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ecame an American Retro Novelist RAW novel - Chapter (65)
65.
오늘도 분주하기 짝이 없는 로스앤젤레스 타임스의 사무실 안.
오전 회의와 발제를 마쳐도 줄리아 챈들러의 책상 위에는 여전히 일거리가 쌓여 있었다.
그중 전날 외근 나갔을 때 온 원고를 집어 들고 읽던 도중, 그녀가 돌연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바로 앞자리에 앉아 열심히 기사를 쓰던 문화 섹션의 동료 기자가 물었다.
“줄리아, 무슨 일 있어?”
“잠깐 화장실 좀.”
“오, 거기에 휴지가 있었군.”
비교적 얇은 팩스 용지를 구기듯 움켜쥐고 있는 그녀를 향해 기자가 짓궂게 말했다. 대답할 가치가 없다고 생각했던 줄리아는 빙긋 웃어주고는 서둘러 화장실로 향했다.
텅 빈 복도에 하이힐 굽이 내는 소리가 빠른 리듬으로 울려 퍼졌고, 화장실 안으로 들어선 줄리아가 곧바로 배를 움켜쥐었다.
“푸흐, 끄끅······!”
그리고 그녀는 꾹 눌러 참았던 웃음을 터뜨렸다.
정말이지, 미치는 줄 알았다.
거울 앞에 서서 미친 사람처럼 흐느끼며 웃던 줄리아는 간신히 심호흡하며 정신을 차렸다.
자신이 가져온, 반쯤 구겨진 종이를 내려다보았다.
신 작가로부터 팩스로 당도한, TRPG 리플레이의 각색 소설.
예상한 것 이상으로 그 내용이 무척이나 가관이었다.
너무 웃겨서 도저히 사무실에서 읽을 수가 없었다. 다른 직원도 많은 사무실에서 빵 터져서 폭소하는 모습을 보이는 게 싫었던 터라 이렇듯 화장실로 대피(?)한 것이었다.
그녀는 느긋하게 벽에 기대어 선 채 신이 보내온 원고를 다시 펼쳐 읽어나가면서 감탄을 금치 못했다.
‘어떻게 이런 내용이 나왔지?’
일반적인 소드 앤 소서리라기보다는, 그에 대한 패러디에 가까운 소설이었다.
‘소드 앤 소서리’는 장르명처럼 검과 마법, 그리고 그 힘을 통해 얻는 성취와 영광을 주로 다루는 장르였다.
사람들은 비일상의 세계에서 펼쳐지는 주인공의 아찔한 모험을 보면서 대리만족을 느꼈으며, TRPG 리플레이 소설에서도 그러한 이야기적 경향은 비슷하게 반복되었다.
‘보통 소드 앤 소서리의 팬이 TRPG를 플레이하니까.’
하지만 이 소설은 그런 느낌이 전혀 아니었다.
아무것도 모르고 읽으면, TRPG와 소드 앤 소서리 장르에 정통한 플레이어가 일부러 ‘루니’ 플레이를 한 것 같다고 생각될 정도였다.
‘루니’는 상황이나 분위기, 설정에 맞지 않는, ‘정신 나간 행동’을 일삼는 TRPG 플레이어를 뜻하는 말이다. 그리고 줄리아는 이 작품에 등장하는 프린세스 클레어나 노 원 제이나의 캐릭터로부터 그런 느낌을 받았다. 둘 다 일반적인 TRPG의 등장인물 같지가 않았다.
‘이 두 캐릭터의 플레이어가 작가님이 말씀하셨던 초보일 수 있겠어.’
소드 앤 소서리 장르에 완전히 관심이 없는 성격이라면 신분제 사회에 의문을 가진 공주 캐릭터를 연기할 수도 있다. 자신의 소환수를 어여삐 여기는 흑마법사 캐릭터 역시 마찬가지였다. 아무튼 이 둘은 일반적인 소드 앤 소서리 장르에 나올 법한 캐릭터가 결코 아니었다.
그렇기에 소설 내에서 이 두 캐릭터에게 확실한 서사를 부여했다.
말인즉슨, 공주인 클레어가 신분제에 염증을 느끼는 이유나, 흑마법사인 제이나가 소환수를 하나의 생명으로 여기는 이유에 대한 굉장히 흥미로운 서사가 주어졌다는 말이었다.
그리고 그 이유가 서로 어울렸다.
클레어는 평민이었던 친구를 잃었으며, 제이나는 귀족 사회에서 살다가 그들로부터 배신당해 나락까지 떨어져 버린 안타까운 인물이었다.
그로 인해 두 사람은 처음부터 서로를 크게 의식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왕궁의 지하를 탐색하는 첫 번째 퀘스트가 끝나는 시점에서 상대를 조금씩 이해하게 되고, 클레어가 제이나를 감싸며 함께 파티를 맺기로 결의하는 것으로 마무리된다.
줄리아는 이 캐릭터 설정들이 신 작가의 완전한 창작일 것이라 생각했다.
‘TRPG를 처음 플레이하는 유저라면, 이런 깊은 서사를 부여할 수는 없을 테니까.’
그렇기에 다소 기존의 클리셰를 비틀더라도 무척이나 흥미로웠다.
아니, 흥미로운 걸 넘어서, 웃겼다.
천성적으로 강함을 타고난 클레어는 어린 시절에 궁정에서 배운 춤을 이용한 무술로 몬스터를 찢어발겼다. 제이나는 그 옆에서 흑마법을 통해 보조하려고 하지만······ 굉장히 다양한 불운이 겹치면서 오히려 다른 문제를 불거지게 만들었다.
두 캐릭터로 인해 엉망진창의 상황이 계속해서 벌어지는데, 한 인물이 이들을 하나로 묶어 주며 파티에 안정감을 만들어 주었다.
렝커스터 왕국의 공작, ‘로드 두푸스’였다.
‘참 특이한 조합이야.’
렝커스터 왕국은 칠왕국 중에서도 가장 큰 발언권과 힘을 지닌 국가였다. 신을 모시는 성직자였음에도 그만한 국가에서 공작의 작위까지 얻었다는 것은, 그만큼 어려운 모험을 수없이 완수해 왔다는 의미였다.
그런 영웅적 존재가 파티에 합류한 것만으로도 중심이 굳건하게 서는 느낌이었다.
‘스승과 제자 같은 느낌이라고 해야 할까?’
소국의 왕궁 지하에서 발생한 탐색을 끝마친 세 사람은, 곳곳에서 망자가 부활하는 일이 계속해서 벌어지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의기투합해 모험에 나선다.
기본적으로 선한 편이지만 세상일에는 무지했던 클레어는 모험에서 만나는 갖가지 상황에 의문을 제기한다.
그로써 굉장히 흥미로운 패턴이 성립했는데, 예를 들자면 이런 식이었다.
『영주의 설명을 들은 클레어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 대충 이해는 했는데요. 도저히 납득이 안 가는 부분이 있어서······.”
“흑흑, 어떤 부분일까요······.”
영주는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딸이 도적에게 납치되어 노이로제에 걸린 모습을 보고 마음이 약해질 법도 하건만, 클레어는 꿋꿋하게 자신이 의문을 느낀 부분에 대해 파고들었다.
“따님을 납치해 가면서 그 도적놈들이 아무런 요구도 하지 않았나요?”
“네, 아직까지 아무런 말이 없습니다······. 그래서 속이 더 타들어 가네요.”
“그러면 납치를 왜 했지? 금화라도 요구하든가.”
“클레어. 선뜻 금화를 내어놓을 만한 재력이 있는 영지였다면, 애초부터 딸이 납치되지 않았을 거요.”
로드 두푸스가 버릇처럼 빈 콧잔등을 스윽 밀어 올렸다.
“일종의 조롱이라고 보면 되겠군. 놈들은 영주의 딸을 납치하면서 자신들이 한낱 도적임에도 근방에서 강력한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싶은 거겠지.”
“······! 그렇군요! 이 나쁜 도적놈들! 돈 한 푼 없는 영지를 괴롭히다니!”
“저기, 다 들리는데요······.”
“영주님! 걱정하지 마세요! 저희가 꼭 따님을 구해드릴게요!”
“저희 영지, 상황이 그렇게 나쁘지는 않답니다아······. 저희도 고기 먹어요······.”
영주는 씁쓸하게 대꾸했지만, 세 사람은 듣지 않았다.』
‘Fantastic.’
이 짧은 꽁트에서 작품의 재미가 그대로 드러났다.
클레어는 소드 앤 소서리 소설에 곧잘 등장하는 클리셰를 꼬집었고, 옆에서 두푸스가 거기에는 나름대로 이유가 있음을 설명했다. 그리고 그 대화가 옆에서 듣는 사람이 느끼기에는 큰 상처로 돌아와, 읽는 입장에서는 쓰게 웃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 연출되었다.
그리고 단순히 거기까지였다면 그냥 적당히 클리셰를 비틀고 부수는 소설 정도로 남았겠지만, 그렇지가 않았다.
이후의 전개가 모든 주연 캐릭터가 예상하지 못했던 방향으로 흘러가면서, 소설의 이야기 자체가 캐릭터보다 더 적극적으로 클리셰를 파괴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영주의 딸은 사실 도적단의 두목과 사랑에 빠져 도피를 한 것이었다.
그 사실을 안 일행은 결혼을 허락받으면 된다는 일념으로 영주의 성에 돌아간다. 영주는 도적의 편에 서서 돌아온 클레어를 보고 당황해 공격을 명령하지만, 그녀의 춤 앞에 모든 것이 수수깡처럼 쓰러졌다.
문제를 해결하고 상처만 남긴 뒤, ‘빨간 구두’의 전설을 남기고 나아가는 클레어.
그리고 그러는 동안 제이나 역시 차근차근 성장해 나갔다.
화장실에서 실컷 웃으면서 그런 식으로 이루어진 소설을 다 읽고야 말았다.
조금 당기기 시작한 복근을 느끼며, 줄리아는 전문가의 시선으로 이 소설을 평가했다.
‘잘 썼단 말이야.’
이 소설은 소드 앤 소서리의 패러디와 코미디에 가까웠다.
KOG의 세계관을 바탕으로, 클레어와 제이나라는 파격적인 더블 주인공을 앞세워, 일반적인 주인공 이미지에 걸맞은 로드 두푸스가 두 사람이 폭주하지 않도록 갈피를 잡아주고, 막장으로 치닫는 상황을 수습하면서 풀어나가는 구성.
여러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그 생각들이 하나로 이어지며 질문을 던졌다.
이런 소드 앤 소서리 소설은 과연 누가 좋아할까?
‘그야 TRPG의 팬들이겠지.’
화장실에서 잠깐 고민하던 줄리아는 손목시계로 시간을 확인하고 자리로 돌아왔다. 그리고 팩스 마지막 페이지에 오늘은 집에 있을 거라고 메모를 남긴 것을 상기하며 신 작가에게 전화를 걸었다.
뚜르르, 뚜르르르르······.
[네, 전화 받았습니다.]“안녕하세요. 작가님. 줄리아에요.”
[아, 줄리아. 잘 지내셨어요?]의례적인 인사가 오갔고, 줄리아는 곧바로 원고부터 칭찬했다.
“정말 재미있던데요? 친구분들이 초보라서 나름의 재미가 있을 수도 있겠다고 말씀드리기는 했지만, 작가님께서 오히려 그 부분을 이렇게까지 살려서 진행할 줄은 생각하지 못했네요. 작가님께서 어떤 식으로 마스터링 하셨을지가 상상이 되어서 더 즐거웠어요.”
[다들 하고 싶은 플레이가 있으니 저도 거기에 맞춰 줘야겠다고 생각했거든요. 각색한 부분이 정말 많기는 하지만, 얼추 소설과 비슷한 느낌으로 플레이했습니다.]“세션을 몇 번 정도 진행하셨나요?”
[지금까지······ 총 네 번이네요.]“이후 전개를 좀 봐야겠지만, 솔직하게 말씀드려도 괜찮을까요?”
[네, 물론이죠.]“저는 이 리플레이 소설이 잡지로 가는 게 맞다고 생각해요.”
줄리아의 말에 전화 반대편에서 소식을 들은 신은 가볍게 입술을 핥았다.
바로 대답하기 어려운 주제였기 때문이었다.
잡지 연재.
신문 연재에 비해 페이도 높고, 그만큼 요구하는 원고 분량도 더 많은 연재처.
하이스쿨을 다니는 동안에는 차근차근 네임밸류를 쌓고, 어머니를 안심시켜 드리기 위해 집안일과 공부, 친구들과의 시간에도 집중하고자 잡지 연재를 고려하지 않겠다고 결정했던 신이었다.
하지만 줄리아의 말을 듣자 살짝 마음이 흔들렸다.
신 역시 이번에 자신이 쓴 리플레이 소설이 마니악한 측면이 있으며, 그렇기에 장르 문법에 빠삭한 팬들이 더 즐겁게 보리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런 팬들은 신문 연재보다 자신이 좋아하는 장르에 주력하는 잡지를 찾아 읽는 경우가 흔했다.
“으음······ 고민 좀 해보겠습니다.”
[너무 부담가지지는 마시고. 일단 계속 재미있게 즐기면서 작업해 주세요.]“네, 또 좋은 에피소드가 나오면 보내드리겠습니다.”
그 말을 끝으로 전화를 끊은 뒤, 신은 거실 탁자에 앉아 기다리고 있던 소녀를 바라보았다.
“미안, 갑자기 일 전화가 걸려 와서.”
“아, 아니에요. ······멋있었어요.”
지우 장.
바로 근처에 살고 치어리더 클럽도 하지 않는 그녀는, TRPG를 시작한 이후 마치 어미 새를 쫓아다니는 아기 새처럼 방과 후면 매일 같이 신을 쫓아다녔다.
오늘 역시 비슷한 상황이었다. 심지어 전날 시간이 되는지 물어보면서 먼저 약속을 잡기까지 했다.
“그럼 하던 거, 마저 정리해 보자. 모르는 거 있으면 물어보고.”
“네!”
11월이 거의 끝나가는 시점, 5회차를 앞둔 TRPG는 그동안 많은 변화를 거쳤다.
한 세션당 하나의 모험.
앞서 네 번의 모험을 거친 클레어와 제이나는 제법 성장했다. 플레이어뿐만이 아니라, 캐릭터에게도 상당한 경험치가 쌓였다는 의미였다. 그리고 게임 플레이를 하다 보니 흥미가 생겼는지, 지우는 스스로 TRPG 관련 서적을 찾아 읽으면서 자신의 캐릭터인 ‘제이나’를 어떤 식으로 성장시킬지를 계속해서 고민했다.
신의 입장에서 보기에는 굉장히 기분 좋은 일이었다. 마음 둘 곳 없이 조용히 흑마술에 심취한 채 혼자 지내다 이곳을 떠났었던 지우가, 이제는 자신과 함께 TRPG를 진지하게 즐기는 모습을 보여줬으니 말이다.
실제로 지우는 나름대로 이 TRPG를 꽤 즐기고 있었다.
처음에는 연기하는 게 어색하고 힘들었지만, 신의 훌륭한 마스터링을 통해 조금씩 상상의 나래를 펼치다 보니 이 KOG 세계관 안의 자신이 누구인지, 그리고 또 어떤 식으로 행동할지에 대한 나름의 기준이 잡혀가기 시작한 것이었다.
그저 어색하기만 했던 초반과는 달리, 즐거운 순간을 선사해 준 알렉사나 두피와도 이제는 눈을 마주치고 이야기할 수 있게 되었다.
신이 가지고 있는 룰북과 자신의 캐릭터 시트를 열심히 비교해 가면서 수치를 계산하던 지우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아, 가능할 것 같아요.”
“그래?”
“네. 저번에 영주님 딸을 무사히 결혼시키면서 경험치를 획득해 레벨이 상승했으니······ 이제 제 캐릭터 레벨이 2고, 스킬 하나 더 가질 수 있게 되는 것 맞죠?”
“응, 그렇지. 어떤 스킬을 선택하려고?”
“여기, 이거요.”
지우는 조심스럽게 룰북 위의 단어 하나를 가리켰다.
‘Hell-berus’.
지옥의 파수견을 소환해 함께 싸우는 스킬.
흑마법사에게 딱히 선호되지 않는 마법이었지만, 신은 지우가 왜 그런 선택을 했는지 그 이유를 이해하고 곧장 고개를 끄덕였다.
“멋진데?”
“······네.”
지우는 수줍게 웃으며 볼을 붉혔다.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유치한 결정이라고 느꼈다. 헬-베로스, 지옥의 파수견을 소환하는 이 스킬을 보자마자 자신이 왜 여기에 이끌렸는지, 그 이유는 무척이나 자명했으니까.
하지만 흑마술을 통해 죽은 토미를 되살리고 싶었던 소녀는, 이 기술을 배운다는 것 자체에서 조금이나마 대리만족할 수 있었다. 물론, 토미가 지옥의 파수견이 됐으리라는 생각은 절대로 하지 않았지만.
지우는 어색하게 웃으며 신을 돌아보았다.
“신 오빠, 정말 고마워요.”
“······갑자기?”
“네, 옆집에 이사 온 것뿐인데 계속 챙겨주셨잖아요. 공부나 소설로 많이 바쁘실 텐데 제 고민을 신경 써주고, 옆에서 이런 즐거운 놀이도 가르쳐 주셔서 정말 감사드려요.”
“어, 지우야?”
“네?”
“다 떠나서. 네가 TRPG를 즐거운 놀이라고 말해준 것만으로도 이 아저씨는 정말 감동하고 있단다. 정말이야.”
“······아저씨?”
“아니, 그. 열일곱, 열일곱.”
지우가 TRPG를 함께해 주면서 어린 시절의 추억을 다시 만들어 가고 있던 신은 황급히 말을 정정하면서 머쓱하게 웃었다.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