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ecame the Savior of a Perishing World RAW novel - Chapter 24
24화 그림자의 정원 (4)
여자가 거울 뒷면을 흘끔 바라보았다. 사실 루나의 거울이라고 해서 빈틈이 없는 건 절대 아니었다.
진실이라고 해서 다 ‘진짜’라는 법은 없으니까 말이다. 그래도 내가 루나의 거울을 봤다는 건 사실이었다.
“그래? 이 거울이 뭔지 알고 있다면 얘기가 빠르겠네.”
여자는 아예 대놓고 거울을 내 쪽으로 돌렸다. 아니, 근데 진짜 저 귀한 템을 어디서 구한 거래? 설마 탑 안에서 루나의 거울이 싸구려 잡템이라든지 그런 건 아니겠지.
나도 궁금한 게 많은 건 사실이었으나 지금 주도권은 여자에게 있었다.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여자가 죽어 있는 약탈자들을 흘끔 보며 물었다.
“너 저 녀석들과 한패야?”
“방금 처음 봤다.”
루나의 거울 뒷면이 빛났다. 다시 거울을 본 그녀의 눈빛이 조금 사그라들었다.
“홍예화는 어떻게 안 거지?”
“잘.”
“뭐?”
장난하냐는 표정도 잠시, 손을 뻗어 여자의 팔을 잡았다.
“내가 대답해 주면 너도 대답해 줄 건가? 혼자만 이런 걸 사용하는 건 비겁하다고 생각하는데?”
“뭐야, 그럼 너도 루나의 거울을 얻든가!”
“얻을 수 있겠냐!”
“…….”
“어쨌든 확인은 됐잖아, 나머지 질문은 안 받는다.”
“누구 마음대로……”
“어어, 움직여? 움직이기만 해 봐, 나 죽이면 이거 삼키고 죽을 거다!”
내가 입 안에 있는 홍예화를 손가락질하자 여자가 움찔거렸다. 눈을 이리저리 굴리던 여자가 내 손을 뿌리쳤다.
“일단 조용한 곳에 가서 얘기하자.”
“싫은데?”
“아, 왜!”
“잘은 모르겠지만 너 마법사잖아. 조용한 곳에 가자고 해 놓고 동료가 있는 곳에 데리고 가서 날 죽이면 어떻게 하냐?”
여자가 나를 믿지 못했듯 나 역시 여자를 믿지 못했다. 머뭇거리던 여자가 노골적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동료 없어.”
“믿겠냐?”
여자가 내가 약탈자가 아니라는 걸 증명하라고 강요했던 것에서 정확하게 반대 상황이 되었다.
“너 성가시네.”
여자는 아공간 주머니에서 다시 루나의 거울을 꺼내 들었다. 거울을 자신 쪽으로 돌린 여자가 말했다.
“나는 동료가 없어.”
루나의 거울 뒷면에서 빛이 났다. 붉은색이면 진짜. 파란색이면 가짜라고 알고 있었다. 여자의 말은 진짜였다.
“이제 됐어?”
퉁명스러운 여자의 반응에 나는 대답 대신 검을 집어넣었다. 서로가 서로에 대한 의심을 푸는 역사적인 순간이었다.
“이제 그거 뱉어. 더러워!”
“아.”
여자의 말에 나는 물고 있던 홍예화를 뱉어 냈다. 오래 문 탓인지 침이 흥건했다. 그녀는 휙 하며 홍예화를 낚아챘다.
그렇게까지 할 필요 없는데.
‘그거 홍예화 아니걸랑.’
그림자의 정원에는 형형색색의 꽃이 있었기에 비슷한 색의 꽃을 찾는 건 일도 아니었다. 우연히 닮은 거 몇 개 뽑았다가 마음에 들어서 가방에 넣어 둔 꽃이었다.
침에 젖은 꽃을 뒤집어 까 본 여자의 눈도 뒤집혔다.
“속였겠…… 뭐야?”
나는 곧장 아공간 가방에서 홍예화를 꺼내 보여 줬다.
“뭐긴 뭐야, 진짜 홍예화지.”
의심받는 건 한 번이면 족했다. 내가 이번에 여자에게 꺼낸 건 진짜 남색 홍예화였다. 여자가 꽃잎을 뒤집어 보고는 진짜 여부를 확인했다.
“진짜네.”
“진짜라니까.”
“가짜 꽃으로 연기한 건 칭찬해 줄게, 근데 뭘 믿고 나한테 이걸 줘?”
“줬다니? 다시 내놔야지.”
이 여자 보게? 내가 달라며 여자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러자 여자가 손에 쥔 홍예화를 만지작거렸다. 와, 진짜 날강도네.
“가져가라, 가져가. 어차피 넌 나 없으면 겨울의 숲에 못 들어갈걸?”
“겨울의 숲을 어떻게……. 그보다 너 더 가지고 있구나?”
눈치가 없는 여자는 아니었다. 내가 홍예화가 더 있다는 걸 깨달은 여자가 남색 꽃을 돌려줬다.
“조용한 곳.”
“…그게 좋겠네.”
여자가 혼자라는 걸 알았으니, 나도 장소를 옮기는 건 찬성이었다. 우리는 적당히 비어 있는 방을 찾아 들어갔다. 방을 이리저리 살피던 여자가 문 쪽으로 다가갔다.
“뭐 해?”
“누가 들어오면 곤란하잖아.”
아공간 가방에서 나온 건 커다란 천이었다. 그림자의 정원에 있는 모든 방문은 열려 있었기에 누구나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었다.
여자가 문에 천을 덮었다. 그러자 천이 일렁거리더니 감쪽같이 벽처럼 바뀌었다. 나조차도 방금 전에 보지 않았다면 저기가 문이라는 걸 모를 정도로 감쪽같았다.
“너 뭘 많이 가지고 있네.”
루나의 거울도 그렇고, 방금 전 아이템도 그렇고 아무리 봐도 1층에 있을 법한 사람은 아니었다.
‘그렇다고 해서 격이 다르다는 느낌까진 아니긴 한데.’
다른 사람들에 비해 강해 보이긴 했으나 김도진이나 차우재만큼은 아니었다. 굳이 게임에 비유하자면 시작부터 현질을 넉넉하게 하고 시작한 게이머 같은 느낌이었다.
문제는 이게 게임이 아니라는 사실이지.
‘동료가 없는 건 맞다고 쳐도, 여자에게 후원자나 비슷한 게 있는 건 분명해.’
그게 아니라면 저런 아이템을 구할 수 있을 리가 없다. 더더욱 여자와 싸워서는 안 된다는 확신이 들었다.
여자가 문제가 아니라 그 뒤에 있는 놈한테 잘못 원한을 사면 감당할 수가 없어서였다.
이럴 때는 선수를 치는 게 맞았다.
“보라색, 노란색, 남색.”
“뭐?”
“내가 가지고 있는 홍예화의 종류야.”
“다짜고짜 패를 까다니 제정신이야?”
나는 대답 대신 어깨만 들썩했다. 여자가 생각에 빠졌다. 바로 반응이 오지 않는 걸 보아하니, 역시 몇 송이를 더 가지고 있는 게 틀림없다.
‘기왕이면 네 개 다 모았으면 좋을 텐데.’
그럼 손만 잡으면 바로 입장이 가능하니, 시간 낭비할 필요도 없이 딱 좋았다.
원래라면 혼자 들어갈 생각이었으나 까짓거 한 명 정도는 괜찮았다. 게다가 대충 보아하니 실력도 나쁘지 않은 것 같고 말이다.
“나랑 손잡자. 여자.”
“너랑? 내가 왜?”
“아니면 못 들어갈 텐데? 네가 날 죽이려 하면 나도 전력으로 널 방해할 거야. 죽기 전에 홍예화 하나쯤은 씹어 먹고 죽을 수 있겠지.”
여자는 나를 일격에 죽일 만한 실력을 가지고 있진 않았다.
“아, 물론 그냥은 아냐.”
“또 뭐?”
“겨울의 숲에 대해 어떻게 알아냈는지는 서로 묻지 않는 거로 하자.”
스승님의 말대로라면 겨울의 숲에 대한 정보를 얻을 수 있는 건 5층 이상이다. 그리고 그걸 알았을 무렵의 5층 등반자들은 대부분 겨울의 숲의 진입 조건 때문에 히든 피스를 포기한다.
그렇다고 해서 1층 등반자들에게 이 사실을 말해 주지도 않는다.
‘대충 파악했다.’
이 탑은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이기적이다. 가지지 못할 바에는 아무도 모르는 게 훨씬 낫다는 마인드가 팽배한 곳. 아무도 손해 보기 싫어하는 장소.
여자의 후원자는 못해도 5층 이상에 진입할 수 있는 실력을 가진 등반자라는 의미였다. 5층 등반자가 어느 정도 실력인지는 모르겠지만 나보다 강하다는 건 명백했다.
“누가 봐도 수상하잖아. 그런데 손을 잡자고?”
“목적을 위한 일시적 동맹인 거지. 어때?”
“너랑 내 목적이 같으면 어쩌려고?”
흠, 그건 생각을 안 해 봤는데.
“최대한 협상해 봐야지. 안 되면 생사결이라도 하는 수밖에.”
“하하, 너 재밌네.”
“하나, 둘, 셋. 하면 원하는 게 뭔지 말하기.”
“좋아, 대신에 생사결을 한다 해도 원망하진 마.”
“거기까지 틀어졌으면 운명이 아닌 거지 뭐.”
웬만하면 타협할 생각은 있다. 하지만 그 타협이 요화의 정수라면 곤란했다. 타협도 할 수 있는 게 있고 없는 게 있다.
내가 숫자를 셌다. 하나. 여자가 둘. 다시 셋. 우리는 거의 동시에 외쳤다.
“요화의 핵!”
“정수!”
“얼레? 핵?”
“정수?”
여자와 내가 벙찐 얼굴로 서로를 보았다. 핵은 레이드 보스 몬스터의 심장이다. 무기 강화나 제작, 등 여러 용도로 사용이 되긴 하지만…….
‘핵은 확정 템이잖아?’
보스 몬스터를 죽이면 어지간하면 떨어지는 게 핵이었다. 근데 그걸 원한다고? 나는 당연히 정수를 원할 줄 알았다.
“진짜 핵이 필요한 거냐?”
“그건 내가 묻고 싶은 말이야. 정수? 그거 확률이 얼마나 되는 줄 알아? 핵 필요 없어?”
“어.”
내가 뺨을 긁적였다. 스승님이랑 얘기할 때도 정수에 대해서만 말했지, 요화의 핵에 대해서 말하진 않았다. 아, 하긴 했지.
‘엉? 요화의 핵? 버려.’
……하고 넘어갔다. 솔직히 당시엔 핵보다 정수에 더 눈이 돌아가서 안 물어본 내 탓도 컸다.
서로 원하는 게 다르다는 걸 깨닫자 허탈함이 몰려왔다.
“진짜?”
“거, 의심 많네. 거울 꺼내든가.”
“응.”
“보통 거기선 그렇게까진 안 해도 되잖아. 하고 넘어가야 하는 거 아니냐?”
기가 막히게도 여자는 정말로 루나의 거울을 꺼냈다. 와, 신뢰도 실화냐?
“일부러 의심을 피하기 위해 정수라고 했을 수도 있잖아.”
충격적이게도 여자는 또다시 내 말을 의심하고 있었다. 나와 여자는 돌아가면서 거울을 사용했고, 둘 다 거짓말이 아니라는 거울의 증명을 받아 냈다.
“…….”
“…….”
나와 여자 사이로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솔직히 이건 나도 황당해서 할 말이 없긴 했다.
“저기, 있잖아. 왜 정수를 얻으려는지 물어봐도 돼?”
“그야 보스한테서 먹을 건 정수밖에 없으니까?”
“확정이 아닌데?”
“그 정도는 감수해야지, 핵은 너 가져라.”
“만약 정수가 안 뜨면?”
“안 뜨면 안 뜨는 거고.”
미안한데 그럴 일은 없다. 다행히 여자는 내가 정수까지 확정으로 얻을 수 있는 방법을 알고 있을 거라는 의심은 못 하고 있었다.
여자가 내 쪽으로 루나의 거울을 들이밀었다. 아, 뭔데 이거 끝난 거 아니었어?
“방금 한 말. 한 번 더 해.”
“너 진짜 성가시네.”
“귀찮은 일은 안 만드는 주의라서.”
오, 그건 나랑 성격이 잘 맞는데? 물론, 이번 경우엔 귀찮아지는 게 나지만 말이다. 돈 드는 것도 아니었기에 나는 한 번 더 말해 줬다.
“요화의 정수가 안 떠도 핵에는 손도 대지 않겠습니다.”
진실이 뜨자 여자가 안심했다. 근데 얘 은근히 허당이네.
“야.”
“어, 응?”
“내가 나중에 가서 마음이 바뀌는 건 거울도 못 잡아내지 않겠냐?”
“너…!”
“하하, 농담이다.”
내가 웃어넘겼으나 여자도 뒤늦게 아차 싶은 듯했다. 하지만 여기서는 별도리가 없다는 걸 깨달았는지 여자가 루나의 거울을 집어넣었다.
“거울에만 너무 의지하길래.”
세상 돌아가는 이치는 그렇게 단순하지 않았다. 근데 저런 것만 보다 보면 사람이 시야가 좁아지기 마련이다.
“주황색, 빨간색, 초록색. ……내가 가지고 있는 거야.”
여자가 드디어 자신의 패를 드러냈다.
‘홍예화는 총 일곱 송이, 여자가 빨, 주, 초. 내가 노, 남, 보. 아.’
내가 가지고 있는 걸 밝혔을 때 여자의 표정이 애매했던 이유를 깨달았다. 나는 안타까운 목소리로 한숨을 내쉬었다.
“파란색이 없네.”
“맞아.”
좋다 말았잖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