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ecame an American Retro Novelist RAW novel - Chapter (60)
60.
나는 ‘Mother’의 첫 장면을 머릿속에 떠올렸다.
수지가 기르던 리트리버 ‘토미’는 마더의 손에 의해 잔혹하게 살해되고, 그로써 소설은 마더라는 인물이 얼마나 비인간적이고 극심한 광기에 빠졌는지를 보여주면서 시작된다.
그로 인해 독자들은 본능적으로 마더에게 거부감을 느꼈다.
개는 사람의 친구이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이 순간 두피 역시 내게 거부감을 느끼는 듯했다.
······내가 주어진 약간의 정보만으로 편협하게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창피와 낭패감이 섞인 눈으로 묵묵히 기다리자, 겨우 울먹임을 잠재운 지우가 말을 이어 나갔다.
“제가 기르던 강아지 이름도 토미였어요. 리트리버가 아니라 미니핀이었지만.”
“으, 음.”
지우의 말에서 나는 어떤 감정을 느꼈다.
바로 ‘죄책감’이었다. 내 글을 읽으며 느낀 공감이 그녀를 더욱 괴롭게 만들었을지 모른다는 데서 오는.
“제가 학교를 다녀오는 사이에 집 앞 차도로 달려 나갔다가 그만······.”
“후우. 안타까운 일이로군.”
두피가 나를 힐끗 보며 말했다. 지우가 자신을 괴롭히는 애들에게 저주를 걸려고 하는 것 같다느니 뭐니 주절거렸던 내가 더욱더 쓰레기가 되어가는 순간이었다.
아니, 나도 억울한 부분이 없지는 않다!
나는 분명 지우가 수상한 액체가 뚝뚝 떨어지는 비닐봉지를 들고 집으로 들어가는 모습을 봤다! 전생에 봐서 두피에게 말할 수는 없었지만! 나로서도 분명히 오해할 만한 여지가 존재했다는 거다!
그렇게 늦은 밤, 어디를 다녀왔지! 손에 든 건 무엇이었지!
“조그마한 유골함에 담겨있는 걸 보는데, 뭔가······ 너무 허망해서.”
“그럴 수 있지. 이해한다.”
“자, 자자자, 잠깐만.”
나는 당황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마더의 토미도 마더의 손에 그, 안 좋게 되잖아? 그런데 왜 재미있게 봤다는 거야?”
도저히 이해가 가질 않는 부분이었다.
토미는 1화에서 마더의 손에 끔찍하게 살해당한다. 근데 그런 소설이 재밌었다고?
그리고 우물거리는 목소리로 답변이 돌아왔다.
“······수지가 토미의 환영을 봤을 때, 저도 그러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이 아저씨가 미안해.
순간 그렇게 대답할 뻔했던 나는 입을 꾹 다물고 말았다. 80년대 열여섯 살의 순수함이 뼈저리게 느껴졌다.
상황이 점점 악화되는 느낌이었다.
그냥 내가 쓰레기임을 빠르게 인정하는 것이 맞지 않을까. 솔직히 말하자면 이미 그런 것 같기는 하지만, 아무튼 괜한 변명은 그만두는 편이 좋지 않을까.
하지만 나는, 포기하지 않았다.
아무리 좋은 의도를 가졌어도 나쁜 행동으로 번질 수 있다. 전생에 지우가 비닐봉지에 무언가를 들고 가는 걸 봤었던 나는 그게 무엇이었을지 꼭 확인해 보고 싶었다.
‘지금과 비슷한 시기라면······.’
나는 두피의 옆에 앉아 지우가 건넨 흑마술 입문서를 살펴보았다. 그녀가 무슨 짓을 했다면 이 안에 정답이 있을 것이다.
흑마술의 정의와 개요부터 시작해 흑마술의 역사를 거쳐, 본격적으로 흑마술을 사용하는 방법과 그에 따르는 대가, 마지막으로 각 상징과 온갖 주문까지 뒤죽박죽 적혀 있는 책.
그중에서 ‘죽은 자를 되살리는 법’이라는 주문에 어떤 재료가 들어가는지 확인했다.
시전자의 머리카락 한 움큼.
달빛을 머금은 이슬.
정오의 태양 아래에서 피어난 꽃.
되살리려는 존재의 흔적이 짙게 밴 물건.
갓 죽은 생명의 살점과 피.
‘흉흉하군.’
나는 마지막 재료를 보고 눈썹을 찡그렸다.
의식의 순서까지 확인한 나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지우. 혹시 이 주문, 시도해 본 적 있어?”
“네······. 있어요.”
“다른 건 대충 이해되는데, 살점과 피는 어떻게 조달했어?”
“아, 정육점에서 샀어요. 매주 목요일마다 정육점에서 갓 잡은 신선한 돼지고기를 들여온다고 하더라고요. ······오빠, 왜 그러세요?”
“······아니, 아무것도 아니야.”
순간 맥이 탁 풀려 이마를 감싸 쥔 나를 보고 지우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나는 괜한 망상으로 자신이 아메리카 대륙 끝자락까지 다녀왔음을 확인하고는 어이가 없어 비실비실 웃고 말았다.
‘그래, 돼지고기였단 말이지······.’
사실 그게 가장 합리적인 수단이기는 했다.
흑마술 같지는 않지만, 나중에 의식이 끝나고 나면 포크찹을 해먹을 수도 있고.
끙끙거리는 나와 한숨을 쉬는 두피를 번갈아 바라보던 지우가 물었다.
“뭔가, 잘못했나요?”
“응? 아, 아냐. 그렇지. 두피?”
나는 환하게 웃으며 두피를 바라보았다. 어서 동의하라는 의미였다.
물론, 그 사회적 제스처를 조금도 알아듣지 못한 두피는 이렇게 대답했다.
“엄밀히 말하자면 그 방식은······.”
“잠깐만, 두피. 따로 얘기 좀. 지우. 잠깐만 기다려 줄 수 있어?”
“네, 네.”
급한 목소리를 듣고 눈이 휘둥그레 뜨여 고개를 끄덕이는 지우.
두피와 함께 일어선 나는 교실 밖으로 나와 복도 모퉁이까지 전진했다.
나도 오지랖인 건 알고 있다.
하지만 지우 본인으로부터 모든 걸 들은 이상, ‘아, 너에게도 그런 슬픈 과거가 있구나.’라고 대충 말하며 넘어가고 싶지는 않았다. 너무나도 무책임한 행동이라고 느꼈으니까.
나 스스로가 원해서 이번 일에 발을 들여놓은 만큼, 제대로 된 책임을 지고 싶었다.
또 한 번 주어진 삶에서는 남에게 휘둘리지 않고 나 자신으로 살아가기로 결심했다.
그걸 위해서는 맨 먼저 돈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 문제가 조금씩 해결되고 그 과정에서 주변을 돌아보게 된 나는, 내 곁에 좋은 사람들이 있음을 깨달았다. 글을 통해 들어오는 돈과 인정은 자긍심이 되었고, 내 안에 있는 상처받은 소년을 조금씩 치유해 주었다.
나는 이 경험을, 반대로 남을 위해 베풀고 싶었다.
동시에 그건 다시금 내 치유가 될 테니까.
‘타인을 위한 행동은 스스로의 긍지가 되기도 하니까.’
그런 각오로 인해 나는 이 일에 확실히 책임을 지고자 하는 것이다.
지우 장이 ‘Mother’를 읽고 감명을 받았듯이, 달라진 나로 인해 지금 내가 살아가는 이 삶이 조금 더 바뀌었으면 했다.
***
장지우는 어린 시절부터 자주 이사를 다닐 수밖에 없었다. 아버지는 군인이었고, 짧게는 1년에 한 번, 길게는 3년에 한 번씩 근무지가 바뀌었기 때문이었다.
그렇기에 어렸을 때부터 새로운 지역의 새로운 학교에 갈 때마다 매번 새로 친구를 사귀어야 하는 환경에 노출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녀는 어느 순간부터 사람과 어울리려는 마음을 버렸다.
‘지긋지긋하니까.’
항상 똑같았다.
새로운 학교로 전학 가면 반드시 두 가지 중 하나의 상황이 벌어졌다.
‘Chang’이라면서 한동안 놀림감이 되거나, 누군가 가장 먼저 다가와 친근하게 굴어 그 애의 그룹과 같이 다니게 되거나.
예전에는 무어라 반박하기도 어려운 괴롭힘이 싫어서 후자를 선호했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오히려 전자가 훨씬 더 나았다.
‘그게 차라리 상처를 덜 받아.’
지우에게 있어 차별보다 더 큰 상처는 상실이었다.
전학 가면 얼마 지나지 않아 학교 내에 소문이 쫘악 퍼졌고, 가장 먼저 다가오는 애가 한 명씩은 존재했다. 그 애와 친하게 지내고 다니다 보면 그 그룹과도 친해졌다. 같은 동양인 그룹일 때도 있고 때로는 다른 인종의 그룹일 때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비슷비슷했다.
항상 먼저 나서는 활기찬 애, 개중에서 공부를 잘하고 똑똑한 애, 예쁘고 잘나가는 애, 조용하지만 속내가 상냥한 애, 그 애들을 하나로 묶어주는 유쾌한 애.
그들 사이에서 함께 지내다 보면 소극적이고 말주변이 없는 자신도, 누군가와 어울릴 수 있다는 사실이 즐거웠다.
하지만 어느 순간 깨닫게 되었다. 자신은 그저 ‘전학 온 동양인 애’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단지 그룹을 보다 돋보이게 하는 장식용 소품에 불과하다는 것을.
그 사실을 깨달은 것은, 몇 번의 전학 이후 친하게 지냈던 아이들과 연락이 끊기면서였다.
같은 학교에 다닐 때는 최고의 친구처럼 지내다가 몸이 멀어지면 꼭 그렇게 되었다. 드넓은 미국에서 다른 주로 떠난다는 것은 다른 나라로 떠나는 것과 비슷했다.
그래서 차별이 더 낫다고 생각했다.
누군가와 친해지는 것이 무섭다. 차라리 자신을 인간으로 생각하지 않았으면 했다.
‘Chang, Chang’거리는 것도 시간이 지나면 줄어드니까. 그때부터 아무하고도 관계를 맺지 않은 채 조용히 학교를 다니는 게 차라리 편했으니까.
기약 없는 기다림이란 무척이나 서글펐다.
돌아오지 않는 편지를 하염없이 기다리다가 지쳐 우편함 앞에 주저앉곤 했다.
그럴 때면 꼭 토미가 와서 산책을 가자고 졸라댔다. 지우는 가만히 주저앉아 있는 것이 아니라 토미에게 목줄을 채우고 일어서야 했다.
토미는 지우가 도저히 슬픔에 잠기지 못하도록 했다. 간식을 달라고 계속해서 졸라댔다. 하루가 멀다고 온갖 사고를 쳤다. 자신을 볼 때마다 신이 나서 꼬리를 흔들고 사랑한다며, 사랑해달라며 달려들었다.
어느 순간부터인가 자연히 지우는 토미에게 더욱 깊이 의지할 수밖에 없었다.
어려서부터 자신의 곁을 떠나지 않은 유일한 친구였으니까.
그렇기에 토미를 잃었다는 현실은 지우의 마음에 크나큰 상처로 남았다. 죽음. 기존에 수차례 겪었던 상실보다 더욱 커다란 상실이었다.
흑마술에 의지하지 않았더라면 진즉에 마음의 문을 닫았을지도 모른다.
사실 지우도 아예 모르지는 않았다. 토미는 죽었으며, 자연의 섭리에 따라 결코 돌아오지 못한다. 하지만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견딜 수가 없었다.
당장 내가 나로서 살아가기 위해서는, 뭐라도 해야 했다.
‘······무슨 이야기를 하러 간 걸까.’
텅 빈 교실.
자리에 앉은 지우는 신과 두피가 사라진 문밖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어머니를 따라 인사드리러 간 옆집에서 처음 만난 신은 지금껏 수많은 또래를 만나본 지우가 느끼기에도 굉장히 특이한 유형이었다. 어딘가 어른스럽다고 해야 할까. 그 나이대의 남자애에게서는 전혀 느껴볼 수 없는 차분함이 존재했다.
그리고 그 차분함의 원인이 무엇인지는 금세 알 수 있었다.
자신과 한 살밖에 차이가 나지 않았지만, 그는 어엿한 ‘소설가’였다.
‘Mother’는 굉장히 흥미로운 소설이었다. 분량은 많지 않았지만, 그 세계 안에서 수지가 겪는 사건은 지우를 상상 속에 몰입할 수밖에 없도록 만들었다. 그녀 역시 수지처럼 마음을 기댈 장소가 없어진 채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밤새 소설을 다 읽은 그녀는 가게로 찾아가 용기를 내 신에게 말을 건넸다.
딱히 다른 뜻은 없었다. 그저 소설을 재미있게 읽었다고 말하고 싶었을 뿐이었다.
하지만 그 순간 신은 도리어 자신에게 불쑥 다가왔다.
그것이 불편하고 불안하면서도, 지우는 그가 건넨 ‘흑마술’이라는 화제에 이끌려 여기까지 오게 되었다.
왜냐면 흑마술은 그녀가 지금 마음을 기대고 있는 유일한 장소였으니까.
그렇기에 그녀는 신의 친절이 슬프게 느껴졌다.
‘어차피 이사 가면 끝나는 관계잖아.’
그럼에도 단호히 끊어내지는 못했다.
그녀는 열여섯짜리 여자애에 불과했으니까. 누군가가 먼저 내민 손을 뿌리칠 만큼 모질지 못했으니까.
그저 이렇게 생각하며 마음을 지킬 수밖에 없었다.
‘지우야. 너무 깊이 친해지지는 않는 거야.’
그래야 떠날 때 마음이 아프지 않으리라.
***
마스터 두푸스 킹스턴은 안경의 브릿지를 밀어 올리며 이렇게 말했다.
“흑마술은 기본적으로 부정적인 감정을 기반으로 진행되는 작업이다. 어설픈 각오로는 주문을 발현시킬 수 없다.”
흑마술에마저 정통한 그의 말에 따르면, 마법진 위에 올려둘 재료로는 새끼 고양이의 사체가, 그것도 갓 죽여서 영혼이 몸을 떠나기 직전의 물건이 최고라고 한다. 그래야 억울한 죽음을 겪은 고양이의 영혼이 흑마술을 일으키는 매개로서 작용할 수 있다나 뭐라나.
나는 두피에게 물었다.
“······새끼 고양이 죽여본 적, 없지?”
“그야 당연하지. 그게 싫어서 연구만 하고 실행해 본 적은 없어.”
“그럼 다행이고. 혹시 새끼 고양이 말고 다른 재료는 없어?”
“새끼 양?”
“제기랄, 왜 죄다 새끼야.”
“말했듯이, 억울한 죽음일수록 효과가 크니까.”
“다른 방법은 없어? 뭔가를 직접 죽이지 않고, 그냥 때 되어서 도살장에서 인도적으로 도축된, 합법적으로 정육점에서 구매한 안심살 600그램을 써서 흑마술을 성공시킬 가능성은?”
“하하- 신.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는군. 애초에 흑마술이란 게 다 가짜잖아.”
“그럼 왜 엄한 고양이를 죽이냐고!!”
나는 어이가 없어 버럭 소리쳤다. 그러자니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두피가 이런 이야기를 해왔다.
“너는 지우가 흑마술을 그만두길 원해?”
“음, 그렇다기보단······ 본인이 하고 싶다면야 내가 상관할 바는 아니긴 한데, 계속 저렇게 헤매면서 TRPG에 나오는 흑마술까지 연구하는 모습이 보기 안쓰러워서 말이야.”
“만족할 만큼 하면 그만두지 않을까. 대화를 나눠보니 딱히 흑마술에 본격적으로 파고들 정도로 진심인 것 같지는 않은데.”
나도 두피의 말에 동의했다.
지우의 행동은 열여섯이라는 나이에 흔히 벌어질 수 있는 수준에 머물러 있었다.
사춘기 시절에 자주 이사할 수밖에 없는 환경에서, 사랑하는 강아지를 한순간에 잃어버렸다. 마음의 공허함을 채우기 위해 뭐라도 해야 했고, 그러다 우연히 흑마술 입문서를 접했다. 그리고 거기에 순수하게 매달리고 있는 것뿐이었다.
“신. 뭔가 위험한 짓을 하지 않을까 걱정되면 내가 적당히 순화해서 말할게. 자신의 손으로 죽인 동물이나 본인의 피를 바치면 효과가 없다고 말이야. 그러면 그런 행동은 하지 않겠지. 다행히 지금 지우는 내가 하는 말을 믿고 그대로 따라줄 것 같으니까.”
“······그 정도에서 그치는 게 나으려나.”
“그렇지. 사람이란 힘든 상황에서 마음 기댈 곳을 찾는 동물 아니겠어? 나 역시 장르나 너드질을 통해 인생의 어려운 시기에 나쁜 행동을 하지 않고 견뎌냈으니까.”
“그 나쁜 행동이라는 건······ 설마.”
“엘로임 엣사임-.”
“······.”
“신. 이 주문은 받아줘야 해.”
“······엘로임 엣사임.”
나는 순간 눈앞의 남자에게서 심연의 공포를 느끼며 순순히 화답했다.
‘그러면 그냥 이대로 두는 게 맞는 건가.’
아예 틀린 생각은 아니었다. 나 역시 두피처럼 힘들었던 어린 시절에 장르 소설을 읽으며 버텨냈으니까. 그렇기에 어른이 되었을 때 더더욱 큰 배신감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지만.
하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나는 나 자신을 드러내며 나아가기로 정했다.
스스로 마음을 둘 곳을 만들고자 했다. 스스로 긍지를 새기고자 했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의 도움으로 그것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잠깐만.’
거기까지 생각한 순간, 머릿속에 불현듯 생각 하나가 스쳤다.
“저기, 두피. 나 방금 미친 아이디어가 하나 떠올랐는데.”
“뭐지? 나는 좋아한다. 너의 미친 아이디어.”
“흑마술에 대한 이해를 위해, 지우에게 함께 TRPG를 하자고 제안하면 어떨까?”
“······악마적, 실로 악마적인 발상이군. 신.”
중지와 약지를 엮어 안경을 밀어 올리는 두피의 이마 위로 한 줄기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상처 입은 순진무구한 소녀를 ‘이쪽 세계’에 끌어들이겠다는 건가.”
그의 신랄한 비난을 부정할 수 없었다.
하지만, 그렇게 해서라도 지우가 흑마술이 아닌 다른 분야에도 관심을 가졌으면 했다.
그리고 내가 조금씩 치유된 것처럼, 그녀도 좋은 사람들을 겪으며 그러길 바랐다. 나 역시 그중의 한 명이 될 수도 있겠지.
별다른 개입이 없을 때 그녀의 이후 1년간이 어떻게 흘러갈지, 나는 누구보다 잘 알았다.
그 누구와도 관계를 맺지 않고 혼자 지낸 끝에 또다시 어디론가 훌쩍 떠난다.
내 기억 속의 옆집 여자애와는 그렇게 인연이 끝났으니까.
그게 안타까웠다. 조금 많이.
“뭐, 일이 잘 풀리지 않더라도 새로운 취미 하나 정도 가지게 되면 좋지 않을까.”
······그게 굳이 TRPG일 필요는 없지만, 사실은 나도 그게 항상 하고 싶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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