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ecame an American Retro Novelist RAW novel - Chapter (64)
64.
아주 잠깐 해프닝이 빚어졌다.
세션의 일시 중지를 선언한 신은 자신이 그저 세계관 설정에 따라 NPC로 등장하는 ‘왕’을 연기했을 뿐으로, 지우를 모욕할 의도는 없었다고 주장했다. 그러고 나서야 세션은 다시 이어질 수가 있었다.
그렇게 처음에는 초보 두 사람의 눈높이에 맞춰 설명하고 배려하느라 살짝 버벅댔지만, 신은 시간이 지날수록 조금씩 자신의 솜씨를 발휘하기 시작했다.
두피 킹스턴, 아니, 이 세션 안에서 ‘로드 두푸스’로 존재하고 있는 한 남자는 시간이 지날수록 절묘하게 마스터링을 진행하는 신에게 감탄을 금치 못했다.
‘역시 현역 작가다운 솜씨로군.’
좋은 마스터는 플레이어가 원하는 대로 움직일 수 있도록 자유를 주면서, 동시에 자연스럽게 그들이 운명의 흐름대로 나아갈 수 있도록 이끈다.
플레이를 잘 유도한다는 이야기였다.
왕은 까마귀 소환에 실패해 임프를 나오게 한 마법사, 제이나를 심하게 질책했다.
제이나는 순간 움츠러들었고, 그 앞의 신은 왕으로서 연기하며 클레어에게 저 더러운 노 원을 어찌하는 편이 좋겠냐고 물었다. 그 말을 들은 클레어는 잔뜩 화가 나서 입을 열었다.
“진짜 말 나쁘게 한다. 잘못한 거면 한 거지, 거기서 신분 이야기는 왜 나와?”
“‘클레어, 아버지 앞에서 못하는 말이 없구나.’”
“그래도 이건 아버지가 잘못했잖아.”
“‘내가 뭘 잘못했지? 하마터면 노 원이 우리 모두를 위험하게 할 뻔했다.’”
“아니, 다 알겠는데. 왜 거기서 신분 얘기가 나오냐고! 너, 그러니까 이름이 뭐였지? ······아! 제이나. 그냥 제이나가 잘못했다고 말하면 되잖아! 제이나가 우리 모두를 죽일 뻔했다고 말이야!”
“······.”
죄책감에 제이나의 어깨가 움츠러들었다. 그러자 왕은 이렇게 외쳤다.
“‘안 되겠군. 저 위험한 지하 동굴에서 무슨 일을 벌일지 모르겠어. 흑마법사는 파티에서 제외한다!’”
“누, 누구 마음대로?!”
신분에 따라 차별하는 아버지에 대한 통렬의 반발. 클레어는 자기가 어디에 가는 줄도 제대로 알지 못하면서 외쳤다.
두피는 신과 알렉사, 두 사람의 논쟁을 지켜보면서 감탄을 금치 못했다.
그리고 로드로서 격화되는 대화 사이에 끼어들면서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왕이시여. 한 말씀 올려도 되겠습니까?”
“‘음, 무슨 일인가. 로드 두푸스.’”
“일단은 흑마법사의 이야기를 들어보는 게 우선일 듯합니다. 허락해 주신다면 미약하나마 마법에 대한 조예가 있는 제가 폐하의 판결에 도움이 되도록 도울 수 있겠습니까?”
“‘좋다. 그대라면 믿을 만하지.’”
허공에서 턱 밑을 가볍게 쓰다듬는 동작을 취하는 신.
그것이 수염을 쓰다듬는 동작임을 알아차리고는 두피는 안경을 스윽 밀어 올리려던 손을 간신히 멈췄다. 현실의 자신은 아무리 감탄을 했어도 지금의 자신은 로드 두푸스였으니까.
‘그야말로 마스터의 표본.’
소국의 프린세스 ‘클레어’의 역할을 맡은 알렉사 플레어는 잔뜩 심통이 난 표정이었다. 지금의 플레이에 몰입했다는 증거였다.
플레이어가 가진 선량한 면모를 자극해 이 상황에 몰입시킨 신의 마스터링 앞에서 두피는 흥미로운 이야기가 될 것 같다고 느끼며 옆을 돌아보았다.
잔뜩 겁을 먹은 제이나.
그녀를 보며 두피는 조심스럽게 질문을 던졌다.
“흑마법사, 제이나여.”
“네, 네?”
“어찌하여 왕궁에서 누구의 허락도 받지 않고 소환 의식을 벌였지? 아니, 그 전에 무엇을 소환하려고 했는지부터 말해줄 수 있겠나?”
“아, 그게······.”
제이나는 시트를 뒤적이더니 말했다.
“까마귀요.”
“어째서?”
“자유롭게, 하늘을 날게 해주고 싶어서. 갇혀 있으면 불쌍하잖아요.”
“······.”
“끄흡!”
클레어가 그 순수한 마음씨에 감동해 두 손으로 입을 틀어 막았다.
그리고 그는 마스터이자 동시에 왕인 존재를 노려보며 외쳤다.
“얼마나 마음이 갸륵해! 너무 귀여워!”
“‘······이해할 수가 없군.’”
“왕이시여.”
“‘무슨 일인가. 로드 두푸스.’”
“아무래도 저 어린 흑마법사는 자신의 소환물에 굉장한 애착을 가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소환물은 탐사에 있어 큰 도움이 될 수 있으니 함께 데려가는 편이 낫다고 사료됩니다.”
“‘하지만, 그로 인해 내 딸이 위험에라도 처한다면······.’”
“방금 공주님의 실력을 제 눈으로 본 바, 걱정은 없을 듯합니다. 행여 무슨 일이 벌어지더라도 이 두푸스가 최선을 다해 공주님을 지키겠습니다.”
“‘렝카스터의 공작인 자네가 그리 말한다면, 어쩔 수 없군.’”
“오, 이제 문제 해결됐어?”
“그렇습니다. 제이나. 그리고 클레어 공주님. 함께 힘을 합쳐 지하를 조사하죠!”
“가, 감사합니다. ······공주님도요.”
“괜찮아. 괜찮아. 제이나, 같이 재미있게 다녀오자.”
상냥한 얼굴로 말을 건네는 클레어.
신과 두피는 말할 것도 없고, 초보인 두 소녀 역시 점차 이야기에 몰입하기 시작하기 시작했다.
그렇기에 알지 못했다.
지금 카페테리아에 있는 모든 손님들의 시선이 집중되고 있다는 사실을.
‘공주라고?’
‘로드······?’
‘흑마법?’
지금 네 사람이 빠져들기 시작한 환상 속의 모험은, 외부에서 보기에 그저 별세계의 이야기일 따름이었다.
***
그렇게 모험은 시작되었다.
로드 두푸스를 필두로 프린세스 클레어와 노 원 제이나는 왕궁의 지하로 내려갔다.
왕의 앞에서는 클레어가 다치지 않도록 보호하겠다고 말한 두푸스였지만, 사실 그는 조금도 긴장하고 있지 않은 상태였다. 이유는 간단했다. 마스터가 오늘 세션은 처음으로 TRPG를 하는 초심자용이라고 말했기 때문······만은 아니었고, 그가 역전의 용사였기 때문이었다.
믿음직한 동료들과 협력해 왕국을 위협하던 드래곤을 물리쳐 본 경험마저 가지고 있는 로드 두푸스의 눈으로 보기에, 이번 일은 사실 뻔했다.
왕궁의 지하는 이전까지 영문도 모르는 채 폐쇄된 상태였다. 그리고 지하를 폐쇄할 수밖에 없었던 이전의 문제가 다시 벌어져, 잠들어 있던 몬스터가 깨어나고 만 거겠지.
그렇게 두푸스는 초심자······ 아니, 오늘이 첫 출정인 두 사람을 배려했다.
그는 제이나에게 까마귀를 소환시켜 혹시 모를 트랩에 대비하며 앞으로 나아가는 방법을 가르쳤고, 몬스터가 등장해 전투가 벌어질 때마다 프린세스 클레어의 전투를 옆에서 보조했다.
프린세스 클레어는 역시 소국의 기사단장을 힘으로 이기는 자다운 모습을 보여주었다.
신성한 춤을 통해 타인의 능력을 고양시키며 그녀는 주사위 20을 띄워······ 아니, 참으로 운이 좋게도 춤의 진행 경로에 있는 몬스터들을 풋 스텝으로 완전히 갈아버렸다.
그러고 나면 꼭 제이나에게 뭔가 불행한 일이 벌어졌다.
하지만 로드 두푸스의 도움으로 문제를 해결하며 계단을 타고 내려가는 일행.
서로 협력하며 탐험을 지속하는 동안, 그들 사이에서는 고된 경험을 함께하는 이들 사이에서 으레 있을 법한 감정이 싹텄다.
바로 ‘우정’이었다.
운명의 ‘주사위’가 굴러가고 그게 올바른 방향을 가리킬 때마다 클레어는 환호했다.
“어! 어! 지금 이거 잘 나왔지?! 까악이가 몬스터 물리쳤지?!”
“······흑마법사의 피조물이 이 고블린의 눈알을 파내 먹습니다.”
“잘했어! 까악아!”
“우리 까악이, 잘했어.”
“신, 까악이 흉내 내줘!”
“······‘까악, 까악.’”
의기양양해진 피조물(연기를 하는 신)이 무미건조하게 우는 소리를 냈다.
그렇게 궁정 지하의 최하층까지 내려간 일행은 비명 소리의 정체와 마주하게 되었다.
바로 네 구의 스켈레톤이었다.
스켈레톤 워리어와 스켈레톤 매지션으로 구성된 적의 파티. 과거에 왕을 시해하려다가 붙잡혀서 산채로 이곳에 묻힌 이들이었다. 로드 두푸스의 예상대로, 그들의 원념과 저주가 한데 모여 오랜 시간이 지난 끝에 부활하고 만 것이었다.
왕을 죽여야 한다는 일념 하나만으로 움직이고 있는 그들은 목에 제각각 그들의 생전 이름이 새겨진 구속구를 쓰고 있었다.
안드레, 말릭, 칼림, 미셸.
그걸 본 흑마법사 제이나의 눈이 휘둥그레 뜨였다.
“어······ 신? 어디선가 많이 본 이름인데.”
“구속구에 새겨진 이름을 본 프린세스 클레어는 어린 시절에 유모로부터 그들에 관한 이야기를 들었다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아니, 클레어가 아니라 플레어가 들은 느낌이야.”
알렉사는 살짝 몰입이 깨진 채 중얼거렸다.
신이 언급한 이름은 학교에서 지우를 괴롭혔었던 네 사람의 흑인 학생이었다. 신이 준비한 TRPG 스토리에 자신들의 이름을 딴 몬스터가 등장하리라고 그들은 과연 예상했을까.
······그래서 신은 열일곱 살의 방식대로 유치한 복수를 하겠다고 했던 걸까.
그 ‘복수’가 재미있다고 생각하면서도 너무 유치하다는 기분도 들어서 어리둥절해하던 알렉사는, 한껏 진지해진 지우의 모습을 발견하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리고 이내 웃음이 나왔다.
“제이나!”
“네, 네······!”
“어서 이놈들을 물리치자!”
“네!”
처음보다는 확연히 커진 목소리로 말하는 제이나.
그리고 그런 두 사람의 모습을 지켜보던 로드 두푸스가 안경을 스윽 밀어 올릴 수 없어 고개를 들어 올린 채 하늘을 바라보았다.
“어라, 나······ 어째서 눈물이······?”
“제이나, 당신 턴입니다.”
“까마귀를 날려서 적의 눈알을 파내겠어요!”
또르르.
2.
“날아간 피조물을 스켈레톤이 파리를 쳐내듯 벽으로 쳐냅니다.”
“안 돼애애애애-!!”
“까악아!!”
그들의 첫 번째 모험은 마지막 순간까지 흥미진진하게 이루어졌다.
***
첫 세션은 어찌저찌 잘 마무리가 되었다.
마지막에 그동안 나온 주사위 중 최고 숫자인 12가 나온 제이나가 막타를 쳤고, 스켈레톤은 바닥에 쓰러졌다.
제이나가 공격당하려 할 때마다 옆에서 열심히 막아준 로드 두푸스와 나머지 세 마리를 캉캉 춤으로 짓밟던 클레어까지.
참 흥미로운 조합이었다.
비록 캐릭터로서 플레이하지는 못했지만, 약 4시간 동안 세 사람이 펼치는 모험의 순간을 틈틈이 기록하면서 나 역시 무척이나 흥미롭게 TRPG를 즐겼다.
세션이 끝나고 친구들과 저녁 식사까지 마친 뒤, 깊은 만족감을 느끼며 집으로 돌아왔다.
바로 옆집에 사는 지우와 인사를 마치고 집으로 들어와, 소파에 앉아 있던 어머니에게 인사를 건넸다. 그리고 부엌에서 코코아 한 잔을 타서 2층으로 올라왔다.
살짝 쌀쌀해진 늦은 밤.
나는 한참 동안 떠드느라 칼칼해진 목을 따스하게 덥혀줄 코코아를 마셨다.
“좋아.”
그리고 플레이 기록지를 보면서 ‘일’을 시작했다.
나는 줄리아 챈들러의 제안으로 이 리플레이를 소설로 각색할 예정이었다.
사실, 오늘의 리플레이의 내용이 일반적으로 이 시대에서 요구하는 소드 앤 소서리 소설에 적합하냐고 물으면, 당연히 아니었다.
일단 주인공부터 근육질의 거한이 아니었으니까.
지금 이 이야기의 중심인물은, 흥미롭게도 알렉사가 역할을 맡은 프린세스 클레어였다.
이 시대의 일반적인 소드 앤 소서리에서는 비중이 거의 없거나, 전리품에 불과하거나, 붙잡힌 히로인의 역할 정도를 수행하는, ‘공주’ 기믹의 캐릭터.
하지만 분명 프린세스 클레어는 매력적인 캐릭터였다.
최상위의 계급과 타고난 높은 능력치. 운명의 가호(다이스 갓)를 워낙 많이 받는 탓에 혼자 일국의 군대를 상대할 수 있겠다 싶을 만큼 뛰어난 활약상.
또한 플레이어의 성향 탓이겠지만, 신분과 관련된 부분에서 굉장히 깨어난 의식을 드러낸다는 점이 흥미로웠다.
‘일반적인 KOG의 서사가 지향하는 바 하고는 완전히 정반대이긴 하지만.’
보통 ‘KOG’의 리플레이 작품은, 주인공이 낮은 계급에서 모험을 통해 점점 성장하며 높은 계급이 되어 간 끝에 영광을 누리게 되는 내용이 대부분이었다.
하지만 우리의 리플레이는 오히려 그런 부분을 꼬집는 면이 훨씬 강했다.
나는 그런 요소가 작품에 있어 양날의 검이 될 수도 있겠다고 느꼈다.
‘잘만 꼬집으면 풍자가 되지만, 선을 넘으면 팬들이 반발하겠지.’
장르 콘텐츠를 즐기는 이들은 작품에서 유희적인 즐거움을 원하지, 딱히 계몽적인 가르침을 바라지 않는다.
신분제가 구시대의 산물이라는 사실쯤은 그들도 당연히 안다. 하지만 현실과는 다르게 사회 시스템이 규칙 안에서 극복할 수 있는 요소로 나왔기에 KOG만의 재미가 성립되고, 사람들에게 오락으로 소비될 수 있는 것이었다.
말인즉슨, 이 글을 읽을 독자들이 납득할 만한 타당한 이유가 필요했다.
‘프린세스 클레어는 이런 식으로 행동할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어린 시절에 가장 가깝게 지냈던 친구가 성 아래 도시의 평민이었으니까.
그리고 프린세스 클레어는 공주였기에 두 사람은 나이가 들면서 서로 멀어졌으니까.
클레어는 주변의 시선을 개의치 않은 채 그 친구를 계속 곁에 두고자 했으나 그것은 사회적인 억압이 되었고, 결국 이 신분제 사회를 지긋지긋하게 생각할 수밖에 없게 된 것이다.
‘이런 식으로.’
리플레이를 각색한 소설은 기본적으로 현실의 플레이어가 가진 성향을 캐릭터에 반영해 그럴듯하게 꾸며내는 과정이 필요했다.
나는 한 명 한 명의 캐릭터마다 플레이한 사람의 성향을 생각해 이야기로 만들어 내기 시작했다.
로드 두푸스는 역전의 용사였으나 자신의 한계를 느끼고 있다.
과거의 동료들이 각자의 사정으로 흩어졌고, 자신이 여러 위기를 극복하며 지켰다고 생각했던 세계는 여전히 그대로였다.
그렇기에 미래의 재목이 될 만한 이들을 키워내고자 한다. 자신과 같은 영웅을.
그리고 마지막으로, 노 원 흑마법사 제이나.
인권조차 희박한 가장 낮은 계급이자, 사람들에게 경원시 되는 직업을 가진 소녀.
종이 위에 글을 수기로 한 자 한 자 새겨나가던 와중, 나는 자그마한 여자애의 모습을 떠올리며 슬그머니 미소를 지었다.
‘참 절묘하단 말이지.’
이 캐릭터는 플레이를 맡은 장지우와 닮은 구석이 있었다.
지우 역시 제이나처럼 자신이 어쩔 수 없는 일로 인해 갖가지 불행을 겪었다.
가정 사정 때문에 끊임없이 전학을 다니며 항상 새로운 환경을 접해야 했고, 단지 동양인에 성이 ‘장’이라는 이유로 차별과 괴롭힘을 당했으며, 기르던 강아지는 자신이 손쓸 새도 없이 멀리 떠나보낼 수밖에 없었다.
나는 그녀가 조금이라도 즐거운 경험을 했으면 했다.
내가 가진 가장 큰 힘, 글을 쓰는 능력을 가지고서.
그렇기에 나는, 이 소설의 진짜 주인공은 클레어보다도 제이나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지나가듯이 나온 부분이었지만, 과연 두피와 알렉사, 지우는 알고 있을까.
왜 하필 소환에 실패하고 나온 몬스터가 악마인 ‘임프’였는지를.
앞으로 그들에게 제공할 시련(?)을 생각하며 나는 음산한 웃음을 흘렸다.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