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ecame an American Retro Novelist RAW novel - Chapter (70)
70.
‘재밌겠는데요. 이 파티에 코즈믹 호러가 섞인다면 어떤 리플레이가 나올까 기대되네요.’
내 설명을 들은 줄리아는 그런 반응을 남기고 돌아갔다.
멋들어지게 사각진 그녀의 차가 집 앞 도로에 부드럽게 올라서는 것까지 지켜본 나는 싱긋 웃으며 뒤돌아섰다.
‘불가항력’이라는 단어가 있다.
일반적으로는 천재지변이나 자연재해처럼 인간이 할 수 있는 어떤 수단과 방법을 동원해도 피할 수 없는 존재나 힘을 뜻하는 말이었다. 태풍이 치고 산불이 휩쓰는 와중에는 개개인의 힘이란 무력하기 마련이며, 그에 대한 공포는 인간의 유전자에 각인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 공포를 하나의 장르로 만든 것이 바로 ‘코즈믹 호러’였다.
미국의 소설가, ‘하워드 필립스 러브크래프트’가 이 장르에서 가장 유명한 인물로 알려졌지만, 사실 이 장르의 선구자 격 인물은 그와 비슷한 시대를 좀 더 일찍 산 영국의 소설가 아서 매컨이었다.
어쨌든 그들의 작품은 인간을 이 거대한 우주에서 한낱 먼지밖에 되지 않는 존재로서 묘사하는 것으로 유명했다.
그것을 읽고 나면 아주 잠깐은 세상이 아주 다르게 보인다.
스스로가 너무나도 작은 존재로 느껴진다. 어찌할 수 없는 세상의 거대함이 느껴진다.
내가 전혀 인지하지 못하던 세계에 대한 절망과 압도적 공포.
바로 이것이 ‘코즈믹 호러’의 기반이었다.
여기에서 더 나아간 시대에 몇몇 작가는 코즈믹 호러를 조금 다른 방식으로 풀어냈다.
단순히 인간이 공포를 느끼고 미쳐버리는 과정만을 보여주는 게 아니라, 미지의 공포와 싸워 이기려는 인간의 모습을 섬세하게 그려냈다.
‘코즈믹 호러의 안티테제적인 작품인 셈이지.’
또한 코즈믹 호러는 워낙에 매력적인 소재인 만큼, 여러 작품에서 굉장히 많이 변주되는 주제였다.
예를 들자면 영화 ‘에일리언’을 예시로 들 수도 있겠다. 영화 초반부에서 인간이 어쩔 수 없는 공포의 대상으로 묘사되는 외계인은 분명히 코즈믹 호러에 가까웠다.
나는 그 ‘코즈믹 호러’를 지금 플레이하고 있는 TRPG, 이 ‘소드 앤 소서리’에 섞고자 했다.
이유는 크게 두 가지였다.
지우가 플레이하는 흑마법사 제이나가 이 작품의 주인공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며, 알렉사가 플레이하는 클레어 역시 플레이어의 행동을 통해서 그에 못지않은 커다란 존재감을 가지게 되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처음에 나는 이 작품이 세 사람의 모험 끝에 제이나가 가진 출생의 뿌리를 찾아가는 이야기가 되리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거기에 플레이어인 클레어와 제이나가 서로에 대한 우정을 보여주면서 확장의 여지가 생겼다.
내 의도를 벗어나게 된 셈이었다.
‘어떻게 보면 이런 게 TRPG의 맛이지.’
마스터는 기본적인 시나리오를 제공하고, 플레이어가 최대한 그 의도대로 움직이도록 이끈다. 하지만 플레이어에게 자유의지가 있는 이상, 때로는 마스터의 의도를 벗어나 플레이 과정에서 충돌하거나 협력한다. 그리하여 그 틈바구니에서 하나의 멋진 이야기가 완성된다.
‘애들이 가지고 있는 다이스 운도 참 재미있단 말이야.’
다이스 운이 최악인 제이나. 평범한 두피. 던지기만 하면 크리티컬 히트가 뜨는 알렉사.
세 사람의 모습을 소설적으로 상상해서 풀어내자 무척 재미있는 이야기가 나왔다. 그렇기에 나는 그 세 사람의 도움을 받아 흥미롭게 이번 작품을 풀어갈 수 있었다.
조금 전까지 줄리아와 나눈 짧은 대화 때문일까.
잠깐의 고민 끝에 마침내 나는 결심할 수 있었다.
‘이 소설은 잡지 연재로 가자.’
하이스쿨을 다니는 동안 신문 연재를 하겠다 결정한 이유를 모아서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시간 문제’였다.
장르가 장르이니만큼 이 작품이 잡지 연재에 더 걸맞다는 것을 알았지만, 그 부분 때문에 오랫동안 결정을 내리지 못했다.
하지만 이제는 아니었다.
이 작품은 나 혼자서 쓰는 소설이 아니다. 뻗어 나갈 가지는 충분히 고심하되 플롯을 치밀하게 짜지 않아도 되는 만큼 그와 관련된 시간을 줄일 수 있었고, 일주일에 한 번씩 세션을 진행하면서 집필을 병행하면 충분히 잡지 연재 일정을 소화할 수 있으리라는 판단이 섰다.
두피는 물론, 알렉사와 지우 역시 모두 훌륭한 TRPG 플레이어들이었고, 마스터인 나조차 가끔 깜짝 놀랄 정도로 멋진 이야기를 만들어 주었다.
나는 스스로가 가끔 그들의 이야기를 쓰는 음유시인 같다고 생각했다.
······그게 아니면 정반대로 천인공노할 악당이거나.
줄리아를 배웅하고 다시 지하실로 내려가자 재잘거리던 애들이 대화를 뚝 멈췄다.
“저기, 무슨 이야기 하고 있었어?”
“아무것도 아니야. 그보다 우리, 저녁은 뭐 먹을까?”
새침하게 대꾸한 알렉사가 화제를 돌렸고, 나는 나도 모르게 그녀의 눈치를 봤다.
얘네들, 언제부턴가 나하고 세션 관련된 이야기를 전혀 하지 않게 되었다.
“신, 뭐 먹고 싶어?”
“어? 어어, 나는······ 아무거나 괜찮아.”
“저, 저희 집에서 드시지 않으실래요? 어머니께서 세 분만 괜찮으면 같이 저녁 먹으러 와도 좋다고 말씀하셨거든요. 아, 신 오빠 어머니도 괜찮으시면 같이 가요.”
“응, 그렇게 할까?”
“그럼, 일단 일어설까.”
두피가 안경을 스윽 밀어 올린 순간, 나는 내 마음에 차는 의심을 참지 못하고 물었다.
“오늘 세션은 어땠어?”
“환상적이었어.”
“퍼펙트.”
“재밌었어요.”
마지막으로 배시시 웃는 지우의 앞에서 나는 깊은 소외감을 느꼈다.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 친구들아? 너희 어느 순간부터인가 나한테 너무 TRPG와 관련된 이야기를 하지 않게 되지 않았니······?”
그 말을 들은 친구들이 서로 눈빛을 주고받았다.
“이제 밥 먹으러 갈까?”
“좋아요.”
“······.”
나는 깨달았다.
이들에게 있어서 어느 순간, 내가 베르그가 되었다는 사실을 말이다.
그래, 일반적으로 마스터와 플레이어는 서로 생각을 너무 주고받지 않은 상태로 플레이하는 것이 나으니까. 나는 이 상황도 나쁘지 않다고 스스로를 합리화하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사이 알렉사와 지우가 먼저 계단 위로 올라갔고, 터덜터덜 그 뒤를 따르려고 했다.
바로 그 순간, 뒤쪽으로 다가온 두피가 나지막이 말을 걸어 왔다.
“신.”
“으헉?! 너, 너무 가깝잖아.”
“아니, 몰래 말하고 싶어서. 미안.”
“······뭔데?”
나는 숨결이 느껴질 정도로 다가온 두피에게서 슬쩍 멀어졌다.
그러자니 녀석은 계단 위를 한 번 쳐다보고는 입을 열었다.
“내가 지금까지 해본 세션 중에 지금이 가장 즐거워.”
“그, 그래?”
“응. 친구들과 해서 그럴 수도 있겠지만, 일반적인 마스터링을 따라가면서도 각 플레이어의 개성을 충실히 살려주고 있다는 점이 무척이나 흥미롭군. 우리가 조금 선을 넘은 행동을 하더라도 네가 잘 생각해서 판정해 주니까. 나도 그래서 막 던질 수 있어 즐겁다.”
“너희가 알아서 최소한의 선은 지켜주잖아.”
그의 칭찬에 나는 씨익 웃으며 물었다.
“그러니까 나 따돌리지 말고 무슨 이야기 했는지 말해줄래?”
“아, 그건 좀. 적대적 플레이어가 나온 세션부터 마스터인 너조차 믿을 수 없다고 알렉사가 이야기해서 말이다. 아무래도 좀 과하게 TRPG에 몰입하고 있는 것 같은데.”
“그러니 로드 두푸스가 리타이어했을 때도 진짜로 울었겠지.”
“나도 그랬다.”
“······미안.”
“아니다. 세상 만물의 모든 것은 태어나면 스러지고 스러지면 태어나는 법. 이제 나는 로드 두푸스가 아니다. 그는 렝커스터 왕국으로 돌아가 선한 영향력을 계속 발휘하고 살아가겠지.”
“분명히 그럴 거야.”
나는 두피의 말을 듣고 싱긋 웃었다.
두피가 플레이하고 내가 지켜봐 온 남자, ‘로드 두푸스’라면 분명 그럴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다. 자신의 몸이 쇠락해 무너져 가는 이 시점에도, 세상을 위협하는 악에 맞서기 위해 제자를 길러내고 좋은 일을 하고자 노력하겠지.
‘그의 희생으로 클레어와 제이나도 앞으로 나아가게 되었고.’
그런 ‘뒷이야기’를 상상하는 것 또한 TRPG의 재미였다.
***
본격적으로 후반부의 내용을 집필하기 전, 나는 지금까지 쓴 리플레이 소설을 퇴고하는 시간을 가졌다.
장르 소설 잡지에 이 작품의 연재를 의뢰하기에 앞서서 그쪽이 요구하는 규격에 최대한 맞춰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내가 생각하는 곳은, 격주 연재, 화당 5,000 단어.
‘사실, 일만 하고 산다면 그렇게까지 부담되는 분량은 아니긴 한데.’
문제는 크게 두 가지였다.
내가 편집부의 문턱을 뚫고 들어갈 수 있을 정도의 네임 밸류와 작품을 가지고 있는가.
하지만 그 부분은 지금 당장 신경 쓸 바는 아니었기에, 잡생각을 머릿속에서 지우고 나는 내가 생각하는 최선의 글을 써 내려갔다.
검은색 타자기로 글을 쳐나갈 때마다 해당 장면을 플레이하던 순간의 기억이 샘솟았다.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그때의 나는 혼자가 아니었다.
사이먼과 줄리아에게 보낸 리플레이 소설은 신문 연재로 갈 가능성이 남아 있었기에 문장도 최대한 간략하게 쓴 편이었고, 묘사도 적당히 줄인 상태였다. 하지만 이 리플레이를 본격적인 소드 앤 소서리 장르 소설로 펴내기로 마음먹었고, 그렇다면 장르의 문법에 맞게 확실하게 묘사와 심리를 보강해야 했다.
‘나쁘지 않군.’
타탁, 탁, 타타탁······.
타자기를 두들길 때마다 새겨지는 눈앞의 글자에 온 정신이 집중되었다.
친구들과 함께 모여 KOG 속에서 펼친 모험이 내 안에서 새로운 세계로 변모했다. 그들이 만들어 낸 캐릭터는 종이 위에서 내가 만든 캐릭터가 되었고, 그들이 한 행동에 내가 나름의 이유를 덧붙이며 이야기는 앞으로 나아갔다.
소국의 공주, 무희 클레어가 살았더랬다.
타고난 강자로 태어난 그녀는 사실 마음이 무척 여렸다. 가장 친한 친구는 평민이었고, 신분의 차이로 인해 어쩔 수 없이 서로를 등져야 했다. 그로 인해 클레어는 자기 자신이 가지고 있는 강함이 때로는 폭력이 될 수 있음을 느꼈다. 의도치 않더라도.
그리고 그녀는 자신을 상징하는 모든 강함으로부터의 해방을 원했다.
이루어질 수 없는 일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녀는 공주였고, 아름다웠으며, 강했다. 그렇기에 먼저 마음을 열어도 상대는 그 마음을 온전히 받아들이지 못했다.
클레어는 고독했고, 자신의 외로움을 이겨내고자 무술의 연마에 더욱 몰두했다. 발차기로 답답한 현실을 꿰뚫고 싶었다.
그 반대편에는 떠돌이 흑마법사, 노 원 제이나가 존재했다.
제이나의 어린 시절 기억은 희미했다. 그녀는 귀족 사회에서 살았으나 배신으로 가문이 멸족당한 이후 최하의 신분이 된 채 정처 없이 떠돌이로 살게 되었다. 그러는 와중 자신의 곁에 항상 남아주는 소환수에게 점차 애정을 주었다.
입장은 너무도 달랐지만, 그녀 역시 클레어와 마찬가지로 외롭고 고독하기 그지없는 존재였다.
그리고 정말 우연히, 소국의 한 왕이 내건 의뢰를 받아 만나게 된 두 사람.
클레어는 제이나를 위해주었고, 제이나도 그런 클레어의 믿음에 부응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하지만 워낙 누군가를 믿어본 적이 없었던 두 사람이었기에 한 남자의 존재가 아니었더라면, 그 한 번의 퀘스트는 그저 한순간의 해프닝으로 지나갔을 터였다.
둘을 하나로 이어준 남자, 랭커스터 왕국의 공작, 로드 두푸스.
향후, 대륙의 평화와 안녕을 이룰 수 있는 두 가능성을 올바른 방향으로 이끌었다. 클레어가 세상에 가진 반감과 의문에 그 나름대로 답을 내려주었으며, 제이나가 조금씩 세상으로 나올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그러니 이 두 사람이 두푸스가 리타이어 됐을 때 그렇게 슬퍼했던 거지.’
대체 누가 그런 운명의 주사위를 던진 걸까.
······아, 나구나.
“······애들이 나한테 세션에 관해 이야기하지 않는 것도 이해가 가는군.”
하지만 그 태도마저도 이 TRPG 세션에 깊이 몰입해 줬기 때문이라고 생각하니, 솔직히 기뻤다.
***
며칠에 걸쳐 양식에 맞춰 3화까지의 퇴고를 끝낸 뒤, 나는 줄리아에게 작품을 보냈다.
신문 연재라면 당연히 토런스 뉴 미디어였겠지만, 잡지 연재의 경우에는 줄리아가 조금 더 믿음직한 상대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래도 그동안 함께 일한 상대에 대한 의리를 지키고 싶어, 미리 연락해서 그녀하고 작업할 생각이라 말했고······ 사이먼은 흔쾌히 멋진 작품 기대한다고 말해주었다.
그렇게 작품을 보내고 다음 날, 줄리아로부터 전화가 걸려 왔다.
[작가님, 보내주신 작품은 잘 봤습니다.]“어떠셨나요?”
[뭐, 말해봤자 입만 아프죠. ······라기에는 좀 놀랍기는 했어요. 신문 연재하시면서 이런 문장력을 감추느라 작가님이 고생 많으셨겠다 싶었네요. 각 화의 밀도도 괜찮고, 추가적으로 들어간 에피소드나 감정선의 흐름도 모두 훌륭했어요. 고생 많으셨습니다.]“별말씀을요. 그러면 이제 잡지사 쪽으로 전달이 될까요?”
[그 전에, 우리 정해야죠. 어떤 잡지사로 갈지.]줄리아의 말에 나는 싱긋 미소를 지었다.
이 시대의 잡지 연재는 작품의 ‘장르’에 따라서 구분되었다. 절대적인 건 아니었지만, 메인 타이틀의 경우에는 반드시 그 규칙을 지키는 편이었다. 즉, 소드 앤 소서리를 중점적으로 미는 잡지 같은 경우에는 그쪽 장르의 작품에 최대한 힘을 준다는 이야기였다.
여기에서 내 선택지는 크게 두 가지였다.
용이 되려고 하느냐. 뱀에서 만족하느냐.
[마침 제가 알고 있는 잡지사에 연재작이 하나 비기는 했어요. 픽션 플래닛 매거진. 이름에서 알 수 있다시피 SF를 주력으로 밀기는 하지만······ 판매 부수가 제법 나오는 곳이죠.]“줄리아.”
[네?]“제 생각, 아시잖아요?”
나는 짧게 생각을 전했다.
그러자 잠깐 입을 다물고 있던 줄리아가 대답했다.
[‘어려움’ 판정이기는 하지만, 작품이 가지고 있는 ‘보정치’가 높기는 하네요.]TRPG 스타일의 대답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건즈 앤 소드(Gun’s and sword) 매거진으로 가시죠.”
캘리포니아에는 여러 장르 소설 잡지사가 있지만, 나는 그중에서도 최고를 택하고 싶었다.
내가 어린 시절 가장 사랑했던 곳으로.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