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ecame an American Retro Novelist RAW novel - Chapter (245)
245.
부우우웅.
차를 몰고 시내로 나가는 동안, 알렉사와 나는 평소와 달리 서로 많은 대화를 나누지는 않았다.
자고로 침묵은 때때로 설렘이 되기 마련이라는 사실을 잘 아는 만큼, 나는 이 순간을 그저 말없이 즐겼을 터였다.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나는 필사적으로 이 어색한 순간을 벗어날 만한 이야기를 생각했으나, 안타깝게도 답은 쉽사리 떠오르지 않았다.
이유는 간단했다.
지금 내 옆에 앉은 사람이 내가 아는 알렉사가 맞는지가 약간 의심됐다.
나는 아무 말도 않고 창문 밖을 바라보는 그녀의 모습을 가끔 확인했다.
······젠장, 솔직히 말하면 지금 이 기괴한(?) 모습마저 귀여웠다.
확실히 중증은 중증이었다.
반짝거리는 킬 힐과 핫-핑크 어깨 뽕 세미 정장. 몇 가지나 되는 색을 배합했는지 자세히는 못 봤으나, 얼굴을 온통 뒤덮은 엄청나게 진한 색조 화장. 거의 폭탄 맞았다 싶을 정도로 어마어마하게 부풀린 금발 머리가 과속방지턱을 넘을 때마다 자동차의 천장에 부딪혔고, 됴이잉- 하고 소리 내면서 완충재 역할을 하는 듯했다.
‘미치겠군.’
이걸 도대체 어떻게 반응해야 하지?
답은 물론, 정해져 있다. ‘예쁘다.’ 그거 하나면 이 상황은 모두 해결이 된다. 내가 꽤나 좋아했던 평소의 스타일과는 전혀 다른 복장인 것으로 봐서는, 아무래도 여러모로 특별히 신경 써서 준비해 온 모양인데, 그런 상황에서 별로라든가 이상하다고 말했다가는 분위기는 최악으로 치닫고 말겠지.
그것을 알기에 나는 일단 이렇게 말을 꺼냈다.
“오늘, 평소와는 좀 다르네.”
그렇다고 평소처럼 무턱대고 ‘예쁘다.’라고 말할 수는 없었다. 알렉사가 지금 자신에게 맞지 않는 옷을 입은 것이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혹시나 내가 계속 그렇게 말했다가, 다음부터 나를 만날 때마다 자신이 원하지도 않는 옷을 무리해서 입고 올 것이 뻔했다.
“으, 응. 이상해?”
“이상하긴. 불편하지는 않아?”
“진짜?! 나, 나는 괜찮아!”
“어떤 모습이든 나한텐 네가 가장 예뻐.”
“아, 응······.”
어떤 모습이든 좋다. 그 말을 듣고 배시시 웃으며 고개를 숙이는 알렉사.
그것으로 말문이 트였다.
나는 그녀가 오늘을 위해 어떻게 준비했는지에 대한 대화를 유도했고, 일전에 봤던 K.H. 에이전시의 모델들이 원흉(?)이라는 사실을 쉽사리 깨달을 수 있었다.
‘미래에도 패션 디자이너들의 센스는 시대를 초월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말이지.’
어째서 이 시대 패션잡지에나 나올 법한 과장된 스타일로 꾸며 왔는지 납득할 수 있었다.
그러면서 동시에 머릿속으로 데이트 장소를 계속 물색했는데, 미리 준비를 해 오지 않아서가 아니라 계획을 변경할 필요성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킬 힐을 신었는데, 오래 걷게 할 수는 없지.’
평소에 우리가 해 왔던 대로 공원 산책이나 윈도우 쇼핑은 어려울 듯했다. 일단 영화관에서 영화를 한 편 보고 카페에 가는 편이 좋겠다고 계획을 수정하면서, 나는 알렉사에게 넌지시 물었다.
“시내 가서 영화나 볼까?”
“응? 아, 좋아. 요즘 무슨 영화 하지?”
“글쎄, 가서 봐야 알 거 같은데.”
왠지 모르게 시작부터 일정이 꼬여 삐걱대는 것 같았지만······ 뭐, 어떻게든 되겠지.
***
한동안 차를 몰아 도착한 시내의 한 영화관.
그곳에서 우리는 두 가지 선택지 중에 하나를 골라야 하는 처지에 놓였다.
그리고 솔직히 말하자면, 두 가지 다 끔찍하게 느껴졌다.
하나는 ‘살인 냉장고의 습격’이라고 하는 공포 영화, 다른 하나는 ‘차이나타운의 골칫거리’라고 하는 굉장히 인종차별적인 뉘앙스가 느껴지는 액션 영화였다.
특히 후자 쪽의 영화 포스터는, 주인공과 히로인 뒤로 푸-만추 수염을 기른 중국인 사내가 사악하게 웃고 있는 것이 무척 인상적이었다.
‘딱히 보고 싶은 영화는 아니다만.’
‘살인 냉장고의 습격’을 봤다가는 안 그래도 예민한 성질의 알렉사가 꽥 기절할 수도 있는 노릇이었으니, 어쩔 수 없이 ‘차이나타운의 골칫거리’로 가는 편이 나을 듯했다.
생각을 마치고 동의를 구하려고 돌아보자, 알렉사가 내 손을 잡은 채 소리쳤다.
“살인 냉장고의 습격으로 갈까?!”
“어? 아냐. 차이나타운으로 가자.”
“나 오늘 왠지 무서운 거 보고 싶은 기분이야!”
그렇게 말하고 앞으로 나선 그녀가 ‘차이나타운의 골칫거리’ 티켓을 사려던 순간이었다.
“아, 손님. 혹시 30분만 기다리시면 ‘작은 새 이야기’를 보실 수도 있는데, 그쪽은 어떠실까요?”
우리의 분위기를 읽었는지 티켓 직원이 친절하게 제안했고, 우리는 티켓 박스 옆에 놓인 작은 팜플렛을 통해서 ‘작은 새 이야기’라는 영화의 포스터를 확인했다.
자그마한 새 한 마리가 나뭇가지 위에서 열심히 날갯짓하면서 이제 막 하늘로 날아오르려는 모습을 그리고 있는 내용의 포스터.
“오호.”
“엄청 귀여워! 이걸로 할까?”
이런 내용이면 무난하게 볼 수 있겠다 싶어 내가 고개를 끄덕였고, 옆에 있던 알렉사도 강렬한 색조 화장 위로 얼굴이 빨개진 것이 보일 정도로 좋아했다.
나와 알렉사는 팝콘에 다이어트 코크를 하나씩 사서 안으로 들어섰다.
앞서 팸플릿에 적힌 시놉시스를 살펴보니 ‘작은 새 이야기’는 ‘올리브솔새’라는 종의 새를 비롯한 작은 새들의 생태를 다루는 작품으로, 이 시대에 가끔 영화관에 배급되곤 하는 일종의 다큐멘터리 영상이었다. 포스터를 보고 예상했던 대로 별일은 없겠다 싶었다.
하지만 이내 시작된 영화는······ 상상도 못한 일을 벌어지게 했다.
영화 시작 후, 대략 한 시간 정도가 흘렀을 무렵.
[올리브솔새는 그렇게 죽습니다.]“으윽, 흑······! 흐그그극!!”
“······음.”
알렉사가 필사적으로 눈물을 참고 있다.
올리브솔새의 삶은 장렬했다. 아킬레우스 저리 가라였다. 혹독한 자연환경에서 살아남기 위해 투쟁하는 그 모습은 지켜보는 우리에게 경외감과 더불어 연민을 느끼게 했다.
포식자의 습격을 피해 열심히 날갯짓해 도망치고 이슬 한 방울을 받아먹으며 목을 축이는 귀여운 올리브솔새였으나, 결국에는 삼라만상의 모든 인과대로 끝이 찾아오기 마련이었다.
[행복한 삶이었습니다. 하지만 자연 속에서 생명은 순환되어야 합니다.]“안 돼······. 안 돼, 케빈.”
어느새 이름까지 지어준 알렉사였다.
위기의 순간(?)임을 직감한 나는 상영관 밖으로 가 휴지를 챙겨서 돌아왔다. 어마어마한 화장을 한 알렉사가 펑펑 울어 버린다면 막을 수 없는 참사가 일어날 것이 분명했다.
최대한 부리나케 서둘렀지만, 상영관으로 돌아왔을 때 이미 늦었음을 직감하고 다리에 힘이 풀리고 말았다.
‘케비이이인······.’ 하고 작게 내는 소리마저 억누르며 오열하는 알렉사.
그나마 다행인 점이 있다면, ‘작은 새 이야기’가 인기 없는 다큐멘터리 영화라 상영관 안에 우리 말고는 아무도 없다는 사실이었다.
알렉사의 옆에 다시 앉은 나는 무려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펑펑 우는 그녀를 설득해 조심스럽게 손을 떼게 만들었고 경악했다.
‘판다가, 되었군.’
당연했다. 눈매를 진하게 만들려고 바른 아이 섀도우가 눈물에 의해서 번졌으니까. 워터 프루프 성능이 뛰어나지 않은 이때의 코스메틱 기술이 못내 원망스러웠다.
나는 침착하게 휴지 끝으로 톡톡 두드려서 눈물을 닦아 주었지만, 알렉사는 계속해서 울었다. 올리브솔새의 죽음 이후로도 한동안 영화는 계속해서 이어졌다.
‘미치겠네.’
알렉사가 영화를 보고 감동해서 우는데, 나는 반대로 웃음이 나왔다.
이 상황 자체가 너무도 사랑스럽게 느껴졌다. 나를 위해 이렇게 ‘꾸며’ 가면서 데이트하러 온 알렉사였으나, 내면은 여전히 그대로였다.
올리브솔새의 죽음에 슬퍼하면서 펑펑 울었고, 코를 훌쩍거렸다. 하지만 이제 곧, 자기 얼굴이 어떤지를 알면 창피해서 죽고 싶어 하겠지.
“으, 으으······.”
“괜찮아?”
“시인, 이 영화 너무 감동적이야아.”
“그래, 그래. 어, 끝나고 나가서 화장실에 가 보는 편이 좋을 거 같아.”
“왜, 왜? 나 얼굴 엉망이야?”
“아니, 나는 예쁜데.”
싱긋 웃으며 말하자 고개를 갸웃거리는 알렉사.
바로 그때였다.
[파랑어치가 죽습니다.]“데이브으으으.”
알렉사가 다시 꺼이꺼이 목 놓아 울기 시작했다.
***
영화가 끝나고 화장실에 간 알렉사는 한동안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이렇게 될 줄 알았지.’
나는 영화관 로비에서 남아 있는 팝콘을 으적으적 씹어 먹으며 그녀를 기다렸다.
1986년의 영화관은 미래처럼 여러 층을 사용하며 많은 상영관을 가지지 않았다. 이곳은 그나마 이 부근에서는 가장 큰 곳이었지만, 자그마한 스낵바와 손님 대기용 로비를 제외하면 딱히 별게 없었다. 아케이드 같은 부대시설이 딸린 미래와 비교하면 굉장히 달랐다.
그래도 입구에서 티켓을 사서 안으로 들어와야 하는 점이라든가, 그 외 여러 감성이 참 마음에 들었다.
‘그러고 보니 ‘시네마 천국’이 몇 년 뒤에 개봉하던가.’
나는 나도 모르게 콧노래로 그 유명한 ‘Love theme’의 멜로디를 흥얼거렸고, 이 당시 영화관이 가진 특유의 분위기를 느긋하게 즐기면서 알렉사가 돌아올 때까지 기다렸다.
그리고 돌아온 그녀는 전투 모드(?)를 해제한 상태였다.
“미, 미안······.”
“좀 진정이 됐어?”
“웅······.”
시무룩해져 고개를 끄덕이는 알렉사.
헤어드라이어로 잔뜩 부풀린 헤어와 복장은 그대로였지만, 전투 모드 아래에 감춰져 있었던 내가 아는 알렉사의 얼굴이 나왔다. 아무래도 화장을 수정해 보려다가 실패해서, 수습하고 수습하다 완전히 지우고 나오느라 시간이 좀 걸린 듯했다.
평소처럼 선크림에 가볍게 립 정도만 바른 얼굴을 보자 괜스레 반가웠다. 뜻하지 않게 오늘 하루 소중한 사람을 두 번 만난 것 같은 기분이었다.
“힝, 미안해······. 오늘 데이트, 뭔가 이상하네.”
“나는 전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데.”
“하, 하지만 나, 영화관에서 완전 펑펑 울어서.”
“슬픈 내용이었으니 당연히 그럴 수도 있지. 안 그래?”
“시이인······!”
알렉사가 내 품에 폭 안겼다. 디요용, 부푼 헤어가 턱에 맞았고 완충재 역할을 했다.
“진짜 너무 좋아! 으, 이해해 줘서 고마워!”
“자자, 그만 처져 있고, 맛있는 케이크라도 먹으러 갈까?”
“응! 케이크는 내가 살게!”
“안 그래도 되는데.”
“아냐! 아냐! 이번에 모델료 들어왔거든! 히히, 꽤 많이 받았어!”
빠각! 빠가각!
킬 힐이 대리석으로 된 극장 바닥을 찍으면서 나는 소리에 돌아보는 사람들.
신이 난 채 내 손을 잡고 앞장서 나아가는 알렉사로서는 그것까지는 딱히 신경 쓰지 못하는 듯했다.
나는 슬그머니 웃으며 그녀를 슬쩍 양탄자 위로 끌었다.
***
이어지는 데이트에서 알렉사는 내내 머릿속으로 한 가지 생각만 했다.
‘진짜 오늘 집에 안 들어가는 거야? 진짜 오늘 집에 안 들어가는 거야? 진짜 오늘 집에 안 들어가는 거야? 진짜 오늘 집에 안 들어가는 거야? 진짜 오늘 집에 안 들어가는 거야?’
배는 안 나왔을까. 어디 이상한 곳은 없을까. 너무 의식해서 이상하게 굴지는 않을까.
자의식과잉에 빠진 사람처럼 시야가 좁아진 채 내내 뚝딱거리는 그녀.
영화관에서부터 시작해 카페를 거쳐, 이제 슬슬 호텔에 가자는 신의 말에 알렉사는 폐나 심장 같은 몸 안의 장기가 입 밖으로 튀어나오려는 듯한 감각을 느꼈다. 몸을 움찔거리며 당황스러운 마음을 수습하기 위해 이렇게 말했다.
“버, 벌써? 이제 오후 다섯 시인데?”
“체크 인 시간 생각하면 좀 더 일찍 갔어야 하긴 하는데······.”
“전에 누구랑 가 봤어.”
“······그, 사이먼하고 조지아 다녀왔잖아.”
“아, 그랬지! 참!”
납득하고 고개를 끄덕이는 알렉사.
전생의 일을 말하지 못하고 순간 죄책감(?)에 시선을 피하는 신을 보면서 머뭇거리던 알렉사가 입을 열었다.
“고, 공원 들러서 산책 좀 하고 갈까?”
“신발, 불편하지 않겠어?”
“부, 불편하기는! 항상 신는 신발인데!”
이제는 아예 발에 감각이 없어져서 괜찮았다.
하지만 어색하고 부끄러운 감정을 날리고자 일부러 더 쾌활하게 행동하는 그녀.
그 모습을 세심하게 지켜보던 신은 내심 걱정이 됐지만, 아주 잠깐 공원을 걷는 정도라면 문제없겠지 생각하면서 차를 몰고 바로 근처에 있는 그리피스 공원으로 향했다.
고지대에 위치한 천문대까지 올라가 차를 세우고 내린 뒤, 두 사람은 길게 뻗은 길을 손을 잡고 걸은 끝에 로스앤젤레스 시내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언덕 위에 도착했다.
“와······!”
두 사람에게 있어서는 특별한 추억이 어린 장소라 그런지, 알렉사도 그곳에서는 긴장이 좀 풀어진 모습이었다.
주중 오후라 주변에 사람은 거의 보이지 않았고, 전세라도 낸 기분으로 빠각, 빠각, 앞으로 걸어 나간 알렉사는 언덕 아래로 펼쳐진 석양을 바라보았다.
“신! 빨리 와!”
방방 뛰느라 머리가 보용, 보용.
“너무 예뻐! 하나님이 팔레트 위에 물감을 섞어 뿌린 것 같아!”
그리고 신이 그 광경을 보면서 느낀 감정은 이루어 말할 수가 없었다.
로스앤젤레스, 1986년.
살짝 매연을 머금은 붉게 시린 석양처럼, 빛바랜 색채로 흘러간 지난 기억 속에도 총천연색으로 빛났던 사람이 존재했었다는 사실이 가슴을 뭉클하게 만들었다.
모든 것이 처음이라 삐걱거리는 그녀의 행동 하나하나가 너무나 사랑스러웠고, 덧없이 사라져 버릴 것만 같은 처연한 아름다움이 함께 느껴졌다.
그로서는 잊고 지냈던, 누리지 못했던 순수가 바로 옆에 있었다.
이 순간을 만들어낸 모든 것들이 너무나도 소중했다.
아마 이것들이 사라지려 한다면, 자신은 모든 것을 내던지고 막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이를 먹으면서 느낀 사실이 있었다. 점차 세상에 찌들며 감정 따위는 사소한 문제가 되어 버린다. 그보다는 지금 눈앞에 닥친 문제의 해결이 우선시되고, 효율을 위해 하나하나 넘기는 일이 많아진다. 그리고 그런 상태를 맞이하게 된 이후로는, 절대 이전으로는 돌아갈 수 없는 법이었다.
그렇기에 다시 떠올릴 수 없다고 생각했던 순수를 잠깐이나마 연기할 수 있도록, 느낄 수 있도록 도와준 알렉사의 존재는, 신에게 있어 그 무엇보다 소중할 수밖에 없었다.
‘아마, 잭도 비슷한 감정을 느끼겠지.’
신은 순간 눈앞이 흐릿해지며 머릿속에 어떤 이미지가 잡혀가는 것을 느꼈다.
너무도 세상에 찌든 ‘남자’이기에, 다시금 맞이한 순수는 그 무엇보다 강렬하리라.
“······예쁘네.”
가까이 다가가며 신은 난간에 몸을 기대고 천천히 석양을 감상했다.
그 옆의 알렉사는 머뭇거리다 이내 천천히 그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그리고 얼마 후.
아무렇지도 않게 갑자기 하늘에 먹구름이 끼더니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어······?”
“아, 오늘 비 온다고 했던가?”
하늘을 올려다보며 고개를 갸웃거리는 알렉사를 본 신은 부랴부랴 그녀의 손을 잡고 왔던 길을 되돌아가기 시작했다.
무슨 마법이라도 부린 것처럼 빗방울은 순식간에 거세졌고, 손을 잡은 채 앞장서 이끄는 신을 따라서 걷던 알렉사는 이내 버티지 못하고 무릎을 꿇었다.
“아······?!”
“알렉사, 괜찮아?!”
“괘, 괜찮아. 걸을 수 있어.”
쏴아아아-.
빗줄기가 쏟아져 온몸을 흠뻑 적셨다. 신이 입고 온 재킷도, 알렉사의 핫-핑크 세미 정장, 모두 천 조각에 불과해졌다.
격한 움직임에 퉁퉁 부은 알렉사의 발목을 살핀 신은 이대로는 안 되겠다는 생각에 겨드랑이 밑과 오금 쪽으로 손을 넣고 들어 올렸다.
“꺅?!”
“조금만 참아. 차까지 갈 테니까.”
“호, 혼자 걸을 수 있어······.”
“내 말 들어.”
신이 단호하게 말하자 우물쭈물하던 알렉사는 순간 빨개진 얼굴을 감추고자 신의 목덜미에 손을 감고 머리를 푹 숙였다.
‘어른’이 되고자 헤어드라이어로 잔뜩 부풀렸던 금발은 푹 젖어 새하얀 뺨에 달라붙었다.
신은 그런 와중에도 계속해서 길을 돌아갔다.
하지만 어찌된 영문인지 보이지 않는 주차장.
‘젠장, 대체 어디야?’
노는 것에도 에너지가 필요하다. 아침 일찍부터 하루 종일 체력을 쓴지라, 이대로 계속 젖은 채 있으면 감기에 걸릴 수도 있다.
아니나 다를까, 알렉사가 금세 몸을 덜덜 떨기 시작했다. 그것을 깨닫고 걸음의 속도를 높이다 보니 거칠게 숨을 몰아쉴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알렉사는 입술을 질끈 깨물고는 고개를 푹 숙인 채로 입을 열었다.
“······미안, 내가 괜히 공원에 오자고 해서.”
“아냐, 아냐. 나도 오고 싶었는데.”
“오늘, 오늘 뭔가 다 엉망진창이네, 정말······.”
거의 울먹거릴 정도로 침울해진 알렉사.
하지만 그녀를 보며 신은 도리어 웃음을 터뜨렸다.
“왜, 왜 웃어?!”
“아니, 아니. 확실히 엉망진창이긴 하구나 싶어서. 오늘 이 일은 평생 기억에 남겠네.”
“으, 으으······!”
“그래도 확실히 알겠어.”
“뭐, 뭘?”
“넌 언제나 예쁘지만, 이런 순간에서 더더욱 예뻐.”
신은 부드럽게 웃으며 놀라서 고개를 번쩍 든 알렉사를 바라보았다.
빗속에서 시선이 교차했다.
불순물이 섞인 술이 아닌, 하늘이 내린 순수한 물에 푹 젖은 두 사람.
때마침 공원관리인용 목조 오두막이 보였다.
마치 오래된 소설 속 구식 클리셰처럼.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