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ecame an American Retro Novelist RAW novel - Chapter (3)
3.
나는 고개를 갸웃거릴 수밖에 없었다.
‘이게 원래 이런 내용의 소설이 아니었을 텐데?’
80년대 최고의 소드 앤 소서리 히트작 중 하나였던 ‘로난 더 바바리안’ 시리즈는 아웃랜드라고 하는 미지의 땅에서 온 야만 전사 ‘로난’의 호쾌한 일대기를 다룬 작품이었다. 가장 낮은 노예로부터 시작해 문명국의 왕이 되는 이야기는 많은 이들에게 대리만족을 주었다.
나도 어린 시절에는 근육질의 거한이 압도적인 힘과 전설의 검으로 자신의 앞을 가로막는 적을 모조리 도륙하는 그 이야기를 무척 좋아했다. 이후 영화로까지 제작되는 ‘로난 더 바바리안’ 시리즈는 미래에도 많은 팬을 끌어들이는 고전 명작으로 남은 작품이었다.
‘그런데 이건 대체 뭐지?’
창-녀왕? 성병?
뭔가 싶어 책의 내용을 다시 자세히 들여다본 나는 이내 어이가 없어 웃고 말았다.
‘로난’이 아니었다. ‘라난’이었다.
Ronan이 아니라 Ranan. 글씨가 워낙 작은 데다가 머릿속으로 로난 생각만 해서 그런지 로난으로 읽고 말았다. 그걸 안 순간, 나는 머릿속 어딘가에 잠들어 있던 기억을 떠올렸다.
라난 더 바바리안 시리즈.
로난 더 바바리안 시리즈가 히트를 치고 뒤따라 나온 패러디 소설이었다.
‘이때는 흔한 일이었지.’
저작권 개념이 미래에 비하면 미흡할 수밖에 없었던 시대라 이러한 작품도 버젓이 존재했다.
페이지를 덮고 표지를 살피니 잡지 역시 ‘Gun’s and sword magazine’이 아니라 ‘Gut’s and storm magazine’이었다.
‘내가 이걸 왜 샀더라?’
순간 의아한 생각이 들었으나 이내 납득했다.
거츠 앤 스톰 매거진은 작품 대부분이 건즈 앤 소드 매거진에 실린 작품의 저열한 성인용 패러디였다. 메이저 잡지에 실리는 작품의 인기에 편승해 부스러기라도 받아먹겠다는 심보였는데, 사람들은 대부분 별생각 없이 자극적인 표지를 보고 그걸 또 읽어주었다.
나는 이 거츠 앤 스톰 매거진을 무척이나 싫어했다.
그만큼 건즈 앤 소드의 작품을 좋아했기 때문이기도 했고, 작품성이라고는 쥐뿔도 없이 자극적이기만 한 이쪽의 작품 성향과도 맞지 않았다.
그럼에도 과거의 내가 이 잡지를 구매한 이유를 어렵지 않게 유추할 수 있었는데, 이번 호 표지가 ‘이 시기’를 기준으로 겁나게 자극적이었다.
금발의 여전사가 비키니 아머를 입고 남성기를 형상화한 듯한 드래곤의 꼬리에 올라타 있는 모습이 열여섯 소년의 은밀한 욕망을 자극했고, 장르 소설과 건즈 앤 소드에 대한 애정을 잠시 내려놓고 이 잡지를 구매한 것이었다. 소설은 역겨웠지만, 중간중간 나오는 삽화는 죽여줬다.
조금씩 옛 기억이 돌아왔다.
이때 장르 소설 업계는 이 시절에 생겨난 문화 콘텐츠 시장이 대부분 그렇듯이 그야말로 혼란 그 자체였다. 이전까지도 장르 소설이라고 하는 개념이 없지는 않았지만, 본격적으로 비즈니스가 커지게 되면서 온갖 출판사가 난립하고 사라졌던 시기가 바로 이때였다.
내가 잠깐 만났던 출판사의 높으신 분은 ‘데드맨즈 헤븐’의 드라마화 계약이 이루어지는 자리에서 이렇게 말했다.
[크, 작가님. 저는 이런 계약이 성사될 때마다 보람을 느낍니다. 예전에는 이러지 않았어요. 이 업계가 주류 문화와는 십만 광년쯤 동떨어져 있었단 말입니다.]그렇게 장르 소설 작가가 되고 본격적으로 업계에 속하게 된 나는 이 시절을 거친 인물을 여럿 만나면서 이런저런 업계의 뒷사정을 듣게 되었다. 내가 어른이 되었을 때는 영화나 드라마, 만화로 미디어 믹스가 진행되며 장르 소설 콘텐츠가 어느 정도 인정받았지만, 지금은 그렇지 못한 시기였다.
나는 이번에는 진짜로 ‘건즈 앤 소드 매거진’을 찾아 읽었다.
200여 페이지의 질 나쁜 펄프로 만든 잡지.
격주로 발매되었으며 열 개 전후의 소설이 연재되었다. 각각의 소설은 대략 다섯 페이지, 2만여 자 전후의 구성에, 나머지 페이지는 D&D의 플레이 로그나 담당 기자들이 쓴 칼럼, 광고와 일러스트가 실렸다. 옛날의 내게는 정말 환상의 실현 그 자체였다.
하지만 물론, 지금은 아니었다.
나이를 먹으며 다시 읽게 된 이때의 소설에는 차마 유머라고 받아들이기 어려울 만큼 인종차별적인 뉘앙스를 담은 글이 다수 실렸다. 소설이란 현실을 반영하는 동시에 영향을 주고받는 것이라고만 생각했는데, 금전적 여유가 생긴 뒤 이때의 소설을 다시 사서 읽으면서 마치 어린 시절이 능욕당하는 듯한 느낌을 받았었다.
그리고 지금 다시 읽어본 건즈 앤 소드 매거진은······.
‘재밌기는 하네.’
나는 씁쓸하게 웃었다.
추억 보정이 있다고는 하지만, 내가 좋아했던 소설을 다시 읽으니 옛 기억도 떠오르고 재미있기는 했다. 로난이 호쾌하게 적의 골통을 까부수고 디텍티브 램이 총을 겨누며 자신의 시그니처 대사인 ‘Get your ass up, freak punk.’를 치자 절로 고개가 끄덕여졌다.
이때의 소설을 나는 ‘날것’ 그 자체의 맛이 있다 평가하고 싶었다.
설정이나 플롯도 무난하고 깔끔하다. 소드 앤 소서리 같은 경우, 영웅이 자신의 소명을 깨닫고 문제를 하나씩 해결해 나간다는 기초적이고 평범한 서사를 취하는 게 대부분이었다. 그리고 미래에는 여러 이유로 기피되는, 근육 빵빵한 금발의 잘생긴 미남과, 그 옆의 섹시한 미녀가 당연한 듯이 쓰였다.
나는 그게 좋았다.
주인공이 행하는 모든 행위가 선이라는 것을 의심하지 않게 하는 그 호쾌함을 사랑했다.
미녀와 사랑에 빠지고 보물을 손에 넣고 악을 단죄하는 단순함이 좋았다.
내가 정말로 사랑했던, 하지만 이제는 나에게 상처 줄 뿐인 소설이 연재되고 있는 시대.
건즈 앤 소드 매거진 한 권을 뚝딱 해치우고 바닥에 내려놓은 나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생각 좀 해보자.’
복잡한 머릿속을 환기하기 위해 나는 덜 자란 몸을 이끌고 벽장 안으로 들어가 문을 닫았다.
어린 시절부터의 버릇이었다. 최근까지도 나는 소설을 쓰면서 머릿속이 너무 복잡해질 때면 어두운 곳에 틀어박혀 생각하고는 했다. 그런 버릇이 대체 어디서 왔나 했더니.
‘바로 여기였나.’
대충 놔둔 쿠션에 등을 대고 앉은 채 나는 기억을 떠올렸다.
상상할 수 있는 최악의 어린 시절까지는 아닐 터였다.
아버지가 강도의 손에 돌아가신 후 어머니와 나는 그 슬픔을 딛고 일어서고자 노력했다. 사람에게는 저마다의 지옥이 있다고 하듯이 그때의 우리가 특별히 불행했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어마어마한 양의 대출금과 그에 못지않은 인종 차별을 견뎌야 했지만, 괜찮았다.
나는 소설을 통해 그걸 이겨냈으니까.
‘그런 경험을 추억이라고 부르는 거겠지.’
어쩌면 그렇기에 더 특별했던 걸지도 몰랐다.
아는 건 없고 모든 게 다 두려웠던 시절, 미지에 대한 공포를 이겨내고 조금씩 앞으로 나아간 끝에 얻은 값진 ‘첫 번째’ 경험이었으니까.
나는 그렇기에 모두가 옛날을 그리워한다고 생각했다.
처음이니까.
그런 건 난생처음이니까.
하지만 어른이 되고 돌아본 나의 ‘처음’은 내가 알던 것과는 사뭇 달랐다.
그렇기에 나는 과거를 그리워할 수 없었다.
‘내가 선택해서 좋아했던 추억은 나의 현실을 부정했으니까.’
그리고 어른이 된 나는 그런 현실과 타협했다.
“후우.”
절로 한숨이 나왔다.
나는 지금 모든 걸 다시 선택할 수 있는 상황으로 돌아왔다.
가난으로 얼룩졌던 어린 시절부터 시작해 작가로서 내가 쓸 소설, 어쩌면 좀 더 나아가 잘만 한다면 업계 자체의 흐름에도 변화를 줄 수 있지 않을까. 적어도 지금 내게는 현재부터 시작해 이후 업계 전체의 변화나 트렌드의 흐름에 대한 대략적인 지식이 있으니까.
아니, 굳이 거기까지 가지 않더라도 적어도 지금 다시 소설을 쓴다면 나라는 작가가 이 업계에 어떻게 기억되느냐 정도는 고를 수 있을 터였다. 어쩌면 그것은 내가 술에 취해 지하실에서 잠들기 직전까지 가장 원해 마지않던 바였다.
나는 어린 시절의 나 자신을 치유할 수 있는 소설을 쓰고 싶었다.
그것 또한 나름의 가치가 있음을 증명하고 싶었다.
‘아니, 굳이 그게 아니더라도.’
이 지긋지긋한 어린 시절의 가난으로부터 하루빨리 벗어나기 위해서라도 나는 소설을 써야 했다.
바로 이곳, 1980년에서.
***
장르 소설을 쓰겠다.
확실하게 마음을 정한 나는 일단 집 밖으로 나왔다.
작가로서 활동하며 나름대로 과거의 업계에 대한 지식이 있다고는 해도, 남들에게 대충 듣기만 해서 그런지 살짝 가물가물했다. 본격적으로 장르 소설을 쓰기 위해서 나는 일단 1980년대의 장르 소설 업계 상황이 어땠는지를 파악해야 한다고 느꼈다.
집에 있는 잡지로는 한계가 있었다. 1980년대는 잡지 말고도 다양한 곳에서 소설이 연재되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나는 코리아타운으로 향했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이후로는 거의 찾지 않았던 곳. 그 모든 기억을 포함해 진실로 이 순간으로 돌아왔다는 사실에 감회가 새로웠다.
나는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어머니가 운영하는 한인 스토어를 향해서 움직였다.
당연히 나를 알아본 한인 상인들이 말을 걸어왔다.
“여! 한신이! 학교 잘 들어갔나?”
“이상한 일은 안 겪었고?”
“네, 걱정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나는 웃으며 인사했다.
정육점을 운영하는 박씨 아저씨. 아버지가 생전에 절친하게 지냈던 사람이었다.
하지만 돌이켜보면 그렇게 좋은 기억은 없었다. 박씨 아저씨는 영어를 잘하지 못해 한인 스토어 운영에 어려움을 겪던 어머니를 조언해준다는 명목 아래에 지독히 굴렸다.
폭언은 기본이고 실제로 물질적인 도움을 준 것도 아니어서, 그냥 생색내듯 잔소리나 했던 사람에 가까웠다.
‘본인이 뭐라고 그랬던 거였는지.’
하지만 나와 어머니는 거기에 익숙해져야 했다.
박씨 아저씨뿐만 아니라 그때 당시의 한인 대부분이 그랬다.
코리아타운은 그저 동향 사람끼리 모여서 지내는 공간이 아니었다. 미국 사회 안의 또 다른 공동체였다. 한인 교회를 중심으로 뭉쳐 정보를 공유하고 서로 물건을 사주면서 말 그대로 다 함께 살았다. 그러다 보니 이곳에서 미움을 받는 행위는 사실상 사회적 자살과도 같았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이후 우리는 철저한 약자가 되었고, 강자에게 기생하면서 그들의 비위를 맞춰줄 수밖에 없었다.
‘새삼 내가 왜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코리아타운을 안 찾았는지 알겠군.’
어찌 보면 참 냉정했던 현실을 느끼며 나는 가게 앞에 도착했다.
그 앞에서 낙엽을 쓸며 서 있던 어머니가 날 발견하고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신이 너, 왜 여기 있어?”
“어머니 일 도와드리려고 왔죠.”
“집에 가서 공부나 하지!”
말은 그렇게 해도 미소를 감추지 못하는 어머니.
은근히 주변 상인들에게 자랑하고 싶은 듯 힐끔거리는 게 사랑스러웠다. ······사실 어머니가 너무 젊게 느껴져서 이질감이 좀 들기는 했지만, 어찌어찌 적응하려고 노력 중이었다.
나는 어머니가 메고 있던 앞치마를 반쯤 억지로 빼앗으면서 말했다.
“가게는 제가 보고 있을 테니까 근처 다방 가서 수다라도 떨고 오세요.”
“괘, 괜찮다니까! 너 이거 일 어려워서 못 해!”
“어차피 파리만 날리고 있는데요.”
“한신!”
“천천히 쉬다 오세요.”
능글맞은 태도로 어머니를 보낸 나는 앞치마를 동여매고 가게 안으로 들어섰다.
아버지와 내 성씨를 붙여 지은 ‘Mr. Han’s store’, 일명 ‘한씨네’에서는 여러 가지 생필품을 판매했다. 아기 기저귀부터 시작해 시리얼을 지나 철제 사다리까지 없는 게 없었고, 아버지가 살아있을 적에는 배달도 겸해서 코리아타운의 감초와 같은 가게였다.
‘물론, 지금은 아니게 됐지만.’
일평생 가정주부로만 살았던 어머니는 가게 운영에 꽤나 애를 먹었고 긴 세월 마음고생을 심하게 했다.
‘어서 글로 돈을 만져서 적어도 마음고생은 덜어 드려야겠어.’
나는 가게 안으로 들어서 계산대로 향했다.
혹시 모를 강도에 대비해 철장을 쳐둔 계산대.
그 앞에는 온갖 잡지와 신문이 가득했다. 나는 개중에서 소설 연재가 이루어지고 있는 활자 매체를 하나씩 뽑아 들었다. 그리고 계산대 안으로 들어가 앉으려다가 뱃속에서 꼬르륵하는 소리가 나 슬쩍 뒤를 돌아보았다.
‘거 참 신기하네.’
제법 나이를 먹은 뒤에는 항상 위장을 어느 정도 비워둬야 속이 편했는데, 열여섯의 몸은 전혀 아닌 모양이었다. 아까 학교에서 스쿨 투어를 진행할 때 점심을 든든하게 먹었는데도 불구하고 벌써 배가 고팠다.
잠시 고민한 나는 냉장고로 가서 그 안에 놓인 온갖 상표의 음료를 보았다.
그리고 깨달았다.
‘아예 더러운 추억만 있는 건 아니로군.’
내가 좋아하던 레트로 디자인의 펩시.
나는 항상 코카콜라보다 펩시를 좋아했다. 이후에 등장할 펩시-맨의 팬이기도 했다.
소년 시절의 내 당분 섭취에 큰 도움을 준 펩시, 그리고 선반에서 갑자칩까지 하나 챙겨서 계산대 안으로 들어서니, 소설을 읽을 준비가 완벽하게 끝마쳐졌다.
“······.”
병따개로 뚜껑을 따고 콜라를 단숨에 마셨다.
꿀꺽꿀꺽.
청량하게 목을 타고 넘어가는 음료의 맛.
나는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Holy mother?”
다시 펩시를 원 샷 때리고도 멀쩡한 몸이 되었다.
거기에 감자칩까지.
어린 시절로 돌아와 좋은 점이 하나 더 생겼음을 깨달은 나는 그때의 버릇 그대로 감자칩에 펩시를 곁들여 소설을 읽기 시작했다.
물론, 주머니 속의 쿼터 동전 몇 개를 슬쩍 금전출납기에 넣어두는 건 잊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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