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ecame the Premier League's youngest manager RAW novel - Chapter (193)
193화: 카라바오컵 4강전
대진표의 여신은 주기적으로 농간을 부린다.
적어도 한두 시즌 이상 축구를 쫓아다니다 보면 모든 팬들이 다 뼈져리게 체감하는 얘기였다.
토너먼트 대회의 결정적인 순간에 더비 라이벌을 만나서 발목을 잡힌다던가, 아니면 강등과 잔류의 길목에서 리그 최강팀을 상대해야 한다던가.
마크 트웨인 말한 것처럼, 현실에는 개연성 따위가 필요없기 때문에 소설보다 더 극적인 순간들이 있다.
하지만 번리에게 주어진 1월의 일정표는 대진표의 여신이 농간을 부리기보다는 악마가 대진표에 오물로 덧칠한 수준이었다.
아니, 적어도 형민과 번리의 코치진에게는 그렇게 다가왔다.
“FA컵 3라운드 상대가 블랙번인데, 그 전후로 리버풀을 상대로 카라바오컵 4강전 1차전과 2차전을 치르라고?!”
축구협회에서 확정한 카라바오컵과 FA컵 일정표를 받아본 형민이 비명을 질렀다.
이럴줄 알았으면 카라바오컵 8강전에서 적당히 할껄!
대진표의 여신인지 악마의 화신인지 모르겠지만, 이렇게 축구협회의 인장을 단 악의 넘치는 세 줄을 눈으로 확인할 줄은 몰랐다.
2024년 1월 9일 화요일, 뉴 터프 무어에서 리버풀을 상대로 카라바오컵 4강전의 1차전.
2024년 1월 13일 토요일, 이우드 파크에서 블랙번을 상대로 FA컵 3라운드.
2024년 1월 16일 화요일, 안필드에서 리버풀을 상대로 카라바오컵 4강전의 2차전.
카라바오컵 4강전 상대가 현재 리그 1위를 질주하는 리버풀이 된 것도 부담스러운데 그 사이에 끼어 있는 FA컵 3라운드 상대가 블랙번인건 더 충격이다.
지금은 잉글랜드 2부 리그 챔피언쉽에 쳐박혀 있지만, 블랙번은 유서 깊은 번리의 라이벌.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와 아스널, 첼시, 맨체스터 시티, 그리고 리버풀 등의 소위 빅클럽들을 제외하면 동화 같은 우승을 차지했던 레스터와 함께 프리미어 리그를 우승한 유이한 클럽 중 하나이다.
잉글랜드 국가대표팀의 전설적인 공격수 앨런 시어러를 앞세워서 차지한 강렬한 우승 경험.
그 후로 기나긴 나락의 길을 걸었지만, 블랙번 팬들이 다른 어떤 팬을 만나도 목을 뻗뻗하게 굳힐 수 있는 요인으로 작용했다.
그리고 바로 그 블랙번과 번리가 벌이는 이스트 랭카셔 더비가 무려 2017년 8월 이후 처음으로 재개될 예정이다.
1888년에 잉글랜드 풋볼 리그를 창설한 12개의 구단 중 2개로서, 무려 1888년부터 135년을 이어온 역사 깊은 지역 라이벌전이다.
총 104번의 더비전을 치뤄서, 무려 42승 21무 41패라는 번리의 털끝 같은 우세.
뭐가 됐던 간에 객관적인 전력 따위는 무시하고, 서로 총력전을 기울인다는 얘기였다.
마이크 갈릭과 존 바나스키위츠를 비롯한 번리 출신의 구단 임직원들은 대진표가 발표된 순간 일제히 이성을 쓰레기통에 던져버린 다음에 철저한 반-블랙번 모드로 정신 무장을 시작했다.
전전임 구단주이자 현직 구단 이사가 앞장서서 경기 당일에 블랙번의 홈구장 이우드 파크까지 행진을 직접 기획하고 있는 가운데, 완공식에서도 마이크 앞에 나서는 것을 사양했던 번리 풋볼 클럽의 공식 서포터즈 회장단은 공식 성명서를 발표했다.
길고 긴 성명서를 대충 요약하자면, 프리미어 리그에서 훨훨 날고 있는 번리 풋볼 클럽이 희대의 명장을 앞세워서 2부 리그의 진흙탕에서 뒹굴고 있는 너희들을 짓밟으러 갈테니 목을 잘 씻고 기다리고 있어라, 정도가 될 수 있겠다.
사실 짓밟는데 왜 목을 씻어야 하는지, 어차피 진흙탕에 뒹굴고 있는 상대와 겨룬다면 우리에게도 진흙이 묻는거 아닌지, 형민은 성명서에 대해서 하고 싶은 말이 많았지만 조용히 있는 것을 선택했다.
헬레나조차 이사들의 부추김에 넘어가서 랭카셔주 경찰에게 신원보호를 요청하는 동시에, 그날 이우드 파크에 입고 가기 위해서 암적색으로 치장된 새로운 드레스를 주문하고 있는 상황이니.
“아오··· 부상자가 더 나오면 안 되는데···.”
형민이 자신의 집무실 소파에 앉아서 괴로운 듯이 얼굴을 감싸쥐고 있는 가운데, 카롤리나가 옆에서 고개를 저었다.
“아니, 카라바오컵은 걱정 안 하는거야? 리버풀을 상대해야 한다고!”
“야, 지금 그런걸 고민할 때가···.”
가뜩이나 2월 첫 경기가 전반기에 챔피언스 리그와의 스케줄 충돌 때문에 미뤄졌던 리버풀과의 프리미어 리그 24라운드 경기인데, 카라바오컵에서 2번이나 상대해야 한다.
1월에만 8경기를 치뤄야 하는 최악의 스케줄.
그냥 아무나 상대해도 힘겨운데 리버풀(두번!)과 블랙번과의 경기가 추가되었다.
***
“아, 진짜···.”
뉴 터프 무어의 원정팬 관중석쪽으로 달려가는 붉은색 유니폼의 인영들을 보면서 형민이 짜증 섞인 탄식을 내뱉었다.
영국 북서부에는 며칠째 거센 비가 내리고 있지만, 최첨단 배수로와 난방 시스템이 설치되어 있는 뉴 터프 무어 경기장은 그대로 물이 쭉쭉 빠져나가는 동시에 경기장의 온도를 포근한 수준으로 끌어올리면서 축구 경기를 벌이기에 최상의 상태를 유지하고 있다.
물론 지붕 한 가운데에 뚫려있는 타원형의 구멍을 통해서 내리붓는 비를 맞으면서 암울하게 상대편 선수들을 지켜보고 있는 암적색 유니폼의 번리 선수들과 테크니컬 에어리어에 나와서 같이 비를 맞고 있는 형민에게는 그게 큰 위로가 되고 있지는 않았지만.
“리버풀의 세번째 골. 0대 3입니다. 득점자는 리버풀의 20번, 디오고 조타.”
“어떻게 할꺼야?”
장내 아나운서의 메마른 목소리가 울려퍼지는 가운데, 테크니컬 에어리어로 걸어나온 카롤리나가 형민에게 물었다.
수석코치의 질문에 어깨 너머로 고개를 돌린 형민은 벤치에 앉아서 온갖 표정으로 답답함을 표출하고 있는 자신의 선수들을 보면서 고개를 저었다.
“안 돼.”
카롤리나도 하고 싶은 말이 많다는 표정이었지만, 간만에 감독이 제정신을 차리고 전체 시즌을 위한 선수들의 체력 관리를 하고 있는데 여기에 초를 칠 수 없다는 생각이 드는지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정말··· 정말 짜증이 나네.”
“다음 경기에는 꼭 갚아주자고.”
이렇게 될 가능성이 높다는걸 모르지 않았지만, 제대로 한 방 먹었다.
리버풀의 위르겐 클롭 감독은 리버풀의 두터운 선수진을 제대로 활용할 줄 알았다.
로테이션 자원 중심으로 선발 명단을 꾸렸던 형민과는 달리 모하메드 살라, 다르윈 누네즈, 그리고 디오고 조타로 이어지는 최상의 공격진에 하비 엘리엇, 조던 헨더슨, 그리고 파비뉴로 이루어진 미드필드진을 내세웠다.
그나마 티아고와 쥬드 벨링엄이 출전하지 않아서 숨통이 트인다고 말을 하기에는 이 정도로도 크리스티앙 메디나와 토마소 포베가, 그리고 루카 수치키로 구성되어 있는 번리의 미드필드를 충분히 짓누를 수 있었다.
번리에서 지난 1시즌 반 동안 많이 성장했지만, 아직 유망주의 탈을 벗어내지 못하고 있는 크리스티앙 메디나가 리버풀의 주장 조던 헨더슨의 노련한 경기 운영 능력이나 수비력을 넘어서는건 요원했다.
거기에 루카 수키치가 리버풀의 주전 수비형 미드필더 파비뉴를 뚫어낼 수가 없고, 반대로 토마소 포베가가 하비 엘리엇을 억제하는 데에 실패하고 있으니 사실상 이번 경기는 미드필드가 말리면서 완전히 넘어간 상황.
겉으로 보기에는 강력한 공격진과 빠르고 거센 전방 압박이 핵심으로 보일 수 있지만, 양 팀 모두 미드필드의 주도권을 쥐는 것이 전술의 시작과 끝이다.
형민이 첫 시즌에 있는 자금 없는 자금 모두 탈탈 털어서 RB 잘츠부르크에서 니콜라스 세이왈드를 임대한 것이 다 이유가 있는 법이다.
전반전이 처참한 3대 0이라는 점수 차이로 이번 시즌에 승승장구하는 리버풀의 벽이 위압적으로 느껴지는 가운데, 형민은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려보았다.
“미드필더를 교체할 수는 없어.”
바로 다음 경기가 블랙번을 상대로 하는 더비 매치이고, 또 그 다음은 다시 리버풀과 카라바오컵 4강전의 2차전을 치뤄야 한다.
1월에만 8경기를 치르는 강행군.
최대한 선수들의 체력을 보존해야 하는 상황이다.
“하지만 공격은 좀 고민해보자고.”
형민의 말에 카롤리나가 덩달아서 생각에 잠겼다.
“자말을 빼자고?”
“자말이랑 비니 모두. 둘 다 지친게 눈에 보여.”
“양쪽 측면을 다 교체하겠다고?”
부상자가 쌓였던 전반기를 거치면서 두 선수 모두 엄청난 출전시간을 기록했다.
물론 12월부터 아담 흘로첵과 킨 루이스-포터가 복귀하면서 출전시간을 어느 정도는 조정할 수 있었지만, 전반기에서부터 이어져온 피로를 모두 해소하기에는 부족하다.
더욱이 에마뉴엘 비냐토는 프리미어 리그의 빠르고 격한 경기 스타일에 적응하느라 체력적인 부담이 심한 상태.
“아, 그렇군. 그럼 드와이티랑 안드레를 투입할꺼야?”
잠깐 생각한 후 감독의 의도를 깨달은 수석코치의 질문에 형민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 아담이랑 킨한테 후반전 시작과 동시에 투입이라고 알려줘.”
“정말?”
카롤리나의 질문에 형민이 얼굴 위를 흐르는 빗방울을 닦아내지도 않은채 친구를 돌아보았다.
“어차피 질 가능성이 높은 경기라면, 한번 시도해보고 싶은게 있어.”
“하아···.”
얘는 꼭 이렇게 잘 나가다가 결정적인 순간에 안정과 호기심 사이에서 호기심을 선택한다.
감독에게 한마디 해주려던 카롤리나는 튀어나오는 말을 꾹 참은채 긴 한숨을 내쉰 후, 비를 피해서 다시 벤치로 터덜터덜 걸어가기 시작했다.
아담 흘로첵과 킨 루이스-포터에게 후반전 교체 준비를 지시해야 했다.
***
잘 모르는 사람은 감독이 경기를 포기했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전반전 내내 리그 최강팀을 상대로 구석에 몰려서 3실점을 한 다음에 후반전의 시작과 함께 교체한 두 명의 공격수가 지난달에 부상 복귀했던 선수들이라면.
어차피 지는 경기, 부상 복귀자들의 경기 감각을 회복시키기 위해서 날리는거라고 충분히 생각하는게 가능하다.
하지만 한국에서 온 그들의 젊은 명장이 경기에서 질 수도 있다는걸 받아들일지언정 포기하는 경우는 없다는걸 피부로 체감했던 번리 팬들은 오히려 몸을 앞으로 기울여서 경기에 더 집중했다.
그리고 후반전의 시작과 함께 번리는 공격 패턴을 완전히 바꾸면서 왜 카롤리나가 군말 없이 두 명의 공격수를 교체하는 데에 동의했는지 보여주었다.
직선적인 움직임을 가져가는 자말 루이스와 속도가 뛰어난 에마뉴엘 비냐토.
전반기 동안 번리의 상승세를 일부 견인한 만큼 확실한 실력을 보유하고 있기는 하다.
하지만 오늘 경기처럼 미드필드가 완전히 상대편한테 장악당하면 측면 수비수들이 섣불리 전진하기가 어렵고, 그러면 앞에 있는 측면 공격수들이 고립되거나 수비 지원을 위해서 자주 내려올 수 밖에 없다.
이러나 저러나 결국 공격이 막히는건 똑같다.
반면에 아담 흘로첵이랑 킨 루이스-포터는 전반전을 뛰었던 두 사람과 완전히 다른 스타일을 한가지 더 장착하고 있다.
지난 여름 이적시장에 형민과 카롤리나, 그리고 조너선 랜드리스와 스카우트팀이 번리의 전술적 다양성을 보강하기 위해서 눈독 들였던 능력.
바로 프리미어 리그에서도 손꼽힐만큼 빼어난 드리블 실력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