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ecame an American Retro Novelist RAW novel - Chapter (181)
181.
마치 이런 느낌이었다.
누군가 침대 위에 나를 묶어놓고 딸기를 장식한 쇼트케이크를 계속 퍼 먹이는 기분.
처음 먹을 때는 맛있으니 기분이 좋다가도, 급격하게 오른 당과 지방의 조화로 인해 금방 고통이 찾아온다.
문제는 쇼트케이크는 멈추지 않고 입안으로 들어오고 있다는 점이었다.
그렇게 두 시간에 걸친 합평회가 끝이 났다.
‘속이 느글대는 느낌이군.’
안 좋은 점이 한두 개 정도 언급이 될 법도 했건만,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다들 입에 침이 마를 정도로 ‘Country of losers’를 칭찬해댔고, 그것을 들으면서 나는 수업이 끝나고 동기들이 찾아와 광고비(?)를 요구하더라도 군말 없이 줘야겠다고 생각했다.
다행히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대신에 사인회가 열렸다.
옆자리에 앉은 존 스미스가 수업이 끝나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말을 걸어오면서부터였다.
“시, 신! 사인 좀 부탁해도 될까?”
“응. 그래.”
나는 감정을 잘라내고 말해야 했다.
그러지 않으면 부끄러워서 버틸 수 없을 것 같았기에.
존을 시작으로 곳곳에 있던 학생들이 내 주변으로 모여들었다. 그리고 이상하게도 다들 침묵을 지키는 내 태도를 자기들 멋대로 해석했다.
“역시 현역 인기 작가야! 사인해 달라니까 당연하다는 듯이 반응해······!”
“얼마나 많은 곳에서 사인 요청을 받으면 그렇겠어?”
“멋지다. 나도 사인 부탁해도 될까?”
“······.”
얘들아. 나 너희하고 같은 학교 같은 학년이야. 이러는 거 부담스러워.
그렇게 말하고 싶은 기분을 꾹꾹 참아가며 동기들이 내미는 책에 사인을 계속 이어 나갔고, 마침내 마지막으로 눈앞에 선 사람을 물끄러미 올려다보았다.
레베카 웡이었다.
“책, 잘 읽었어.”
사인을 요구하는 대신 가볍게 인사를 건네 오는 그녀.
“네가 했던 말이 좀 이해가 가더라.”
“고마워. 그런데 내가 했던 말이라니, 뭘 말하는 거야?”
“내가 네 신작을 좋아할 거라고 했던 말. 기억 안 나?”
“아, 그거. 나지.”
“인정하기는 쉽지 않았지만, 정말 좋았어. 그래서 묻고 싶은 게 하나 있는데.”
“응.”
“이게, 장르 소설이니?”
“······그게 그렇게 중요한 문제야?”
“나에게는. 나는 장르 소설을 읽어 본 게 거의 없으니까.”
“뭐, 추천이라도 좀 해줄까?”
“그래 주면 고맙지.”
순간 눈을 빛내는 레베카.
그 앞에서 나는 별생각 없이 대답했다.
“‘재능 있는 리플리’는 어때. 아니면 ‘제인 에어’라든가.”
“제인 에어는 아는데, 그걸 장르 소설로 구분한다고?”
“아주 훌륭한 로맨스 소설이지.”
싱긋 웃으며 대답하자 레베카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글쎄, 제인 에어는 사료적 가치도 뛰어나고 그 시대 사람들의 생각을 엿볼 수도 있는 좋은 문학 작품이라고 생각하는데.”
“그런 요소가 있으면 장르가 될 수 없다는 말이야?”
“······음.”
“그러면 이건 어때. ‘디텍티브 램’ 시리즈. 2차 세계 대전 직후를 그린 탐정 소설이지. 이런 작품이 미래에는 사료적 가치가 있지 않을까? ‘재능 있는 리플리’도 그렇고 말이야.”
“그 소설은 어떤데?”
“그건 네가 읽어 보고 판단했으면 좋겠는데.”
대화를 나누던 중 나는 문득 느껴지는 부산스러운 분위기에 문득 주변을 살펴보았다.
“제인, 에어······.”
“재능 있는······ 리플리.”
내가 한 말이 무슨 학교 과제라도 된다는 듯이 노트에 적고 있는 학생들이 보였다.
환장하겠군.
***
레베카 웡은 자신의 가장 큰 장점 중 하나로 행동력을 꼽았다.
그녀는 그날의 수업이 모두 끝나자마자 신으로부터 추천받은 소설을 사기 위해 학교 밖으로 나갔다.
그리고 서점에 들러 직원에게 ‘재능 있는 리플리’가 있는지 물어보았고, 있다고 하자 아무 망설임 없이 구매했다. 그러고는 곧장 책 뒤편에 적혀진 소개 문구를 읽으며 밖으로 나왔다.
‘‘재능 있는 리플리’는 미국의 범죄 소설가, 퍼트리샤 하이스미스가 1955년에 집필한 범죄 소설이다. 주인공인 톰 리플리의 심리 변화와 그에 따른 범죄 행각이······. 오호라, 추리 소설이라고 보면 되는 건가?’
제인 에어도 추천받았으니 함께 구매할까 했지만, 이미 책이 본가에 있고 예전에 읽어 봤던지라 굳이 사지는 않았다.
그 대신, 그녀는 기숙사로 돌아오는 내내 제인 에어의 내용을 머릿속에 떠올리며 신이 말했던 ‘장르’의 속성과 결부해 생각해 보았다.
‘제인 에어’는 영국의 소설가 ‘샬럿 브론테’가 ‘커러 벨’이라는 남자 필명으로 쓴 소설로, 주인공인 제인의 격정적인 인생을 다룬 작품이었다.
제인은 삶과 투쟁하는 존재로서 많은 문제를 만나지만, 꿋꿋하게 버텨내고 자신과 세상 사이에서 고민을 거듭하며 성장한다.
특히 책의 마지막에 나오는 ‘독자 여러분, 나는 그와 결혼했습니다.’라는 문장을 읽은 순간, 어린 시절의 레베카는 이루어 말할 수 없는 큰 기쁨을 느꼈다. 소설을 읽으면서 내내 자유로워졌으면 했던 제인이 그 꿈을 이루었다는 생각에 감격했던 기억이 새삼스레 떠올랐다.
‘흐음.’
거기에까지 생각이 이르자, 또 여러 가지 생각이 뻗어 나갔다.
신은 왜 ‘제인 에어’를 훌륭한 ‘장르 문학’이라고 표현했을까.
분명 ‘연애’가 작품에서 중요한 요소로 다뤄지기는 하는데······ 그런 요소 때문에 장르라는 걸까?
그 해답을 찾고자 레베카는 기숙사 방으로 돌아와 저녁으로 사 온 샌드위치를 옆에 두고 먹으면서 ‘재능 있는 리플리’를 읽기 시작했다.
작품은 생각보다 훨씬 흥미로웠다.
‘톰 리플리’라고 하는 캐릭터가 범죄에 발을 들이고 이후에 어떻게 수습하는지, 그 모든 과정 하나하나가 레베카의 마음을 빼앗았다.
마음의 어딘가가 크게 결여된 인물을 이해하는 과정은 큰 즐거움으로 다가왔고, 정신없이 읽다 보니 어느새 하루가 다 지나갔다.
“후우.”
자정을 막 넘긴 시각.
레베카는 ‘재능 있는 리플리’를 앞에 내려 두고서 고민에 빠졌다.
‘결론을 못 내리겠어.’
장르 문학과 순수 문학의 차이는 무엇인가.
‘재능 있는 리플리’는 2차 세계 대전 직후 이탈리아와 유럽 곳곳의 풍조, 다시 말해 그들이 미국인을 어떻게 대하는가를 엿볼 수 있는 좋은 소설이었다. 냉전 분위기에다 패전으로 가난해진 그들은 미국인의 비위를 맞출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
그런 디테일이 부와 권력을 추구하는 주인공, 톰 리플리의 개성을 더욱 부각했다.
태생부터 ‘거짓말쟁이’였던 그는 타인의 인생을 완벽하게 연기하면서 자신에게 다가오는 위협에 맞섰다.
레베카는 그러한 내용의 소설을 읽으면서, 그 안에 담겨 있는 깊은 메시지에 감탄을 금치 못했다.
그래서 지금까지의 자신에 대해 더욱 의심이 들 수밖에 없었다.
마치 ‘더 북’의 존재를 알아 버린 일개 시민처럼 말이다.
‘내가 아는 모든 지식이, 결국 남에게서 배운 거잖아.’
어쩌면 내가 나의 것이라 생각했던 철학과 이성이 사실은 그렇지 않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신이 왜 ‘Country of losers’를 읽어 보라고 했는지 알겠어.’
일단 신이 말한 의미는 깨달았다.
부끄러워졌다.
장르 문학을 함부로 순수 문학보다 열등하다고 여겼던 자신이 참으로 편협했다는 사실을 깨닫고 말았다.
또한 신에게 말했던, ‘왜 깊이 있는 소설을 쓸 수 있으면서 ‘About T’는 그렇지 않아?’라는 질문이 얼마나 치졸하고 오만했는지를 자각했다.
그렇기에 더 알고 싶었다.
“후우.”
힐끔 옆을 돌아본 레베카는 아직까지 자지 않고 책상 앞에 앉아 있던 룸메이트를 불렀다.
“사라.”
“으, 응?”
“혹시 장르 소설 가진 거 좀 있니?”
“······음.”
“한번 읽어 보고 싶은데 빌려 줄 수 있어?”
사라의 굽은 어깨 위에 달린 머리가 약간 흔들렸다.
루이지애나 출신의 그녀는 심약한 성미를 가진 백인 소녀로, ‘About T’의 앨리스에게 강한 동질감을 느끼고 있었다. 그렇기에 언제 어디서나 자신이 할 말은 딱딱 하는 레베카를 약간은 무섭게 여길 수밖에 없었다.
······레베카 본인은 전혀 모르는 사실이었지만 말이다.
“으, 음. 어떤 게 좋을까? ‘About T’?”
“그건 다 읽었어. 다른 거 뭐 없어?”
“나, 나도 많이는 없어서······.”
책상 위의 좁은 책장을 뒤적거리던 그녀가 책 한 권을 꺼내들었다.
“이건 어때?”
‘브이’ 작가가 쓴 ‘디피스트 던전’의 단행본 1권.
음험한 동굴 앞에 선 망토를 입은 남자의 그림이 마음에 들어 사 온 책이었다.
그것을 받아 든 레베카가 눈을 빛냈다.
“고마워.”
“아, 아냐. 재미있게 봐~.”
“주말에 시간 되면 같이 장르 소설 좀 사러 갈래?”
“그, 그럴까?”
거절도 하지 못하고 곧장 승낙해 버리는 심약한 사라.
“좋아. 끝나고 영화도 같이 보자.”
반면 장르 문학에 관한 관심이 생긴 레베카는 당당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
내가 생각하는 작가의 고질병이 하나 있다.
그것은 바로 ‘영감’을 받으면 멈출 수가 없다는 사실이었다.
이 ‘영감’을 스스로 찾아 나서는 작가도 있고, 자신만의 루틴으로 찾아오게 만드는 작가도 있으며, 끊임없이 떨어지지 않는 작가도 있는데다가, 어찌어찌 꾸역꾸역 쓰면서 얻어 나가는 작가도 있다.
나는 명백하게 그중 두 번째였다.
그리고 때때로 네 번째 경우가 되기도 했다. 보통 생각이 많아지면 그랬다.
이 원고를 어떤 식으로 구성할까. 어디서부터 쓸까.
생각 하나하나가 머릿속에 부유하는 느낌이었다. 그리고 이러한 상태는, 글을 쓰기 위한 고민을 끊임없이 붙잡아 구체화하는 과정을 전제로 두고 이루어져야 성립했다.
쓰고 싶은 부분이 너무나도 많은데, 그것들이 두둥실 떠오른 채 제대로 내려올락 말락 하는 상태.
그래서 좀 괴로웠다.
그럼에도 내가 집필이란 행위를 사랑하는 이유 중 하나는, 이 인고의 시간이 지난 끝에 찾아오는 해방의 순간이 너무나도 달콤하다는 사실이었다.
그때가 되면 마치 일류 운동선수가 ‘ZONE’에 들어가듯이 어마어마한 집중이 일어났다. 내가 소설인지 소설이 나인지 모르겠다 싶을 정도로.
그렇게 일주일이 흘렀고, 나는 2만 5천 단어 분량의 원고를 완성해냈다.
가제는 ‘Country of losers : Part 2’.
‘피곤해 죽겠군.’
이른 새벽, 해방감과 탈력을 동시에 느끼면서 나는 의자에 추욱 늘어졌다.
나는 아직 워드 프로세서나 ‘APPLE II’같은 PC로 넘어가지 않고 타자기를 사용했다.
워낙에 타자기라는 물건에 익숙해져 있어 그다지 불편함을 느끼지는 못했고, 거기에 더해 ‘하드보일드 나인 싸우전드’라는 물건이 나에게 주는 의미가 특별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몸체 옆 부분에 ‘R.T. Chandler’라는 서명이 각인된 검은색의 묵직한 기계장치.
시대가 시대인 만큼 절대 그 유명한 작가인 레이먼드 챈들러의 타자기일 수는 없었지만, ‘하드보일드’라는 네이밍이 주는 의미도 그렇고, 되도록 오래도록 쓰고 싶다······고 생각했었다.
2만 3천 단어 정도를 썼을 때까지는 말이다.
그즈음에 갑자기 ‘Z’ 글쇠가 망가졌다.
분해해서 확인해 볼까 싶었지만, ‘Z’가 자주 쓰이는 알파벳도 아니고, 한껏 달아오른 이 집중력이 흔들릴 것 같아서 그냥 그대로 써나갔다.
그렇게 수업에 나가면서 그 밖에 남는 시간을 모조리 다 투자한 끝에, 거듭된 전쟁을 수행하며 손가락 하나가 잘리고 만 것 같은 이 녀석과 함께 원고를 완성하는 데 성공했다.
‘고생 많았다.’
나는 불편한 몸으로 사투를 끝마친 소중한 전우를 쓰다듬으며 빙긋 웃었다.
어디 수리를 맡길 만한 곳이 있을까. 그렇게 생각하며 글자가 빼곡하게 적힌 원고를 책상에 대고 탁탁 쳐 정리하던 중, 코도 한 번 안 골고 자고 있던 존 스미스가 잠에서 깨어났다.
“으어어······.”
“일어났어?”
“어, 으으······. 밤, 샌 거야?”
“어쩌다 보니.”
“4일째 아니야?”
“정확히는 3일. 자면서 불편하지는 않았어?”
“난 괜찮아. 오히려, 타자기 소리가 뭔가 규칙적이니까 편해서······.”
길게 하품한 녀석이 자리에서 일어서 세면도구를 챙겨 들고 방 밖으로 나갔다.
나는 수업에 가기 전에 사이먼에게 팩스로 부치고자 다시 원고를 정리해 순서를 확인했고, 그러는 사이 씻고 돌아온 존 스미스가 내 쪽으로 뭔가를 스윽 내밀었다.
“여기.”
“응?”
캔 커피였다.
“잠 잘 자게 해 준 보답. 다음에도 잘 부탁해.”
“음, 가능할까 모르겠는데.”
“어라, 왜?”
“아무래도 망가진 것 같아서.”
“타자기? 언제?”
“대충, 아까 막 쓰기 시작했을 즈음이던가.”
“······근데 계속 썼어?”
“고장 난 게 ‘Z’라서 그렇게 힘들지는 않았어.”
A나 E, I 같은 키가 망가졌으면 꼼짝 없이 못 썼을 텐데, Z라서 그나마 대체할 단어를 생각하면서 쓸 수 있었다.
그 설명을 들은 존은 커다란 눈을 껌뻑거리며 말을 이었다.
“진짜 대단하네. 너는 단어도 엄청 많이 아는구나.”
별 이상한 곳에서 감탄한다 싶었다.
어쨌든 건네받은 캔 커피를 단숨에 마시고 원고를 마저 정리한 다음, 어차피 같은 수업이었던 터라 존과 함께 기숙사를 나왔다.
오늘도 여전히 쾌청한 날씨였다.
나는 카페인과 밝은 햇살을 맞으며 비몽사몽 차에 시동을 걸고 출발했다.
“운전, 괜찮겠어?”
“괜찮아. 여기에 다니는 차가 많은 것도 아니고.”
그렇게 문리과대학 행정실로 가서 팩스를 보낸 뒤, 첫 수업인 독일어 강의를 듣고자 다시금 이동했다. 거의 도착할 때쯤 슬슬 잠이 깨기 시작해서 겨우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나는 원형 강의실 안으로 들어서며 먼저 와 있던 다른 동기들과 인사를 나눴다.
“신, 왔어?”
“좋은 아침!”
“안녕.”
다들 먼저 인사를 건네 와서, 슬쩍 웃으며 그것을 하나하나 되갚아 주던 찰나였다.
누군가가 근처에서 벌떡 일어서는 것이 힐끗 보였다.
‘레베카?’
가방에서 공책을 하나 꺼내든 그녀가 내가 오기를 기다렸다는 듯 성큼성큼 다가와서는 다짜고짜 말을 걸었다.
“잠깐, 얘기 좀 할 수 있을까?”
눈 밑이 시꺼멓다.
나처럼 잠을 못 잔 건가?
“무슨 일 때문인데 그래?”
“소설 좀 평가해 줬으면 해.”
“······응?”
너무나도 갑작스러운 이야기에 나는 눈을 동그랗게 뜰 수밖에 없었다.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