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ecame the Savior of a Perishing World RAW novel - Chapter 22
22화 그림자의 정원 (2)
너 같음 살려 주겠냐? 나는 오징어 중년을 죽였다. 그러고는 죽은 남자에게 말했다.
“왜 물어봤긴, 내 죄책감 조금이라도 덜려고 한다.”
안타깝게도 그는 내 말을 듣지 못했다. 하지만 뭐 어떤가? 저자들의 손에 억울하게 죽은 이들도 비슷했을 거다.
저지른 대로 돌아온 것뿐이지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아공간 가방을 챙긴 후 등을 돌렸다.
“하암, 제길, 어디 조용한 데서 조금 더 자야겠네.”
표면 세계의 시간이 거의 안 간다고 해도 내 시간이 안 흐르는 건 아니었다. 1층이라고는 하나 생각보다 체력이 빠르게 소모됐다.
‘긴장한 상태로 한두 시 밖에 못 자고 있으니까, 이것도 힘드네.’
차라리 빨리 겨울의 숲에 들어가는 게 훨씬 편하게 잘 수 있을 듯했다. 스승님이 알려 주길 거기에는 안전지대가 있었다.
나 말고 다른 사람도 없을 테니까, 적어도 잠은 편히 잘 수 있었다.
“어라? 저기 꽃이 있었나?”
죽은 오징어의 옆으로 꽃이 자라 있었다. 하마터면 못 보고 지나칠 뻔했다.
죽은 사내를 밀어내고 꽃을 확인했다. 남색 꽃이었다. 꽃잎을 뒤집어 보자 생전 처음 보는 무늬가 그려져 있었다. 꽃잎 두 개를 조심스럽게 맞대니 퍼즐처럼 맞물렸다.
“홍예화! 와, 이게 있네?”
금은보화라도 발견한 것처럼 길길이 날뛰었다. 탑에 들어온 지 이틀 만에 찾은 첫 홍예화니까 당연했다.
“고맙다.”
이놈들이 나에게 덤비지 않았다면 아마 홍예화도 찾지 못했을 거였다. 재수가 없다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던 모양이다.
나는 홍예화를 잘 챙긴 후 방으로 들어왔다. 다행히 몬스터가 스폰 되지 않은 빈방이었다.
“와, 침낭! 미친!”
홍예화를 얻었다는 생각에 잠이 달아난 것도 잠시, 아공간 가방에서 나온 침낭에 눈이 뒤집어졌다.
침낭뿐이던가, 하급 마석, 그리고 통조림처럼 보이는 먹을 것들과 무기와 여러 아이템들이 들어 있었다.
“알뜰살뜰하게도 챙겼구만.”
혹시 쓸 만한 무기가 있나 살폈으나 다 꽝이었다. 감정 스킬은 없으나, 각성자 짬밥으로 무기 정도는 대충 파악할 수 있었다.
“이건 한 4급 정도는 되겠는데. 아까워 죽겠네.”
가장 좋은 무기가 커다란 날도끼였다. 문제는 내가 쓰기엔 영 안 어울리는 거라는 점이었다.
‘진짜 돌아가면 암시장이라도 뚫어 봐?’
4급이라고 해도 이게 얼마짜리야. 지금의 나로서는 이면 게이트를 여러 군데 돌아도 소유권 한번 주장하기 힘든 정도의 무기였다.
어쨌든 빛 좋은 개살구였기에 전부 두고 가기로 했다. 경량화 마법이 걸려 있지 않은 상태에서 이런 것들은 전부 짐 덩이니까 말이다.
정화의 넝쿨을 먹고 버티긴 했으나 나라고 맛있는 게 먹고 싶지 않은 건 아니었다. 나는 캔을 뜯어 내용물을 확인했다.
혹시 못 먹으면 안 되는 게 나오는 건 아닌가 걱정했으나 그 정돈 아니었다. 양념에 절인 듯한 고기였다.
아무렴 씹을 때마다 물만 나오고, 식감도 영 좋지 않은 넝쿨보다야 훨씬 나았다.
“쩝, 그래도 김치 땡기는 건 어쩔 수 없…… 엥?”
캔 하나로는 배가 안 찼기에 다른 캔을 뒤적거리던 나는 내 눈을 의심했다.
『김치』
알루미늄 캔에 누군가 휘갈겨 쓴 듯 한글로 김치라는 글씨가 써져 있었다.
“얼래? 문자까지는 통용이 안 된다고 들었는데.”
양자의 탑에서는 국적이나 언어가 달라도 서로 대화가 가능하다고 했다. 내가 죽인 놈들도 내 기준으로 본다면 한국인은 절대 아니었다.
‘이면 세계는 대체 뭐지?’
거기도 한국인이 있나? 아니면 가끔 악령에게 호의를 베푸는 놈들이 있다고 들었는데 그 녀석들이 준 게 흘러 들어갔나?
이럴 줄 알았으면 양자의 탑에 들어오기 전에 스승님에게 자세히 물어보고 올 걸 하고 후회가 들었다.
사실 물어볼 건 전부 물어봤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막상 들어오니 추가로 호기심이 생기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김치에 독을 탄 건 아니겠지? 이걸 먹어 말아? 근데 김치가 맞긴 할까?”
김치 캔을 보고 오만 가지 생각들이 다 들었다. 한참의 고민 끝에 나는 캔을 뜯었다. 양이 좀 적긴 했으나 레알 의심할 필요 없는 김치였다.
조심스럽게 먹어 보니 맛있었다. 웬만큼 시중에서 파는 거보다 맛있다. 김치 장인이 만든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쩝, 이걸 좋아해야 하는 건지.”
어쨌든 덕분에 거의 이틀 만에 제대로 된 식사를 할 수 있었다.
‘속도를 높여야겠네.’
스승님과 이야기했을 때, 업경을 만드는 건 늦어도 한 달 안에는 해야 한다고 했다. 이 주 내로 끝내면 베스트고.
내가 찾은 홍예화는 고작 한 송이였다. 이래서는 재료만 모으다가 겨울의 숲에 들어가기도 전에 시즌이 끝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심지어 다음 시즌 때는 처음부터 다시 찾아야 하잖아? 지리도 바뀌고, 홍예화가 나오는 위치도 바뀌니까 재수 없으면 이 짓거리만 여러 번 해야 할 수도 있었다.
‘부지런히 움직이는 수밖에.’
실패는 없어야 한다. 나는 이번이 마지막 잠이라 생각하며 침낭에서 눈을 붙였다.
* * *
한 무리의 사람들이 끝없는 고원을 걷고 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고원의 몬스터들이 그들을 덮쳤다.
싸움이 한 시간가량 이어졌다. 주변에는 죽은 몬스터들의 시체들이 가득 쌓였다.
“허억, 젠장. 더럽게 힘드네.”
“다친 사람은? 포션 남았으니까 치료해라!”
“후, 한 명이 빠진 게 이렇게 차이가 클 줄이야.”
전방에서 싸운 두 명의 사내들이 포션을 들이부으며 상처를 치료했다. 그사이 다른 한 명은 빠르게 죽은 몬스터의 배를 갈라 심장에 있는 마석을 꺼냈다.
“그냥 같이 올라왔으면 좋았을걸.”
“쩝, 어쩌겠냐? 볼일이 있다고 하는데.”
“설마 다른 파티에서 모셔 간 건 아니겠지? 길드라든지.”
“그래도 할 말이 없긴 하지. 우리 중에 가장 잘 싸웠으니까.”
사내가 아쉽다며 껄껄 웃었다. 그의 시선이 구석에 있는 한 남자에게 닿았다.
“그래도 합류한 일행이 괜찮은 놈이라서 다행이지.”
“과묵한 건 좀 마음에 안 들긴 하지만?”
두 사람의 대화가 들렸는지, 사내와 눈이 마주친 남자가 모르는 척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그는 어깨 아래를 살짝 덮는 긴 머리카락을 뒤로 묶고 있었다. 키도 크고 훤칠했는데, 곱상하게 생긴 외모 탓에 여자라는 오해를 종종 받기도 했다. 하기야 처음 파티를 맺었을 당시만 해도 일행들이 그가 여자인 줄 알았으니 말 다 한 셈이었다.
이지스 리트만. 그게 사내의 이름이었다. 마석 정리를 마친 길잡이가 손을 흔들었다.
“정리 다 했어요. 다시 출발……”
쿠우우웅.
다섯 명이 있는 곳을 중심으로 진동이 일어났다. 쉬고 있던 두 사내도 깜짝 놀라 무기를 들고 벌떡 일어났다.
“뭐야? 갑자기 무슨 일이야?”
“이 주변 몬스터는 다 정리한 거 아니었나?”
두 사람이 이지스를 슬쩍 보았다. 두 사내에 비해 비교적 부상이 덜한 이지스는 쉬는 사이 주변을 정찰하고 왔다.
몬스터가 없다는 걸 확인한 후에 돌아왔을 텐데 이게 무슨 일인지 모르겠다. 의아해하는 그들을 향해 고원에 몇 없는 나무가 뿌리째 뽑히더니 날아왔다.
일행들이 간신히 날아드는 나무를 피했다. 동시에 나무가 날아온 쪽으로 시선이 몰렸다.
거기에는 수 미터 크기에 등에는 불길이 이는 몬스터가 있었다.
“빌어먹을, 알코노스가 왜 여기에!”
“저놈은 산맥 너머에서 나오는 거 아니었나?”
“튀어야겠군.”
알코노스는 3층 입구 근처에서 낮은 확률로 발견되는 레이드 몬스터로 이런 곳에서 나타날 녀석이 아니었다.
파티의 레벨이 조금 더 높았다면 횡재했다고 할 수도 있으나, 안타깝게도 2층 초반에 진입한 파티에게는 불행에 가까웠다.
상대가 알코노스라면 이 중 한둘은 죽어도 이상하지 않았다.
놈이 입을 크게 벌리자 입에서 불길이 튀어나왔다.
간신히 브레스를 피했으나 녀석은 덩치에 비해 빠른 움직임을 가지고 있었다. 알코노스가 노린 건 이지스였다.
“이보게! 자네…!”
다른 일행이 놀라 소리쳤으나 이미 늦은 후였다. 놈의 거대한 발이 이지스의 머리 위까지 다가왔다.
머리가 새하얗게 질려 싸울 생각조차 들지 않았다. 그가 눈을 질끈 감았다. 그 순간이었다.
서걱.
이지스의 눈앞에서 커다란 다리가 깔끔하게 잘려 나갔다. 잘려 나간 단면에서 쏟아진 피가 이지스의 머리 위로 떨어졌다.
그는 재빨리 알코노스의 다리를 자른 무언가가 날아온 방향을 보았다. 거기에는 누군가가 허공에 반쯤 떠 있었다.
다리가 잘린 놈이 발악하더니 남자에게 달려들었다. 잔뜩 분노한 알코노스가 사람 이빨만 한 입을 벌리며 달려들었다.
“귀 떨어지것다.”
그가 들고 있던 새하얀 검을 휘두르자 번개가 번쩍거렸다. 그게 이지스가 알코노스와의 싸움에서 본 마지막 장면이었다.
다시 눈을 깜박였을 때 알코노스는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만큼 검게 탄 채 잘려 있었다.
고개를 들어 사내를 다시 보았다. 은발에 붉은 눈을 가진, 무척이나 신비하게 생긴 외모의 남자였다.
눈을 마주친 이지스는 사내에게 정체를 알 수 없는 두려움을 느꼈다. 그가 사뿐히 아래로 내려왔다.
“으헉, 허억… 허억… 뒈지는 줄 알았네.”
같은 일행인 사내가 놀란 가슴을 쓸어내렸다. 알코노스보다 은발 사내의 공격이 더 무서웠기 때문이었다.
정신을 차린 그가 다가오는 은발의 남자를 유심히 바라보았다.
“헉, 저 사람은……”
“아는 사람입니까?”
“알진 않네만 소문으로 들은 적이 있네. ……은발에 붉은 눈, 그리고 특이한 옷차림의 사내.”
수라마존. 그게 사내를 칭하는 다른 이름이었다.
“저자가 그 수라마존이라구요?”
수라마존이라면 이지스도 들어 본 적이 있었다. 탑을 등반하는 자들 중에서 열 손가락 안에 꼽히는 네임드였으니까.
“아마도 그, 그럴걸세. 근데 왜 여기에 있는 건지 모르겠군. 5층 이하는 디버프가 걸릴 텐데, 알코노스가 한 방에 죽다니 상층 등반자들이 괴물이라는 소리는 들었다만 이 정도일 줄이야.”
그가 무슨 변덕으로 자신들을 구해 준 건지는 모르겠으나, 최악의 경우 목숨값을 내야 할지도 몰랐다. 다른 의미로 알코노스가 나타난 것보다 더 긴장되는 순간이었다.
다가온 수라마존이 일행들을 쭉 둘러봤다. 그러더니 길잡이 청년, 유엘에게 다가갔다.
“너.”
“으악, 네? 네?”
“네가 유엘이냐?”
“헉! 제 이름을 아시다니 영광……. 아니, 맞습니다! 그런데 무슨 일이십니까?”
“지난 시즌에 같이 있던 여자는?”
“어라? 여자라 하면……. 주아 씨요?”
수라마존이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주아 씨라면 이번 시즌에는 다른 빠진다고 들었어요.”
“1층에서 같이 올라온 게 아닌가?”
“아쉽게도요.”
“특별히 한 말은 없었나?”
수라마존의 취재에 유엘은 살짝 당황했다. 왜 임주아를 찾는지 알 수 없으나, 지금은 일단 대답을 하는 것 말고는 다른 생각이 들지 않았다. 머리를 이리저리 굴리던 유엘이 뭔가 생각난 게 있는지 입을 열었다.
“아, 맞다! 지난번에 정산 끝나고 이번에 왜 참여 안 하냐고 물어봤었거든요. 뭐라더라 1층에서 찾을 게 있다고 했던 거 같아요. 뭔지 물어봤는데 안 알려 주더라구요.”
그 말을 들은 수라마존이 한숨을 내쉬었다.
‘망할 제자 놈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