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ecame an American Retro Novelist RAW novel - Chapter (4)
1980년으로 (3)
4.
나는 불현듯 이 1980년의 전반적인 사회 양상이 미래와는 무척 다르다는 것을 자각했다.
가장 크게 다가오는 차이점은 접할 수 있는 정보가 미래보다 현저히 적다는 점이었다. 스마트폰은커녕 대중이 접할 수 있는 인터넷망조차 발달하지 않은 현시대에는 개인이 지식을 얻기 위해서 소문이나 활자 매체, 라디오, 텔레비전 따위를 통해야 했다.
말인즉슨, 각자에게 주어진 절대적인 정보의 질과 양이 훨씬 적을 수밖에 없다는 뜻이었다.
그것은 사고의 편협을 불러왔다. 이 복잡한 세상에서 사람들은 자신이 취사선택해 얻은 적은 양의 정보를 바탕으로 살아갔다. 나는 인간이 겪는 갈등 대부분이 거기에서 비롯된다고 생각했다. 알고 있는 정보가 적다 보니 오해가 쌓이고 싸우게 되는 구조가 아닐까.
하지만 한편으로는 이런 생각도 들었다.
‘그게 뭐 어때서?’
편협함은 머나먼 옛날부터 인류의 생존에 큰 도움을 준 감정이었다. 자신과 다른 것을 경계하고 배척하면서 인류는 혹시 모를 위협에서 벗어났고, 자손을 퍼뜨리며 번영할 수 있었다.
문제는 그것이 현재 나의 일상과 추억, 더 나아가 미래에까지 악영향을 준다는 점이었다.
특히나 와닿는 부분은 그중 ‘일상’이었다.
1980년에 나오고 있는 소설을 읽으며 트렌드 조사를 이어가는 와중, 나는 열여섯이라는 나이답게 학교와 집을 오가는 생활을 지속했다. 그러면서 계속해서 이 시대에 적응해 나갔다.
내가 다니는 센트럴 시티 밸류 하이스쿨은 인종 간의 비율도 극단적이지 않고 치안도 좋은 구역에 속한 학교였다. 하지만 그런 학교에서도 차별은 당연하다는 듯이 존재했다. 다들 자신과 다른 인종과 어울리기를 꺼리거나 불편해하는 모습을 자주 보여주었다.
1학년 수업 중에 가장 인기가 좋을 수밖에 없는 체육 시간.
“자자, 다들 준비 운동을 할 테니 2인 1조로 팀을 짜도록 한다.”
체육 교사인 미스터 어빈의 말에 학생들은 당연하다는 듯 같은 인종의 상대와 팀을 이뤘다. 그걸 뒤에서 지켜보던 나는 홀수로 남은 학생들의 반응을 살폈다. 다들 눈치만 볼 뿐, 누구도 쉽게 나서서 다른 인종의 학생과 짝을 이루려고 하지 않았다.
“뭐해? 다들 빨리.”
미스터 어빈 역시 그런 기류를 모르지는 않을 테지만, 재촉해서 대충 넘기려 들었다.
‘그래, 아무래도 불편하기는 할 테지.’
다들 학교에 들어오고 이제 갓 일주일째, 같은 인종 이외의 학생과는 교류할 일이 딱히 없었을 테니까.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대놓고 불편해하며 피하는 건 좀 너무하지 않나 싶었다.
나는 바로 옆에 있던 히스패닉 남학생에게 다가가 당당하게 말을 걸었다.
“같이 할까?”
“······아니.”
너무나도 손쉽게 거절당했다.
하지만 내 행동으로 인해 다들 결심이 선 모양이었다.
“같이 하자.”
“그래.”
“나랑 짝할 사람?”
인종 간 교류의 장이 이루어졌고, 나는 혼자 남겨졌다.
“······.”
깜빡했다.
동양인은 이 미국에서 거의 최하층민에 속하는 인종이었다.
순종적이고 말 잘 듣기로 정평이 난 동양인이 갑자기 나서서 분위기를 주도하니 다들 불편해하는 것도 당연지사······는 개뿔.
홀로 남겨진 나는 이를 악물며 앞에 있던 미스터 어빈에게 다가가 이렇게 항의했다.
“선생님, 저는 짝이 없는데요.”
“오, 너는 나와 하자꾸나. 한.”
다행히 미스터 어빈마저 나를 거부하지는 않았다.
***
1980년으로 돌아오고 처음으로 찾아온 일요일.
나는 어머니와 함께 교회에 갔다.
목을 꽉 조이는 검은색 보타이와 체크무늬 셔츠가 많이 불편했다. 하지만 80년도에 교회에 갈 때는 항상 이런 불편한 세미 정장 차림을 고수해야 했다. 이 시대의 한인들에게 있어서 교회는 사회 교류 및 문화 교류의 장이었으니까.
나와 어머니도 꽤 오랫동안 교회를 다녔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로도 그 사실은 변하지 않았다. 오히려 어머니는 더 열심히 교회를 다니면서 교인들과 소통하면서 살아가고자 했다. 말했듯이 80년대 미국 사회에서 한인 교회는 일종의 친목회나 다름없기 때문이었다.
‘살아남기’ 위해서라도 우리는 교회에 나가야 했다.
‘참 씁쓸한 현실이었지.’
나는 낡은 차 안에서 나오는 찬송가를 들으며 쓰게 웃었다.
[만유의 주 앞에 감사를 드리고-! 다 경배하면서 찬송을 부르세-!]그 내용에 문득 관심이 갔다.
‘이게 대체 무슨 내용이야?’
한인 교회인 만큼 뿌리를 잊지 말자는 취지로 1세대 한인들은 한국어로 된 찬송가를 불렀고, 나와 같은 2세대도 드문드문 적당히 따라서 부를 수 있었다. 하지만 3세대에 접어들면서 완전히 영어로 바꾸었던 기억이 슬며시 났다.
어머니는 유창한 한국어로 찬송가를 따라 부르다가 내게 조용히 말을 걸어왔다.
“듣기 정말 좋지 않니? 신아.”
“······Very good.”
나는 어색한 미소와 함께 엄지를 치켜들었다.
“일주일의 피로를 날리는 노래구나. 같이 부를래?”
“O, Of course.”
나는 어색하게 찬송가를 따라 불렀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1년째, 어머니는 항상 밝게 행동하려고 노력했다. 아마도 아들인 나를 위해서였을 터였다. 문득 그 사실을 떠올렸던 나는 어머니와 함께 어색한 한국어로 신나게 찬송가를 불렀다.
얼마 지나지 않아 우리는 교외의 한적한 장소에 자리한 한인 교회에 도착했다.
그 앞에는 모여든 한인들로 가득했다. 다들 참 무겁게도 차려입은 모습이었다.
차에서 내린 어머니는 가볍게 심호흡하고 앞으로 나아가 교인들과 인사를 나눴다.
“아유, 권 집사님! 안녕하세요!”
“순복 씨! 잘 지냈어?!”
“저야 잘 지냈죠! 요즘 어떠세요!”
“말도 마! 혹시 우리 딸 기억나?”
“미정이요? 아유~ 당연히 하죠! 어쩜 그렇게 예쁜 아이였는지!”
“걔 이번에 피아노 콩쿨에서 지역 예선 돌파해서 주 경연까지 나가게 됐잖아! 그거 때문에 아주 집안이 난리도 아니야!! 뉴욕 간다고 지금 비행기 표 끊고, 아주 돈 먹는 하마야, 하마!”
“어머나, 따님이 피아노 실력이 대단한가 보네요!”
“오호홋, 그냥 좀 하는 정도지! 순복 씨네는 요즘 어때?”
“신이가 이번에 고등학교에 들어갔어요.”
“아~. 그래? 어디?”
“센트럴 시티 밸류 하이스쿨이요.”
“거기가 어디였더라?”
“어, 그게.”
순간 당황하는 어머니.
그걸 옆에서 지켜보던 나는 참지 못하고 나섰다.
“권 집사님. 뭐 하나만 여쭤봐도 될까요?”
“응? 어떤 거?”
권 집사가 나를 돌아보았다.
“혹시 화장품 뭐 쓰세요?”
“그건, 왜?”
“신아!”
“아니, 권 집사님 피부가 너무 좋으셔서 어머니 생신 때 제가 권 집사님 쓰시는 화장품으로 선물해드리고 싶어서요.”
“······.”
“······.”
순간 침묵이 일었다.
그리고 이내 권 집사가 웃음을 터뜨렸다.
“오호호호!! 얘! 너 어디 가서 굶어 죽지는 않겠다! 어쩜 이렇게 말을 예쁘게 할까?”
“제가요? 어디가요?”
“호호호! 아니다! 아냐! 순복 씨! 아들 참 잘 키웠네!”
“가, 감사합니다.”
권 집사의 칭찬에 어색하게 웃은 어머니는 그대로 돌아서는 권 집사를 보더니 이내 긴 한숨과 함께 내게 말을 걸어왔다.
“······방금 엄마 도와준 거니?”
“글쎄요.”
나는 짐짓 시치미를 뗐고 피식 웃은 어머니는 앞장서 나아갔다.
우리가 내던져진 큰 정글은 미국 사회 그 자체였고, 마찬가지로 이 작은 한인 사회가 녹록했던 것 역시 결코 아니었다. 정육점의 박씨 아저씨부터 시작해, 오지랖 넓으면서 인정받기 좋아하는 한인들은 나와 어머니를 철저하게 약자 취급하며 은연중에 무시했다.
‘문제는 우리가 그걸 맞춰줄 수밖에 없었다는 점이지.’
그래도 이들을 아예 나쁘다고 볼 수만은 없었다. 물건이 필요하면 한인들은 정 때문에라도 우리 가게를 찾아 물건을 사줬다. 그렇기에 나는 무사히 대학에 진학할 수가 있었다.
한 바퀴 인사를 돌고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나는 열여섯의 소년이라는 이점을 살려 한인들이 어머니께 선을 넘으려고 할 때마다 저지했다. 순진한 얼굴로 하는 칭찬에 다들 웃으면서 뒤로 물러섰고 나는 어머니와 함께 큰 탈 없이 예배를 보고 집에 돌아왔다.
어머니는 내게 이렇게 말했다.
“오늘 너무 대견하네. 신이.”
“에이, 별말씀을요.”
“평소에도 그랬지만, 오늘은 특히. 혹시 뭐 저녁 먹고 싶은 거 없니?”
“어머니 요리면 뭐든 좋아요.”
“그래? 그러면 오늘 엄마가 실력 좀 발휘해야겠는걸?”
기분이 좋았는지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부엌으로 들어서는 어머니. 그 뒷모습을 바라보던 나는 보타이를 끌러내며 계단을 올라갔다. 그리고 방안으로 들어서서 길게 숨을 내뱉었다.
‘얼른 시작해야겠어.’
이 편협함이 내 일상을 침범하는 걸 더는 두고 보고 싶지 않았다.
1980년으로 돌아와 일주일. 나는 기억을 더듬어 내가 구할 수 있는 모든 소설을 읽었다. 그리고 지금 시대에서 내가 어떤 소설을 쓸까를 고민했다. 작가에게 있어서 데뷔작은 상당히 중요한 법이니까.
벽장에 틀어박혀 내내 궁리했고, 어렵사리 답을 내렸다.
‘공포 소설.’
이유는 간단했다.
장르 소설 시장은 하염없이 좋게 포장해도 결국은 대중성에 의해 판가름 되는 무대였다. 아무리 잘 쓴 글이라고 하더라도 대중이 봐주지 않으면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거기에서 가장 중요한 점은 그들이 원하는 바에 작가의 개성을 섞어 얼마나 새로운 맛을 낼 수 있느냐였다.
하지만 적어도 ‘데뷔작’만큼은 나 자신을 고스란히 드러내고 싶었다.
‘전생에는 이 규칙을 알고 난 뒤로 그렇게 하지 못했으니까.’
그래서 막판에는 집필 자체를 거의 멈췄을 정도였다.
한을 풀고 싶다고 해야 할까.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대놓고 내가 쓰고 싶은 소설을 써서 잘 될 수 있으리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내가 글을 아무리 잘 쓴다고 해도 동양인이 바바리안이 되어서 창녀-왕의 성병을 치료해주는 내용을 쓰면 다들 좋다면서 볼까? 그럴 리가 없겠지.
‘그게 내가 공포 소설을 택한 첫 번째 이유. 동양인이 나와도 어색하지 않아.’
두 번째 이유는, 공포라는 장르가 가지고 있는 특징 때문이었다.
공포라는 감정은 미지로부터 기인한다. 그리고 그것은 편협함을 낳는다.
매체의 한계로 인한 좁은 정보에 익숙한 이 시절의 미국인들은 푸-만추 수염을 기른 동양인이 괴상한 주술을 부려 사람들을 현혹할 수 있다고 무의식중에 생각하곤 한다. 하지만 그것이 장르 소설로서는 더없는 재미가 되는 것은 사실이었다. 대중이 인식하는 현실에 기반을 두었으니까.
그렇기에 많은 이들이 편협함에 빠져서 바라보는 ‘동양’이라는 소재는 공포 소설 장르에서는 메이저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여기에서 나는 한 가지 아이디어를 통해 교묘하게 클리셰를 비틀어 단순히 편협하기만 한 동양인을 묘사하는 소설로는 가지 않을 생각이었다.
‘그래야지.’
의지가 화르륵 타올랐다.
자리에 앉은 나는 미리 준비해둔 종이와 펜을 꺼냈다. 그리고 본격적으로 작품의 플롯을 짜기에 앞서, 바로 옆에 놓아둔 ‘신문’을 펼쳐 다시금 내가 목표한 바를 확인했다.
현시대에서 장르 소설은 주로 잡지와 신문을 중심으로 연재가 진행되었다.
건즈 앤 소드 매거진과 같은 잡지는 대부분 공모전의 형태를 취했으며, 개중에는 아예 상시 모집을 진행하는 곳도 많았다. 신문은 ‘로스앤젤레스 타임스’처럼 이름이 알려진 곳 같은 경우에는 이름값이 있는 작가들의 작품을 내부에서 엄선해 받는 편이었다.
하지만 내가 택한 신문사는 그런 곳은 아니었다.
‘토런스 뉴 미디어’.
캘리포니아의 도시 중 하나인 토런스를 중심으로 발행되는 일간 신문.
이곳은 지면에 광고를 실어 연재될 작품을 상시 모집했다. 영세한 신문사이기에 이런 방법을 택할 수밖에 없었다. 조금이라도 이름이 있는 작가들은 더 높은 급의 신문사로 갔으니까.
나는 지면에 게재된 상시 모집 광고를 다시 읽어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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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런스 뉴 미디어에서 연재될 소설을 모집합니다.
지원 자격 : 없음.
모집 분야 : 공포, SF, 미스터리 등의 장르 소설.
접수 방법 : 5화 분량의 작품과 기획서를 신문사 우편으로 접수.
작품 규격 : 1화 1,000자 전후, 20화 전후의 완결성 있는 작품.
모집 기간 : 1980.8.1. ~ 모집 완료 시까지.
문의 사항 : 신문사 전화 후 내선 번호 3번(문화 섹션 담당 기자 사이먼 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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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밖에 없지.’
내가 잡지사나 다른 신문사를 생각하지 않고 이곳을 택한 이유는, 공포 소설을 고른 것과 똑같이 두 가지였다.
첫 번째로, 신문 연재는 장르 소설 잡지에 비해 대중성을 더욱 요구하는 편이라 내가 쓸 데뷔작이 이곳에 적절하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두 번째는, 내가 가지고 있는 미래의 지식과 연결되었다.
‘이 신문사가 우파적 성향을 가지고 있거든.’
캘리포니아는 미래에 민주당의 텃밭이라 불릴 정도로 좌파적 성향이 강해지지만, 지금 시절만 하더라도 중도 쪽에 속하는 주(州)였다.
하지만 그런 상황에서도 대부분의 캘리포니아 사람들은 좌파적 성향을 가진 ‘로스앤젤레스 타임스’를 주로 구독하는 편이었다. 신문사의 규모가 크고, 그만큼 신문 자체를 잘 만들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올해 말에 펼쳐질 ‘대통령 선거’의 결과 때문에, 좌파적 성향의 로스앤젤레스 타임스에 반발해 토런스 뉴 미디어의 구독자는 이례적으로 상승하게 된다.
나는 그때를 대비해 이 신문사에 ‘빨대’를 꽂아둘 작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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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으로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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