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ecame an American Retro Novelist RAW novel - Chapter (98)
98.
늦은 저녁.
어머니와의 식사를 끝마치고 방으로 들어온 브이는 길게 숨을 내뱉으며 자리에 앉았다.
어째서일까.
요즘 들어 전에는 적당히 넘겼던 어머니의 말이 불편하게 느껴졌다.
어머니는 매일매일 저녁 식사 시간마다 뭔가를 저주하고 분노를 쏟아냈다. 저쪽 동네의 흑인이 꿍꿍이가 있다거나, 아니면 이쪽 동네의 황인은 꼭 뒤통수를 치려 하고 있다거나.
반쯤 뇌를 비운 채로 그 이야기를 듣던 와중, 문득 머릿속으로 이런 생각이 떠올랐다.
‘그렇지 않던데.’
코리아타운의 사람들은 친절했다.
손님이어서라는 이유도 있겠지만, 적어도 어머니의 말처럼 음흉해 보이지는 않았다.
그러한 자신의 변화가 어딘가 어색하면서도 딱히 거부감은 들지 않았다. 호랑이 자수가 새겨진 깔개가 처음에는 신기했으나 이제는 익숙해졌듯이.
불편한 감정을 진정시키며 엄지와 검지를 브이 자 모양으로 펼쳐 안경을 밀어 올린 뒤, 브이는 책상 서랍에 몰래 숨겨두었던 건즈 앤 소드 매거진 두 부를 꺼내 들었다.
일단 자신의 소설인 ‘디피스트 던전’부터 확인하고, 다음으로 ‘Princess quest’를 찾았다.
‘응?’
맨 앞으로 돌아갔는데도 없어서 브이는 목차를 확인했고, ‘Princess quest’가 맨 뒤에 실려 있다는 사실을 알고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보통 맨 뒤에 실리는 소설은 잡지에서 가장 주목받거나 인기를 끄는 작품이었다. 그리고 대부분은 ‘로난’이나 ‘레인보우’가 차지했다.
자신은 한 번도 차지하지 못했던 잡지의 맨 뒷자리.
하지만 현재 이 작품이 보여주는 재미를 생각해 보자면 납득이 안 가는 건 아니었다. 그 사실을 순순히 인정하며 브이는 감탄했다.
신 작가와 코리아타운에서 대담을 나눈 이후로도 그는 계속해서 ‘Princess quest’를 읽었다. 아니, 그뿐 아니라 건즈 앤 소드 매거진에 실리는 소설 대부분을 읽어보게 되었다.
어떤 소설은 재미있고 어떤 소설은 재미가 없었지만, 한 가지는 확실했다.
‘어떻게 이런 생각을 했을까.’
‘이다음은 어떻게 되는 거지?’
그런 생각이 드는 소설은 재미가 없어도 계속 읽게 되었다.
그리고 그 두 가지 생각이 모두 드는 글이 바로 ‘Princess quest’였다.
브이는 이전까지의 내용을 머릿속에 떠올리면서 자리에 앉아 흥미롭게 12화를 읽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다음으로 읽을 13화가 담긴 잡지도 미리 꺼내두었다. 요즘 들어서 디피스트 던전의 전개를 고민하다 편집자가 추천해 준 다른 참고용 작품을 읽느라 ‘Princess quest’ 12화를 건너뛰었다.
하지만 그 덕분에 브이는 조금 덜 고통(?)받게 되었다.
제이나는 모든 기억을 떠올렸다.
미친 사람처럼 웃어대는 베르그의 광소가 회랑을 가득 채운 가운데, 검은 점액질은 사방에서 세 사람을 향해 서서히 다가왔다. 먼저 정신을 차린 스탠이 이럴 때가 아니라고 소리쳤고, 클레어는 어떻게든 마음을 다잡은 뒤 베르그를 향해서 달려들었다.
하지만 그녀의 앞을 소의 머리를 한 인간형 악마가 막아섰다. 베르그가 자신의 주문을 완성하는 동안 시간을 벌기 위해 소환한 몬스터들이 곳곳에서 일어선 것이다.
소환되는 몬스터들은 그 구성부터 모습까지 어딘가 이상했다.
산과 들에서 흔하게 만날 수 있는 종류부터 대륙 최남단에 위치한 ‘마운틴 오브 더 이블’에서나 발견되는 악마들까지 온갖 것들이 넘쳐났다. 거기에 더해 하나같이 기괴하게 변형된 모습을 하고 있었는데, 신체 부위 중 일부는 잿빛이었고 그곳을 파괴하면 살점이 떨어지는 대신 재가 휘날렸다.
점점 다가오는 검은 점액질과 더불어 그것은 클레어와 스탠에게 깊은 공포를 심어주었다. 읽고 있는 브이 역시 손에 땀을 쥐고 볼 수밖에 없었다.
그 괴물 무리를 상대로 클레어와 스탠이 필사적으로 싸우는 동안, 제이나는 줄곧 머리를 감싸 쥔 채로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했다. 그녀를 보호해야 했기에 전투는 더욱 힘들어질 수밖에 없었다.
특히나 스탠은 지금 당장에라도 이곳에서 도망치고 싶은 충동에 휩싸여 있었다.
자신이 배워온 모든 것들이 부정되는 듯한 기분이었다.
그 누구도, 그 어떤 책도 이런 끔찍하고 기괴한 존재에 대해서 가르쳐주지는 않았다. 이성이 마비될 것 같은 공포를 이겨내고자 발버둥 치는 스탠에 대한 묘사는, 그동안 신앙과 의무감으로 탐색을 수행하던 그의 자세로 미루어 볼 때 전혀 상상할 수 없던 고뇌를 그려내었다.
그래서 브이는 지금 이들이 마주하고 있는 상황이 세계관 상 얼마나 비상식적인지가 이해됐다.
[제이나, 제이나······!] [일어나라! 어서 일어나서 싸우라고!] [제이나한테 그딴 식으로 말하지 마!!]혼란과 분열.
필사적으로 제이나의 이름을 외치는 클레어의 목소리는 허공으로 흩어졌다.
그리고 머리와 팔, 다리가 재로 이루어진 스켈레톤이 다가오며 내는 뼈다귀 소리를 들으며 소녀는 하염없이 떠오르는 기억 속에 파묻혀 있었다.
『절그럭. 절그럭. 절그럭. 절그럭.
제이나는 오랜 시간 어둠 속에 갇혀 있던 기억을 떠올렸다.
다그닥. 다그닥. 다그닥. 다그닥.
말발굽 소리가 들려왔다. 그것은 영지의 정원에서 어머니와 함께 화관을 만들면서 기다렸던, 아버지가 돌아오는 소리였다. 찬란하게 빛을 발하던 태양 아래에서 제이나는 어머니와 함께 아버지를 마중 나갔다.
흑마법사는 음침하고 속내를 알 수 없다는 인식이 존재한다.
하지만 제이나의 아버지는 그렇지 않았다. 다른 일반적인 귀족의 모습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그가 흑마법을 연구하는 이유는 어디까지나 선대로부터 이어져 온 일이기 때문이었다. 아버지는 영지의 주민을 아꼈고, 제이나의 가문은 평화로운 하루하루를 보냈다.
모두의 얼굴에는 웃음꽃이 피었다. 다들 제이나를 사랑해 주었다.
그 따스했던 나날에서 이어지는 다음 순간의 기억은······ 그렇게 웃던 얼굴들이 모두 고통으로 일그러진 채 장대에 걸린 광경이었다.
어머니가 소중히 여기며 매일 빗질하던 긴 머리칼은 목덜미 부근에서 싹둑 잘려져 있었다. 고통을 참아내느라 대부분의 이가 부러졌고 한쪽 눈알은 빠졌다. 그렇게 몸은 어디로 갔는지 알 수 없는 채로 머리만 남아 장대에 걸려 있었다.
어린 제이나는 그 모습을 올려다보았다.
눈물도 비명도 나오지 않았다.
그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한 채 제이나는 멍하니 옆을 돌아보았다. 영지에 불을 지르고 주민을 짓밟던 병사들. 높이 솟은 그들의 깃발은 꽃과 검으로 장식되었다.
직후, 저 멀리서 뿔나팔 소리가 들려왔다.
리네르 왕국군이 나타나자 꽃과 검의 깃발을 든 병사들이 기다렸다는 듯이 퇴각했다.
그리고 다음 순간, 제이나의 허리를 누군가가 낚아챘다.
영지의 견습 마법사, 베르그였다.
“반드시······! 반드시 복수하고야 말겠어······!”
피투성이가 된 그는 눈물로 뺨이 얼룩진 채 제이나를 말에 태우고 함께 내달렸다.
추적이 시작되었다. 꽃과 검의 깃발을 들었던 병사들이었다. 찾았다. 여기에 있어. 딸까지 죽여야 한다고. 혼란스러운 가운데, 정신을 차려보니 혼자 남게 되었다.
이제 자신에게는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제이나는 그제야 눈물을 흘렸다. 엉엉 울면서 아버지와 어머니, 영지의 사람들을 찾았다. 굶주리고 지쳐 쓰러졌다 일어나기를 반복했다.
그렇게 서서히 죽어가던 그녀의 곁에 작은 까마귀 하나가 날아와 사과를 물어다 주었다.
그것은 어머니가 죽기 직전, 딸을 수호하기 위해 보낸 소환수였다. 말이 달리는 속도를 따라가지 못하고 뒤처졌던 까마귀가 이제야 쫓아왔고, 제이나의 상태를 알고 급하게 근처 나무에서 사과 하나를 따다가 가져다준 것이었다.
제이나는 눈물을 그쳤다.
그리고 자신이 누구였는지를 잊었다.
사과를 먹으며 기운을 차렸지만, 까마귀는 원래 있는 곳으로 돌아가야 했다. 까마귀의 송환을 지켜보며, 그녀는 누구에게 배웠는지도 알지 못하는 흑마법을 기억해냈다.
정처 없이 험난한 세상을 나아가기 시작했다.
“아아아아아아아악-!!”
비명과 함께 현실이 돌아왔다.
고통과 분노, 역겨움과 무력함. 갖가지 감정이 제이나의 안에서 휘몰아쳤다. 그리고 그것이 에너지가 되어 외부로 분출됐다. 기억을 되찾으며 자신이 잊고 살았던 흑마법사로서의 재능도 다시 일깨워냈고, 그녀는 검은 점액질로부터 온갖 불경한 괴물을 꽃피웠다.
“제이나······?!”
놀라 돌아보는 클레어.
그리고 제이나와 괴물들은 눈에 보이는 모든 걸 짓밟기 시작했다.』
거기까지 이어진 12화를 모두 다 읽은 브이는 심장이 쿵쿵 뛰는 감각을 느꼈다.
‘13화, 13화······.’
정신 없이 다음 잡지를 집어 든 그는 곧바로 맨 뒤쪽의 페이지를 펼쳐 들었다.
제이나에게 부여된 서사는 너무나도 안타까웠다. 그 분노를 이해하면서도, 동시에 거기에 휘말려 후회할 행동을 하지 않기를 바랐다. 만약 자신이 12화를 2주 전에 읽었더라면 다음 화를 기다리느라 무척 고통스러웠으리라 생각하면서, 브이는 다시 ‘Princess quest’의 이야기 속으로 빠져들었다.
고통을 끄집어내는 듯한 비명과 함께 이성을 잃고 날뛰기 시작한 제이나.
제이나는 검은 점액질 속에서 몬스터를 소환해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을 무차별적으로 공격하기 시작했다. 클레어와 스탠은 거기에 대항했지만, 제이나를 이겨낼 수는 없었다.
원래의 것보다 더욱 거대한 입이 달린 오우거가 달려들어 스탠을 먹어 치우려고 들었다. 클레어 역시 똑같이 기괴한 몬스터에게 제압당했다.
클레어는 그런 상황에서 자신의 과거를 떠올렸다.
평민이라는 이유로 친구를 잃고, 마음을 나눌 수 있는 친구를 간절히 바라며 살아온 인생.
오갈 곳 없는 울분을 몸을 움직이며 토해내던 그녀는 최근 몇 달에 걸쳐 그 바람을 이루었다. 친구가 생겼다. 그것도 두 명이나. 로드 두푸스와 제이나라는 친구였다.
그렇기에 지금 이 상황이 너무나도 슬펐다. 받아들일 수 없었다.
하지만 그 감정을 억지로 삼킨 뒤 클레어는 울면서 소리쳤다.
스탠에게는 손을 대지 마라. 잃어버린 삶에 대한 정당한 복수가 하고 싶다면 나 하나로 충분하다.
그리고 끔찍한 고통 속에서도 끊임없이 사과했다.
[미안해. 정말 미안해. 제이나. 상처 줘서 미안해. 너를, 네 가문을 무너뜨리고 나 혼자 행복한 삶을 누려와서 미안해. 혼자 외롭게 세상을 떠돌게 해서 미안해. 혼자 깊은 밤을 지새우면서 두려움에 떨게 해서 미안해. 그 누구와도 대화하지 못하게 해서 미안해.]그 말을 들은 제이나는 혼란에 빠져들었고, 다시 한번 큰 비명을 내질렀다. 회랑 전체가 진동했고 그 모습을 보면서 베르그는 완전히 정신이 나간 채 웃음을 터뜨렸다.
그리고 베르그의 주문이 완성되었다.
검은 점액질 속에서 뻗어 나온 수천, 수만 개의 검은 손이 그들을 덮쳤다.
거기까지가 ‘Princess quest’ 13화.
‘잡지의 맨 마지막에 실어줄 만했군.’
브이는 감탄을 금치 못했다.
신 작가는 지금까지 쌓아온 서사를 완전히 무너뜨리며 동시에 재조립했다. 클레어와 제이나는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넌 듯했다. 아슬아슬한 천국에서 단숨에 지옥 밑바닥까지 떨어진 두 사람의 서사는, 브이로 하여금 먹먹한 감정을 느끼게 했다.
그리고 떠오르는 생각은 하나였다.
‘16화로 완결 짓는다고 하셨었지?’
말인즉슨, 앞으로 남은 연재는 단 세 화뿐이라는 뜻이었다.
‘과연 어떻게 마무리될까.’
좋아하는 방식으로 소스를 뿌린 핫도그를 먹다가 떨어뜨린 것 같은 아쉬움을 느끼면서 브이는 천천히 페이지를 넘겼다. 그리고 저번 주 앙케트 순위의 결과를 확인하고는 놀라 눈을 동그랗게 떴다.
‘Princess quest’의 순위가 상승했다.
‘레인보우 월드’를 끌어내리고, 2위였다.
***
[미안해. 정말 미안해. 제이나. 상처 줘서 미안해. 너를, 네 가문을 무너뜨리고 나 혼자 행복한 삶을 누려와서 미안해. 혼자 외롭게 세상을 떠돌게 해서 미안해. 혼자 깊은 밤을 지새우면서 두려움에 떨게 해서 미안해. 그 누구와도 대화하지 못하게 해서 미안해.]나는 문득, 13화에서 썼던 클레어의 대사를 머릿속에 떠올렸다.
지금 쓰려 하는 장면에도 활용하고자 공을 들여 써서 그런지, 바다를 바라보던 와중에 갑자기 떠올랐다.
주말, 살짝 지나간 여름을 만끽하고자 다 함께 놀러 간 두피 집 근처의 해변.
하와이안 트렁크를 입은 두피가 선글라스를 쓴 채 모래찜질 중이었다. 그리고 검정색 비키니 수영복 위에 흰 티셔츠를 입은 알렉사가 스커트가 달린 원피스 수영복을 입은 지우와 신나게 튜브를 타고 놀고 있었다.
그러다 눈이 마주치니, 알렉사는 모래사장으로 돌아와 내게 이런 말을 전해왔다.
“신. 말하는 걸 깜빡했는데, 우리 부모님이 한번 놀러 오라고 하셨어.”
“그래?”
“응, 이번에 13화를 굉장히 인상 깊게 보신 모양이더라고.”
“어떤 부분에서?”
“음? 글쎄, 갑자기 부엌에서 ‘꿱!’ 하고 비명을 지른 다음에 하신 말씀이라.”
“······.”
“어쨌든, 더 이상 일 생각 그만! 앉아 있지만 말고! 같이 놀자!”
나는 팔을 당겨지면서 파라솔 밑에서 빠져나와 바다로 향했다.
멀리서 지우가 손을 흔들었다. 야자수가 흔들리는 것 같았다.
그리고 원고에 대한 생각을 멈추니, 자연히 다른 생각이 들고 말았다.
‘코믹북 스토어에 가면 왠지 또 체호프 사태가 벌어질 것 같은 느낌이······.’
물론 반쯤 농담으로 하는 생각이었다.
하지만 그것이야말로 연재 소설의 참맛이 아닐까. 독자에게는 지옥을 선사하고 작가는 사람들이 고통받는 걸 보면서 낄낄 웃는······ 아, 아니. 이게 아니라. 재밌게 읽은 소설이 더 궁금하게 만든 상황에서 막을 내리고 2주 동안 그 다음 화를 기대하는 시간 말이다.
지우나 알렉사, 두피는 이미 세션을 진행해 봤으니 대충 앞으로 어떻게 될지를 예상할 수 있어서 딱히 다른 일반 독자처럼 미치고 팔짝 뛰지는 않는 것 같았다. 하지만 13화가 나간 시점부터 나는 아예 키튼즈 코믹북 스토어에 발길을 끊었다.
읽는 독자를 안달 나게 만드는 건 작품을 연재하는 작가로서 필수적인 기술이기는 하지만, 그것을 의도하고 쓴 만큼 가기가 두려웠다.
그리고 ‘Princess quest’는 이제 14화까지 연재가 이루어졌다.
“얍, 얍.”
“꺄아. 그러지 마.”
“······.”
소심하게 물을 끼얹던 지우가 내 로봇 같은 반응에 시무룩해졌다.
멀리서 튜브로 물을 몰고 온 알렉사가 나를 덮쳤다. 꼬로록. 바다의 짠 내와 함께 일어서자 깔깔거리며 웃는 두 사람이 보였다. 두 사람의 뺨 언저리에 각각 금발과 흑발이 달라붙어서 대비되었다.
‘······모든 게 대비되는 구성인 만큼, 마지막까지 허술해선 안 되는데.’
어느덧 2위까지 올라선 상태였지만, 나는 방심하지 않았다.
작품 후반부의 구성이 회상과 함께 진행되면서 몇 화에 걸쳐 이어지는 형태였기에, 최대한 독자들이 흐름을 기억하기 쉽게 하는 방향으로 집필이 진행되었다. 안달이 나서 전전긍긍하는 것도 너무 과하면 독자로서는 불쾌할 수 있는 경험인 만큼, 한 화 한 화를 읽을 때의 만족감 역시 확실하게 전해주고자 노력한 것이다.
12화에서는 제이나의 과거를, 13화에서는 클레어의 과거를 보여주며, 각 화에서 주요 화자를 교차시켜 착실하게 이야기를 진전시켜 나갔다.
그리고 14화에서는 스탠까지 포함해, 세 사람이 마침내 ‘심연’을 마주하게 되었다.
여기에서 절망 끝에 찾아올 희망을 대비시키기 위해, 절망이라 할 수 있는 ’심연‘을 섬세하게 묘사하는 데 심혈을 기울였다. 세션을 진행할 때 정리했던 것에 더해, ‘Knight’s of the wisdom‘ 사에 보낸 원고를 바탕으로 구체화시키는 과정은, 예상했던 것보다 힘들었다.
온통 잿빛으로 이루어진 세계. 벽과 지면, 눈이 닿는 모든 곳에서 검은 손이 뻗어 나온다.
그곳에 떨어진 클레어는 제이나를 찾고자 헤매다 스탠과 마주쳤다.
반쯤 미쳐가던 스탠의 뺨을 후려쳐 정신을 일깨운 클레어는 그런 상황에서도 포기하지 않고 제이나를 찾아 이곳을 빠져나가자고 했다. 신성하기까지 한, 불굴의 의지를 드러내는 그녀의 모습을 보면서 스탠은 마음을 다시금 다잡았다.
심연의 끔찍한 광경을 목도하면서도 꿋꿋이 탐색을 이어 나간 두 사람은 결국, 제이나를 찾아냈다.
수많은 손에 붙잡혀 하늘로 들어 올려지고 있는 그녀를.
공포에 금방이라도 미칠 것 같았지만, 클레어는 제이나를 발견하자마자 이름을 외치면서 달려들었다. 자신의 가문이 제이나의 가문을 멸문시켰다 데서 오는 죄악감이나, 범람하는 기억과 그에 호응하는 흑마법의 의식으로 인해 착란에 빠진 제이나가 자신을 공격했던 일 같은 것은 더 이상 안중에 없었다.
제이나는 하나뿐인 소중한 친구였으니까.
‘14화는 그렇게 마무리가 되었고.’
이제 발매 후 일주일 정도 시간이 흘렀으니, 슬슬 앙케트 엽서가 날아들 때였다.
하지만 14화로 1위를 차지할 수 있으리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12, 13, 14화가 연재되는 동안 ‘Princess quest’는 계속 2위를 차지했지만, 경쟁자를 꺾고 다시 굳건히 1위를 수성하기 시작한 ‘로난 더 바바리안’의 아성을 한순간이나마 깨뜨리기 위해서는 15화의 힘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나는 15화에서 그동안 쌓아온 모든 걸 터뜨릴 예정이었다.
제이나가 클레어를 용서하고, 앞서 건넨 사과를 같은 형태로 받아치면서.
[고마워요. 정말 고마워요. 클레어. 행복하게 해줘서 고마워요. 혼자 세상을 떠돌며 아무와도 교류하지 않고 살았어요. 그런 저를 발견해 줘서 고마워요. 깊은 밤, 잠에 들지 못할 때면 옆에서 같이 이야기해 줘서 고마워요. 그때 당신과 나눈 대화가 저에게는 그 어떤 대화보다도 값졌어요.]어렴풋이 형태를 갖추기 시작한 대사를 곱씹으면서, 나는 생각했다.
그 장면으로 마침내 1위에 올라설 수 있을 것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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