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ecame the Son of the Final Boss RAW novel - chapter (200)
최종 보스의 아들이 되었다-200화(200/278)
200화.
바람이 불었다.
넓은 땅 위에 물이 흘렀고, 불이 일어났다.
정령왕, 왕이라 불리는 이들의 형체는 없었다.
그럼에도 신기하게 목소리는 선명했다.
뺨을 스치는 바람 속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맹약의 주인이여.”
바람의 정령왕일까? 이름은 무엇일까? 왜 형체는 없는 것일까? 실피드나 실울펜처럼 늑대의 형상은 아닐까?
수많은 궁금증들이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지만, 정작 들려오는 말은 내 궁금증과 상관없는 내용이다.
“그대의 안에 세계의 본질이 깃들어있습니다.”
바람의 정령왕은 나도 모르는 내 안의 힘에 대하여 잘 안다는 듯 말했다. 내용과 관계없는 순수한 내 궁금증을 위하여 먼저 물었다.
“정령왕입니까?”
바람이 웃는 듯 느껴졌다. 내가 미친 건 아닐까?
불어오던 바람이 한 곳으로 모인다. 점점 진해지기 시작하는 바람, 그에 따라 점점 모여드는 물, 점점 커지는 불, 점점 뭉치는 흙.
네 명의 인간.
나보다 약간 키가 크고 모두가 중성적인 분위기를 풍기며 각 속성의 특성이 잘 드러나 있는 외모들이다.
바람의 정령왕은 형체가 마치 흩날리듯 보였고, 불의 정령왕은 몸의 화염이 이글거렸다. 땅의 정령왕은 단단한 체구였으며 물의 정령왕은 미소에서부터 부드러움이 느껴졌다.
“네. 우리는 최초의 정령왕. 이제정령계의 일부가 되어 본질 그 자체가 되어버린 숨겨진 힘을 가진 존재들입니다.”
“그러니까 지금은 정령왕이 아닌데 한때 정령왕이었다는 뜻입니까?”
바람의 정령왕이 내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세계수 안에서 뭐 하십니까?”
이들에게서 느껴지는 힘은 론 칼 레오드, 나의 아버지와도 비교할 수 없었다. 자연 그 자체인 이들과 한낱 인간을 비교하는 게 애초에 무리였던 탓이지.
어쨌든 이들 중 한 명만 나서도 세계는 당장 평화롭고 자연은 더욱 활발하며 마왕 따위는 강림을 꿈꾸지도 못할 것 같았다.
그만큼 이들에게서 느껴지는 자연의 힘은 인간에 불과한 내가 자연 속에 얼마나 작은 존재인지 뼈저리게 깨닫게 만들었다.
“요정들은 중간계가 위기에 빠졌다고 하고, 인간들은 전쟁을 거듭하고…… 숲은 파괴되고 자연의 질서는 무너지고 있습니다.”
자연의 순환, 중간계의 균형. 정령들이 말하는 자신들의 역할이다.
마왕의 강림이 정령 탓인가? 인간의 전쟁이 정령의 책임인가? 모두 아니다.
하지만 나는 이토록 강대한 힘을 가지고 있는 이들이 왜 나무 안에 처박혀 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손짓 한 번이면 폭풍이 불어 모든 혼란이 종식되고 태초의 자연이 돌아올 것 같은데요.”
나도 모르게 말투가 날카로워졌다. 바람의 정령왕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 수도 있지요.”
“그럼 왜 세계수 안에서 나와 같은 인간 한 명을 기다렸다는 듯 있었습니까?”
“우리는 태초의 존재. 신이 정한 역할이 있으며 운명의 흐름을 따라 살아가는 존재입니다.”
“신이 당신들을 막기라도 했다는 뜻입니까?”
“태초의 정령들은 정령계를 지키고 나아가 새로운 정령들을 끊임없이 탄생시키는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세계수는 정령계와 중간계가 이어지는 통로.”
바람의 정령왕이 하는 설명을 물의 정령왕이 맺었다.
“우리는 중간계에 개입할 수 없습니다. 다만, 더 많은 정령들을 만들어낼 뿐.”
나는 깔끔하게 정리했다.
“할 수 있는 게 없다는 뜻이라고 들리네요. 그럼 나를 기다린 이유는 무엇이고 나를 이상한 시험에 몰아넣은 까닭은 뭡니까?”
불의 정령왕이 어느새 내 앞에 다가왔다.
스륵 사라졌다가 바로 앞에서 화락 하고 나타나는 게 꼭 귀신 같았지만, 나는 그닥 놀라지 않았다.
“간단하다.”
불의 정령왕이 말을 이었다.
“그대가 진정 맹약의 주인으로서 태초의 힘으로 중간계의 기울어진 균형을 맞출 수 있는지 알아보기 위해서지.”
“그래서, 합격했습니까?”
겁먹지 않은 나의 당당한 물음에 불의 정령왕이 살짝 흠칫한 듯 느껴졌다.
“아니. 이제 봐야지.”
불의 정령왕이 내 가슴에 손을 뻗었다. 피할 수 없었다. 뜨거운 기운이 내 안으로 밀려들었다.
숨이 막혔다.
온몸이 불구덩이에 빠진 듯했고 타는 듯한 통증이 숨구멍을 막았다.
동시에 바람의 정령왕이 내 마나 홀에 손을 대었다. 마나 홀 전체가 회오리쳤다. 동그란 형태의 마나 홀이 무섭도록 회전했다.
물의 정령왕이 내 어깨에 손을 얹었다. 마나가 흐르는 혈맥들이 날 뛰었다. 마나의 흐름이 갑자기 빨라졌다.
땅의 정령왕이 내 발목을 잡았다. 온몸이 딱딱하게 굳으면서 움직일 수 없었다.
“바람의 호흡법으로 통제해야 됩니다. 통제할 수 없다면 그대는 맹약의 주인으로서 자격이 없는 것.”
이들은 또 바람의 호흡법에 대해서 어떻게 아는 것일까? 기억 속 너머에서 어머니가 떠올랐다. 아무래도 어머니의 가문에 대해 다시 알아봐야겠다.
바람의 정령왕 입에서 바람의 호흡법이 나오다니. 단순히 정령술로 유명한 가문이 아닌 게 분명하다. 정령왕이 일개 정령술사의 마나 호흡법까지 알고 있다?
대체 바람의 호흡법으로 뭐를 통제하라는 건가?
“태초의 힘은 바람의 호흡법으로만 통제할 수 있습니다.”
죽으라는 듯이 고통을 주면서 참 친절한 설명을 늘어놓는구나.
극심한 통증으로 의식이 끊어지려는 찰나 나는 필사적으로 바람의 호흡법을 펼쳤다.
바람의 정령왕 힘은 내 마나 홀을 갈가리 찢어놓았고, 불의 정령왕 힘은 찢어지는 마나 홀을 재로 만들었으며, 물의 정령왕 힘은 혈맥들을 마나로 휩쓸고 다녔다. 땅의 정령왕 힘은 온몸을 굳게 만들었고.
총제적 난국이었지만 나는 끊어지는 의식을 잡아냈다.
* * *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정령왕들의 목소리도 들리지 않을 무렵, 나는 천천히 눈을 떴다.
마나 홀이 찢기고 재가 되고 다시 형성되기가 수백 번. 혈맥이 파도와 같은 마나 흐름에 터져나가고 몸이 돌이 되는 듯한 느낌으로 굳어졌다 풀어졌다가 수백 번.
마나 홀 크기를 가늠할 수조차 없었다.
그런데 전혀 이상하지가 않았다.
“실피드.”
실피드가 모습을 드러냈다.
“이프리트.”
이그니스였던 존재, 그리고 이제는 이프리트의 이름을 가지게 된 최상급 불의 정령이 나타났다.
“운다인, 노아스.”
엘라임과 클라임이었던 상급 정령들이 최상급 정령이 되어 내 앞에 모습을 보였다.
최상급 정령 넷을 동시에 소한했음에도 마나가 줄어드는 느낌조차 받지 못했다.
‘이거 괴물이 된 느낌이잖아?’
-시스템이 업데이트됩니다.
몹시 오랜만에 듣는 시스템 음성, 내가 켜지도 않았는데 상태창이 주르륵 눈 앞에 펼쳐졌다.
-아룬 칼 레오드(Lv1)
레벨이 1로 초기화되었다. 나는 놀라지 않았다.
내 안의 무엇인가가 달라졌다는 것은 나 스스로가 제일 잘 느끼고 있으니까.
-위대한 정령사, 맹약의 주인.
호칭이 하나로 통일되었다. 오크 학살자는 사라졌다.
위대한 정령사이자 맹약의 주인이 나의 또 다른 이름이다.
위대한 정령사의 길을 걷는 자, 태초의 맹약을 따르는 자가 업그레이드되었다.
칭호 효과는 간단하다.
-모든 정령 스킬 위력 100% 증가.
-태초의 정령술을 정령으로부터 습득할 수 있습니다.
스킬을 이제 개방시키지 않아도 된다는 뜻이다. 정령에게 스킬을 배우고 보너스 스탯은 모두 퀘스트에 투자할 수 있게 되었다.
“괴물이 된 느낌이 아니라 진짜 괴물이 됐네.”
이프리트가 입을 열었다.
“오, 이게 진정한 화염인가!”
어째, 나보다 더 신난 듯 보였다.이프리트가 이그니스였던 시절과 변함이 없듯, 운다인도 마찬가지였다.
포근함을 주던 엘라임은 언제나처럼 따뜻한 목소리로 말했다.
“많은 짐을 지게 되셨지만 맹약의 주인께서는 잘 해내실 거라 믿어요.”
“고마워. 그만 나가자고.”
-세계수의 시험이 업데이트됩니다.
-자동 퀘스트입니다.
들려오는 시스템 음성에 나는 얼굴을 굳혔다.
-마그마의 분노 연계 퀘스트. 레벨 제한으로 자세한 정보 열람이 불가능합니다.
참 친절하다. 언제부터 이렇게 시스템창이 친절하셨는지.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세계수를 나가는 건 어렵지 않았다. 세계수가 알아서 내보내줬으니까.
그리고 밖의 풍경은 나의 상상과 많이 달랐다.
꽤 오랜 시간 동안 세계수 안에 있었던 것 같은데, 렌과 필 그리고 올리비아와 게일까지 나를 배웅했던 모습 그대로였다.
“전하!”
올리비아의 목소리에 나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물었다.
“나올 줄 알고 있었어?”
“방금 들어가셨잖아요.”
“방금?”
나는 올리비아의 말에 세계수 안에서의 시간이 외부와의 시간과 다르다는 사실을 곧바로 깨달았다.
저절로 세계수에게 시선이 돌아갔다.
‘진짜 신비로운 나무구나.’
나는 어깨를 으쓱였다.
“여러 가지 일이 있었어.”
렌이 한 발짝 내딛었다.
“안에서 일행분은 찾으셨나요?”
나는 고개를 저었다.
“세계수가 직접 누군가를 데리고 들어간 건 처음 있는 일입니다. 맹약의 주인…….”
“아, 아, 소란을 일으켜서 미안하게 되었어. 일행에게 세계수의 시험을 볼 수 있는 기회를 준 것도 고맙고. 일행이 올 때까지 얌전히 숙소에서 기다리지.”
나의 말에 렌이 눈을 가늘게 떴다.
“어차피 그 이후에 마왕 강림을 꾸미는 놈들에 대한 이야기도 할 거잖아.”
“그렇습니다.”
어느 순간 렌에게 말을 편하게 하고 있었지만 렌은 내 말투를 딱히 지적하지 않았다.
그리고 나는 내가 완전히 달라졌다는 사실을 온몸으로 풍겨내고 있었다.
렌도 자세히 나를 살펴보는 게 느껴졌다.
‘모르겠지. 내가 드러내지 않는 한.’
내가 아버지의 강함을 짐작할 수 없듯, 현재의 렌은 나를 짐작할 수 없다.
단순히 레벨이 오른 게 아니다.
‘격이 높아진 기분이다. 한 단계가 아니라 족히 몇 단계는 올라섰다. 일종의 환골탈태를 겪었고. 마나 홀은 어마어마하게 커졌고, 모든 혈맥이 뚫려 있다.’
서둘러 상태를 점검하고 싶었다.
그리고 눈앞에 선명하게 보이는 렌의 정보.
-렌(Lv98)
-세계수의 관리자 요정.
-정화의 불꽃단 아홉 번째 사제.
마왕 강림을 운운하는 실체가 눈 앞에 있었다.
정화의 불꽃단에 대한 평가도 수정했다.
놈들은 절대로 쉽게 무너뜨릴 수 없다. 제국의 황후를 암살할 때부터 느꼈지만, 렌을 보고 확신할 수 있었다.
괜스레 대륙의 모든 국가들에게 영향력을 끼치고 있는 놈들이 아니라고.
수백 년 동안 신비에 쌓여 있던 요정들에게도 놈들은 손을 써 두었다.
그것도 요정의 정점이라 불리는 관리자 요정에게.
렌이 나를 그리고 릴리안을 세계수 안으로 들여보낸 이유도 명백해졌다.
‘다른 요정들에게 들키지 않기 위하여 적당한 명분으로 처리하기 위함인가.’
사르한 백작과 그 일행들을 손 쉽게 처리한 건 그들이 약한 탓도 있지만, 명백하게 악의 흔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는 맹약의 주인이며 요정들 사이에서도 존경받는 최상급 정령사였다.
내가 걸음을 돌리자 렌은 굳이 붙잡지 않았다.
“가자. 숙소에 가서 할 이야기가 많아.”
나의 말에 켄이 물었다.
“전하, 많이 달라지신 것 같습니다. 세계수 안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 겁니까?”
“있었지. 그들의 의도와 다른 일들이.”
나의 묘한 말을 켄은 곧바로 알아들었다.
“가서 할 이야기가 정말 많군요.”
“그래. 이제 가닥이 잡히는 것 같아. 적의 실체에 대해서도. 내가 할 일에 대해서도.”