이 박히는 것을 느꼈다.
‘그래. 해서 다행이었어.’
그리고 화장품 가게에서 신을 만났다.
자신에게 이렇게 큰 영향을 준 소설을 쓴 장본인.
그때쯤, 이미 마음의 긴장은 크게 풀어진 상태였던지라, 케이트는 사회 안에서의 자신도, 그리고 항상 틱틱거리는 자신도 아닌 그 중간쯤의 태도로 그를 대할 수 있었다고 생각했다.
‘생각해 보면 참, 고마운 친구야.’
그리고 이제는 가끔 얼굴이 안 보이면 무슨 일이 있나 궁금해지는 그런 사람.
다음부터는 만났을 때 조금 더 친절하게 대하고 싶었다.
그 이후 저녁 식사 자리에서 이루어진 가게 종업원과의 대화라거나. 기숙사로 돌아오는 길에 정말 마지막 용기를 내서 말을 걸었던 공장 일을 한다는 청년과의 대화라거나.
그 하나하나가 뭐랄까, 자신에게 새로운 세계를 선사해 준 기분이 들었다.
흐릿한 눈으로 머릿속의 기억을 하나씩 훑다가, 케이트는 정말 오랜만에 아무 생각 없이 푹 잠이 들었다.
***
존과 시내에 다녀오고 며칠 뒤.
슬슬 1학년 기말고사가 다가오는 시점이었다.
나는 25화 분량으로 기획된 ‘About T : College’ 원고를 완결까지 작성해서 로스앤젤레스 타임스 측으로 보냈고, 한동안은 공부에 집중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현재 8화까지 연재된 소설은, 이후에 더 제대로 된 사건이 벌어지면서 ‘About T’다운 전개로 이어질 예정이었다.
애초부터 ‘About T’가 무슨 소설이던가?
바로 ‘T’에 관한 이야기였다.
그리고 이번 시리즈에서 토니에게는 그것이 ‘Training’이었고, 앨리스의 경우에는 ‘Trouble’이라는 단어로 치환될 수 있었다.
본디 이 소설은 틴에이저, 로맨스와 함께 추리물의 성격을 띠고 있었다. 나는 그 요소를 다시 차근차근 활용했고, 어떤 사건이 벌어지면서 앨리스가 자연스럽게 학교 사람들과 친해지는 이야기를 쌓아올렸다.
어둠을 틈타 학교에서 벌어지는 무차별 연쇄 살인······은 물론 아니고.
우유 도둑 사건.
그 범인이 누구인지를 추리해 가는 과정 속에서 앨리스는 새로운 친구들을 사귀게 된다.
연재는 당연히 호평이었다.
당장 ‘About T’의 가장 큰 팬인 케이트 무어만 봐도 알 수 있는 사실이었다.
“신, 하나만 물어볼게.”
“······뭔데.”
“범인 누구야. 제발 가르쳐 줘.”
아. 그냥 예전처럼 속내를 숨기고 살도록 놔두는 건데.
괜히 참견했나.
틱틱대는 태도는 여전한데 묘하게 살가움이 한 스푼 정도 섞여서, 나만이 느끼는 괴리감 때문에 괜히 불편했다.
그래도 내 소설을 읽으며 즐거움을 얻었다면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기는 했다. 기존의 관계망 속에서 그녀는 여전히 ‘그 케이트 무어’였지만, 얼굴만 봐도 이전 같은 공허함은 많이 줄어든 것 같았다.
‘About T : College’의 앨리스와 마찬가지로 나 역시 현실에서 하나의 사건을 해결한 것 같은 느낌에, 조금 더 편한 마음으로 기말고사를 준비해 나갈 수 있었다.
그 기조는 가을 학기 때와 비슷했다.
일단은 최선을 다해 준비하기는 하지만, 내 정해진 루틴을 깰 마음은 없었다. 알렉사와 데이트도 하고, 소설도 쓰고, 심심할 때는 차를 몰고 여기저기 다니기도 하고. 너무 무리하지 않는 선에서 준비를 해 나가던 와중, 나는 이 기조의 문제점을 발견했다.
그건 바로, 나 이외의 사람이 이 루틴을 방해할 수도 있다는 사실이었다.
가을 학기 때 들었던 ‘소설 비평 이론 I’의 확장인 ‘소설 비평 이론 II’ 수업.
수업 명에서 알 수 있다시피, 작품 하나를 선정해 다양한 각도에서 비평하고 그 이론에 관한 설명을 듣는 커리큘럼의 강의였다.
하지만 기말고사가 찾아오면서 그 수업이 생각도 못한 방향으로 커브를 던졌다.
“에······ 그러니까······.”
그 수업을 맡은 교수는 희끗한 백발이 매력적인 백인 남성, 르네 맥코이.
목소리가 워낙 작아 우리는 그 수업에서 항상 귀를 쫑긋 세워야 했는데, 거기다 말의 속도까지 느려서 과제를 발표하는 순간에는 다들 엄청난 긴장 상태가 될 수밖에 없었다.
“이번, 기말은······ 과제로······.”
압니다. 알아요.
젠장, 왜 대학에는 항상 이런 교수님이 계시는 거지.
“대체하겠습니다······. 하지만 이제, 여기에······ 팀을, 구성해서······.”
숨넘어가겠다!
“그럼······ 발표, 하겠습니다.”
마치 머리만 빼고 털을 몽땅 밀린 푸들처럼 푸들푸들 떨며 돌아선 교수님은 칠판에 대고 백묵으로 글씨를 적어나갔다. 그의 성향을 그대로 드러내는 듯한 고풍스럽고 우아한 글씨체였다.
그리고 서서히 완성되는 문장을 본 나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기말 과제 : ‘영웅 설화’를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작품의 분석 비평 발표.》
“······잉?”
턱을 괴고 있다가 목울대를 울릴 수밖에 없었다.
영웅 설화라니.
‘이건 완전 내 전문 분야인데.’
당장 떠오르는 작품만 해도 수십 가지였다.
그리고 듀프리 교수가 영겁처럼 느껴지는 시간을 거쳐 다시 뒤를 돌아보고, 이야기했다.
“팀은, 3인으로······.”
그러자 어째 많은 시선이 느껴졌다.
실제로 그랬다. 스무 명이나 되는 이 스탠퍼드 대학교 문예창작과 1학년생은 모두 순간적으로 나를 돌아본 것이었다.
여전히 느릿하게 수업의 종료가 선언되었고, 르네 듀프리 교수가 천천히 밖으로 걸어 나가는 동안 학생들은 금방이라도 자리에서 일어설 것처럼 몸을 움찔거렸다.
그 느릿한 나무늘보 같은 움직임이 강의실 밖으로 나간 직후, 우르르 자리에서 일어선 학생들이 나를 돌아보았다.
“신!”
“신, 나하고 같이 하자!”
“우리 팀으로 와 줘!!”
“······.”
어째 이렇게 되리라고 예상은 했다만.
원래도 나는 팀 과제에서 선호 받는 편이었으나, 지금 이 반응은 굉장히 남달랐다. 다들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내게 다가왔고, 원 안에 갇힌 꼴이 된 나는 뭐라 할 말을 잃고 말았다.
‘아니, 진짜 내 전문이긴 한데.’
애초에 장르 소설이라는 것이, 대부분 영웅에 관한 이야기였다.
영웅. 위대한 업적을 이루는 자.
사건 중심에 확실한 주인공이 있는 장르 소설은, 대부분 영웅 설화와 유사한 경향성을 보일 수밖에 없었다. 그렇기에 장르 소설, 특히 소드 앤 소서리 같은 류의 작품은 주로 기사도 문학이나 고전 설화에서 그 기틀을 따온 작품이 많았다.
무엇보다 즐겁게 시간을 때우려고 읽는 것이 장르 소설인데, 주인공이 별 볼 일 없는 모습만 보인다면 무슨 재미로 읽겠는가?
그리고 어찌 되었든 나는 장르 소설 작가로서 활동하고 있었다.
말인즉슨, 나는 그것에 대해 제법 빠삭하다는 뜻이었다.
‘그걸 순간적으로 포착하고 움직인 이 녀석들도 신기하군.’
어이가 없어 아무 반응도 안 하고 있자니, 누군가 학생들 사이로 손을 뻗어왔다.
“같이 할까? Brother?”
“······누가 너하고 형제냐.”
나는 이 자리에서 바로 답을 내리긴 이른 문제라고 생각하며 존 스미스의 손을 쳐냈다.
‘누구랑 할지 좀 생각을 해 봐야겠어.’
어차피 계속 마주치는 얼굴들이고, 내 입장에서는 너무 범위가 포괄적이라 생각을 정리할 시간이 필요한 주제였다. 그러다가 마음 맞는 사람들끼리 먼저 팀을 맺는다 해도 큰 상관은 없었고.
그렇게 결론을 내린 순간, 누군가가 더욱 직접적으로 말을 걸어왔다.
“신, 나하고 하자.”
우리 학과의 단 둘뿐인 동양인 중 하나, 레베카 웡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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