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ecame the Savior of a Perishing World RAW novel - Chapter 118
118화 아포피스 (3)
나는 정세림을 만난 적은 없다. 그녀는 차우재와 마찬가지로 가끔 언론 사진에 모습을 드러냈고, 거기서 사진으로 본 게 전부다. 하지만 뭐랄까, 인간은 적응의 동물이라고 하던가.
차우재를 만나고, 스승님의 귀신을 옆에서 보고 있자니 ‘아, 스승님의 제자들 사실 별거 없을지도?’ 같은 생각이 스멀스멀 싹터 올랐다.
오연수가 말했던 ‘다 똑같은 사람이다.’라는 것도 한몫했고. 그래서일까? 정서희로부터 사촌 언니가 정세림이란 말을 들었을 때도 신기하단 생각은 했으나 딱 거기까지였다.
“근데 너 사촌 언니랑 하나도 안 닮았다.”
“말 돌리지 말고.”
눈치하고는.
근데 빈말은 아니었다. 정서희와 정세림 사이에 닮은 구석이라고는 조금도 없었다. 사촌이라곤 해도, 아마 먼저 말해 주지 않았더라면 정세림의 정 자도 떠오르지 않았을 거다.
아, 같은 성씨니까 ‘정’ 정도는 떠올릴 수도 있겠다.
“내가 널 불편해하지 않는 건 사실이긴 한데, 그게 바나흐 공략에 같이 가 주겠다는 뜻은 아닌데? 너 죽으면 진짜 나도 죽는다니까?”
“각서라도 남겨 놓으면 되잖아. 아니면 동영상?”
“무슨 동영상. 내가 죽어도 이수혁에게 화풀이를 하지 않겠습니다. 이런 거? 그거 남겨 놓는 게 더 이상하다는 생각은 안 해? 그리고 그런 거 남길 거면 더 좋은 팀 찾아가는 게 낫지 않나?”
저 정도 약속이면 한두 팀 정도는 받아 주지 않을까? 나야, 팀이라고 해 봤자 나 하나밖에 없고.
“그게 안 되니까 이러고 있는 거잖아.”
“각서까지 쓴다고 했는데도 안 받아 줬다고? 너 혹시 트롤이냐?”
“누가 트롤이야.”
“그럼 왜 안 받아 주는 건데?”
“저녁 먹을래?”
머리 위로 노을이 지고 있었다. 누굴 한량으로 생각하나, 나도 바쁘…….
“내가 살게.”
“한우?”
“콜.”
[쉬운 남자구만.]그치만, 한우인걸?
게다가 아닌 척하긴 했으나 내심 정서희가 무슨 말을 할지도 궁금했다.
“10분 정도 가면 내가 자주 가는 식당이 있거든? 거기 갈래?”
“네가 사는 거니까 상관없어.”
나는 한 가지 착각을 하고 있었다. 정세림에게 돈을 받아 쓰는 건 쓰는 거고, 결국은 그녀 또한 집안 재력이 상당한 사람이라는 걸. 일 인분에 20만 원이 실화야?
드라이 에이징 소고기라는데 고기에 금가루라도 뿌린 것 아닐까. 아무튼 룸에서 나오는 소고기는 맛있었다.
“장담하는데 나는 절대 4성을 벗어나지 못해.”
위로 올라가려면 더 많은 경험이 필요하다. 돈이야 충분히 많아 보이고, 실력도 자신있다고 했으니, 시간이 지나면 5성까지도 올라갈 수 있을 거라는 게 내 판단이었다.
“이유가 있어?”
“날 방해하고 있는 사람이 있으니까.”
“누구?”
“사촌 언니.”
“콜록… 아, 미안.”
나는 황급히 근처에 있는 휴지를 가지고 와선 입을 닦았다.
“정세림이 왜 너를 방해해? 피해망상 아니야?”
“진짜야. 언니는 내가 4성 이상 올라가는 걸 원하지 않는걸. 말했잖아, 나는 탱커라고.”
[레벨이 올라갈수록 힐러만큼이나 탱커가 귀하긴 하지.]수요가 없는 건 아니지만, ‘잘’하는 사람이 드물다는 게 문제였다. 게다가 탱커의 가장 큰 특징이 뭔가. 가장 위험한 곳에서 아군을 보호하는 역할이다.
부상을 입는 빈도도 가장 높고, 파티가 터진다? 그럼 가장 먼저 죽는 건 탱커다. 다른 사람들은 살 가능성이라도 있지, 탱커는 아니다.
말을 하다가 울분이 쌓인 건지 정서희가 술을 시켰다. 어, 이래도 되나? 모르겠다. 본인이 내는 거니까.
“……탱커를 하겠다고 했을 때, 집에서 뒤집어졌거든? 아, 혹시나 하는 말인데 집안이랑은 절연했어. 그래도 유일하게 지지해 준 게 언니야.”
정서희가 정세림의 카드를 쓰는 이유였다. 당연하겠지만, 생활비나 하자고 정세림의 카드를 쓰고 있지는 않을 거다.
정세림의 인맥, 돈. 지원을 받을 만큼 받고 있다는 뜻이다. 하지만 얻는 게 있으면 잃는 것도 있는 법.
“4성 게이트부터는 탱커가 목숨을 걸어야 할 일들이 늘어나니까, 거기까지 올라가는 건 원하지 않는 거겠지.”
“그거야. 너 말이 좀 통하네. 그래서 난 함께 모험을 떠날 사람이 필요해. 언니의 눈치를 보지 않고, 날 써먹어 줄 수 있는 사람이. 너 최근 연수랑 어울린다면서?”
“아놔.”
“오연수 걔가 그렇게 누구랑 친하게 지내는 성격이 아니거든? 그거 알아? 어어어엄청나게 워커홀릭인 거.”
왠지 그럴 것 같다고 생각은 했는데 진짜였구나. 근데 그 전에, 해야 할 말들이 있는 것 같은데.
“연수 씨랑 어떻게 알아?”
“나 걔랑 고등학교 동창인데, 몰랐구나?”
“내가 그걸 어떻게 알아? 잠깐, 너 설마 일부러 나 찾아왔냐?”
정서희는 대답 대신 술을 들이켰다. 소주를 누가 맥주컵에 마셔! 그녀가 내 쪽으로 소주병을 들이밀었다.
나는 됐다며 손사래를 쳤다. 술을 좋아하는 사람도 아닐뿐더러, 이런 걸로 컨디션 망치고 싶지 않았다.
“아, 뭐……. 이수혁이 누군지 궁금하긴 했어. 그러다 총기 연습을 할 때 옆에 적힌 이름을 보고 설마설마했거든.”
총기 연습을 할 때 옆에 있었던 건 우연이지만, 내버려 뒀으면 어떻게든 찾아냈을 거라는 뜻 아닌가. 매도 빨리 맞는 게 낫다고 판단한 나는 그냥 해탈하기로 했다.
“연수 씨가 다른 말은 안 하고?”
“차 팀장님이 눈여겨보고 있는 사람이란 소리도 했지.”
“젠장, 너 라인 갈아타려고 나한테 들러붙는 거 같은데…….”
“그게 뭐 어때서? 너도 팀원 없잖아. 파티 만들기가 어디 쉬워? 우리 목적이 일치하는 거 같지 않아? 나는 후원자를 갈아타는 게 목적이고, 너는 실적을 만드는 게 목적이고.”
확실히 좀 끌리는 제안이다. 게다가 본인 입으로 탱커라고 하기도 했고.
위험 요소가 있다는 것과는 별개로 탱커가 있으면 싸움의 전략이 바뀌는 건 사실이었다. 나는 결국 벨을 누르며 맥주를 시켰다.
정서희는 남자가 쪼잔하게 맥주가 뭐냐고 잔소리했으나, 시끄러워! 내 마음이다.
“진짜 나랑 팀 하려고?”
“괜찮을 것 같은데? 연수 걔가 아무나 추천하고 돌아다니는 사람은 아니거든.”
뭘 믿고 그런 짓을 하냐고 물어보려던 순간 입이 쏙 들어갔다. 나를 좋게 봐 준 건 참 좋은데 말이지.
[가운데에 낄 수도 있는데 괜찮겠냐?]‘모르겠어요. 근데 솔직히 탱커가 탐나긴 하거든요. 게다가 연수 씨가 추천해 준 사람이라면 탈도 안 날 것 같은데.’
아무리 생각해도 오연수가 일부러 정서희에게 내 정보를 흘린 게 틀림없다고 확신했다.
“좋아. 대신 조건이 있어.”
“뭔데? 각서?”
“그딴 거 말고. 네 실력 좀 보자.”
“파티하자며. 그럼 못 해도 일 년 이상은 같이 다닐 텐데, 실력도 모르는 놈에게 내 뒤를 맡길 순 없잖냐?”
“그건 맞지. 근데 나중에 가서 후회하지 마?”
“후회? 내가?”
“흐흐, 졌다고 짜지 말라구.”
“취했냐?”
나는 극딜러다. 일단 딜에 있어서 밀린다면 딜러 탈락이었다. 그에 비해 정서희는 탱커, 그것도…….
“탱커, 거기에 여자애한테 질 리가 없지. ……라고 생각하고 있지?”
“너 독심술이라도 익혔냐고.”
“너 같은 남자들이 생각하는 거야 뻔하지.”
“쩝. 부정은 안 해.”
나는 옆에서 침을 흘리고 있는 스승님을 봤다.
[크흐, 내가 다른 건 다 참아도 술은 못 참겠단 말이야.]‘귀신인데도요?’
[살아 있긴 하지 않느냐. 게다가 귀신이라고 해서 욕망이 없는 것도 아니고.]‘진짜요?’
[몰라. 내가 그걸 어떻게 아냐?]스승님은 몇 번이고 자신은 귀신이 아니라 그냥 영체일 뿐이라며 정체성을 강조했다. 근데 내가 보기엔 그게 그거 같긴 한데……. 뭐, 그래도 우리 스승님 죽은 건 아니니까. 대충 그렇다고 칩시다.
“내가 그래도 폼으로 4성까지 올라온 건 아니거든.”
“알겠다고.”
“대신 기준 충족하면 바나흐 같이 가 주는 거다?”
“바나흐 한 번만 가고 끝날 거냐?”
내가 괜히 띄워 주자 정서희의 표정이 밝아졌다. 거, 그렇다고 해서 술병으로 병나발 불지는 말고! 불안하다고!
* * *
“내가 이럴 줄 알았어.”
나와 정서희는 다음 날, 길드 AI-연습실에서 보기로 했다. 가상현실을 이용해서 게이트에서처럼 싸울 수 있게끔 해 주는 모의 대련이었다.
실제보다 강하게 등록할 순 없으나, 실제보다 약한 수준으로의 설정은 가능했다. 정서희가 오기 전에 준비를 끝내 놓았으나, 정서희는 약속 시간으로부터 한 시간이 지나도록 오지 않았다.
그나마 어제 전화번호를 따 놔서 다행이지. 그것도 정서희가 받은 게 아니다.
─ 서희 아가씨와 약속이요? 어느 분 되십니까?
─ 청영 길드에 이수혁인데요.
─ 아, 그렇군요.
딱 봐도 깐깐해 보이는 남자가 대신 전화를 받았다. 그 뒤에도 무슨 목적으로 연락했냐, 언제까지 가기로 했냐 등등을 꼬치꼬치 캐물었다. 이미 약속 시간이 늦었다는 말에 한숨을 쉬긴 했지만 아무튼 깨워서 보내 준다고 했다.
“저기 룸 예약은……”
“두 시, 아니다. 세 시로 미룰 수 있을까요?”
“알겠습니다.”
다행히 세 시 타임이 비어 있어서 바꿨다. 그러니까 내가 술 작작 처먹으라고 했잖아.
[킬킬, 그 꼬맹이 아주 술고래가 다 됐어. 세림이랑 똑같구만.]‘정세림이요?’
[걔도 완전 술고래여. 술고래. 아니지, 전생에 장군이었을지도 모른다니까.]스승님피셜 정세림은 술을 잘 마셨다. 그것도 엄청.
‘어우, 생긴 건 그렇게 안 생겼는데요.’
정세림의 이명은 비밀의 공주였다. 대한민국, 길드에 청영 길드가 있으면 정계를 꽉 잡고 있는 이들은 화양그룹이었다.
‘각성자 길드와 기업 운영에 관한 법률’에 의거해 각성자 길드는 일반 기업을 운영할 수 없고, 마찬가지로 일반 기업 또한 각성자 길드를 운영할 수 없다.
하지만 그게 투자가 안 된다는 건 아니거든. 아무튼 정세림은 화양그룹 정 회장의 유일한 딸이다.
괜히 그녀가 공주님이라고 불리는 게 아니라고, 적어도 대한민국에서는 정세림보다 높은 수저는 없을걸? 해외나 나가면 또 몰라.
[그거 알아? 걔 공주님이라는 별명만 들으면 아주 게거품을 문다.]‘그래요? 진짜 의외네.’
[하는 꼴 보면 기도 안 찰걸.]역시 사람은 겉모습만 보고 판단하면 안 되는 모양이다. 아무튼 그사이, 정서희에게서 미안하다는 이모티콘과 함께 가고 있다는 답이 돌아왔다.
길드 카페에서 커피를 산 후 돌아서자 웬 정장을 입은 사내들이 나를 반겼다. 정서희보다 이 사람들을 먼저 만나게 될 줄은 몰랐는데. 젠장.
“누구십니까?”
나는 아메리카노 빨대에 입술을 댄 채 수상해 보이는 사내들을 올려다봤다.
“잠시 시간 괜찮으십니까?”
“용건.”
“찾으시는 분이 계십니다. 삼십 분 정도면 됩니다.”
“예에, 가죠 뭐.”
내가 아무렇지 않게 따라가자 사내들이 적잖게 당황했다. 이렇게 쉽게 갈 줄은 몰랐나 봐. 사실 나도 그럴 생각은 없었는데.
[정세림 쪽 사람들이다.]스승님이 그렇게 말해 주니까. 근데 벌써 내가 정서희랑 모의 대련한다는 거 알아낸 거야? 성격도 급하셔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