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ecame an American Retro Novelist RAW novel - Chapter (82)
82.
‘Princess quest’의 2화가 실린 건즈 앤 소드 매거진이 발매된 직후, 키튼즈 코믹북 스토어의 마스터 빌은 가장 먼저 잡지를 사서 그 내용을 읽었다.
역시 기대했던 대로 재밌었다. 훌륭한 코미디이자 패러디, 부조리극이었다.
첫 번째 퀘스트를 무사히 해결하고 대륙 곳곳에서 근래 갑자기 들끓고 있는 ‘망자의 부활’ 문제를 조사하고자 세 사람은 여행을 떠났다.
그리고 소국의 수도를 떠난 그들은 얼마 지나지 않아 다른 도시로 가는 길목에서 여행자를 습격해 짐을 빼앗는 도적들과 마주한다.
일반적인 TRPG 세션이나 소드 앤 소서리 소설이었다면, 적당히 퀘스트 도중 나와서 주인공 파티의 레벨 업을 위해 소비되었을 도적 무리와의 조우.
하지만 이 소설은 역시 그렇게 가지 않았다.
클레어가 배틀 부츠로 탭 댄스를 추자 땅이 갈라지고 도적들이 털푸덕 쓰러졌다. 그녀는 공포와 경악으로 전투 의지를 잃은 이들에게 진지한 표정으로 물었다. ‘당신들 대체 왜 이런 짓을 하는 거야? 몸도 건강한 사람들이 남의 물건을 빼앗고 죽이다니! 부끄러운 줄 알라고!’
도적 중 하나가 엉엉 울며 소리쳤다. ‘우리도 이렇게 살고 싶지 않아! 평범하게 농사나 짓고 싶다고!’ 그렇다. 세상만사 모든 일이 그렇듯이 그들에게도 나름의 사정이 존재했다. 수많은 주인공들에게 무수히 죽어간 도적 무리에게도 저마다의 드라마가 있는 것이었다.
그 상세한 이야기는 다음과 같았다.
존은 어린 시절, 고아로 태어났다.
그리고 거기까지 들은 클레어가 당당하게 말했다.
“야야, 너무 처음부터야. 테이프 좀 빨리 감아봐.”
“테이프? 그게 뭐죠?”
“Turbo And Past Emotion. 과거의 감정을 빠르게 감는다는 용어지.”
“억진데······.”
존이 청년이 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를 보살펴 주던 마을에 몬스터 집단의 습격이 벌어졌다. 그리고 허무하리만치 아무렇지 않게 그동안 이뤄온 모든 것을 잃었다. 농작지는 전부 불길에 휩싸였으며, 집은 모조리 무너졌다. 하지만 영주는 주민들의 사정을 이해해 주지 않았다. 내야 하는 세금은 그대로였고, 계속되는 압박에 주민들은 도적이 되는 길을 택할 수밖에 없었다.
그 상투적인 이야기를 들은 클레어는 분통을 터트린다. ‘어떻게 이런 불합리한 일이 있을 수가!’ 로드 두푸스는 이마를 짚었고, 제이나는 두 주먹을 불끈 쥐며 그 분노에 공조했다.
파티원들과의 상의 끝에──우리들의 신분을 알리고 보다 공식적인 방식을 택하자는 로드 두푸스의 설득에도 불구하고──그녀는 영주와 직접 담판을 짓겠다며 본거지의 도적들까지 포함해 100여 명 정도 되는 인원을 모아 성으로 향했다.
그리고 뭔가를 단단히 착각(?)한 영주의 명령으로 전투가 벌어졌다.
“바바바, 반란이다!”
“아니라니까!”
클레어는 몰려드는 수비 병력을 뻥뻥 차대면서 자신의 무죄를 주장했다. 먼 곳에 숨어서 벌벌 떨던 영주는 클레어가 공주라는 사실을 알아차릴 수 없었고, 무지한 수비 병력도 그 말을 믿어주지 않았다. 그럴 법했다. 공주가 발차기로 모두 다 기절시키고 있는 상황인데.
그러다가 제이나가 또 흑마법을 잘못 사용하면서 악마가 소환되었고, 영주를 지키기 위해 용기 있게 검을 들고 나선 경비 대장이 소리쳤다. ‘그들은 악마를 숭배하고 있다!!’ 문제는 더욱 불거졌고, 저항은 더욱 거세졌다. 제이나는 그들에게 연신 사과했고, 로드 두푸스가 악마를 처리하는 동안 클레어는 왜 우리 애를 울리냐며 더욱더 폭주해 버렸다.
······이 소설은 소드 앤 소서리면서 몬스터보다 인간을 더 많이 때려잡았다.
어찌어찌 오해가 풀리고 영주와 대화를 나눈 일행은 몬스터가 나온 곳으로 들어가서 그곳을 쑥대밭(?)으로 만들었다. 말 그대로의 의미였다.
벌벌 떠는 영주에게 감사의 인사와 함께 영지가 재건되기 전까지는 주민들의 세금을 감면해 주겠다는 확언을 들은 뒤 그들은 다음 목적지를 향해 나아가기 시작했다.
그들의 모험은 엉망진창이었지만 다시 여행길에 오르는 장면만큼은 전형적으로 훈훈하게 마무리된 것이 그나마 다행일까.
그렇게 ‘Princess quest’의 2화를 전부 읽은 빌의 입가에는 미소가 걸린 채였다.
그는 중간중간 계속해서 킥킥거렸고, 소리가 커지며 껄껄거리며 웃다가 몇 번 무릎을 칠 정도였다.
이 세 사람의 모험이 앞으로 어떻게 될지 정말 기대가 됐다.
‘일단 캐릭터가 웃기지만, 리플레이 소설이면서도 소설 자체로 완성도가 준수해.’
캐릭터와 개그는 무척이나 빼어났고, 적당한 전개 속도와 단단한 문장력, 다음 내용에 대한 기대감을 남기는 부분까지, 흠잡을 만한 데가 없었다. 연재 소설로서 갖춰야 할 부분은 다 갖춘 작품이었다.
거기다 중요한 점은, 이 소설이 현재 건즈 앤 소드 매거진에 연재되는 인기작과 비슷하면서도 확실한 차별점을 갖추고 있다는 부분이었다.
잡지에 실린 열두 소설의 장르 분포는 다음과 같았다.
소드 앤 소서리가 다섯.
SF가 둘.
호러, 하드보일드 형사물, 밀리터리물, 어드벤처물이 각 하나씩.
그리고 그중에서 최상위권 작품 세 개 모두가 소드 앤 소서리였다.
1위는 7년 가까이 연재하고 있는 ‘로난 더 바바리안 시리즈’······가 아니라, 비교적 최근에 연재를 시작해 크나큰 인기를 끌고 있는 작품인 ‘레인보우 월드’였다. 물론 로난 역시 그에 못지않은 인기를 자랑해서, 1위와 큰 격차 없는 2위의 자리에서 경쟁 중에 있었다.
거기에 인기 하드보일드 형사물 ‘디택티브 램 시리즈’를 제치고 이제는 꾸준히 3위를 마크하고 있는 작품인 ‘디피스트 던전’까지.
세 작품은 같은 ‘소드 앤 소서리’ 카테고리로 묶였지만, 작품의 분위기나 색깔은 제각각 달랐다.
‘로난 더 바바리안 시리즈’는 멋진 주인공의 활약을 보여주는 정통파적인 작품이었고, ‘레인보우 월드’는 환상적이고 신비한 세계를 탐험하는 작품, 마지막으로 ‘디피스트 던전’은 어둡고 음울한 세계관을 지닌 작품이었다.
이 세 개의 작품이 가장 인기가 있다는 말은, 그만큼 펄프 픽션을 읽는 독자층이 소드 앤 소서리, 혹은 판타지라는 형태로 묶인 작품을 원하고 있다는 의미였다.
따라서 ‘Princess quest’의 1화를 읽고 재미를 느낀 빌은 이 작품이 분명히 인기를 끌리라고 예측했다. 또한 가까운 동료들 역시 토론 끝에 거기에 동의했다.
그리고 그 생각은 적중했다.
건즈 앤 소드 매거진은 평소에도 잘 팔려나가는 잡지였지만, ‘Princess quest’가 연재된 후에는 그 속도가 더욱 빨라졌다. 작품의 순수한 인기를 떠나서, 어떠한 방식으로든 화제의 대상이 되면 해당 작품이 실린 잡지에 그런 경향이 생기는 편이었다.
키튼즈 코믹북 스토어의 너드 가이들도 본작의 특징이나 작가인 ‘신’의 이력을 들먹이며 툴툴댈지언정, 평소에는 단행본을 위주로 사서 읽던 녀석들까지 잡지를 사기 시작했다.
빌은 이 상황이 흥미롭다고 느꼈다.
그리고 첫 페이지로 돌아가 한 번 읽었던 소설을 다시 곱씹던 와중, 그는 작중에 등장하는 한 캐릭터의 이름이 계속해서 눈에 밟히는 것을 느꼈다.
로드 두푸스.
그로서는 자연스레 이 코믹북 스토어를 자주 드나들며 함께 세션까지 진행했던 남자가 떠오를 수밖에 없는 이름.
‘과연, 같은 사람일까?’
그렇게 되면 문제는 심각해졌다.
“왜 그렇게 얼굴이 심각한 거야? 마스터.”
심각해진 기색을 느낀 그의 사이드킥 프레드가 고개를 갸웃거리자, 빌은 귀 뒤쪽으로 손을 넘겨 안경다리 끝의 팁 부분을 가볍게 눌렀다. 그러자 잡지를 보느라 반쯤 내려가 있던 안경이 무슨 장치처럼 올라갔고, 브릿지가 콧등에 알맞게 걸쳐지며 제자리를 찾았다.
“만일 우리가 아는 ‘로드 두푸스’가 이 세션의 플레이어 중 하나라면, 그 마스터는 ‘신’이라는 말이니까.”
“아······!!”
“그래, 어쩌면 ‘신’이 우리 코믹북 스토어를 드나들 수도 있다는 말이지.”
프레드의 눈이 휘둥그레 뜨였다.
역시 빌은 코믹북 마스터다웠다. 남들이 하지 못하는 생각을 너무나도 손쉽게 했다. 거기에 전율했다.
“그, 그는 브루스 웨인인가······! 놀라워! 마스터! 그리고 나 조금 떨려!”
“나도 그래. ······후후, 나의 키튼즈 코믹북 스토어에 현업 장르 작가가 드나들다니.”
참고로, 그는 이곳의 사장이 아니다.
“어쨌든 이 사실은 우리의 친구들에게 아직 감춰두는 편이 좋을 것 같군.”
“어, 어째서지! 마스터! 나에게도 그 이유를 가르쳐 줘!”
“녀석들에겐 자극이 너무 심할 테니까.”
귀 뒤의 팁 부분을 다시 툭 내려치자 안경이 덜컥 올라갔다.
“여, 역시 마스터······!”
“로드 두푸스가 오면 이 소설에 나오는 인물이 본인이 맞나 확인해 보겠어. 그 녀석은 일주일에 세 번씩 코믹북 스토어에 오니까, 오늘 반드시 이곳에 등장할 거야.”
홈즈처럼 자신만만하게 대답하며 햄처럼 두툼한 뱃살 위로 팔짱을 끼는 빌.
······하지만 계획이란 게 다 그렇듯이, 그의 생각대로 일이 풀리지는 않았다.
하필 봄 방학을 맞이한 신과 그 친구들이 로스앤젤레스 근처의 시카모어 캐니언으로 캠핑을 떠났기 때문이었다.
자신만만하게 팔짱을 낀 채 키튼즈 코믹북 스토어가 문을 닫는 오후 9시까지 우두커니 기다리는 빌에게 이 가게의 사장, 키튼은 한심하다는 시선을 보내며 생각했다.
‘지랄을 한다.’
자본주의의 논리에 의거해 빌을 내버려두고 있는 형국이었으나, 그는 너드는 아니었다.
***
알렉사 플레어는 네온사인으로 가득한 밤거리를 걸으며 이런 명언(?)을 남겼다.
‘우리 같이 세계를 확장시켜 보자.’
나는 그 말에 동의했고, 그때의 약속이 지켜질 순간이 찾아왔다.
주말마다 우리를 하나로 엮어주던 세션이 끝났지만, 곧바로 이어지는 다음 주말에도 다 함께 모일 계획을 잡았다.
그리하여 봄 방학이 되자마자 우리는 함께 캠핑을 떠나기로 했다.
캠핑.
전생에는 하이스쿨 시절은 물론이고, 대학생이 된 이후로도 친구들과는 단 한 번도 해보지 않은 일이었다. 상주 경비원이 있는 캠핑장을 가더라도 곰의 습격 같은 사고가 심심찮게 뉴스에 보도되고는 했던 터라, 어머니에게 괜한 걱정을 끼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더욱이 그렇게 가까운 친구도 없었고.’
하지만 나는 캠핑이라는 행위를 상당히 동경했고, 좋아했다.
대학에 들어가 면허를 따고 동행인으로 어머니를 졸라 처음으로 캠핑을 갔을 때, 나는 맑은 밤하늘을 채운 별을 보면서 깊은 상념에 잠겼고, 막연한 동경이 명확한 호감으로 바뀌었다.
그때의 나는 여전히 가난한 집안 사정으로 인해 걱정이 많았고, 공부에 알바까지 하느라 심신이 많이 지친 상태였다. 그리고 그날, 자연 속에서 지내며 꽤 많이 회복한 것이었다.
그런 좋은 기억을 친구들과 함께 되새기고 싶었던 나는 직접 나서서 각 부모님께 허락을 받았다. 내가 그동안 이미지를 잘 쌓아온 덕인지 다들 신이라면 믿을 수 있다며 흔쾌히 오케이 사인을 보내 주었다.
그렇게 계획이 정해진 상황에서 나는 일단 남은 ‘일’부터 신속하게 끝마쳤다.
손으로 정리한 플롯을 확인하며 타자기로 탁탁 글을 쳐나갔다. 줄리아에게 보낼 ‘Princess quest’의 4화 원고와 함께 ‘Double spy’ 코믹스 판의 향후 스토리를 써나가면서, 내가 잠깐 자리를 비운 동안에도 문제가 생기지 않도록 완벽하게 일을 끝내고자 한 것이었다.
‘1980년대라 이런 부분이 문제란 말이지.’
내가 원래 살던 미래에는, 어디든 핸드폰하고 노트북을 가지고 다니면서 뭔가 문제가 생기면 연락을 받는 대로 처리하면 그만인데.
지금은 아예 퍼스널 컴퓨터 자체가 보급되어 있지 않으니, 이런 상황에서는 애초부터 문제가 생기지 않게 최대한 완벽하게 끝내야 했다. 그래도 덕분에 쉬러 가서 일과 관련 없이 지낼 수 있으니, 이건 이것대로 좋을 수도 있겠다 싶었다.
그렇게 시간에 늦지 않게 마무리 지은 원고들을 모아 팩스로 보내고, 전화를 통해 줄리아에게 보고까지 끝마친 뒤, 나는 조금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부푼 기대감은 좀처럼 나를 잠에 빠지도록 놔두지 않았지만, 적당히 눈을 붙이려 노력했고 간신히 그 결실이 맺어졌다.
다음 날 아침, 옆집에서 찾아온 지우와 함께 차를 타고 시내로 나갔다. 그리고 합류 지점에서 알렉사와 두피를 픽업 한 뒤, 우리는 곧바로 시카모어 캐니언 캠핑장으로 향했다. 여러 명의 상주 경비원이 있는 곳이라 곰 문제로부터 그나마 자유로운 장소였고, 음식은 물론, 텐트도 넉넉하게 두 개 챙겨서 가서 즐기기만 하면 되었다.
이미 가는 도중부터 다들 잔뜩 신이 난 눈치였다.
“가서 읽으려고 이걸 가져왔다.”
“아, Mother······!”
“그, 그그그, 그걸 왜 가져 와?”
“Frrrrrrr······. 한밤중의 캠핑장에서 읽는 공포 소설은 더 각별한 법.”
“진짜 싫어!”
“듣자 하니 그곳 캠핑장에서는 담력 체험도 할 수 있다는 모양이군.”
“으아, 진짜 너무 싫어!”
슬쩍 발을 빼는 알렉사.
그걸 들은 나는 피식 웃으며 말했다.
“새로운 세계를 경험한다면서?”
“······그래도 이건 아니야.”
주눅 든 알렉사의 목소리를 들으면서, 나는 즐거운 봄 방학이 되리라 예상했다.
***
일반적으로 잡지 연재작의 순위를 결정하는 지점은 5화 전후였다.
대충 그쯤 되면 초반에 반짝 떠오르거나 반대로 빌드업이 늦은 소설이라고 해도 얼추 독자들의 머릿속에서 ‘아, 이건 이런 글이구나.’ 하는 생각이 정리되기 때문이었다.
그 이상으로 연재를 이어가더라도 순위가 높아지는 글은 거의 없었다. 떨어지는 경우는 무척 많았지만.
2주에 한 화씩 연재. 각 화의 분량은 5,000 단어 전후.
즉, 무려 25,000 단어나 썼다.
그만큼 썼는데도 아직 빌드업이 덜 끝났거나 보여줄 게 남은 소설이라면, 독자들의 인내심의 한계만 시험할 뿐이라는 것이 대부분 업계인들이 갖는 견해였다.
그리고 ‘Princess quest’가 5화를 맞이하는 시점에서, 그 성적표를 받아들였다.
‘5위인가.’
편집장, 아서 레이놀즈는 납득했다.
‘그래도 생각보다 높은 편이기는 하군.’
엎치락뒤치락을 거듭하는 1, 2위의 소설과 그 밑에서 조용히 자리를 지키며 멋진 에피소드로 치고 올라갈 일만을 기다리고 있는 3위. 그리고 얼마 전 3위에 밀려 4위가 된 ‘디텍티브 램 시리즈’ 역시 하드보일드 형사물로서 두꺼운 팬층을 갖췄다.
그들의 바로 아래에 자리한 것이었다.
그는 애써 무덤덤하게 받아들였지만, 사실 굉장히 놀라운 결과였다.
‘Princess quest’.
여성 주인공을 내세운, KOG의 리플레이 소설.
남성 독자층이 많은 이 건즈 앤 소드 매거진에서 연재하기에는 아무래도 약점이 될 수밖에 없는 컨셉이었다. 하지만 신 작가는 패러디라는 형태를 택하면서 그 약점을 훌륭하게 극복했다.
확실히 가벼운 글이라 웃으면서 즐기기 좋았다. 심지어 3화부터는 첫 번째 순서로 실리면서 잡지 전체의 분위기를 환기하는 역할을 맡게 되었다. 야구로 따지자면 1번 타자쯤 될까.
아서는 앞으로도 이 소설이 연재되는 동안, 잡지를 펼친 독자가 잡지 전체를 읽을 기분이 나도록 활약해 줬으면 했다.
‘그래야 4번과 5번을 맡은 로난 더 바바리안과 레인보우 월드가 맘 편히 홈런을 때리니까.’
그렇게 생각하며 집계된 자료와 함께 이 건에 대한 상념을 정리했다.
하지만 아서는 그날 오랜만에 편집부를 직접 찾아온 젊은 작가와의 만남에서 이 일에 대해 다시 상기하게 되는, 희한한 부탁을 하나 듣게 되었다.
바로 3위, 3번 타자, ‘디피스트 월드’를 쓴 작가인 ‘브이(V)’였다.
브이는 당연히 필명이었다. 본명은 계약한 지 오래되어서 순간 떠오르지 않았다.
창백한 피부에 안경을 쓴 구부정한 체격. 소설 연재만으로 적당히 먹고살면서, 편집부에도 잘 오지 않고 집에 틀어박혀서 원고만 쓰는 형태의 작가였다.
그런 그가 갑자기 편집부에 찾아와서 이렇게 말했다.
“신 작가를 만나고 싶어요.”
그렇게 말하며 검지와 엄지를 펴서 V 모양으로 만들어 안경을 끌어 올리는 브이.
“······어, 왜죠?”
“‘Princess quest’가 내 자리를 위협할 것 같으니까.”
제대로 설명하지 않은 채 얼토당토않은 소리를 짤막하게 늘어놓는 브이.
애초에 그가 다른 작가의 작품에 대해 언급하는 것 자체가 처음이었던 터라, 아서는 황당한 기분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그냥 5위 소설 아니야?’
하지만 실제로 브이는 작가로서의 어떤 본능에 따라 이 작품에 흥미를 느끼고 있었다.
이 작품은 분명히 아직 더 올라갈 여지가 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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