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ecame an American Retro Novelist RAW novel - Chapter (192)
192.
모 독재자 때문에 한 끗 차이로 콧수염의 아이콘이 되지 못한 불운의 사내, 찰리 채플린은 이렇게 말했다.
‘삶은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요, 멀리서 보면 희극이다.’ 연기 수업을 받던 도중 지나가듯 들은 말이었다. 알렉사 플레어는 최근 들어 그 말이 굉장히 자신에게 어울린다고 느꼈다.
‘About T : TV Series’가 방영을 시작하고 많은 것이 바뀌었다.
그녀를 멀리서 본 이들은 다들 축하를 전해왔다.
[알렉사~! 축하해! 네가 배우가 되다니!] [이제 성공하는 일만 남았네!] [너, 잘 됐다고 우리 잊으면 서운하다?]졸업 후에 한 번도 연락이 없던 치어리더 클럽의 친구들에게 전화가 걸려 왔다. 그럴 때마다 알렉사는 ‘고마워~! 잘 지내지?’ 하고 반갑게 대답해 주었고, 이런 일로라도 연락이 와서 다행이라고 여겼다.
그 뒤를 이어, 현실에서도 이래저래 치이는 그녀였다.
먼저, 가족들.
“알렉사, 요즘 일은 좀 괜찮니?”
“응, 너무 즐거워요.”
“너 텔레비전에 나오는 거 보고 주변에서 다들 멋지다고 난리더라.”
“와, 진짜요?!”
“열심히 하는 모습이 보기 좋구나. 그래도 힘든 일 있으면 꼭 말해줘야 한다?”
언제나 자신을 북돋아 주는 가족들.
그리고, 가끔 들르는 코믹북 스토어의 친구들.
“······.”
“······.”
“······.”
“후우.”
다들 매대 뒤에 숨어서 잔뜩 눈치만 살폈고 알렉사는 한숨을 내쉬었다.
“저기, 이제 좀 적응할 때도 되지 않았어요?”
“우, 우.”
벼락이 떨어져 나무에 붙은 불을 보고 두려워하는 듯한 네안데르탈인 같은 짓을 하는 코믹북 스토어의 너드 가이들.
이전 ‘더 치어리더’ 시절에 먼저 다가가 겨우 경계를 풀었더니만, 이제 ‘더 액트리스’가 되면서 내적 친밀도가 다시 초기화된 것 같은 모습이었다.
‘야, 네가 가.’
‘아니야. 네가 가!’
서로 다 들리는 말을 수군덕거리는 너드 가이들.
그리고 앞으로 나선 마이클이 종이 한 장을 들고 부끄러운 듯 다가와 말했다.
“저, 사인 좀 해주실 수 있나요.”
“······.”
잠깐 굳어져 있던 알렉사는 이내 지금 상황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소리쳤다.
“으앙!”
지금 느끼는 이 모든 고통은, ‘현실은 절대 그렇지 않다.’라는 사실로부터 기인했다.
***
‘About T : TV Series’는 순항 중이었다.
시청률 지표만 하더라도······ 알렉사는 자세히 알지 못했으나, PD나 작가가 지나가듯이 말하는 ‘대박’이라는 표현을 여러 번 들었다. 그렇다 보니 촬영장 분위기도 훈훈해졌고, 다들 기분 좋게 촬영을 진행했다.
얼핏 보기에 무난하고 좋은 상황이었다.
문제는 알렉사는 그 안에서 그냥 ‘안경’에 불과하다는 사실이었다.
놀랍게도 대본상의 캐릭터 이름이 그랬다.
‘안경’.
밝은 갈색 스웨터와 안경, 금발을 양 갈래로 땋고 항상 책을 들고 다니는 캐릭터.
작품 내에서의 활약은 거의 없었지만, 스크린에는 자주 등장하는 편이었다. PD와 촬영 감독이 알렉사의 앳된 마스크와 ‘안경’이라는 캐릭터가 이 작품의 ‘틴에이지 감성’에 어울린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정작 대사는 ‘책 빌릴게.’ ‘와, 쟤네가 같이 다니네?’ 정도가 전부였다.
물론, 연기 경력이 전혀 없었던 알렉사에게는 그조차 버거웠다.
촬영 현장에서의 그녀는 이제 막 데뷔한, 그것도 모델 출신의 신인이었다.
실제 화면으로 나오는 드라마와는 달리, 카메라와 촬영 팀이 눈앞에 가득한 상황에서 감정에 이입해 대사를 치는 것은 절대 쉬운 일이 아니었다. NG 한 번이라도 내면 아무리 귀염받는 알렉사라고 할지라도 촬영장 내에 순간 싸늘한 공기가 내려앉을 정도였다.
그럼에도 ‘골든리트리버’는 주어진 일에 감사하고 더 노력했다.
일단은 ‘안경’에게 ‘애니’라는 이름을 붙여 주었다.
그리고 자기 나름대로 설정을 가미했다.
이른바, 인물 해석이었다.
책을 좋아하는 순수한 소녀.
입고 다니는 밝은 갈색 스웨터는 어머니가 짜준 것이다.
도서관 사서인 앨리스에게 약간의 호기심과 친밀함을 느끼고 있으나, 성격이 워낙 소심해서 딱히 말을 먼저 걸지는 못하고 있다.
고등학교 시절, 누군가 지나가듯이 자신에게 했던, ‘너는 나하고는 달리 너무 빛나. 멋지면서도 동시에 약간 나를 초라하게 만들어.’라는 말.
그리고 지금 촬영 현장에서 느끼는 감정까지.
알렉사는 자신의 안에서 자신이 생각한 애니를 찾아내려 노력했다.
그렇게 자신의 기억과 경험, 그 모든 것을 더해서 만든 캐릭터에 애정을 갖고 연기했다.
물론, 그러한 알렉사의 노력을 촬영 현장의 사람들이 알아 주지는 않았다. 그녀의 역할은 여전히 ‘안경’이었으며, 지금도 군중 사이에서 지나가는 역할을 맡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하지만 주변의 사람들은 그런 그녀를 무슨 할리우드 영화의 슈퍼스타 취급하니 부담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고민이 많아요오.”
테이블 위에 털썩 엎어진 알렉사가 앓는 소리를 냈다.
그 앞에 앉아 커피를 마시던 신은 그 모습이 귀엽다고 생각하면서 웃었다.
말은 자신 따위는 별것 아니라고 하면서도, 얼굴을 감추기 위해 선글라스를 쓸 수밖에 없게 된 그녀였다.
그렇지 않으면 가끔 그녀를 알아본 사람이 다가와 혹시 배우 맞냐고 물어보고 사인을 부탁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주변에서 반신반의하던 차에 그런 식으로 한 번 확인이 이루어지면 많은 사람이 연달아 사인을 부탁하고, 심지어는 사진기를 들이밀기도 했다.
알렉사 플레어.
본인은 자각하지 못하고 있지만, ‘About T : TV Series’의 출연을 통해 조금씩 그 이름과 존재가 알려지는 중이었다.
그리고 그 결과는 일로 돌아왔다. 모델 일이 조금씩 늘기 시작하더니, 이제는 주말을 제외하고 평일 내내 촬영을 하는 일이 허다했을 정도였다.
자신 앞에서 징징대는 그녀를 보면서 신은 생각했다.
‘내가 어쩌면 알렉사의 재능을 일깨운 걸 수도 있겠군.’
전생에는 자신이 누구인지, 무엇을 하고 싶은지를 확실하게 찾지 못해 방황했을 그녀.
지금의 모습을 보자면, 다문화가정이라는 자신의 정체성과 외부에 드러나는 금발 백인 미소녀의 모습 사이에서 고민하다 결국은 모델이 되고자 뉴욕으로 간 것 같았다.
하지만 확실한 고민 선택 없이 선택한 결과가 좋을 리가 없었을 터였다.
지금은 전혀 달랐다. 지우, 두피, 그리고 신이라는 친구들과 함께하며 알렉사는 변했다.
스스로 자신의 꿈을 좇아 나가는 친구들을 보면서 자극을 느꼈고, 그녀는 자신에게 주어진 일을 열정적으로 해나가는 중이었다.
그리고 그로 인한 결과는 생각보다 더 거대했다.
말했듯, 본인은 자각하지 못할 정도로.
“신, 나 어쩌면 좋아아.”
“저런, 정말 힘들겠다.”
“······뭐지. 이 기계적인 리액션은?”
볼을 뾰로통하게 부풀리는 알렉사.
신은 순간 식은땀이 흐르는 것을 느꼈다.
만약에 이런 대화를 나누는 상대가 두피였다면 ‘너 잘 나가는데 뭐 고민이냐! 그냥 더 열심히 해!’라고 팩트를 말할 테지만, 지금 눈앞의 상대는 여자친구였다. 서로 감정적인 교류를 하는 입장에서, 이럴 땐 평소보다 조금 더 상냥하게 말할 필요성이 존재한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신이라는 인간은, 그런 쪽으로 많이 취약한 편이었다.
다행히 당황해하는 그의 얼굴을 보고 금방 화가 풀어져 귀엽다며 웃는 알렉사.
그러더니 곧바로 사과를 해왔다.
“미안. 내가 너무 징징거렸나?”
“아니야. 충분히 할 수 있는 고민이지. 특히 코믹북 스토어 애들 일은 진짜 상처 많이 받았겠는데. 서로 모르는 사이도 아닌데 갑자기 그렇게 거리를 두고 다시 두려워하다니.”
“그치?! 너무하지 않아?!”
“······걔들이 장난으로 그랬을 가능성은 없을까?”
“아, 그럴 수도 있나?”
“이따가 같이 가볼까?”
“오늘은 싫어. 신, 너하고 둘이서만 보낼래. 음~ 어디 조용한 곳 없나?”
“······.”
신은 머릿속에 순간 스치는 생각 하나를 지우기 위해 필사적으로 노력했다.
한가로운 하루였다.
그래서 설레기도 했다.
학교도 다시 방학에 돌입했고, ‘Country of losers : Part 2’의 원고도 다 마무리된 상태.
‘About T : TV Series’는 순조롭게 방영 중이었고, 얼마 전에는 ‘Double spy’ 코믹스도 완결이 났다. 그리고 코믹북 스토어에서는 ‘KOG’의 추가 룰북인 ‘Other worlds’를 가지고 계속해서 TRPG 세션이 열리고 있었다.
작품이 끝나더라도 팬들은 그 작품을 계속해서 다른 형태로 소비해 주고 있다는 사실이 이렇게 기쁘게 느껴질 줄은 생각하지 못했다.
바로 그때, 그런 신의 표정을 민감하게 캐치한 알렉사가 물었다.
“그러고 보니, 2부 제목이 뭐라고 했었지?”
“‘Universe of losers’.”
“‘Country에서 Universe라. 스케일이 확 커지네?”
“본격적으로 더 북으로 인해······.”
“아! 아! 스포일러 금지!”
“직접 읽어 볼래?”
“응! ······많이 어려울까?”
“괜찮을 거야.”
신은 확신에 차 대답했다.
사이먼 카버의 도움을 받아 최선을 다해 수정한 작품.
전작에 비해 보다 더 거대한 이야기를 다루기에 붙인 제목, ‘Universe’.
분명히 쉬운 소설은 아니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아예 이해하지 못할 정도로 어려운 글이 아닐 수 있도록 노력했으니까.
***
어두운 방 안.
“후우.”
토런스 뉴 미디어의 사장, 레미 마틴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 앞에는 바로 오늘 발매된 ‘Country of losers’의 2부, ‘Universe of losers’가 놓여 있었다.
전작과는 반대로 흰색 표지에 검은색으로 그림이 그려져 있는 것이 무척 인상적이었다.
레미는 책을 들어 한 번 살펴보았다.
이번에도 마찬가지로 하드 커버. 상단의 제목 아래에 자리 잡은 일러스트는 검은 구체 안에서 연기 같은 것이 스멀스멀 올라오는 듯한 형상으로 그려져 있다. 사람의 손처럼 보이기도 했고, 비명이 형상화된 것 같기도 했다.
‘국가 다음에는 우주라.’
급격한 스케일의 상승이 느껴졌지만, 제목 상의 ‘Country’라는 단어가 절대 일반적으로 통용되는 국가를 뜻하는 말이 아니라는 점을 상기한다면······.
‘그래, 유니버스도 절대 그냥 유니버스가 아니겠지.’
그 사실을 이해하는 자신이 불편하게 느껴졌다.
레미 마틴.
소설이란 것을 그저 돈을 벌기 위한 수단으로서 쓸 뿐, 그런 허구의 세계에 빠져드느니 차라리 몸을 움직이고 진짜 세상과 소통하는 편이 여러모로 남자의 삶과 맞닿아 있다고 생각해 왔던 남자.
하지만 여러 가지 편견으로 얼룩진 그의 기준은, 확실히 박살 났다.
정말 재밌었다.
······어느 순간에는 스스로 잠까지 줄여 가며 소설을 탐독할 정도로.
사업가로서 그는, 비즈니스를 하는 사람이란 응당 미래를 예측하고 움직일 줄 알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타입이었다. 그렇기에 ‘인터넷’이 등장한 이후의 미래 시대를 정확하게 예측한 것 같은 이 ‘Country of losers’를 읽고 많은 생각이 들 수밖에 없었다.
미래를 예측하는 일은 정말 어려웠지만, 사실 그 골자는 지극히 단순했다.
‘바로 사람을 보는 거지.’
사람들의 심리를 읽고 어떻게 행동할지 분석한다.
그리고 그로써 드러날 결과를 예측한다.
레미 마틴의 안에 있는 비즈니스와 인간에 관한 생각은 이 소설에 대한 흥미를 더 부추겼다.
사실, 오히려 그는 ‘더 북’에 관해서는 신경조차 쓰지 않았다.
왜냐고? 인간은 ‘더 북’이 있으면 분명히 굴종하고 복종할 테니까. 그가 아는 인간은 그런 식으로 만들어졌으니까.
하지만 그렇게 되어 버리고 마는 인간의 모습을 구체적으로 묘사해낸 신 작가의 통찰력에는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며칠 밤을 새우며 소설을 다 읽었고, 그는 인정하기 싫은 부끄러움을 느꼈다.
‘내가 소설에 이렇게 깊이 빠져들다니.’
‘리얼 월드’ 운운하면서 종이 위의 활자보다는 현실에서 진짜 삶을 경험하는 것이 더 가치가 있다고 주장했던 자신이, ‘Country of losers’를 통해 소설을 읽는 즐거움을 깨달았다.
하지만 레미는 쉽사리 그 사실을 인정하고 받아들이지 못했다. 수십 년 동안 자신의 분야에서 성공을 거듭해 오면서, 어느 순간 찾아온 약간의 공허감조차 더 큰 성공으로 이겨냈던 그였다. 그런 남자에게 자신의 신념은 마치 살아온 인생과도 같았다. 쉽게 꺾을 수는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발매된 당일, ‘Universe of losers’를 사 왔다.
‘일이니까. 일.’
2부의 유통은 자신이 맡기로 했으니 미리 읽어야 하지 않겠나.
······이전에 했던, ‘소설 파는 사람이 소설은 읽어서 뭐해?’라는 생각은 이미 접어둔 지 오래였다.
담배를 뻑뻑 피우며 책을 펼쳐 들고 읽기 시작했고, 첫 문단을 본 순간부터 레미 마틴의 정신은 방금 자신이 있던 서재에서 떠났다. 그리고 더 북이 지배하는 미래의 지구로 옮겨갔다.
그는 인정하지 않았지만, 이미 신이라는 작가의 포로가 되었다.
‘니콜라이 카르다쇼프라.’
소련의 천문학자가 주창했던 가설을 따라, 인류가 ‘더 북’에 도움으로 도달한 머나먼 미래로 옮겨가는 이야기.
그 첫 문장부터 강렬히 가슴에 불이 붙었더랬다.
그 이유는 무의식에 기인했다.
[나, 모험이 하고 싶어요!]본인조차 기억하지 못하는 머나먼 과거, 레미 마틴은 그런 소년이었다.
하지만 어린 시절, 이런 말을 들었다.
‘지구를 탐험하기에는 너무 늦게 태어났고, 우주를 탐험하기에는 너무 일찍 태어났다.’
그로 인해 자연히 성장 과정에서 사라진 꿈.
그 시절의 꿈이 이 소설로 인해 다시 불타오르리라는 사실을 지금의 그는 알지 못했다.
‘SF’, 그리고 ‘디스토피아’.
바로 ‘Universe of losers’로 인해서.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