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ecame an American Retro Novelist RAW novel - Chapter (55)
55.
방과 후, 학교 체육관.
견학은 자유였던지라 나는 관객석에 앉아 치어리딩 클럽 활동을 지켜보고 있었다.
삼각편대를 이루고 있는 ‘블랙 유니콘즈’의 멤버들. 검은 연습복을 입은 열두 명이 각각 그 안에서 네 명씩 조를 이뤘다. 알렉사는 삼각형의 꼭짓점 조에서 가장 중앙에 서 있었다. 말인즉슨 그녀는 ‘블랙 유니콘즈’에서 가장 에이스 멤버라는 이야기였다.
이윽고 음악이 시작되었다.
빰-빠밤-빠밤-!
웅장한 나팔이 주가 되는 음악이었다. 지금으로부터 조금 더 세월이 지난 후에는 신나는 팝 음악이 치어리딩 공연에 사용되기도 했지만, 지금은 이 정도도 충분히 신이 났다.
치어리딩은 세상에 몇 안 되는 미국에서 시작된 문화였다.
1980년대 사람들은 밝게 움직이고 뛰어노는 이 문화에 특히나 열광했으며, 고등학교 대회를 텔레비전에서 방영해 줄 정도였다. 그리고 내 기억이 맞다면, 블랙 유니콘즈는 거기에서 종종 우승했을 정도의 강팀이었다.
음악에 따라 던지고 받고, 발로 차고 팔을 휘두르고, 뛰어오르고 회전하고. 온갖 격렬한 움직임을 지켜보자니 자연스럽게 이런 생각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사람이 저렇게 움직일 수 있다니.’
놀라움을 넘어서 약간은 경외감마저 느꼈다.
알렉사는 경쾌하게 몸을 움직였고, 블랙 유니콘즈의 중심을 확고하게 잡아주었다. 그렇게 첫 번째 연습이 끝나고, 그녀는 다가온 코치 및 팀원들과 진지한 얼굴로 이야기를 나눴다.
저 모습이 내가 기억하는 알렉사 플레어였다.
소위 이야기하는 ‘구김살’이 없다고 해야 할까. 딱 집에서 사랑받고 자란 막내 같은 느낌이었다. 키는 평균보다 조금 작았지만, 영화배우 같은 미모에 좋은 비율, 가만히 있을 때 느껴지는 묘한 아우라까지. 적어도 이 고등학교라는 공간 안에서는 절대적인 포식자의 입장이라고 할 수 있었다.
주변 사람들은 알렉사를 좋아했고, 그 이상으로 동경했다.
그 좋은 예시가 나와 처음 만났을 때, 옆에 다가와서 시비를 건 같은 치어리더 클럽 여자애들이었다. 사실 그녀들 역시 알렉사와 친해지고 싶어서 그런 거였다.
실제로 전생에는 그러다 알렉사와 그 아이들이 잠깐 어울려 지낸 적도 있었다. 길지는 않았던 걸로 기억하지만.
그래, 전생의 내가 봤을 때, 알렉사는 어딘가 신기한 인간이었다.
그룹을 이루기 마련인 미국의 고등학교에서 딱히 일정한 그룹을 가지지 않고 여기저기 옮겨 다니면서 놀았다. 미식축구부의 쿼터백과 데이트하다가도 다음 날에는 별로라며 뻥 차버렸다. 누구에게나 편하게 말을 걸었고 그게 받아들여졌다.
그럼에도 다들 그런 그녀를 동경했다.
나는 그것이 천성적으로 타고 난 그녀의 매력 덕이라고 생각했다.
‘나와는 달리 말이야.’
전생의 나는 살기 위해 어떻게 해서든 무리에 속해야 하는 처지였다. 같은 동양인 그룹이나 방송반에서 최대한 나의 개성을 숨기고 그들이 원하는 대로 맞춰주면서 지냈다.
밴드라면 보컬 겸 기타를 맡았을 알렉사와 달리, 객원 코러스도 겨우 될까 말까 한 아무것도 아닌 존재. 말하자면, 밴드의 프론트 맨인 알렉사를 뒤쪽에서 단편적인 모습만 보고 있던 셈이었다.
하지만 발버둥을 그만두고 앞으로 나아가서 본 알렉사는, 전생의 내가 생각했던 것처럼 모든 걸 다 가진 슈퍼스타가 결코 아니었다.
그녀는 ‘Mother’를 보면서 꽥꽥 비명을 질러댈 정도로 무서운 걸 싫어했으며, 어딘가 굉장히 민감하고 예민한 기질을 지녔다. 하드코어한 보드게임은 규칙이 어렵다며 입술을 삐죽이며 대충했고, 자기가 좋아하는 수술 보드게임은 꺅꺅거리며 즐겁게 플레이했다.
하지만 나는 그 사실을 알게 됐을 때도 알렉사가 나나 두피를 왜 편안하게 느끼고 친구로서 생각하는지 좀처럼 그 이유를 짐작하지 못했다.
‘그리고 그 의문이 최근 들어 해소되었지.’
알렉사 플레어는 다문화 가정의 일원이었고, 그러한 부분이 인종 분리 현상이 심한 미국에서는 커다란 괴리감으로 작용하고 있을 터였다. 미국인, 특히 스스로 만날 사람을 선택할 수 있는 고등학생은 각자 인종에 따라 그룹을 이루는 게 보편적이었으니 말이다.
미디어에서 나오는 인종을 가리지 않고 모두가 친하게 지내는 관계란, 80년대에는 이루어질 수 없는 환상 속의 무언가에 가까웠다.
‘아예 그런 일이 없다고 볼 수는 없겠지만, 적어도 나는 경험해 본 적 없지.’
적어도 여기 치어리딩 클럽부터가 그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코치가 잠깐 쉬는 시간을 주자 학생들은 저마다의 인종으로 삼삼오오 나뉘었다. 그리고 백인과 흑인 무리로 나뉘더니 거기에서 또 한 번 더 두 파로 갈렸다.
서로 친한 사람들끼리 모이고 있는 거라고 볼 수도 있겠지만, 만약에 그랬다면 알렉사가 나나 두피가 편하다고 이야기하지는 않았겠지.
같은 인종 안에도 차별이 존재한다. 그것은 더 이상 인종이라는 테두리로 설명할 수 있는 것이 아닌, 인간 본연의 성질이겠지.
문득 지난 파티에서 알렉사가 내게 했던 말을 떠올렸다.
[너하고 두피는 뭐랄까. 괜히 이것저것 재지 않는 느낌이라서 좋아. 그래서 너희들이 편해.]나는 그 말을 듣고 왠지 모를 복잡한 감정에 휩싸였다.
‘내가 그렇다고?’
나로 말할 것 같으면, 그 누구보다 많은 속내를 숨긴 채 다른 사람들을 대하는 사람이었다.
전생의 기억을 가지고 돌아왔으며, 자신의 삶을 바꾸기 위해 그야말로 무엇이든 이용하고 있다. 여기 순진한 고등학생들처럼 무리에 끼고자 뭔가를 계산하고 붙어먹거나 하지는 않지만, 내가 과연 뭔가를 재지 않는 사람이라고 할 수가 있을까.
‘그래······ 나 역시 그렇게 되고 싶어.’
적어도, ‘친구’들과 함께 있을 때만큼은 무언가를 계산하고 싶지 않았다.
나는 알렉사에 대해 조금 더 알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가 나를 이것저것 재지 않고 봐준 만큼, 나 역시 그러고 싶었다.
***
그로부터 며칠 뒤, 주말.
두피, 알렉사와 약속을 잡은 나는 시내로 향했다.
PC나 게임이 발달하지 않았던 만큼 이때 당시의 사람들은 주말이 되면 주로 밖에서 놀았다. 특히나 날씨가 따뜻한 캘리포니아는 더 그런 경향이 강했다.
물론, 전생의 나는 딱히 친구랄 게 없었으므로 주말이 되더라도 집 안에서 책을 읽으면서 시간을 보내는 편이기는 했다.
하지만 사람이 매번 책만 읽고 글만 쓸 수는 없지 않겠는가.
서점에서 ‘Mother’의 종이책이 잘 나가고 있는지 확인도 해보고 이래저래 힐링도 할 겸, 나는 내가 작가라는 사실을 알고 있는 두 명의 친구를 먼저 불러낸 것이었다.
약속 장소에 나보다 더 빨리 도착한 두피에게 나는 알렉사가 내 정체를 알게 되었다는 사실에 대해서 이야기했다.
그 말을 들은 두피는 순간 놀라워하며 이야기했다.
“뭔가 나랑 굉장히 비슷하게 알았네.”
“그러게 말이다. 너도 그랬고, 알렉사도 내가 비즈니스로 얽힌 사람의 가족이었다니.”
어이없다는 듯 웃은 나는 멀리서 다가오고 있는 알렉사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등장만으로도 주변 사람들의 시선을 끌어모았기에 발견하는 것이 그리 어렵지 않았다.
오늘은 청재킷에 짧은 바지, 캡 모자를 거꾸로 썼는데, 어딘가 톰보이스러운 느낌이었다.
“안녕~. 오늘 날씨 좋네.”
“왔어?”
“알렉사! 너도 신이 ‘신’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면서?”
“응. 나도 네 소식은 대충 들었어.”
“뭔가 좀 만화 같지 않았어?”
“이 경우에는 소설 같다고 해야겠지?”
알렉사가 나를 슬쩍 돌아보았다.
“덕분에 나는 작가님 앞인 줄도 모르고 온갖 주접은 다 떨었지만.”
“······그 부분은 양해 부탁드립니다.”
나는 슬쩍 시선을 피했다.
그러자니 킥킥 웃은 알렉사가 내 등을 퍽, 하고 때렸다.
“가자. 신. 세상에서 가장 멋진 소설을 사러 가야지.”
“계속 그렇게 놀릴 거면 돌아가고.”
“아냐! 신! 나는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한다고!”
“······두피, 적당히 좀 하자.”
나는 얼굴이 화끈거리는 걸 느끼며 대답했다.
하지만 내가 그러거나 말거나 두피는 신이 나서 앞장서 나아갔다.
‘왠지 이 상황은 내가 익숙해지는 것 말고는 답이 없을 것 같은데.’
그런 식으로 생각하자니 옆에서 알렉사가 옆구리를 툭툭 건드렸다.
“신.”
“왜.”
“그렇게 삐쳐있지 말고. 농담이야.”
“농담이면 또 그건 그거대로 상처인데.”
“아, 그런가?”
“그래. 팩트로는 전혀 아니더라도, 작가란 어쨌든 자기 작품이 최고라고 믿어야 하거든.”
“흐음, 뭔가 멋진 말인데.”
“또 놀리는 거야?”
“아냐. 아냐. 진짜로. ······오늘은 이렇게 불러줘서 고마워. 아니었으면 레이첼한테 불려 가서 지루한 아이쇼핑이나 할 뻔했잖아.”
“안 가면 그만이잖아?”
“또 마냥 그럴 수만도 없단 말이지.”
뭔가 어려운 사정이 있다는 듯 이마를 짚는 알렉사.
그녀는 우리랑 있는 게 마음이 편하다고 했다.
······그리고 사실, 나는 그 말에 조금 어폐가 있다고 생각했다.
왜냐면 지금까지 알렉사는 ‘진짜 우리’와 있어 본 적이 거의 없었기 때문이었다.
“알렉사.”
“응?”
“오늘 네가 아는 것과는 조금 달라진 세계가 펼쳐질 수도 있어.”
“왜?”
“각오해 둬.”
나는 짧게 대답하고는 가벼운 발걸음으로 앞장서는 두피를 바라보았다.
나도 모르게 없는 안경을 밀어 올릴 뻔했다.
***
알렉사 플레어는 서점에 도착했을 때만 하더라도 신이 하는 말을 그저 가볍게 여겼다.
‘뭐, 별거 있겠어?’
너드 스타일로 노는 것에 기가 빨리진 않을까 걱정하는 모양인데, 기우였다.
알렉사는 사실, 꾸미는 걸 좀 귀찮아하는 축에 속했다.
어려서부터 좀 활동적으로 지내왔던 그녀는 레이첼이나 치어리딩 클럽의 다른 학생들과 달리, 그다지 패션이나 뷰티 쪽에는 관심이 없었다. 그래서 그런 면에서는 신이나 두피와 더 마음이 맞는다고 생각했다. 더블 스파이 배트냐 뷰티 화장품이냐 하면 그녀는 망설임 없이 더블 스파이 배트를 들고 휘두를 성격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예상했던 대로 별거 없었다.
다운타운에서 가장 큰 서점에 도착하자 조용한 분위기와 책 냄새가 마음을 자극했다.
‘역시 뷰티보다는 이쪽이 낫단 말이야.’
그런 생각으로 씨익 웃으며 두피와 신의 뒤를 졸졸 따라가는 알렉사.
이 공간에 있는 사람들은 서로 소곤거리며 대화하는 터라 세 사람은 굳이 필요한 말이 아니면 먼저 입을 열지 않았다. 그런 분위기 헤치며 장르 코너로 이동한 신은 최신간 코너에 쌓여 있던 ‘Mother’를 반짝거리는 눈으로 바라보았다.
알렉사는 그를 조심스럽게 불렀다.
“신.”
“응, 알렉사.”
“그렇게 좋아? 책은 이미 보지 않았어?”
“······서점에 다른 책들하고 진열되어 있는 걸 보니 또 느낌이 다르네.”
“하긴, 그렇겠구나.”
고개를 끄덕이며 알렉사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곳곳에 쌓여 있는 수많은 책들. 그중 하나일 따름이었다. 하지만 신에게 있어서는 ‘그중의 하나’가 자신의 책이라는 사실에 깊이 감격할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
게다가 ‘Mother’는 꽤나 팔렸는지 다른 책들에 비해 쌓여 있는 높이가 상당히 낮은 상태였다.
‘정말 좋은가 보네.’
알렉사는 다른 책에는 눈도 돌리지 못한 채 안절부절못하고 있는 신의 모습을 보며 저도 모르게 웃었다.
그리고 옆에서 누군가가 ‘Mother’를 한 권 집어 갔다.
“아, 여기 있네.”
“‘Mother’야?”
“응응, 겨우 찾았네. 우리 서점 세 개 돌지 않았어?”
“여기에는 있어서 다행이다. 나도 사야겠어. 저기, 잠깐만 비켜 주실래요?”
“아, 죄, 죄송합니다.”
신이 옆으로 황급히 비켜섰고, 두 여성이 사이좋게 ‘Mother’를 한 권씩 든 채로 돌아섰다. 신은 그 뒷모습을 바라보다 다시 책에 눈길을 주었다. 아까보다 눈이 몇 배는 더 반짝거리는 듯했다.
모든 상황을 알고 있는 알렉사로서는 웃을 수밖에 없었다.
‘저 두 사람은 알까?’
지금 자신들이 만난 사람이 ‘Mother’를 쓴 장본인이라는 사실을 말이다.
덴젤이 일러스트를 그리고 신이 원고를 집필한 소설책.
그것은 또한 알렉사에게도 의미가 무척이나 깊은 작품이었다.
그리고 두 소년소녀 옆에서 또 다른 사람이 책을 스윽 집어 들었다.
“표지는 나쁘지 않군. ‘Mother’라는 작품에 모자람이 없어.”
바로 두푸스 ‘전문가’ 킹스턴이었다.
그리고 그는 날카로운 눈빛으로 책을 펼쳐 들었다.
“하지만 내부 일러스트는 어떨지······.”
“아, 두피. 그거 알렉사네 오빠가 그린 그림이야.”
“이 이상 좋을 수 없겠다 싶을 정도로 잘 그렸군. 환상적이야.”
신의 말을 들은 두피가 머쓱한 얼굴로 안경을 스윽 밀어 올리며 말을 돌렸다.
알렉사는 두 사람 앞에서 웃음을 참느라 완전 혼이 났다.
신 역시 기왕 왔으니 기념이라며 ‘Mother’를 한 권 구입했다. 그렇게 책을 구매하고 나온 일행은 즉석에서 다음 행선지를 정했다.
“신, 다음은 어디에 갈까?”
“글쎄. 두피, 어디 가고 싶은 곳 있어?”
“역시, ‘그곳’밖에는 없겠지.”
“······그곳?”
알렉사는 순간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리고 자신이 나름대로 발전(?)했음을 깨달은 그녀는 두피가 가고자 하는 행선지를 눈치채고 소리쳤다.
“코믹북 스토어?!”
“Yes! Yes! Yes!”
“응응! 가보자! 나도 코믹북 스토어는 꼭 가보고 싶었어!”
“······후회할 텐데.”
“뭐라고. 신?”
“아, 아냐. 가자.”
순간 어색하게 웃은 신이 앞장서 나아갔다.
그때까지만 하더라도 알렉사는 코믹북 스토어를 온갖 재미있는 그림으로 가득 찬 장소라고만 생각했다. 가끔씩 덴젤이 그려주는 그림이나 TV에서 나오는 애니메이션처럼. 그리고 두피나 신이 환장하는 만화가 어떤 것인지 궁금했던 차에 잘됐다고 느꼈다.
몇 블록 정도 이동해서 도착한 코믹북 스토어.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선 알렉사는 천장에 매달린 더블 스파이 배트 풍선을 보고 소리쳤다.
“오! 저기 더블 스파이 있다!”
바로 그 순간이었다.
코믹북 스토어 안에 있던 열 명 정도 되는 사내들이 동시에 알렉사를 쳐다보았다.
“······어?”
어두운 조명 아래에서 희번뜩 빛나는 그들의 안경알.
순간 굳어진 알렉사의 뒤에서 신이 말했다.
“I told you.”
의역하자면, ‘경고했잖아.’라는 뜻.
알렉사는 지금 사자 굴에 내던져진 토끼의 심정이 되었다.
하지만 그녀가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사실이 존재했으니, 그건 바로 코믹북 스토어 안에 있던 사내들이 오히려 이 금발 소녀로 인해 PTSD를 느끼기 시작했다는 점이었다.
────────────────────────────────────
────────────────────────────────────
Pay day (3)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