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ecame an American Retro Novelist RAW novel - Chapter (87)
87.
수업 시간 내내, 나는 두피의 이야기를 한번 곱씹어 보았다.
교문 앞에서는 약간(?) 흥분해 이야기했지만, 냉정함을 되찾고 다시 생각해 보니 코믹북 스토어에서 벌어진 사건은 나에게도 진지하게 고민해야 하는 굉장히 중요한 문제였다.
두피는 이래저래 일이 바빠서 가지 않았지만, 나는 그런 순간에도 시장 조사(?)를 위해 건즈 앤 소드 매거진이 발매되는 날에는 꼭 키튼즈 코믹북 스토어를 들러서 너드 가이들의 반응을 엿듣고는 했다. 그리고 연재가 계속될수록 좋아지는 반응에 기쁨을 맛봤다.
‘문제는 이게, 그거지.’
코믹북 너드 가이들이 로드 두푸스의 정체를 물은 이유나, 두피가 거기에 대답하지 않은 이유가, 아마도 나와 연관이 있으리라는 점이었다.
두피는 본능적으로 알아차린 것이다. 그들이 그런 질문을 해온 이유가 결국은, ‘SEEN’이라는 작가와 만나고 싶어서임을.
그걸 생각하자 두피에게 고마운 마음이 들었다.
‘진짜 깊이 있게 생각하고 신경 써줬군.’
연재가 계속되면서 ‘Princess quest’의 팬이 된 너드들은 분명 나라는 작가에게도 흥미를 가질 터였다. 너드에게는 수집 욕구가 기본적으로 장착된 이상 사인을 원할 테고, 그러니 분명 만나고 싶어 하겠지.
하지만 나는 그걸 마냥 좋게 느끼지는 않았다.
1980년대는 히피 문화의 잔재가 남아 있어서인지 우상에게 자아를 의탁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Mother’ 때 너무 과몰입해 팬레터를 보낸 팬들도 그렇고, 작가로서 얼굴을 알리는 건 나에게 있어서 꽤 조심스러운 문제일 수밖에 없었다.
현재 1세대 한인 사회 쪽에는 어떤 계급론에 의한 이득이 있고, 다들 미국의 문화와는 어느 정도 동떨어져 있는 사람들이라서 집안 상황의 개선을 위해 알렸다. 하지만 주변에는 말하지 말아 달라며 신신당부를 해두었고, 애초에 미국이 인종 분리가 심한 편이라 그런지 외부로 잘 퍼져 나가지도 않았다.
그로 인해 캘리포니아 전체를 따져 볼 때, 내가 작가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정말 극소수였다.
그리고 나는 적어도 나 자신이나 주변 사람을 안전하게 지킬 수 있다는 생각이 들 때까지는 그 태도를 견지할 생각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밝혀야 하는 상황이 왔을 때 아예 내가 작가라는 사실을 부정할 생각까지는 없었지만 말이다.
그러면 이 순간 생각해 봐야 하는 문제가 생긴다.
코믹북 스토어의 너드 가이들에게 내가 작가라는 사실을 밝혀도 되느냐, 아니냐.
그리고 생각의 추는 이미 반쯤 기운 상태였다.
‘키튼즈 코믹북 스토어 사람들이 딱히 위험해 보이지는 않았고.’
두피가 로드 두푸스임을 밝힌다고 한들, 그 사람들은 계속해서 누가 ‘SEEN’인지를 찾을 터였다. 그럴 바에야 그냥 시원하게 내가 나서서 작가라고 말하는 게 좋은 선택이지 싶었다.
물론, 그 이후 그들의 마음대로 해줄 생각은 없었지만 말이다.
‘내 친구를 축 처지게 한 대가를 치러야지.’
그런 결심을 한 나는 학교가 끝난 뒤, 두피와 함께 코믹북 스토어로 향했다.
녀석은 여전히 안경을 밀어 올리지 못했고, 나는 조심스럽게 위로를 건넸다.
“괜찮아. 아쿠아맨 뉴 이슈, 열 권도 넘게 사자. 응?”
“······웅.”
우물거리며 대답하는 두피. 조금 귀엽다.
그렇게 버스를 타고 코믹북 스토어에 도착한 두피와 나는 당당하게 문을 열고 키튼즈 코믹북 스토어 안으로 들어섰다.
그러자니 당연하다는 듯이 계산대······의 바로 옆에 의자를 두고서 앉아 있던 코믹북 마스터 빌이 자신의 수하들과 함께 자리에서 일어섰다.
나는 빌에게 다가가 물었다.
“진실을 알고 싶나?”
“······진실은 언제나 잔혹한 법이지.”
안경 팁을 툭 눌러서 안경을 밀어 올리는 빌.
제, 제기랄. 적이지만 멋있었다.
나는 불안한 마음에 두피를 돌아보았다. 아니나 다를까, 두피는 여전히 안경을 밀어 올리지 못했다.
가벼운 농담처럼 들리는 말이었지만, 이들에게 있어 안경을 밀어 올린다는 행위는 자신감의 표출이었다. 공작새들이 날개를 펼치는 일에 가깝다고 해야 할까. 알렉사가 듣는다면 ‘뭐야, 그거. 기분 나빠.’ 할 테지만 남자들에게는 남자들만의 세계가 존재한다.
나는 녀석을 찌릿 노려보며 물었다.
“그전에 게임을 하지. 이기면 두피에게 사과하고 코믹북 마스터 자리를 넘겨. 우리가 진다면 진실을 가르쳐주마.”
“Huuuuuuuuu·········. 게임이라. 이 마스터 빌에게 게임으로 덤비겠다고?”
빌이 두피를 돌아보았다.
“어떤 게임으로 하고 싶지?”
“그야 물론, 음.”
나는 순간 말을 멈추고 두피를 돌아보았다.
사실 나는 친구가 없었기 때문에 이 시대의 대결 게임은 잘 몰랐다. 한 번의 삶을 돌아왔다고 해서 모든 것을 다 알고 짱 먹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오산이다. 적어도 이 부분에서만큼은 두푸스 킹스턴이 나보다 훨씬 더 권위자였다.
그리고 바로 그 순간이었다.
마침내 두푸스가 중지와 약지를 엮어 안경의 브릿지를 스윽 밀어 올렸다.
“두, 두피!”
“······‘그걸’ 하지.”
“‘그것’인가. 좋은 선택이로군.”
그게 대체 뭐야?!
***
두피와 빌이 고른 게임은 ‘캐터펄트 앤 크로스보우’라는 게임이었다.
그 제목을 들은 순간, 신은 머릿속에 파노라마가 스치듯 기억을 떠올렸다.
‘아, 이거. 기억났다.’
캐터펄트 앤 크로스보우.
중세 스타일의 콘셉트에, 두 진영으로 나뉘어 고무줄로 작동하는 조그마한 플라스틱 장치를 쏘며, 상대방의 기물을 모두 먼저 맞춰 쓰러뜨리면 승리하는 게임.
피지컬과 더불어, 주사위를 굴려 자신의 기물을 전진시키는 규칙이 있어 전략적인 부분도 상당히 중요한 게임이었다. 특히나 먼저 기물을 전진시켜서 전장 곳곳에 배치된 거점을 점령하면 상대방이 기물을 맞춰서 쓰러뜨리는 게 상당히 어려워졌다.
······신은 고등학교에 다니던 시절, 항상 이 게임을 플레이해 보고 싶었지만, 안타깝게도 그에게는 같이 할 친구가 존재하지 않았다.
‘이걸 지금 눈앞에서 관전한다고?’
그는 흥분을 감추지 못한 채 두 사람을 지켜보았다.
테이블 위에 각자의 기물을 배치하는 두피와 빌.
PC 게임이었다면 그냥 클릭 몇 번에 자동으로 됐겠지만, 보드게임에는 역시 이런 아날로그한 맛이 존재했다.
상자 안에 고이 모셔져 있던 기물을 꺼내서 고무줄을 감고 설치하는 과정이 대략 한 시간.
주변에 구경하러 온 사람들은 열 명이 넘어가는 가운데, 신은 두피에게 말했다.
“두피.”
“신.”
“너무 부담 갖지 마. 이기든 지든, 우리 그냥 말해주자.”
“고맙다. 나를 위해서.”
“우리를 위해서지.”
두 사람의 시선이 교차했다.
“그럼, 염치 불구하고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하마.”
그리고 게임이 시작되었다.
코믹북 마스터, 빌의 전략은 정석적이었다.
그는 주사위를 굴려 기물을 전진시켰다. 반대로 두피는 초장부터 주사위를 굴리지 않고 곰 발바닥처럼 큰 손에 투석기를 쥐고 상대방의 기물을 쏘아 맞췄다. 플라스틱 공이 허공을 날아다녔고, 두피가 손쉽게 상대의 기물을 맞출 때마다 사람들은 연신 환호했다.
“미쳤군! 두피!”
“이걸 맞춘다고?!”
다들 흥분해 외치는 가운데, 신은 두피를 존경의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두피의 슈팅은 점점 빗나가게 되었다.
“칫······!”
“후흐하하하! 어떻게 된 거지?! 로드 두푸스!!”
코믹북 마스터 빌이 소리쳤다.
그의 주사위 운이 너무 좋았다. 6을 연속으로 띄웠고, 그로써 캐터펄트를 전진시켜 금방 거점을 먹은 빌의 진영 앞에서 두피는 제대로 공을 맞추지 못했다.
반면, 플라스틱 성벽 뒤로 모습을 감춘 마스터 빌의 캐터펄트는 반대로 두피의 기물을 차례차례 쓰러뜨려 나갔다.
누군가가 외쳤다.
“비겁하다! 빌!”
“비겁?! 비겁을 말하는 건 항상 약자들이지! 그리고 나는 승자고! 로드 두푸스! 오늘 너는 이곳에서 최후를 맞이한다!!”
‘어라?’
신은 생각했다.
이거 왠지 ‘Princess quest’ 같다고.
“Frrrrrrrr······.”
그런 상황에서도 침착하게 안경을 밀어 올리는 두피.
싸움은 계속되었고, 빗나간 플라스틱 공들이 테이블 밑으로 떨어져 바닥을 나뒹굴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는 키튼은 마냥 웃고만 있었다. 손으로 호두를 으깨면서.
바로 그때, 역시 그냥 내버려 둘 수는 없겠다 싶어 베이스 레슨을 미루고 온 지우 장이 가게 안으로 들어섰다.
그녀는 안쪽에 모여 있는 사람들을 발견하고는 허겁지겁 달려갔다.
전장은 참혹했다.
두피의 병사들은 빌의 캐터펄트에 무자비하게 피탄된 채 바닥을 나뒹굴었다.
사실 무슨 게임인지 잘 몰랐으나, 대강 돌아가는 분위기로 상황을 알아차린 지우는 사람들 사이를 헤치고 나가 두피의 옆까지 도달했다.
“두, 두피. 괜찮아요?”
“지우인가. 레슨은?”
“미뤄두고 왔어요. 걱정이 되어서요.”
“Frrrrrrr······. 너의 소중한 시간을 빼앗고 말았군.”
바로 그때, 두피의 안경이 날카롭게 빛났다.
“그 대신, 그대에게 승리를 선사하도록 하지.”
“말은 잘하는군! 두피! 귀여운 여자애도 옆에 끼고 말이야!”
“빌. 이 말을 명심해라.”
두피는 캐터펄트를 ‘하늘로’ 쏘았다. 빨간색 공이 두둥실 궤적을 그렸다.
그걸 본 신은 순간 깨달았다.
애초부터 두피에게 거점이니 방어벽이니 하는 건 아무런 의미도 없었다고.
“각도를 제압하는 자가 승리를 제압한다.”
이유는 간단했다.
친구는 없어도 수많은 게임을 가졌던 남자. 두푸스 킹스턴.
그는 집에서 수십 시간이 넘게 이 캐터펄트 앤 크로스보우를 ‘혼자’ 가지고 놀며 이 게임 자체에 통달해 버리고 만 것이었다.
“Ohhhhhhhhhhhhhhhhhhhhhh-?!”
“뭣?!”
천장에 닿을 만큼 높이 날아오른 두피의 공이 거의 수직으로 떨어지면서 성벽 뒤에 있던 빌의 캐터펄트를 맞췄다.
두피는 싱긋 웃었고, 빌은 식은땀을 삐질삐질 흘리면서 주사위를 들었다.
그리고 싸움은 종막을 향해 달려갔다.
두피의 크로스보우가 계속해서 빌의 기물을 쏘아 쓰러뜨렸다. 그 가운데에서 안색이 창백해져 가는 빌. 신과 지우는 승리를 예감하고 두피를 계속 응원했다.
바로 그 순간이었다.
“마, 마스터! 지면 안 돼!”
“힘내라고! 어이!”
“여기서 쓰러지지 마! 할 수 있어!”
“의지를 가져야 한다!”
“자넨 우리의 미래야!”
마스터 빌의 옆에서 그를 열심히 응원하는 ‘동료’들의 존재를.
그들을 본 순간 두피는 굉장히 묘한 느낌을 받았다.
빌은 자신이 이곳에 올 때마다 항상 자리를 지키는 그런 존재였다. 초심자나 새로운 작품을 찾는 사람들에게 코믹북을 추천해 주고, 이런 행사를 개최해 이곳의 사람들이 즐겁게 놀 수 있도록 이끌었다.
신은 두피의 무너진 자존심을 세워주고자 게임으로의 승부를 제안했다.
하지만 두피는 게임을 하면서 깨달았다.
중요한 것은, 자신의 자존심이 아니다.
로드 두푸스의 영혼을 가진 자로서, 모두가 바라는 결말을 향해 나아가기 시작했다.
“신, 그리고 지우.”
“응, 두피.”
“네.”
“미안하다. 승리하겠다는 약속, 지키지 않아도 되겠는가.”
“무, 무슨 일이야. 혹시 배가 고파?”
“제가 핫도그라도 사 올까요?”
“······아니.”
두피는 일부러 캐터펄트를 빗맞혔다.
“좋아! 이제 기회가 왔어!”
“힘내, 마스터!”
“힘내라고!!”
빌이 캐터펄트를 쏘았고 두피의 기물이 쓰러졌다.
“그냥, 상대방을 존중하고 싶어졌달까.”
그렇게 이어진 게임.
아슬아슬한 차이로 빌이 승리를 거뒀다.
“우오오오오!! 이겼다! 우리가 이겼어!”
“이제 들을 수 있다고!”
무슨 수퍼 볼에서 우승한 팀의 일원처럼 기뻐하는 코믹북 너드 가이들.
그 혼잡한 틈바구니에서 빌과 두피의 시선이 교차했다.
사실, 빌은 중간부터 두피가 자신을 봐주고 있다는 생각을 지우기 어려웠다. 그리고 두피의 부드러운 미소에서 그런 생각이 진실이었음을 깨달았다.
그는 스스로 부끄러운 짓을 저질렀음을 느꼈고, 천천히 두피에게 다가갔다.
“좋은 승부였다. 두피.”
“······로드 두푸스라고 불러주겠나.”
두 사람이 각자의 방식으로 안경을 밀어 올린 뒤 악수했고, 그들 사이에서 신도 웃었다.
‘저 자식.’
일부러 좀 자존심 회복하라고 자리를 마련해줬는데, 끝내 평소처럼 상대를 배려했다. 하지만 코믹북 마스터 빌도 자신의 잘못을 깨달았으니, 어쩌면 이게 최선의 결말이지 싶었다.
감동으로 벅찬 마음을 가다듬은 신이 두피의 옆에 천천히 다가갔다.
그 의미를 알아차린 두피가 두 팔을 벌리며 코믹북 너드 가이들에게 이야기했다.
“졌으니 내기의 조건대로 말하자면, 내가 이곳에서 플레이해 왔던 로드 두푸스는 ‘Princess quest’에 나오는 로드 두푸스가 맞다. ······그리고 여기 있는 이 친구가, 세션을 진행하고 소설을 쓴 작가인 ‘SEEN’이다.”
그 말을 듣자마자 너드 가이들의 안경 너머 눈이 휘둥그레 커졌다.
분명히 두피의 주변 인물 중에 ‘SEEN’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기는 했지만, 두피와 함께 코믹북 스토어에 자주 오던 동양인 동급생이 그 당사자일 거라는 생각은 전혀 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런 놀람도 아주 잠시, 그들은 신의 곁으로 달려들어 잔뜩 흥분해 소리쳤다.
“SEEN! SEEN! SEEN! SEEN! SEEN! SEEN! SEEN! SEEN! SEEN! SEEN! SEEN!”
서브컬처에 진심인 그 마음을 담아 외치는 그들.
그 사이에 선 신은 침착하게 입을 열었다.
“그래요. 제가 ‘SEEN’입니다.”
본인의 입으로 직접 확인을 시켜준 순간, 키튼즈 코믹북 스토어 안에는 어마어마한 환호가 휘몰아쳤다.
“Ohhhhhhhh-!”
“사, 사인······! 사인 좀!!”
“진짜로 네가 SEEN이야?! ‘Mother’와 ‘Double spy’를 쓴?!”
“어떻게 로드 두푸스를 죽일 수가 있어?!”
그 소란은 ‘Princess quest’가 너드 팬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는 증거처럼 느껴졌다.
그리고 그런 반응이 모이고 모여 이틀 뒤, 대략적인 순위 윤곽이 나왔다.
‘Princess quest’는 3위를 수성 중이었다.
[ Kingdom of nerd’s (2) > 끝(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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