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ecame an American Retro Novelist RAW novel - Chapter (77)
77.
네온사인의 현란함이 드리우기 시작한 저녁의 거리.
알렉사를 3단 아이스크림으로 꼬드겨 바깥으로 데리고 나온 나는 문득 자신이 한 말에 전혀 현실성이 없음을 자각했다.
첫 번째 데이트를 이런 평일 저녁에, 그것도 코믹북 스토어를 약속 장소로 삼다니. 장르 소설에서도 안 쓸 법한 비현실적인 설정이었다.
하지만 다들 의심하지 못했다. 오히려 자신들과 같은 너드가 학교에서 제일 잘 나가는 부류인 치어리더 걸과 데이트한다는 상황 자체를 약간은 ‘동경의 눈’으로 바라보는 듯했다.
디테일을 따지자면 전혀 일어날 수 없는 상황이지만, 그들의 눈으로 보기에는 그렇게 생각하는 것도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들에게 있어 코믹북 스토어는 ‘일상의 공간’이었고, 사람은 자신의 편협한 시각에서밖에 생각할 수가 없는 생물이었으니까.
나도 그렇고 모두가 겪고 있는 문제이자 현실이었다.
뭔가 좀 쓴웃음을 짓게 되었다.
나는 조용해진 알렉사를 데리고 잠깐 걸었다.
찬 기운이 내려앉은 아스팔트 바닥은 살짝 습기를 머금은 채였다. 밤의 저편에서 헤드라이트가 달려와 우리 옆을 스쳐 지나갔다.
시내의 몇몇 가게는 이제 막 영업을 시작했고, 태양을 대신해 빛을 비추는 네온사인은 법률 규제의 미비와 디자인의 미흡함으로 눈을 아프게 만들었다.
망막을 자극하는 잔상에 눈을 깜박이면서, 사람이란 참으로 모순적인 생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70~80년대를 주름 잡은 네온사인은, 훗날 머나먼 미래를 상징하는 ‘사이버 펑크’의 대표적 디자인으로 각인된다. 하지만 동시에 나 같은 사람들에게는 추억을 상징하는 물건이기도 했다.
그래서 미래에서 돌아온 나는 이때를 촌스러우면서도 힙하다고 느꼈다.
‘어렵구먼.’
레트로란 과거의 산물이지만, 돌고 돌아 다시 유행한다.
나도 그와 비슷한 느낌인가. 돌고 돌아 다시 과거를 살고 있으니까.
“······저기.”
“응?”
누군가 부르는 소리에 뒤를 돌아보려니, 알렉사가 내 앞을 가로막기 위해 가벼운 발걸음으로 빙그르 돌면서 내 옆을 스쳐 지나갔다. 역시나 코믹북 스토어의 블랙 맘바(아님)다운 유연한 움직임이었다.
“아이스크림은?”
“아?”
“3단으로 사준다면서.”
“다이어트한다고 하지 않았음?”
“······언제부터 엿들었어?”
“딱히 엿듣지는 않았는데. 그냥 네가 내 존재를 알아차리지 못했잖아.”
“그, 그래?”
“응. 너보다 먼저 코믹북 스토어에 있었지. ······그래서 다이어트는 거짓말이었음?”
“아니, 그게.”
“농담이야. 알아. 사회적 관계에서 서로 충분히 가까운 사이가 아직 아니라고 생각하는데 갑자기 음식을 권유하는 게 부담되니까 적당히 핑계 대고 거절한 거잖아? 그렇지?”
“······.”
“아니야?”
“맞긴, 한데. 그걸 굳이 설명하니까 뭔가 좀 우울해졌어.”
알렉사가 입술을 샐쭉 내밀었다.
······내가 잘못한 건가.
“아무튼 사 줘. 아이스크림. 산다면서. 우리 데이트잖아.”
“이렇게 늦은 시간에?”
“코믹북 스토어에서 만났는데, 늦었다고 데이트 못 할 건 또 뭐야.”
싱긋 웃은 알렉사가 천천히 앞으로 걸어갔다.
네온사인 아래로 보이는 그 뒷모습만 봐도, 확실히 전생의 나였다면 절대로 어울리기 어려울 것 같은 인상이었다.
‘저걸 루즈 핏이라고 했나.’
대미지드 진에 펑퍼짐한 셔츠, 거기다 깔끔하게 하나로 묶은 머리.
그 외견에서 중성적인 분위기가 느껴지면서도, 알렉사였기에 감출 수 없는 여성적인 매력을 드러냈다. 담백한 모양새를 갖춘 꽃이 향기가 강렬하다는 느낌이라고 해야 할까.
‘참 대단하단 말이야.’
이런 시대에도 촌스럽지 않게 자신의 개성을 표현하는 그녀가 어딘가 좀 신기했다.
우리는 문을 닫기 직전의 아이스크림 트럭으로 향했고, 거기에서 각자 아이스크림을 샀다. 둘 다 3단으로.
나는 초코, 딸기, 바닐라.
알렉사는 민트 초코, 민트 초코, 민트 초코.
나는 황당한 얼굴로 알렉사를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다른 건 다 참을 수 있지만, 민트 초코는 선을 넘었다.
“기껏 사줬는데 민트 초코를 골라?”
“내, 내가 제일 좋아하는 맛이야!”
“민트 초코는 맛으로 성립되지가 않잖아.”
“와, 진짜 차별 장난 아닌데? 이렇게 편협한 사람인 줄은 몰랐어. 신. 난 오히려 네 아이스크림이 더 마음에 안 들어. 초코, 딸기, 바닐라?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조합 아니니?”
“이 조합은 수천 년 아이스크림 역사에서 만들어진 궁극의 조합식이야.”
“그래? 왜?”
“봐봐. 지금 아이스크림이 녹기 시작했잖아. 자연스럽게 위에서 밑으로 떨어지게 되었지. 우유를 많이 섞은 좋은 아이스크림을 썼을뿐더러, 여기 사장님의 아이스크림 스쿱핑 스킬이 훌륭하다는 증거라고. 트럭 아이스크림 업계의 샤넬이라고 할 수 있지.”
“······어, 그래서?”
“위에서 초코가 떨어져 딸기와 섞이면서 절묘한 맛을 내고 딸기와 초코가 섞인 채 또 바닐라로 섞이면서 최상의 맛을 끌어내지. 타이밍을 조절하면서 먹으면 이게 최고의 조합이야.”
“Boy.”
바로 그때, 아이스크림 트럭을 정리하던 사장님이 날 불렀다. 팔뚝의 두께가 거의 알렉사의 허리만 한 남자가 엄지를 치켜들며 고개를 끄덕였다.
“먹을 줄 아는구나.”
“그쵸?”
“하지만 아이스크림에 정답은 없다. 민트 초코도 나름의 수요가 있지.”
“사장님은 어떤데요.”
“난 싫어해.”
“역시!”
“······나 집에 갈게.”
알렉사가 사장님을 흘낏 노려보았다. 블랙 맘바의 눈빛을 받은 사장님은 본능적으로 시선을 피했다.
나는 가볍게 웃음을 터뜨리며 알렉사의 어깨를 두드렸다.
“에이, 농담이잖아.”
“알아, 알아. ······흥.”
“나도 민트 초코 좋아해. 먹을 수 있어.”
“그럼 먹어 봐.”
“어?”
“먹어 보라고. 민트 초코.”
알렉사가 슬쩍 아이스크림을 내밀었고 그 앞에서 나는 침묵했다.
‘아, 제기랄. 될 대로 되라지.’
한 입 크게 베어 물었다. 초콜릿 우유를 먹고 양치하는 느낌이었다.
“어때, 맛있지?”
“······3일 정도 굶으면 그렇게 느껴질 수도.”
“야!!”
“너도 먹어 봐.”
“응?”
“이 조합이 왜 트럭 아이스크림 계의 명품인지 가르쳐줄게.”
그 말에 무표정한 얼굴로 서 있던 알렉사가 고개를 내밀어 내 아이스크림을 한입 베어 물었다. 슬쩍 떨어지는 턱선 옆을 흐르는 금색 머리카락이 순간적으로 내 시선을 빼앗았다.
우물, 우물.
“어때?”
“······맛있어.”
“그렇지? 역시 명품에는 이유가 있다니까?”
“너는······ 항상 이렇게 깊이 생각하면서 살아?”
“응?”
“뭔가, 아이스크림 하나 먹는 데도 나름의 철학이 있구나 싶어서.”
“전부 그렇지는 않지. 있는 것만 있고. 너도 그렇지 않아? 치어리딩 할 때 이렇게 해서 이렇게 하는 게 낫겠구나, 하는 그런 거 있잖아.”
“그게 보통 아이스크림까지 적용되지는 않지.”
“아이스크림에도 적용하는 편이 좋다고 생각하는데.”
“왜?”
“삶의 매 순간이 특별해지니까.”
그 말을 들은 알렉사의 눈이 휘둥그레 뜨였다.
그사이 아이스크림 트럭이 전부 정리되었고, 우리는 적막해진 자리를 떠나 아이스크림을 머금으면서 네온사인으로 가득 찬 거리를 걸어 갔다.
그러더니 알렉사가 다른 질문을 해왔다.
“신. 그러는 게 소설가야?”
“······갑자기?”
“사실 궁금했거든. 아까 네 소설에 대해서 비평하는 사람들 있었잖아. 그 사람들 이야기에 괜히 나까지 기분이 나빠지더라고. 내가 이 작업에 어느 정도 기여해서 그런가?”
“어느 정도가 아니야. 네가 주인공이지. 기분 나쁠 만해.”
“하지만 연기했을 뿐인 나하고는 다르게 너는 소설을 직접 쓴 거잖아? 그런데도 딱히 기분 나쁘다는 티를 내거나 하지는 않았고. 그래서 너의 그런······ ‘강함’이 네가 가진 그 철학으로부터 오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방금 문득 들었어. 만약 그게 내 착각이었다면 미안하고.”
“뭐, 신경이 아예 안 쓰인다면 거짓말이겠지만, 그 정도로 기분 나쁘지는 않긴 했지.”
“그래?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 내 말이 맞는 거야?”
“······그 사람들이 나한테 돈 주는 사람들이니까?”
“농담하지 말고.”
이게 농담임을 알아채다니. 대단한 녀석이었다.
그리고 나는 잠깐 말을 아꼈다.
‘지금까지 이런 질문을 해오는 사람은 없었는데.’
편집자는 물론이고, 같은 작가들끼리도 그랬다. 정확히 말하자면, ‘악플’은 소설가에게 따르는 기본 소양 같은 거라 거기에 쓰게 웃거나 싸구려 악담으로 씹어 넘길 뿐 구구절절이 서로 이야기하는 편은 아니었다. 독자들의 날 선 반응을 일일이 신경 쓰고 거기에 스트레스받으면, 장르 작가로서는 살아갈 수가 없으니까.
그리고 그 사람들이 정말 내가 싫어서 그러는 게 아니라는 사실도 알았다. 스스로 장르에 정통하다고 생각하는 자신의 눈을 믿고, 그 감상을 표현하다 보니 그렇게 된 거겠지. 가끔 그 수위가 심각한 경우도 있었지만, 어쨌든 그걸 말하는 것은 그들의 자유 아니겠는가.
나는 장르의 탈을 빌려 소설에 나 자신을 표현한다.
그리고 그걸 읽게 된 독자는 철저하게 두 부류로 나뉜다. 장르의 탈을 쓴 내 세계를 좋아해 주거나, 아니면 반대로 싫어하거나.
글이 욕을 먹을 때면 나 자신이 욕을 먹는 기분을 느꼈으나 그들이 거기까지 생각하고 나를 배려해주면······ 고맙긴 해도 오히려 내가 미안했다.
‘그냥 글은 글대로 즐겨주면 그만이니까.’
나는 나를 담은 소설을 상품으로써 팔고, 그걸 찾아서 읽어주는 상대가 있다.
그것을 깨달았을 때, 나는 사람들의 비평도 받아들일 수 있게 되었다.
······아, 물론 어디까지나 ‘비평’에 해당하는 것만이었다. 그걸 넘어서서 그저 악의에 찬 ‘비난’은 나도 똑같이 생각하면서 무시하거나 대놓고 되갚아 주었다.
따라서 알렉사의 질문에 나는 이런 답을 내놓았다.
“나는 내가 읽고 살아온 삶을 담아서 세상에 던지지. 그냥 그뿐이야. 이후에 따라오는 비평은 사실 당연하고. 나도 민트 초코를 이해하지 못하는데, 어떻게 나를 전부 이해해달라고 강요하겠어? 해주면 좋지만, 모두가 그렇게 해주리라는 건 사실 오만 아닐까 싶어.”
“소설에 너의 삶을 담아낸다고? 마더나 더블 스파이, 이번 소설도 그랬어?”
“그렇지. 형태는 바꾸지만 말이야. 이번에 세션, 나도 준비하면서 굉장히 즐거웠어. 소설로 쓰면서도 즐거웠고. 내가 본 너나 두피, 지우를 담아낼 수 있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해.”
“거기에 ‘신’도 담아냈잖아?”
“······그래?”
“응. 너는 이 이야기의 작가잖아. 뭔가, 너의 세계에서 뛰어논 기분이었어.”
누군가 이런 말을 했었다.
사람이 무언가를 창조하는 이유는, 자신의 내면에 있는 감정을 드러내 해소하기 위함이다.
불을 피우고 요리를 만드는 사람은 맛있는 음식을 먹고 싶다는 감정을 외부로 드러내 해소하기 위해 요리한다. 그리고 그걸 남에게 대접하면서 자신의 감정이 충족되는 느낌을 받는다. 그 대가로 인정과 돈, 다양한 결과를 얻어내면서 나아갈 용기를 얻는다.
나에게 있어 소설이, 이야기를 만들어 낸다는 행위가 바로 그러했다.
그리고 알렉사는 내가 소설가라는 사실을 알게 된 뒤로 그것을 더욱 민감하게 느끼는 듯했다.
아이스크림을 다 해치운 뒤 앞장서 걷기 시작한 알렉사.
그러다가 빙글 돌아보며 입을 열었다.
“그으러면 말이야.”
“응?”
“너의 세계는 어떻게 확장되는 거야?”
“글쎄. 흥미롭고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
“그래? 아예 모르는 일은 어때? 그런 도전, 좋아해?”
“······싫어하진 않는데.”
“우리 그럼 함께 세계를 확장시켜 볼래?”
“어떻게?”
“TRPG 세션이 끝나고 난 뒤에도 주말마다 다 같이 모여서 서로가 좋아하는 일을 하는 거지. 지난번처럼 두피가 좋아하는 보드게임을 한다든가. 아니면 신 네가 좋아하는 TRPG를 또 한다든가. 그리고 이 알렉사 플레어 님이 좋아하는 일도 해보는 거지.”
“지우가 좋아하는 흑마술도?”
“······그건 좀 봐주라. 내가 지우한테 양해를 구할게.”
학을 떼는 알렉사를 보며 피식 웃은 뒤, 나는 순순히 대답했다.
“좋은데. 해보자.”
그리고 이어진 알렉사의 말을 듣고 후회했다.
“그럼 나 좋아하는 거 하는 날에는 롤러스케이트부터 타는 거야!”
“············아.”
세계가 확장되고 자시고 그 전에 지쳐 죽겠군.
***
장르 소설의 애독자, 다시 말해 ‘너드’에게는 어딘가 좀 짓궂은 구석이 존재했다.
그들은 어떤 글이라도 자신의 마음에 들지 않으면 가차 없이 모순점을 찾아내 비평했다. 줄리아는 그것이 글을 단순히 즐기기보다 해체해서 음미하는 특성 때문에 그렇다고 느꼈다.
그런 행위를 의식해서 하지는 않아도, 일반인보다 훨씬 더 많은 글을 읽어온 그들을 만족시키는 건 절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장르의 규칙을 맛깔나게 버무려 쓸 수 있으면서도 그와 동시에 작가가 거기에 넣는 자신의 사유가 흥미롭고 즐거워야 했다.
따라서 인간사가 그렇듯이, 모든 이를 만족시킬 수는 없었다.
······그럼에도 그걸 추구하는 게 작가라는 생물의 나쁜 점이었고 말이다.
1982년 2월 4일.
격주 목요일마다 발매하는 건즈 앤 소드 매거진이 발매되었다.
해당 호에 게재된 신의 리플레이 소설 ‘Princess quest’는······ 줄리아가 생각한 것보다 훨씬 더 호의적인 반응을 얻는 데 성공했다.
계속해서 연락을 주고받는 그쪽 편집자의 말에 따르면, 독자의 반응은 크게 두 가지였다.
‘웃긴다.’ 그리고 ‘또라이 같다.’.
비평하는 편지가 아예 없지는 않았으나, 공주가 주인공이라는 작품의 콘셉트 자체를 까는 것뿐이라서 굳이 신경 쓸 만한 비판은 아니라고 했고, 그 의견에 줄리아 역시 동의했다.
‘예상대로의 반응이네.’
미소를 지은 줄리아는 앞으로도 문제없겠다고 생각했다.
장르에 익숙한 독자들 사이에서 ‘신(SEEN)’이라는 작가의 평판은 그저 ‘운이 좋아서 뜬’ 작가에 불과했다. 실제로 신의 작품을 재밌게 보았다고 하더라도, 장르 독자들이 보기에는 신문 연재를 통해 자신들이 느낀 재미 이상의 인기를 얻는 신이 고깝게 보이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번 작품을 통해, 신은 확실하게 보여주었다.
‘장르 업계에서도 먹히는 소설을 쓸 수 있는 작가라는 사실을 말이지.’
일반 대중의 픽은 아니겠지만, 확실히 타겟팅을 한 만큼 좋은 작품이 나왔다.
소드 앤 소서리의 클리셰를 부수어 나가는 ‘Princess quest’처럼, 이제는 장르 독자들의 편견을 깨부수면서 연재를 계속해서 이어 나가는 일만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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